2023년 12월 11일 월요일

불교는 불살생계(不殺生戒)에서 끝났다.

지금 시대는 그 때와는 달라서 식물도 생명이란 걸 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생물도 다 발견되어 미생물이라 한다.
흡수하고 체를 유지하고 배출하는 행이 있는 모든 것이다.
에너지로 보면 작용반작용, 응력이니 생명아닌 것이 없게 된다.

인간의 먹이로 보면 식물을 먹는 것이 동물을 먹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때다.
추위,더위에 몸을 유지해야 하는데 요구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체제는 가만히 있어도 비용이 아주 많이 든다.
먹는데 가장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면 가난한 사람이다.

계를 극으로 하면 존재할 수 없다.
다 어디선가는 훔쳐온 것이니까.
몸을 유지하는 것은 곧..(가장 나쁜 의미의)...이다.

끊임없이 자기 정당화 핑계만 대는 인간들로서야

...

아주 심각한 경우에 ...
돼지를 먹어주지 않는다면 돼지가 얼마나 서운해 하겠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많이 텄다 싶은 생각이란 것이
생명을 주고받는 것을 생태계라고 용감하게 말한다면
그는 기꺼이 자기 몸 유지하는 동안 해쳐왔던 생명체만큼 몸으로 나서 돌려줘야 하리라.

계戒에 불살생不殺生이 있는데
불교에 묻는다
살생하지 않고 몸의 유지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불교는 끝난 것 아닌가?

계.정.혜 순인데

계에서 벌써 성립불가로 어긋났으니 말이다.
먹지 않는 불자,승,보살이 증험한다면 모를까... 불교는 성립불가다.

경전을 보면, 식물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고
인식도 동물과 많이 다르다.

그럼 무시가 답인가?

말마따나 불이不二랍시고 분별하지 않으면 그만인가?
둘이니까 자꾸 불이不二라고 우기는 것 아닌가?

살생하되 살생이란 생각을 안하면 그만이라고?
그런 개(편리한)법이 있는가?
살생에도 그정도면 그럼 세상법은 ...
그래서 본래 무법천지인가?

생사에 자유롭다는 말에 대해 나는
나의 생사와 자연물들의 생사를 달리 생각한 적이 없어서,
그래서 생사에 어쩌구 저쩌구 안한다.

생사가 그저 개념일 뿐이라 말한다면... 아~

몸 있고 근.경.식이 일어났으니
몸 흩어지면 그만일 것인데 다시 뭘 말한단 말인가?

모이면 흩어지는 것도 당연하다는 걸 모르는 자가 어디 있는가?
모였을 때 흩어짐을 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는가?
대별의 쌍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어디 있는가?

나는 아직 仙,佛을 만난 적이 없다.
증험의 일도 쉽지 만은 않다.

나가 있고 세상이 있다... 그래서 세상은 내가 만들었다?
지꼴대로 보고 사는 것이 자기세상이다.?

이것은 다 관점의 전환 정도의 간단한 이야기다.

그걸 보고 있는 '이것'은 뭐냐?

이것도 식이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단지 있고 없고의 개념이 몸 이후에 생긴 것이란 걸 지적하는 말이고
지각하는 '이것'이다. 또는 '작용'하는 이것이다.고 한다.

이걸 몰랐던 사람이 있었나? 눈이,보는 마음이 다른데 가 있었겠지.

이것이 여실하다고 해도
본래부터 이랬기 때문에
석가가 다시 이걸 말했고 이것 뿐이라고?

그래서 좀 뭐하니 견도,수도,무학도를 다시 말한다?
수행도 말며, 다시 할 것도 없다면서...
분별에 떨어졌다고 하는 그것은 분별 아닌가?

나는 아직 아득하고 황홀한 상태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격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래서 불살생계(不殺生戒)에서 끝났다.

2023년 10월 28일 토요일

선禪 한다는 이야기 중에서 견見 후 견해에 빠지는 오류...

선禪 언어도단 말로는 이르름이 끊겼다는 말이다. 

그래 놓고선 수 많은 말 말 말 말 말 말....

그래서 그 견見하면 '이게 뭐여 ~' 할 정도로 헛헛한데...

그렇게 온갖 ... 로 뭐나 있는 듯 팔았던 것이 이거냐? 할 정도다.

경험의 작용이 있다면 경험하는 주체를 말한 것이다.

주체도 객체도 없는 작용...


그 다음의 견해가 문제다.

견해, 입장 아님이 없다.

특히 가르치는 자들이 그렇다.


이렇다 저렇다 이러니 이렇다 저러니 저렇다. 


그것에 대한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그것이 또는 이것이 진리라면 

이 진리가 문제냐, 업이든 오해든 우리의 체험이 문제냐...

이 체험하고 해석하고 편향하고 이것이 문제다.

곧장 가리키는 것은 쉽다.


문제는 원인도 이유도 모르고 실시간으로 일어나며 일체 개념으로도 정의가 불가한데...

뒤집어 언어로 그걸 형용하여 헛갈리게 만드니 곧장 자각하는 자.


여기서부터는 분명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 스스로가 겪는 이 난감한 것들을 해결하는 것이 일이다.

그것이건 이것이건 뭐라든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살이의 곤난함이다.

그래서 풀어야 할 것은 곤난함이다.

그것이 마음의 문제든 몸의 문제든

먹는 것이건 살 곳이건 닥치는 이 지점이 이야기 할 것이다.


모두가 이것 그것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문제의 것들이 편향을 만들고 기억을 만들고 

이 작용을 다시 좋아함 꺼림 무서움 두려움 이런 것을 렌즈처럼 회로처럼 걸러낸다.

당연히 

몸.맘을 작용이 있으니 살려 더 나아지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기억이 고통의 기억이 거쳐져 들고 난다.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삶이 

먹이든 편안함이던 삶의 여건의 불편함,괴로움으로 된 것이라..


몸이 필요로 하는 걸 먹음에 일말의 장애가 없으면 무엇이 문제랴

쉬어야 할 곳 조용히 머므름에 장애가 없다면 무엇이 문제랴.

비용이 걱정이 없고 공해의 걱정이 없다면 겨울추위가 뭐가 문제가 되랴...


지금 이 시대에는 예전에 그렇게 고통스럽던 해결되어서 더 이상 그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공해나 방식이나 이런 문제는 당연히 해결해야 한다.)


다른 것들은 그 눈으로 봐도 스스로 잡고 싶어서 잡고 가는 것을 뭐라 시비랴.
다만 그것들은 자아상으로 타 존재.생명에 피해를 주니 그 지점은 엄격해야 할 것이다.

원래 다 있으니 잠시 내려지면 곧장 알아 보고

그 이후는 그 작용으로 본으로 삶의 문제도 그렇게 해결하는 것이라.

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모두 생이지지生而知之 - 차별,분별,평등

생이지지(生而知之) - 말을 만들고 뭐라도 덧씌워 분별,차별 해보려고...
살아있는 몸은 어디서 왔나? 죽은 몸은 어디로 가던가?
나투면서 생이지지(生而知之)다.
몸 있기 전에는 몸으로 사는 지금은 몸 없어지면...
일이관지 일이관지 하지만 무엇이 일인지 그걸 몰랐지

사람에, 사람살이에 이런저런 이름 붙인다 하더라도 이름일 뿐이지...

헤아릴 수 없는 경험,체험,경계,기억도 다 그것일 뿐이다.

원만한 몸이면 없는 것 같고, 마음도 원만하여 없는 것 같고,

말도 없고, 뜻도 없고...

저것은 저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고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맛을 알아야 평등도 보이는 거지

번뇌 열반 선정 - 선禪의 뜻

번뇌 선정 열반


번뇌가 없는 상태가 열반이라는데


선, 정 에서 정은 살아있는 열반을 상태랄까.


번뇌란 고요한 선을 배경으로 하니 

선은 집중과 고요함이 함께하고

번뇌는 생각이 왔다 갔다 이랬다 저랬다 에너지를 쓰니 

몸도 그에 맞춰야 하니 번거롭기가 이를 데 없다.

할 수 있을 만큼만 번뇌에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선은 없는 것 같은 균형의 극치라, 번뇌에 균형과 복원이다.


말로 하니 다 뒤집혀 에효~


선정禪定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뜻을 보면
두 개의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선禪은 관觀에 해당하고 - 위빠사나 - 사띠
정定은 멸滅, 적寂, 열반涅槃에 해당한다. - 사마띠

선禪이란 의미는 열반의 정定에 비해 활活한 속제에 해당한다.
글자는 보일 시示 뜻에  선單 오랑캐 '선'의 소리를 쓰는 글자다.
즉 시示는 보인다, 보여 준다... 란 뜻이다.

시示 보이는 것이고 견見은 봄이다.

선禪과 정定은 별개인 듯 하지만 둘이 쌍인지 하나인지 잘 모르겠다.


2023년 10월 13일 금요일

수다원(예류자預流者), 사다함(일래자一來者) - 윤회에 대한 이야기일까?

불교가 윤회에 휩쓸리다 보니 

수다원(예류자預流者) - 신이나 인간 중에 일곱 번 태어나서 윤회한 뒤 괴로움이 끝나는 자
사다함(일래자一來者) - 한 번만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을 끝내는 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수다원, 사다함도 열반에 대한 분명한데 7번, 1번 윤회한다는 걸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열반에서 튕겨 나와 속세에 번뇌에 시달리는 정도로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사에 경계,구분이 없는 것이 열반이라면
경계에 떨어지는 정도로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나함은 이 세상보다 열반으로 중심이 간 상태.

아라한은 번뇌가 사라져 열반에 머무는 자


윤회라는 것도 이 생에서 들어 아는 것이고 보면
이전 생, 지금 생, 다음 생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면 
내려 놓는 것이 마땅하다.

윤회한들 안한들 뭘 어쩌자는 것인가. 놓는 것 밖에 더 있는가?


2023년 9월 23일 토요일

과거는 지나갔다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는 머물지 않는다.

과거는 지나갔다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는 머물지 않는다.

현재는 찰나 순간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분명한가?

과거,현재,미래를 떠난다.

아 무 것 도 설 수 없 다.

이것이 분명한가?

선 것이 없으니 얻을 수 없다

분명한가?

2023년 9월 22일 금요일

사死의 찬미讚美 윤심덕 버전

노래 가사
오시프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다뉴브(도나우) 강의 잔물결' 번안곡.


사의 찬미

                  윤심덕 버전 1926

광막曠寞한 광야曠野에 달니는 인생人生아
너의 가는 곳 그어데이냐
쓸슬한 세상世上 험악險惡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차즈러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世上이
나 죽으면 고만잀가
행복幸福찻는 인생人生들아
너 찻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運命이 모도 다 같고나
삶에 열중한熱中한 가련可憐한 인생人生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者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世上이
나 죽으면 고만잀가
행복幸福찻는 인생人生들아
너 찻는 것 서름

허영虛榮에 바져 날ᄯㅟ는 인생人生아
너 속혓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世上의 것은 너의게 허무虛無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업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世上아
나 죽으면 고만잀가
행복幸福찻는 인생人生들아
너 찻는 것 서름

2023년 9월 21일 목요일

4고苦 8고苦

 4고苦 8고苦는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_(%EB%B6%88%EA%B5%90) 에 짤막하게 나와 있다.


초기불교에서 3법인과 4법인이 설해진 후,
후대에 고(苦)는 구체적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4고와
게다가 사랑하는 자와 이별(離別)하지 않으면 안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원한 깊은 미운 자와 만나야만 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구(求)해도 얻을 수 없는 구부득고(求不得苦),
모든 것에 집착하는 데서 생기는 5취온고(五取蘊苦)의 4고를 더하여 4고8고(四苦八苦)로서 정리되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 4고(4苦)
- 태어나는 괴로움
- 늙는 괴로움
- 아픈 괴로움
- 죽는 괴로움

애별리고(愛別離苦) - 사랑하는 것을 떠나는 괴로움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을 만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 -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5취온고(五取蘊苦) - 색온色蘊 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蘊  5온蘊

거리를 두지 않는 관점이어야 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4고(4苦)는 몸에 대한 4가지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는 것은 이견이 없다.
이 과정 자체가 괴로움이다.
몸이라는 생명체계가 가장 격하게 겪는 것들이다.
그런데 몸으로 겪는 늙음과 병듬도 괴로움이지만
몸이 태어나는 과정과 생명체계의 그침인 죽음의 과정 괴로움으로 보았다.

죽음은 

자연으로 죽음,
굶어 죽음,
병으로 죽음,
사고로 죽음,

자연으로 죽음을 제외하면
살아가는데 고통을 주는 것이 병행되다 죽음으로 끝난다.

태어남의 과정은 기억이 없어 모르지만
의학적 관점에서는 대단한 고통이라고 한다.
머리는 첫경험이라 기억되지 않아 모르지만,
몸 전체로 보면 과연 기억하지 못할까? 의문이다.

관점은 몸이다.

나머지 고苦를 다시 보면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는 인간으로 살면서 오는 사회적 생활의 고통이다.

5취온고(五取蘊苦)
몸이 자기체계를 위해 동작하는 5온이 이란 것을 집착하는 고통이란 것이다.

따라서 5온에 집착하는 5취온고(五取蘊苦) 가 먼저고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는 세분화된 개념이고 5취온고(五取蘊苦)가 구르는 것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심적,정신적 여러가지 작용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몸과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

더 줄이면

몸,맘 이 다 괴로움이다.

이렇게 되면 첫 번째 화살은 몸이다.
두 번째 화살은 맘이다.


몸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두번째 화살인 맘을 피하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된다.

괴로움을 늘리지 않는 것이다.
보통 불교는 이 두번째 화살에 집중한다.

가려진 것은 몸에 대한 것이다.
선가는 처음부터 몸을 포함 전체를 다루고
밀교쪽은 말 그대로 가려두었다.

선가는 전체를 다루지만 출발은 무심無心 즉 5취온고(五取蘊苦)가 사라진 상태로 출발하는 것이며
몸에 대한 것도 태어남 죽음은 시작과 끝이므로 - 대부분은 알 수 없다.
중간인 삶의 과정에서 병앓이와 늙음이 있는데
늙음은 스사로 모르면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국 병으로 인한 고통이 없으면
몸에 대한 고통도 없다.

그러니 무심無心이고 병 없는 몸이라면 선가仙家수행에 장애가 없다 할 것이다.

앓는 몸이 힘든 것은
통증, 압박, 힘듬, 답답함, 피곤함 등등과
감각없이 여러 증상으로 생명체 기능에 장애가 발생하는 것 등이다.

몸이 원만하면(의학에서 말하는 여러 체계가 잘 돌아가면)
몸이 없는 것처럼 가볍고 
맘에 나댐도 현저히 줄어든다. 
맘 없다는 무심이 쉬워진다.
숨도 무심만큼 몸에 맞춰져 자연스럽다.

이렇게 되면 몸,맘,숨이 없는 같다.

이래서 내가 쓰는 말이

좋은 몸은 없는 것 같고
좋은 맘은 없는 것 같고
좋은 말도 없는 것 같다.

라고 말로 표현 한다.

숨,옷,신발,먹거리 몸에 필요한 온갖 것이
잘 맞는다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2023년 9월 16일 토요일

알라야식 알라야 비즈냐나(ālaya vijñāna) 아뢰야식(阿賴耶識)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2%B0%EC%95%BC%EC%8B%9D

아뢰야식(阿賴耶識)
무몰식(無沒識)
장식(藏識) 또는 택식(宅識)
이숙식(異熟識) 또는 비파가식(毘播迦識)
아타나식(阿陀那識) 또는 집지식(執持識)
심(心)
소지의(所知依)
종자식(種子識) · 일체종식(一切種識) 또는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무구식(無垢識) 또는 아마라식(阿摩羅識)
본식(本識)
초식(初識) 또는 초찰나식(初剎那識)
초능변식(初能變識)
제1식(第一識)
식주(識主)


기억

뇌가 처리하는 방식 감각 - 기억 - 의식 과정(프로세스)이 있다.
이 기억을 거치치 않은 감각-의식의 작용은 매우 선명하고 새롭고 신비롭다.
생명현상의 반복되는 작용에 의해 기억은 만들어지고 생존을 향한다.
6식까지는 스스로 관찰할 수 있다.


장식(藏識) 저장된 식

7식 유전자에 잠재된 정보라고나 할까.
8식 비물질-물질 간여된다고나 할까 장 파동 등 에너지 형태, 거칠게 물질 간.
     물질도 육안의 범위, 원.분자의 범위, 초미리립자 범위, 양자-물질~파동 범주화

9식 청정광명식 허공과 같은 의식이랄까 - 바탕이 되는 식, 근본식

각 식識의 유무有無는 관찰의 범주에 따라 나누는 개념이다.

2023년 9월 6일 수요일

2차전지가 아니고 맥신 수퍼 커패시터가 답 아냐? 방향 정해졌네.

그래핀으로 뭐가 나올까 생각 했었는데 

에너지 문제가 심각하니 맥신 수퍼 커패시터 MXene supercapacitor 이게 가장 급한 것 같다.
2차 전지 잊어 버리고, 수퍼캡으로 가자. 1분 안에 충전 끝날 걸?
수명도 반영구적이래.


선진문명이라면 지구를 보면서 저 사막에 그늘과 전기와 물을 선물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해야지.

그곳에 당장 필요한 필수품이다. 그 다음은 식물이겠지.


2차 전지는 결국 다 화학의 문제... 회수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생산에서 포장 소비 너무 공해적이야.


좋은 것은 해가 없으며 가치가 없게 해야 한다.
공기, 물에 기반해서 생태계가 있다.

문명 좀 바꿉시다.

2023년 9월 2일 토요일

무아無我로 윤회輪廻를 본다.

스스로 쳇바퀴 도는 걸 안다.

자아가 아닌 무아無我가 자각한 것이다.


자아自我는 일반적으로 통념과 다르니 자기自己라 하면
자기自己가 자기自己인 걸 무아無我로 안다.

살아서 해탈解脫 열반涅槃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

번뇌煩惱 즉卽 보리菩提

중생衆生 즉卽 부처佛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생즉사 生卽死 사즉생 死卽生

卽 동전의 양면은 즉卽 이다.


살아서 해탈,열반을 모른다면 죽어서 해탈,열반을 기약할 수 있나?

번뇌.윤회가 사라지면 해탈.열반도 사라지는 걸.

열반만 있으면 웬 통 열반이니, 지을 것이 없다.

살아서 열반해야 여여如如지 살았을 때, 죽었을 때 다르면 여여如如가 아니지.


관광觀光 이 관광인 걸 왜 몰랐을까.

2023년 8월 29일 화요일

심경(心經)은 관(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심心은 핵심核心,중中, 그럼 핵심은 뭘까?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로 시작하는 반야심경 첫 글자는
관觀이다.

관觀을 떼어 보면 어떨까?

관(觀) 자재보살(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이런 관점이 더 맞지 않나?
자재보살의 깊은 지혜바라밀 수행 관찰하기... 정도.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조견照見

바깥을 보는 게 아니니 조照, 조照는 반조返照 길게 말하면 회광반조回光返照

빛 즉 의식(Consciousness)를 돌려서 바같이 아닌
의식의 주의를 끄는 과정과 의식 자체를 돌이켜서 비추니,
의식으로 의식을 본다고 할 수 있다.

관觀 반조返照 견見

즉 돌이켜 비추어 보다... 이를 관찰하는 것.

****
무엇 관觀한 걸까 - 실상

오온개공五蘊皆空 - 인연.조건 따라 일어났다 사라짐.

시是 제법공상(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제법諸法 모든 유무형의 것.
잘 해석해야 하는 것이 엉뚱한 관념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생겨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늘지 않고 줄지 않고

불생不生이니 불멸不滅이다.
불구不垢이니 부정不淨이다.
부증不增이니 불감不減이다.

시고(是故)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역무실亦無失]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무소득無所得이니 무소실無所失이다.


*** 그래서 어찌 되느냐

고故 심무가애(心無罣礙) 무가애고(無罣礙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遠離)전도몽상(顛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마음에 장애가 없으므로 공포가 있지 않으니 뒤집힌 꿈의 생각을 멀리 떠나 열반에 든다.


2023년 8월 20일 일요일

초전도 현상 - 간단한 것 아닐까?

특정 물질, 저온

물질 - 원자 분자의 결합 

원자 - 핵, 전자.

원자 모델에 보면 해 주위의 전자는 2,8,8... 형태로 있고

지금으로서는 위치는 특정할 수 없을 수 없다.
에너지를 쏴 보고 에너지 준위 층으로 추론 된 것.

전자가 핵 주위에 돌고 있다면 저온에서 전자 궤도 수축이 일어나고

좁아진 궤도로 전자가 서로 걸려서 회전을 방해하여(stuck) 공간이 생기는 현상이지 않을까.
(양자형태까지만 파악된 게 전자니까, 궤도적으로 본다면 특정 영역으로만 궤적를 그린다고도 할 수 있다.
궤도적 쏠림이랄까.)

stuck된 전자와 자기장에 의해 lock 현상 일어나는 것 아닐까?

그런 조합을 일으키는 상태에 있는 물질은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냥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2023년 8월 5일 토요일

열반사덕涅槃四德,법신사덕法身四德 -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열반사덕涅槃四德,법신사덕法身四德 - 상常 락樂 아我 정淨

대승경전 -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여래장경如來藏經 승만경勝鬘經
에 나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대승경전은 추천하지 않는다.
빠알리어 5경이라는 걸 추천한다.

불교사에 보면 석가붓다열반 후
500 아라한이 모여서 가장 먼저 정리한 것이 율장이라고 하고
다른 경장들을 교차검증해서 정리하여 합송(외워 함께 낭송) 한다.
인도서부 아람어로 기록되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 후에 두번째 모여서 부파화 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을 정리하고
200년 후 세번째 모인다고 한다.
이 결집에 의해 문자화(산스크리트어,팔리어,마가다어 추정) 되었다고 한다.
문자화 되었다 -> 상징체계에 밝은 지식층이 정리했다는 것이다.

석가붓다가 대중언어인 팔리어로 설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 한 갈래가 소승 남방불교라는 스리랑카로 전파되어 필사를 반복하면서 전승되고
팔리어어본도 최근 200~300년 전의 필사본이지만 그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고 평가 받는다고.
산스크리트어 본은 중국으로 전해져 번역되고 아함경이 된다고.

산스크리트어는 브라만(엘리트집단)계급이 쓰던 고급언어이고
한자 또한 계급을 구분짓는 지배집단의 것이어서
팔리어 번역을 읽을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다.

남아 있는 기록물로는
법구경의 코뿔소경,대반열반경 기원 2세기 본이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삼장三藏 -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
아함경 - 장아함,중아함,잡아함,증일아함
니까야 - 디가(긴 장부長部), 맛찌마(중간 중부 中部), 쌍윳다(잡부 雜部),앙굿따라(늘어난 증지부增支部),쿳다까(작은 소부小部)

쿳다까(작은 소부小部)는 아함에 없다고...

아는 척하려는 것이 아니다.

계.정.혜 삼학(三學)이라는 것이 디가니까야에 나오는 수십편의 대담의 뼈대였다.
계를 지켜 청정해지면 정에 들고 4선정을 지나 적멸해지면 혜가 나오는 순서다.
긍까 하고자 하는 말은
계.정.혜 삼학(三學) 이렇게 정리하면 똑똑하고 유식해 보일지 모르지만,
딱딱하고 재미없고 본질과도 동떨어진 이상한 데 가 있게 된다. 말의 오용이다.

해서 이런 방식으로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을 보자

법신사덕法身四德,열반사덕涅槃四德(팔리어 nicca-sukha-atta-subha)
상常,락樂,아我,정淨
상常,락樂,아我 기己,정淨

불교는 환幻(변화)을 걷는 방식이다.
그래서 정리된 계->정->혜 순이 나온다.
사유를 하되 혜로서 하여 환幻 걷는 것이다.

8정도도 마찬가지다

정견(正見)봄,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생각
정어(正語)말, 정업(正業)행동, 정명(正命)생활
정념(正念)알아차림,정정(正定)삼매

이것이 구른다,순환한다. 하여 해탈,열반에 이른다.

상常 <-> 무상無常
락樂 <-> 고苦
아我 <-> 무아無我
정淨 <-> 부정不淨

이렇게 대별 된다.

불교는 출리심出離을 강조한다.
출리出離는 벗어나 떠남이다.

무상無常에 집集쌓음이 있기 때문에 고苦가 있음으로 
아我(기己) 상相(집集)이 고苦의 원인이라 벗어나 떠난다.

그래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면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즉 본연의 상태가 이렇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열반,여여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어야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 겪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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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은 집중.몰입沒入하여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한 환幻의 념念이 몰락沒落하여
즉 정념(正念)알아차림, 정정(正定)삼매 되면서
깨지는 것, 벗어나는 것, 깨닫는 것, 체험하는 것이다.

이게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한 환幻.념念 의 경계를 벗어나니
상락아정常樂我淨
열반적정涅槃寂靜
원성실성圓成實性
공적영지空寂靈知
의 본연의 상태에 든 것이라 말로 표현한 것이다.

본연이 이와 같으므로 이 상태에 익숙해지면 원만해진다고 한다.
이 원만히 해갈 때 경전을 보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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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른 수련의 기본이다. 
선仙 수행修行의 착수는 많이 나오지만 전제 조건이 있다. 
성性(마음)을 무심無心으로 놓고 시작한다.
예를 들어 성명규지性命圭指 - 성性(마음)과 명命(몸)을 규圭하나로 꿰는 지指 가르침.
를 보면 '무심無心으로'라고 가볍게 넘어가지만
대체 무심無心이 어떤 상태인지 모를 때는
관觀이 안되고 응應이 안되니 상기,주화,입마에 대한 경고가 가득 차 있다. 

이 때부터는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선仙,수행修行이지만,
티벳불교의 정광명수련(마하무드라)이다.

불교를 성性에 대해 밝은 면이 있지만, 이면은 상대적으로 가려진 것이 많고
선정과 관법 (~지관) 대해서는 능엄경이 밝지만 또 선수仙修와는 다른 용어를 쓰니
어찌 보면 본연이 원만해져 가면 자연으로 성불 한다 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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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妄想)은 이것을 직접 체험 증명하지 않고
이런가,저런가 심지어 이렇다,저렇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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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식 용어를 떠난 말로 하자면
다 떠나 보내고 다 놓아 버리니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때 체험경계는 사람마다 상태마다 다양하다.

얻었어도 없는 것을 얻었으니 얻었다고 할 수도 없고
본래 있었던 것이니 얻었다기 보다 이르렀다,든다고 한다. 

몸은 괴로우면 계속해서 버둥거리기 때문에
쓸데없이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원만히 해가는 것이다.

석가붓다도 보면
때가 되어 구걸하러 나가고 돌아와 먹고 정리하고 나서
입으로 먹은 음식에 대해 조용히 앉아 소화 한다.
자연스럽다. 무위無爲라 할까.

당시 인도에 걸식 문화가 있어서 이렇게 한 것이지
다른 문화에서는 달리 알맞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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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나 기복은 방편일 뿐,

수修와 관계 없다.

가르침을 행하여 증명하는 것보다 강한 신앙,기복이 있을 수 있나?
가르침을 행하여 증명하는 것보다 강한 앎이 있나?

2023년 8월 1일 화요일

오분향 五分香 이라니까 - 향을 태운다고? 焚香 이 무슨...

 https://mkmk.tistory.com/3726

오분향五分香이라니까 예불이라고 향을 태운다고?(분향焚香)...

계戒, 정定, 혜彗,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彗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한자로 된 경전은 범어를 번역한 것이라 하고
한자나 범어나 지식쟁이의 언어다. 일반인의 언어가 아니다.
그러니 빠알리어로 된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장아함경 - 디가니까야 ..

디기니까야 수십편의 붓다와의 대화 내용을 보면
붓다의 답변 구성이 계戒.정定.혜慧 순서로 전개된다.

향香 - 냄새, 향기
내음이 은은하게 퍼져나가기 때문에 향香을 붙인 것이다.

오분五分하여 향香 붙인 것은 각각에 그 풍겨나는 향이 있기 때문이다.
빛,소리,냄새,맛,느낌 중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한 향이 어울리는 감각작용이라서 향香을 쓴 것이다.

계戒,정定,혜彗,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 다섯을 구분한 이유는
진행이 앞이 바탕이 되어 뒤가 오기 때문이다.
이름붙임마다 맛,향이 있다.

계戒 - 계향戒香
정定 - 정향定香
혜彗 - 혜향彗香
해탈解脫 -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解脫知見 -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계戒 - 잘 지켜지면 청정이 결과로 온다.
계향戒香 - 청정향이다. 

정定 - 계戒행行의 청정을 바탕으로 고요함이 온다. 사마타
정향定香 - 고요함이다. 정의 단계별로 적정寂靜이 있고 그것이 퍼진다.

혜彗 - 정定 바탕으로 다른 봄,행이 나타난다.
         봄이 밝아져서  환하다. 그래서 흔이 지혜라고 한다. 위빠사나
혜향彗香 - 계戒 정定 기반하여 나타난 혜彗이기 때문에 밝다. 밝음이 향이다.

해탈解脫 - 혜彗의 밝음으로 벗어난다.
해탈향解脫香 - 벗어난 자유로움이다. 거리낌(참 좋은 단어-거리가 끼었다)이 없다. 
                   무애無碍 자재自在가 향이다.

해탈지견解脫知見 - 해탈解脫을 바탕으로 앎과 봄이 나온다. 대지혜大知慧.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 대지혜大知慧의 무위無爲가  향이다. 자연自然이고 여여如如함이다.

오분향五分香은 이런 향이 퍼지는 것을 말한다.
스님에게서 오분향五分香이 나면 대중은 자연스럽게 존경하지 않을까?

2023년 7월 30일 일요일

법구경 3장 마음 - 35 - 마띠까 촌장 어미니의 수행과 공양(음식의 중요성)

3개의 같은 이야기를 모아 보았다.

법구경(담마빠다) - 마음에 대한 가르침의 배경 이야기 중 하나다.
제목이 달라질 정도로 방점을 찍는 부분이 다르다.

내가 더 중요하게 본 것은 음식이다.
신통으로 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음식이 수행의 속도차 낸다.

선禪 안내하는 글에서도 주의 깊게 보면
몸을 떠나 따로 수행이 있지 않다는 구절을 볼 수 있다.

몸,맘은 같이 간다.
몸이 원만하면 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맘이 원만하면 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만하지 않은 몸을 몰아치면 문제가 생긴다.
맘이 산만한데 몸이 원만해질 리가 없다.

몸즉맘이다. 하나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무극이란 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끝.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무심이란 말이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처럼 고요하다는 말이다.

(마음이) 아프다 -> 마음에 아픔이 일어났다.
(마음이) 슬프다 -> 마음에 슬픔이 일어났다.
(마음이) 기쁘다 -> 마음에 기쁨이 일어났다.
너무나 명쾌하지 않은가?
*(마음이) 생략하고 쓰는 경우가 흔하다.

이게 일반인이 쓰는 용어와 불교 관련 말쟁이가 구분하지 않고 혼란을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는 근본이란 의미의 본本이란 말을 붙여 본심本心이라 하기도 한다.
이것이 본래 있는 것이라 성품性品이라고도 한다.
경계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지만 깨달음의 체험은 이것을 체험한다는 뜻이다.

불교를 한마디로 줄이면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상태를 진여, 공적영지, 본각, 해탈, 열반, 진공묘유 등을 말의 맥락에 따라 쓴다.

이제 이 없는 것 같은 상태와 모든 것이 일렁이는 상태가 명쾌해졌으니
인식의 변화들이 일어나고 두 상태가 공존하게 된다.
이랬다 저랬다면 번뇌로 당장 문제가 생기겠지만 동시에 간다.
없는 것 같은 상태를 배경으로 일렁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렁임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6GHB8GJCX8 에 낭송된 이야기이다.


한 때에 육십명의 비구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수행 주제를 받아 마띠가라는 자가 촌장으로 있는 마띠까 마을로 갔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비구들이 머물 정사를 짓고 비구들에게 항상 공양을 올렸다.
그 덕에 비구들은 그 마을에서 우안거雨安居를 보낼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비구들에게 명상 수행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비구들은 그녀에게 몸이 늙어가는 과정과 죽어가는 과정을 깨닫게 하는,
몸의 구성요소에 대한 명상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명상 주제와 수행방법을 잘 배워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비구들보다 더 일찍 높은 수행의 경지에 이르렀고 신통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녀는 신통력으로 비구들이 아직 깊은 수행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음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녀는 수행에 맞는 적절한 음식을 비구들에게 올렸다.

그녀가 올린 음식으로 바르게 정진할 수 있었던 비구들은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안거가 끝나자 비구들은 부처님을 찾아뵙고 그간의 일들을 다 말씀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 마띠까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한 비구가
부처님께 수행 주제를 받아 미띠가 마을로 향했다.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미띠까의 어머니는 이 비구가 마을에 도착하자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다 챙겨주었다.

어느 날 이 비구가 그녀를 직접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을 회피하였다.

그러자 이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깨닫지 못하여 아직 범부일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청정하지 못한 생각을 할 때도 있는데,
이 재가여신도는 나의 그런 생각을 다 알아내겠구나!'

비구는 이런 생각으로 그녀가 두려워져서 그 마을을 떠나 부처님께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마띠가의 어머니가 저의 부정한 생각들을 간파할까봐 두려워서 마을을 떠났습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단 한 가지만 잘 단련할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는 바로 마음이다.
그대는 마띠까 마을로 돌아가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마음만 잘 단련하도록 하라."

비구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며 다시 마띠까 마을로 돌아가
마띠까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수행 정진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설하였다.

제어하기 어렵고 재빠르며
내키는 곳 어디든지 내려앉는
이 마을을 잘 단련해야 한다
단련된 마음은 행복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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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미디어 본은 이야기의 맛이 많이 다르다.

법구경 이야기

http://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Amp.html?idxno=8975

노파(老婆)의 타심통(他心通)

코사란 왕의 통치하에 여러 부족이 어울려 사는 마티카라는 산중턱 마을이 있었다. 촌장의 이름도 마티카였다.

한 번은 60명의 비구들이 안거할 곳을 찾아 유행하던 중에 이 마을로 왔다. 마침 우기가 앞서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마티카의 늙으신 어머니는 이들을 맞아 크게 환희하며 시주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좋은 인연을 맺도록 부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감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덕들이시여! 이곳에서 머무소서, 늙은이가 귀명(歸命) 삼보하여 정덕(淨德)의 인연을 맺고자 발원하나이다." 비구들은 좋은 인연으로 알고, 노파가 시주한 정사에서 안거하기로 했다. 결제일이 되어 비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이런 의논들을 했다.

"친구여! 우리의 앞에는 여덟 지옥의 문이 열려 있다. 설사 집안일지라도 삼가 경솔함이 없도록 하자! 우리는 부처님의 뜻을 따라 이곳에 모인 것이다. 어디 부처님의 은혜가 함부로 있을 수 있던가. 사악한 자는 부처님의 꽁무니를 따라 붙어도 그의 은혜를 빌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가 삼가하여 부처님의 말씀대로 둘이 함께 걷거나 머물지도 말자. 다만 아침 일찍은 탁발을 돌기 위해서 한 차례, 그리고 저녁에는 상좌 장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렇게 하루 두 차례만 서로 만나도록 하자. 그리고 환자가 생기거나 급한 일일 때는 정사 마당에 달아둔 종을 울려 알리도록 하자."

서로 약속들을 하고는 각자의 요사(거처하는 집)로 헤어져 정진에 들어갔다. 그 뒤 촌장의 노모가 별난 음식을 수레에 채워 왔다. 그러나 정사는 쥐 죽은 듯 고요하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행여나 하고 노파가 종을 두드렸다. 그제서야 팔방에서 모여드는 대중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기고 그들이 서로 다투고 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들 다투셨나요?"
"아닙니다만---"
"다투지 않으셨다면 오실 적에 모두 함께였었는데 어쩐 일로 뿔뿔이 흩어져 계시나요?"
"모두가 정진하느라고 흩어져 있을 뿐입니다."

노파는 비구들에게서 정진이 무엇인지 참선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건지를 배웠다. 그리고 밤낮 없이 몰두했다. 뜻밖에도 결과는 빨랐다. 비구들 보다도 먼저 오도(悟道)하고 타심통(他心通)을 얻은 것이다.

인연법을 믿고 새 인연을 닦고자 했던 노파로서는 너무나 돌연한 큰 인연이었다. 인연법을 따라서 새 인연을 창조하고자 했던 그녀는 이로서 인연의 올가미를 벗어나 인연 자체를 창조하는 인생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제 도인이 된 노파는 회중(會衆)의 대덕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삼독(三毒: 탐진치(貪 · 瞋 · 癡)의 중생들이었다. 그러나 도인이 될 소양도 깊고 원력도 대단했다. 그리고 환경도 좋았고 도반(道伴: 길벗)도 좋았다. 다만 한 가지 의식(衣食) 생활이 부족하여 거칠었다. 그날로부터 노파는 비구들의 의식생활에 각별한 관심으로 뒷바라지를 다했다.

그 결과 대중들은 더욱 정화(淨和)롭고 윤기있는 생활로 마음의 평정을 더해갔고 평정을 통해 관심(觀心)의 경지를 더욱 승화하여 함께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

이렇게 하여 마티카 마을에서의 안거를 훌륭히 끝낸 60명의 대중들은 사위성의 죽림정사로 돌아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자신들의 오도를 점검받고 인가받았다. 그때 비구들이 말했다.

"저희들의 오도는 훌륭한 신도의 보살핌을 받은 덕택입니다. 마티카 촌장의 늙으신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의 생활의 부족함을 낱낱 미리 알아 정진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셨고 생각의 낌새를 먼저 알아차려 탁마하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범상한 외호(外호) 신도가 아니라 빼어난 선지식이요, 보살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때 한 비구가 여럿의 한결같은 찬탄의 말을 듣고는 자신도 마티카 마을로 가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거기에 가서 살기만 하면 자신도 꼭 아라한이 되리라 생각하니 더욱 간절히 가고 싶어졌다.

부처님께서 그의 마음을 읽으시고, 삿된 기미가 있긴 하나 오도의 인연이 성숙하였음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마티카로 갈 수 있고 누구나 도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일을 주저하거나 믿지 못하여 다른 일로서 안락을 구하는 이는 마티카로 갈 수 없다. 행여 가더라도 돌아올 것이다. 갈 수 있는 이는 모두 가도록 하라."

아까의 그 비구는 선걸음에 나섰다. 바루 조차 챙기지 않은 상태였다. 허둥지둥 당일 저녁으로 마티카에 도착한 그는 몹시 지치고 시장했던 차에 이런 생각을 했다.

'청소는 커녕 세숫물을 길어올 기력도 없구나. 이리 배고픈 일도 처음이고, 생각만 하면 노파가 도와준다고 했으니 소식이 있을 테지.'

과연 얼마 안 기다려 촌장의 집에서 하인이 왔다. 청소를 하고 발 씻을 물을 길어주고 음식도 주고 갔다. 배를 채워 먹고나니 시각은 한밤이었다. 갈증이 났다. 그러나 물이 있는 곳 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때 다시 하인이 물을 가져왔다.

그는 물을 마시고 나서 다음날 아침에는 촌장이 먹는 맛있는 음식과 철 맞은 과일들을 먹고 그리고 노파를 만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그의 생각대로 어김없이 촌장의 노모가 정사로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촌장의 노모께서는 남의 마음을 낱낱이 아신다지요?"
"정진하여 아라한이 된 스님들은 흔히들 남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더군요."
"남의 일이 아니라 노모의 경우를 묻고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이들은 흔히들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는 자신이 못 올 곳을 왔다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노파는 사람의 생각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있구나. 나는 아직 신심으로 삼보에 귀명치 못하여 정명(淨命)에 들지 못했으니, 삿된 나로서 어찌 지옥의 판관과 같은 저 노파 앞에서 배길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황급히 사위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때에 부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그대는 왜 그대의 관심을 노파에게 두고 노파의 신통 앞에 절절 매는가? 그대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다스려야 할 바는 다만 그대의 자신이요, 마음이 아니든가? 그래야 노파의 신통을 이기지"

그리고는 다음의 게송을 설하셨다.

가볍고 날뛰며 변덕스러운
요사한 마음을 길들여 부려라
길들인 마음에 선이 따르고
다스려진 마음은 행복일지니. 

<제35송> 佛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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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본 

https://blog.naver.com/byunsdd/60210944150


법구경(法句經)

제3장 마음의 장

게송 35

생각을 다스리기 힘든 빅쿠 이야기

어느 때 빅쿠 예순 명이 부처님으로부터 좌선 수행에 관한 설법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수행을 하기 위해 적합한 장소를 찾다가 마띠까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그 마을의 촌장은 마띠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띠까의 늙은 어머니는 예순 명의 빅쿠들을 보자 기꺼이 빅쿠들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빅쿠들의 발 아래 절하고 빅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쭈었다. 그래서 빅쿠들이 수행할 장소를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된 마띠까의 늙은 어머니는 말했다.

"테라님들, 테라님들께서 우기 석 달 동안 여기서 수행하기로 결정하시면 저는 그동안 삼귀의와 오계를 받들고 초하루와 보름의 제일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테라님들이 수행하시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과 음식을 잘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이 같은 제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이 마을에 머물러 수행해 주십시오."

그러자 빅쿠들은 이번 왓사를 마띠까 마을에서 보내기로 결정하여, 침묵으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빅쿠들이 자기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마띠가의 어머니는 가족을 동원하여 건물을 지어 빅쿠들이 거처할 수도원을 짓고 빅쿠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띠까의 어머니의 열성적인 후원에 감동한 빅쿠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렇게 결정했다.

“우리는 아주 좋은 장소에서 이곳 주민들과 마띠까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아무런 불편 없이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소. 그러니 이런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 우리는 각기 자기 방에 있으면서 다만 열심히 수행할 뿐 둘이 모여 앉아 이야기 하지 맙시다. 우리가 수행하는 동안 만약 급한 상황이 생기면 말을 하지 말고 수도원의 종을 울려 알리기로 하고, 하루 한 번 마을로 탁발 나가는 시간에만 모여서 나가되, 그때에도 침묵을 지킵시다. 우리가 한가하게 놀며 신자의 시주나 받아먹고 지내면 부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열심히 수행하여 하루 빨리 생사 윤회를 벗어나는 것만이 부처님과 신자들의 은혜를 갚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이서 한 군데 앉지 말고, 혼자서 한 곳에 앉아 수행할 것이며, 높은 경각심을 유지합시다. 그리고 저녁 때 한 자리에 모여서 법랍이 높은 빅쿠 선배의 훈계를 듣고, 아침에는 일찍 탁발을 나갑시다.”

이같이 서로 결정한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마띠까의 어머니는 자기의 가족과 이웃 신자들을 데리고 우유, 버터, 치즈 등을 준비하여 수도원에 갔는데, 이상하게도 빅쿠 스님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보니 빅쿠 스님들은 각자 자기 방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스님들을 만나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종을 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수도원의 종을 쳤다. 그러자 빅쿠들은 누가 급한 병이라도 걸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제각기 자기 방으로부터 따로따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빅쿠 스님들이 각각 한 사람씩 따로따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테라님들이 혹시 서로 다투시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그녀는 빅쿠들에게 여쭈어 보았다.

“테라님들, 혹시 서로 다투시기라도 하신 건가요?”

빅쿠들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난번에 제가 테라님들을 집으로 초청했을 때는 모두들 같이 오시더니, 오늘은 왜 따로따로 모이시는 것입니까?”
“신자님, 우리는 각각 자기 방에서 서로 떨어져 앉아 좌선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선 수행이라니요? 좌선 수행이 무엇입니까?”
“좌선 수행이란 우리 몸의 서른 두 가지 부분을 세심하게 분석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구성되어진 양태와, 늙어가는 과정, 죽어가는 과정, 모든 기능이 일어나고 사라져 가는 현상 등을 예리하게 밀착 관찰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바르게 보아, 그것들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며, 무상한 것이며, 자아가 없는 것임을 깨달아, 모든 집착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생사를 해탈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가르침을 들은 마띠까의 어머니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테라님들, 그렇다면 그런 수행은 빅쿠 스님들만 하실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누구든지 수행하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요?”

“이것은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그렇다면 제게도 그 수행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빅쿠들은 그녀에게 수행법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부인은 배운 것을 그 자리에서 세 번 네 번 외더니 곧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후부터 열심히 정진했고, 아주 짧은 기간에 아나가미 팔라를 성취했으며, 네 가지의 신통력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성취한 자기 수행에 대해 만족한 마띠까의 늙은 어머니는 신통력으로써 빅쿠들의 수행 정도를 가늠해 보았다. 그 결과 그녀는 빅쿠들이 아직도 탐심과 진심, 치심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빅쿠들은 아직도 내적 현상 관찰이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삼매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다시 빅쿠들에게 아라핫따 팔라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보았다. 그 잠재력은 충분했다. 다시 그녀는 그렇다면 빅쿠들이 적합한 장소에서 수행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역시 장소도 적합하였다. 그렇다면 벗은 좋은가? 역시 벗도 좋았다. 음식은? 그녀는 바로 음식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마띠까의 어머니는 그때부터 특별한 음식을 공양했다. 그녀는 각종 쌀죽과 여러 가지 견고하고 부드러운 음식에 향미를 넣어서 빅쿠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빅쿠들의 마음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그 안정된 마음으로 내적 현상을 바르게 관찰했으며, 결국 사대오온의 자연적인 성품을 보아 삼매를 이루어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신통력까지도 갖추었다.

빅쿠들은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마띠까의 어머니 같은 위대한 신자의 도움으로 수행의 궁극적인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부인은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자, 이제 우리는 우기가 끝나는 대로 부처님을 찾아뵙고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기로 하자.”

마침내 우기가 끝나 빅쿠들은 마띠까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빅쿠들을 배웅하여 떠나 보냈다.

빅쿠들은 제따와나 수도원에 도착하여 부처님을 뵙고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다음 부처님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부처님께서 물으시었다.

“빅쿠들이여, 너희들은 수행과 생활에서 모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는구나. 그런데 혹 음식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 적은 없었느냐?”

빅쿠들이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매우 신심 있고 매사에 배려가 깊었던 마띠까 촌장의 어머니로부터 넉넉하게 음식을 공양 받았습니다. 음식에 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다른 필요한 물품도 잘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부처님과 빅쿠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한 빅쿠가 있었다. 그는 마띠까의 어머니가 빅쿠들을 잘 공양한다는 말에 자기도 그곳에서 수행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수행 주제를 받아 마띠까 마을로 떠났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듣기로 그 여자 신자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아는 신통력을 지녔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먼 길을 가느라고 피곤하니 수도원과 방을 미리 청소해 놓았으면 좋겠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띠까의 늙은 어머니는 그의 마음을 읽고 곧 심부름꾼을 보내면서, 수도원을 청소하여 도착하는 빅쿠 스님에게 인계해 드리라고 지시했다. 수도원에 도착한 빅쿠는 이번에는 마실 물과 일용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띠까의 어머니는 그것들을 보냈다. 그리고 빅쿠가 죽과 버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녀는 착오 없이 죽과 버터를 보냈다.

그때 빅쿠는 또 생각했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과연 듣던 대로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보내 주시는구나. 이제 나는 그 신자를 보고 싶다. 마띠가의 어머니가 여러 가지 양념으로 부드럽고 맛있게 만든 음식을 가지고 직접 와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은 마띠까의 어머니에게 전해졌으므로 그녀는 곧 빅쿠가 필요로 하는 음식을 준비하여 수도원으로 갔다. 빅쿠는 공양이 끝나자 물었다.

“신자님이 마띠까 촌장의 모친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바를 아시나요?”

마띠까의 어머니는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곤란하여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요?”
“당신은 내가 원했던 것을 착오 없이 다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같이 묻는 것입니다.”

“테라님, 저는 어쨌건 간에, 많은 다른 빅쿠 스님들도 남이 생각하는 바를 아시는 줄로 아는데요.”
“나는 다른 빅쿠들의 경우를 묻는 게 아니오. 단지 당신이 남이 생각하는 바를 아는지 모르는지를 묻고 있소.”

그러자 마띠까의 어머니는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뭣해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 같은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빅쿠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마띠까의 어머니가 타심통의 능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여,‘나는 이제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져 버렸구나. 생각이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어서 남에 대해 좋은 생각도 하고 나쁜 생각도 하기 마련인데, 이 여자 신자는 내가 일으키는 나쁜 생각을 다 알 게 아닌가? 그러니 이 여자는 도적을 붙잡아 돈주머니와 멱살을 꽉 쥐어 잡는 사람처럼 나를 쥐어 잡을 것이다. 얼른 이곳을 피해 떠나는 것이 상책이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신자님, 나는 이곳을 떠나겠소이다.”
“어디로 가시고자 하시는지요?”
“나는 부처님께 갈 것이오.”
“테라님, 그러지 마시고 이곳에서 더 수행하도록 하시지요.”
“나는 이곳에서 더 머무를 수가 없소이다.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오.”

빅쿠는 이렇게 말하고 그곳을 떠나 다시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그가 수도원에 도착하자 부처님께서 그에게 물으시었다.

“빅쿠여, 너는 왜 그곳에 있지 않고 떠나왔느냐?”
“부처님이시여, 저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부처님이시여, 그 여자 신자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을 떠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빅쿠여, 그곳이야말로 네가 꼭 머물러 수행해야 할 장소이니라.”
“부처님,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빅쿠에게 다짐하시었다.

“빅쿠여, 그렇다면 너는 한 가지를 꼭 지킬 수 있겠느냐?”
“부처님, 그것은 무엇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처님의 자비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빅쿠여, 너는 이제부터 네 마음 하나만을 잘 보호하도록 하여라. 마음은 매우 보호하기 어렵고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니라. 빅쿠여, 이제부터 너 자신에 관한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말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마음은 가볍게 움직여 다스리기 매우 힘든 것
어느 곳이건 좋아하는 곳에 쉽게 머문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진정 훌륭한 것
잘 다스린 마음이 행복을 가져온다.

이 빅쿠는 부처님의 이 같은 설법을 듣고 다시 마띠까 마을의 수도원으로 돌아가 마띠까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수행을 했고, 머지 않아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하였다.

[출처] 제3장-게송 35 : 생각을 다스리기 힘든 빅쿠 이야기


헛갈리는 불교 용어 - 무아無我, 법法

언어란 체험과 인지에 기반한다. 불교식으로는 오온이 언어 기반이 된다.
생활이 다르면 언어의 차이로 번역이 불가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라는 우리말은 한자로 번역되기 어렵다 그래서 나 오吾를 써서 오등吾等이라고 썼다.
한자가 지식을 대표하는 조선 직후라
기미독립선언의 시작도 '우리는' 이란 말을 쓰지 않고 오등吾等은 이라고 썼다.
한자로 조어특권 누리던 우월 버르장머리가 남아서 그렇다.

한자와 범어는 더 차이가 컸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어인지라 지금의 의미와도 차이가 크다.
인도의 사고체계와 한자의 의미개념이 너무 달라서 직역이 불가할 정도다(빠알리어 번역 보면서).

무아無我 - 아낫따 an-Atta(빠알리), 안아트만an-Atman(산스크리트)의 한문번역
Atta,Atman은 변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 그것에 an은 '아니다'의 부정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각되는 나 Atta,Atman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것이 불변독립이란 것을 부정한 것이다.

在,存,體 이런 말들은 애초에 체험,인지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의 의미로 쓸 때는 本을 붙인다. 근본이 그래서 체험,인지가 그랬다의 뜻을 담고 있다.
본本, 실체實體 란 말을 쓸 때도 체험에 따라 인지에 변화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드러났다는 뜻이지,
그것이 작용에 따라 어떻게 체험이 예측가능하다는 것이지 고정됐다는 의미는 희박하다.

왜냐.. 이쪽 문화는 계속 체험되듯 자연은 변화한다는 것을 깔고
음양, 오행, 역, 모두가 변화를 설명하는 문화다.

거기에 그렇게 되는 이유와 규칙성이 있다는 의미로 리理를 쓴다.
그렇다고 이걸 다 받아들였냐? 아니다. 왜냐
꼭 그렇게만 되는 게 아니었거든.

한자의 구성
我는 발음에 따라, <-'아'라는 나,자기의 뜻을 가진 말이 있었나보다 
吾는 口가 입,먹다,말이 뜻에 五가 소리다.

다시 무아無我 를 보면 我는 이상하다.
Atta는 개체個體, 자기自己, 영혼靈魂  이런 말에 더 가깝다.
한글자로 떨어지는 한자는 짧은 지식으로 못찾겠다.
기己가 있는데 이것은 몸이란 나란 의미를 깔고 있으니 이것이 더 적합하다 하겠다.

인도의 힌두,브라만 사상에는 현상계에 현현하는 것 안에 아트만 있다고 생각했으니
기己 이것이 주관으로든 대상으로든 더 가깝다 하겠다. Atta - 기己
an은 부정어. 영어에서도 쓰인다.

한자로는
부不,弗-아니다
미未-아니다,아직~못하다
비非-아니다,그르다,나쁘다
무無,无-아니다非,없다,않다不 
부否-아니다
물勿-아니다,없다, 말다
피彼-아니다怫,저,그
모毋-아니다不,말다
부𠀚-아니다
비匪-아니다,떼도적

중에서 부不,弗이 일반적이다. 不己 약간 고어적으로 弗己이겠지만
불교는 '아니므로 그런 건 없다'의 의미가 강하므로 무기無己가 적합하다 하겠다.

무아無我 -> 불기弗己 또는 무기無己

* 佛 - 人 + 弗 -> 사람 아님?
불교가 부정하는게 많아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되지만
붓다를 발음이 비슷한 弗를 취하고 사람을 뜻하니까...쓰게 된거라.

법法 - 자연의 또는 보편적으로 체험되는 원리,이치,질서,법칙 등의 의미

다르마Dharma[담마Dhamma]
자연계의 법칙,
인간계의 질서 ...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행위...
지켜야할 고귀한 것
삶에 대한 가르침
물질적.정신적 모든 현상

인도의 담마Dhamma, 지나국의 법法은 주술의 시대에 권위를 가지려는 온갖 것이 녹아 있는 단어다.

불교적 의미에는 

진리와 그 합리성
법칙과 그 보편성
인간의 도덕.윤리
붓다의 가르침
실상과 진리
사물
현상
깨닫는 방법

석가모니부처가 말을 헛갈리게 한 것인지 제자들이 혼란하게 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체로  진리,사물,현상, 붓다의 가르침 정도로 되는데 최소한 말할 때
지금 말하는 법法 이런 의미다를 어눌이 하던가.
...로써의 법法이라 수식하던지
더 간명하게 ...을 직접 쓰던지
스님도 말의 정연함 있어야 한다. 누가 지맘에 들려고 말듣나? 듣는 나 도움 되라고 듣지.

아비담마, 아비다르마, 아비달마 -> 붓다 가르침의 주석, 논장
담마湛磨  담마談磨 담마𤯌磨 이런 조합도 가능했을텐데...지나국 소리가 또 시대가 그렇다 하니... 

그런데 리理를 쓰지 않고 법法을 썼을까.
다른 뜻은 수렴되어도 '사물'의 뜻은 수렴할 길이 요원하다.
리理는 사물物의 돌아가는 원리라는 뜻이지만 법法이 사물로 되는 것은 엉뚱하다. 이때는 물物이 더 적합하다.

그런데

한국불교가 따라 주창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法은 '사물'을 가리킨다.

제법무아諸法無我 -> 제물불기諸物弗己 또는 제물무기諸物無己

물物의 뜻이 법法이란 글자에 없다 해도

제법무아諸法無我 -> 제법불기諸法弗己 또는 제법무기諸法無己

이 정도가 가깝다 하겠다.
해 놓고 보니 뜻이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많이 다르다.
연기에 의해 나타난다 또는 존재한다는 불교의 기반이 없으면
말로 다가오는 느낌... 생소함인지 조금 어색하다.



2023년 7월 22일 토요일

밝은 에너지 최고의 가수 - 남진

가수 남진南珍 본명 金南鎭 1946년생 - 1967 신인상. 1967 10대가수

- 아주 밝은 에너지
- 전대역이 개방된 독특한 목소리
- 다양한 울림과 톤 기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보컬
- 스토리와 이미지를 완전히 그린 후 노래로 표현하는 실력
- 브라스밴드(금관악기 위주의 악단)의 남성적이고 한 번에 흐르는 원테이크 최적
- 노래의 맛,멋이 좋다.

대중적이며 소탈한 무대, 환상적인 무대연출의 나~아와 완전히 다르다.
나~아는 히트곡이 많다면 남진은 멋진 곡들이 있다.

1959 이미자 '열아홉 순정' 1961 한명숙 '노란 쌰스의 사나이'
등의 노래로 시절로는 봄은 시작 되었지만
전후라 경제.문화기반도 그렇고 군부쿠데타로 어둡게 바뀌고 했는데
그걸 뚫고 남진과 함께 한국의 봄바람이 불었다.
(얼마 뒤 일이지만 등려군과 함께 중국의 봄이 시작되었듯 月亮代表我的心 1977 甜蜜蜜 1979)
(미국은 아마도 1960 Chubby Checker - Let’s Twist Again)

시대 유행에 따라 슬픈곡조의 트롯(뽕짝)이 많지만
다음 곡들을 보면 얼마나 파격이었는지 알게 된다.

마음이 고와야지 1967
님과 함께 1972
젊은 초원 1972 (정말 멋진 노래다)
그대여 변치마오 1973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1974

꽃분이 1977
마워도 다시 한번 1977
빈잔 1982

잘 어울릴 다른 곡
복면달호 - 이차선 다리위...뒷부분은 좀 바꿔야 할 듯.

이 나라는 스스로 만든 삶이 척박한지라
삶의 애환이 노래의 주제가 되고 아직도 밝아지지 않고...
인간도 동물인지라 본능적으로 흐르는 것이
대중음악에도 사랑이란 이름의 탐닉이 많지만

이 애환의 시대와 환경이 어찌보면 이도저도 아닌..

히트곡으로 본 전성기는 1972~1974년인 듯하다.

송창식 한번쯤, 피리부는 사나이 1974,  왜불러 1975 이니까...

시대상이 구슬픈 트롯 시대였고 스스로 트롯을 선택했지만
밝은 에너지 폭사되는 밝은 노래가 어울린다.

밝고 간결하고 단순한 주제. 목소리 기교 무대매너야 보시다시피 뭐~
이런 이미지와 주제(테마)를 잡는 훌륭한 사.곡이 인연이고 인연일 것이다.
트롯 대부분이라 위 5~6곡이다.
음악적으로 다양한 접점이 있었다면, 더 많은 곡을 남겼을 것이다.
활동기간으로 보면 20~30곡은 나왔어야 ...

밝은 에너지와 실력을 갖춘 가수는 의외로 아주 희귀하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밝은 에너지와 노는 법을 잊은 것 같다.
그만큼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 많은 것이고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2023년 7월 19일 수요일

휴정休靜 - 선가귀감禪家龜鑑 유가귀감儒家龜鑑 도가귀감道家龜監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禪을 잘  정리했다고들 한다.

유가귀감儒家龜鑑은 심오한 부분이 선禪과 겹쳐서 인지 유교儒敎의 선禪적 이해라 할만큼
약간의 예禮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유가 선비들을 위한 선禪,노자老子 가이드'라 할 정도로
해박,깊이를 드러낸다.

반면 휴정 당시에 승려가 핍박받는 시절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완전 딴판으로 도가귀감道家龜監은
노자老子처세학 정도의 구절들을 모아 놓았다.

도가道家는 잡술이나 할 정도고 유가儒家 불가佛家는 비슷해... 이런 걸 어필한 것일까?
절이 무당집 같은 것이 만갈래 도가道家와는 먼 것이 불가佛家다는 것을 티내는 건지 알 수 없다.

도가道家의 출발이 노자,장자로 알고 있는데 잘 못 알고 있는 건가?


2023년 7월 15일 토요일

불교의 공空이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 있다는 말이잖아 왜 뜻이 반대로 바뀌냐?

왜냐
공空은 구멍, 빔, 비어 있음, 비었다, 없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게 왜 문제냐
같은 글자를 썼기 때문에 기본뜻에 얹어 항상 중의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고의적으로 얹어먹기 한 의도가 분명하다.

아니면 공空이 기본 뜻과 같다로 이해했을 때
'뭘 모르셔서 그러는데, 불교에서 공空이란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는 뜻이에요'...
결국 있다는 말이잖아. 형태는 변전하다를 모르는게 아니잖아.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 - 이 말도
일반인에게는 지금 감각할 수 있고  있다는 뜻이잖아.

있는데 딱 이거다 할 수 없고 모든 것은 변해간다. 마치 유물론 같다.
결국 있음에 대한 이야기잖아. 그러면 기본뜻에 완전히 반대개념이잖아.
없음은 있음의 상대개념 아니냐? 있음즉없음이니 ... 식이라면
공空 = 유有가 되겠네?

불교가 좀 치열한 종교인가? 혼돈은 말할 수 없으니 분명해라.

이래도 틀렸고 저래도 틀렸다 언어도단이다 이런 식의 말을 구사하려면
말로 되었을 때는 정확해야 한다.

색色 물질이란 뜻이라며... 물질적으로 유有
공空 비었다 없다 의 뜻이지... 물질적으로 무無

컵을 들고
이걸 컵이라 아니라면 뭐라고 할래?
이런 질문을 받거든 말장난 하는 놈이니
그 놈의 대갈통을 딱 그 컵으로 제대로 후리쳐라.
컵이든 대가리든 둘 다든 박살나거든 한마디 해라.
이건 뭐라고 할래? 

부처가 뭡니까? 뜰앞에 잣나무 이런 대답을 하거든.
잣나무에게 3,000배 시켜라.
살불살조라 하거든 잣나무를 베라 하라.

이런 걸 흉내내고 다니는 놈은 당장 만나지 마라.


어원에 가깝게 글자 풀어서 보면

허虛 - 비었다. 없음. <-> 실實 열매,꽉차다.
공空 - 구멍, 비었다.

虛空허공 텅빈 공 중
空虛공허 속이 텅 빔

머리통을 때리고 싶어진다.

무상無常이니 무상無相 - 4相? 아상我相이면 끝 아닌가?

진제眞諦,속제俗諦 해가면서 불경을 구라로 만들지 말고
이제는 진제眞諦만의 분명한 흐름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다른 의도가 있지 않다면, 이 시대에는 진제眞諦만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설說로 되는 게 아니라면 설說할 필요가 있나?

(모양 - 형이상 형이하의 모양, 유무형상)
아상(我相 atman samjna) - '나' 나라는 유무형상
인상(人相, 개아個我, pudgala samjna) - 나 아닌 사람이라는 유무형상
중생상(衆生相, sattva samjna) - 다른 생명체라는 유무형상
수자상(壽者相, jiva samjna) - 윤회하는 주체.영혼이라는 유무형상

오온五蘊 과정에서 대상으로 보는 것을
실상實相으로 보지 않는다.

금강경 구절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모양이 있다는 것은 다 허망하다.
만일 모든 모양을 상으로 보지 않은 즉 여래를 본다.

에서 상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은 '나'라는 것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다 '나'라는 것에 있다.

나라는 모양만 없으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다른 생명체라는, 영혼이라는 모양이 있을 수 없다.

자아,영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자아가 없다면
다른 사람의 자아도 없고 다른 생명체의 자아도 없고
없는 자아가 생을 넘어갈 수도 없다.

만일 나 아닌 모든 것이 영혼이 있다고 증명된다고 해도
나의 영혼을 발견할 수 없으면 나는 그냥 다른 현상인거다.
다른 현상에 대해 같은 기준으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맞지 않다.


공空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공空 - 인연가합의 몸에 오온이 흐른다.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법(法: 존재)

아공(我空) -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법공(法空) - 대상이라고 할 것이 없다.
구공(俱空) - 아공(我空),법공(法空) 후 아공(我空),법공(法空)을 벗어나 본성계합

이것도 자아.본체를 넣어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아공(我空)이면 법공(法空)이고 공空에 대한 집착을 떠나면 구공(俱空)
아공(我空)인데 법공(法空)이 안될 수 있나?
그럼 다른 현상이므로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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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브놀이
https://www.youtube.com/watch?v=kSMI5OPyDzI

향봉스님이 대중의 언어로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아상(我相 atman samjna) -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군지 알고?
인상(人相, 개아個我, pudgala samjna) - 니가 뭔데?
중생상(衆生相, sattva samjna) - 끼리, 무리짓기, 편가르기, 패거리 
수자상(壽者相, jiva samjna) - 오래오래 누릴려는 경향.
*중국에서 수壽를 목숨이란 것도 있지만, 누리다 누림의 의미도 많다고 한다.
'충족도 변한다' 것에 방점. 충족은 많은 인연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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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相이란 가름,차별이다.
상相없으면 평등지에 든다.

2023년 7월 10일 월요일

완등록 13. 무연자비 無緣慈悲

묻습니다.
모든 부처는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데 대자비를 행함이 어떻습니까?

諸佛 如何行大慈悲 爲衆生說法

스승이 말하길,
부처의 자비라는 것은 인연이 없어서 이름이 자비다.
師云
佛慈悲者 無緣故 名大慈悲 

자慈란 이룰 부처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비悲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慈者 不見有佛可成
悲者 不見有衆生可度 

그 법을 설한다는 바가 말하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다.
그 법을 듣는다는 것도 듣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其所說法 無說無示
其聽法者 無聞無得 

비유하자면 환사가 환인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 같다.
譬如幻士爲幻人說法 

이런 법을 내가 선지식을 따라 말에 이치를 알고 이해하고 깨달았다 하겠나
이런 자비를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다른 견해를 배워 얻었다 하겠나
者箇法 若爲道我從善知識言下領得 會也悟也
者箇慈悲 若爲汝起心動念 學得他見解 

스스로 본심을 깨닫지 않으면 끝내 이로울 게 없다.
不是自悟本心 究竟無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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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을 떠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고
알 것도 얻을 것도 없다 하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하고
이 없는 것에 의지하여 열반에 이른다니...

알송달송 한 것이 알아지는 게 아니라잖...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없는 거라잖...

말로 이르름 끊겼다. 언어는 생각의 집이라니 생각으로는 끊겼다.

몸의 일(먹고 자고 싸고 쉬고)외에
아무것도 어떤 것도 하지마?


흠 흠 흠.

2023년 7월 6일 목요일

The Beginning of Japan's Self-Destruction - Fukushima Nuclear Contamination

Japan is using their scheming techniques to discharge contaminated water in Fukushima.
This is an attack on Earth's life-ecosystem and humanity.

The way is - spend 1/10 of your national budget on nuclear waste disposal.

On the one hand, we are trying to find a way for the world to stop generating any more nuclear waste.

On the other hand,
Classify and separate all polluting nuclides according to characteristics and half-lives,
bury long and toxic ones in stable bedrock,
and dig short and less dangerous ones in drainage wells several kilometers deep underground and store them there.

2023년 7월 5일 수요일

헛갈리는 불교 언어 및 개념 - 법 공 무아.무상 윤회

불교 문헌이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사용된 문자들
원래 쓰이고 있던 개념과 달리
자기들만의 용어인 듯, 지멋대로 써서
쓰던 개념 깔고 얹어 먹는 효과를 노리고 쓴 듯
그 위에 또 '그 뜻이 아니고 - 백퍼'라고 하고 싶어서 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그리고 지네 스스로 새로운 용어를 개발하거나
기본 개념과는 달리 분명하게 이런 뜻이라고 밝혀주는 놈고 없고
대중법문에서도 알고 쓰는지 모르고 쓰는지
알아 듣던 못알아 듣던 막 쓴다.
한자 유교쟁이들처럼 똑 같은 말을 한다. '그것도 모르고...'

그래서 산스크리트나 팔리어 쪽을 보면 또 다른 개념처럼 들린다.


우스꽝스런 선문답 같다.
즉심시불... 짚신이 부처다.
삼강은 아냐? ... (떡) 다섯개 먹었다.


법法 - 분명 단어다.
불교서적 읽거나 불교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골치아픈 단어다.
다르마 담마 dharma 달마達磨 담마曇摩
이건 다른 단어인데 왜 법法을 썼을까?

달마가 음차라서?

1 붓다가 말한 가르침, 교리.
2 붓다가 깨달은 진리, 곧 불교의 진리.
3 붓다의 말을 기록한 경전 곧 법보(法寶).
4 독자적인 본성, 속성, 특성을 지니고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 '제법諸法'

dharma  윤리적 의무,계급적 의무 사회적 윤리 라는 뜻이 있다고 하니
인도에서 당시에도 얹어 먹기 했다는 것이다.

요는 붓다 관련은 붓다가 진리의 말을 했다고 했으니 그렇게 크게 묶으면
법法 - 가르침,진리,교리,경전(법보)는 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뭐 이런 ... 그냥 마구잡이 썼다에 1원 건다.

그런데 제법諸法무아無我 제법諸法공상空相 이 때는 모든 법法은...
독자적인 본성, 속성, 특성을 지니고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

불교가 논리적 분석이 많다. 따지는 영역은 애매하지 않다.
그 지녔다는 성질이 독자적이란 뜻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의미?
성질은 개체의 색.수.상.행.식 작용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데

개체에 따라 달리 파악되면 법法은 달라지는 건가?
법法 다르다고 인식되는 유무형의 것인가?

---

공空 - 비었다,없다.
그래서 한 때 텅빈...이런 표현 자주 쓰더만.

이게 정반대의 뜻이 된다.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성이 없다는 뜻이란다.
더 구체적으로는 2가지
- (스스로의 성질)자성(본성,속성,특성)이 영원하지 않다.
- 정해진 특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용에서 드러난다.
  예. 종이컵 - 물잔,찻잔,커피잔,술잔,음료수잔, 재털이,쓰레기통,모종그릇,받침대
  이러면 이것이 되고 저러면 저것이 되어서
  즉 자성이 정해지지 않아서 비었다는 것. 자성이란 위치는 있는데 비어서 없다는?

그럼 자성이 비었다 해서 性空으로 쓰던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할 때 공空을 쓰면 다시 없다 비었다의 뜻이다.
이건 또 석가의 장광설 뒤에 - 나타나는(일어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의 뜻으로
무극.태극.천지... 이런 노.장 선가의 개념에 얹는다.
어쩌라는 거냐?

이런 거 하나 정리안하고 뭐가 어쩌고 어째?
그래놓고 불교는 포용적이라서 다 수용한다나 어쩐다나...

차라리
애초에 정해진건 없어 살다보니 이름도 붙이고 그렇게 된거지
특히 인간문명의 산물은..하다보니 그런거지... 
이러고서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탈,열반이나 알려주셔요.

이런 말이 훨씬 쉽고 좋잖아.
지네끼리 알아 듣기 어려운 용어 만들어 놓고 비용만 높이는 꼴이라니...

-

무자성 공空은 개념이라서 또 다른 문제가 있어.
그렇다면 공空은 공空이야 공空이 아니야?

---

윤회 

1. 생이 돌고 돈다. - 생과 생을 넘어간 것
2. 괴로움이 반복된다. - 현생

현생은 바로 되짚어 확인할 수 있지만 윤회라는 말보다 다른 단어들이 많다.
(수행의 이유도 되지만, 이건 윤회라는 개념정의를 바꾸고 다른 이야기를 함.
1을 보완하려고 하는 경우도 더러 봤음)

생을 넘어 윤회라는 개념은
물리적으로 우주안의 생명현상을 원소의 이합집산보면 물질적으로 윤회인가?
그런데 이건 앞의 어떤 모양이 사라지고 뒤에 어떻게 이어지는 밝혀진게 없잖아.
앞의 모양으로 겪은 것이 어떻게 뒤의 모양으로 이어지는지 밝혀 놓고... 윤회를 들먹여야지.

조상-후손으로 소위 업.식이 이어진다는 뜻의 윤회인가?
유전자가 물질적으로 확인 되었으니 과학적으로도 확실한 기반이 있다.
또 부모-자식이 어떻게 닮아가는지 직접 보고 확인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에 맞으면 개체의 성격이 반복되서 발현된다.
이건 생명체에 한정된 것이다. 
이것이 조건에 따라 업.식이 발현된다는 이론도 증명된다.(입양)
유사과학 연구 동기 같은 것이다.(과학이라면 유전자,환경 너무나 방대하다)
사이비들이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많이 활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 윤회의 관점이 아니다.

복 지으면 좋은데 간다고..음. 이건 윤회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석가의 전생에 대해 본생경本生經이란 것까지 있는 거 보면
경이니까 분명 석가가 이야기 했다는 것인데...그렇다면
영체,의념체 같은 것이 있어서 생을 넘어 간다?
정해진 자성이 없어서 공空하다는 말은 빈말?
일체가 공空하고 무일물無一物이라매 윤회가 성립하나?
(정견은 여러가지 견 중에서 바른 견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견이 본래 없었고 인연따라 견이 발생/소멸한다 정견인가?
그럼 정견도 인연따라 발생/소멸하는가?
있는 그대로라면 있는 그대로는 뭔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건가?
이런 수행파 있고 만능 공空처럼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 )

해탈.열반 떠들기 전에 그것을 증명을 해줘야지 

모두에게 그것을 서비스 해야하고 그에 따라 가장 적합한 해탈.열반의 길을 안내해야하고.
중생이 몸.맘을 잘 모른다고 이렇게 막~하면...

---

무상無常 무상無相 

1. 고유한 형태나 모양이 없음. 불변하는 실체나 형상이 없음, 고유한 실체가 없는 공(空)의 상태.
2. 대립적인 차별이나 분별이 없음. 대상에 가치나 감정을 부여하지 않음. 형상을 떠남. 집착이나 속박에서 벗어남. 

2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므로 해탈 전에는 할 말이 아니고

1의 경우는 그럼 작용하는 색.수.상.행.식은 뭠?
이 작용도 없는 거라는 뜻? 공空처럼 ... 있지만 없어?
해탈,열반도 모양이 없음? 상락아정,해탈지견... 아니아니 해탈.열반은 있음? 없음?

해탈,열반 은 공空, 공空 아님? 

상수멸진想受滅盡이라 공空도 아니고 공空하지 않은 것도 아님? 공을 벗어남?
상相에 이미 무상無相이 있고 무상無相도 이미 상相을 포함한다?

그러면 상대계에서 안그런게 어딨나?
그것이면 그것이 아닌 것을 전제로 그것이라 하는 거지.

절대계라면 상相 무상無相은 말할 대상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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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모든 존재에는 고정 불변의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는 뜻이라는데
일반인 쓰는 말 '나' 이건 뭐여?
육근육식의 작용이건 일체가 인연으로 존재하던 말던
본인의 느낌이건 당사자에게 '나'라는 분명함이 있고
인간사회의 기반이잖아...부처법은 출세간법이라 세상의 개념은 무시하는 거?
생로병사하니 고정 불변이 아니라고 해 놓고 무아無我라는 말을 쓰는 거?
해탈했다는 부처가 쓰는 여래如來라는 뜻이
문맥상 말하고 있는 이것 '나'란 의미 아님?

이거 말 막해...

대승에서 부처설법은 광명설법 해설이라는데 봤어야 말이지.
불교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은 아니라면서?

2023년 7월 2일 일요일

유교가 기독교를 비판하지 못하는 이유

유교는 참 이율배반적이다. 그리고 신분제의 강압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어려운 글자 마저도 배울기회를 박탈해 놓고 '그것도 모르면서...'라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속이고 빼앗고 고혈을 빠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공자가 그러라고 시키디?
공자도 책 읽고 공부하다가 이렇더라, 그러니 이랬으면 하네... 라는 것이었잖아.
근데 쓰는 놈들은 잔혹한 도구로 썼잖아.

쟁투기에서 중세 조선의 암흑기로 ...

신성을 주장하고 싶으면 신성부터 보여라. 
기독교는 빨아 먹던 로마제국의 도구가 되면서 초장부터 변질 되었다.
그래서 장구한 전쟁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런 면에서 유교는 기독교에 비하면 까마득한 아래고
초록은 동색이라 비판하지도 못한다.

들어보면 유교가 학문적으로 좀 심오하다 싶은 거는 
불교의 것을 선별적으로 축소되어 용어 바꾸기에 불과한 것들이 허다하다.

불교를 탄압한 목적도 결국 그들이 누린다고 여기던 것들을 빼앗기 위한 목적이었다.
불교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고 개선하는 쪽으로 정리해주지 못했다.
그럴 역량이 안됐으니까... 그래서 한 것은 빼앗기...

사람이 다양한 만큼 크고 다양한 세계관을 제시해 주지도 못했고
더 좁아지다 못해 차단된 경우가 너무 많다.

노자 기준으로 조선왕조를 보면... 

역사도 그렇다.
도대체 진짜 고려나 그전의 삼국은 어땠는지도 알 도리가 없다.

게다가 대대손손 오래오래 해 먹고 싶어서
풍수로 좋다는 자연환경은 다 독점하려 했다.

불가 승의 다비와 부도보다 훨씬 낭비적이다.

음택은 공부터로만 썼어야 했고
양택은 공용으로 활용되었어야 했다.
그것을 관청이 독점하는 것도 좋지 않다.
권력이 언제 바르기만 하던가?
권력은 기본적으로 강압이고 
언제든 가혹해질 수 있어서 양택을 점유하면 나쁜 것을 더 키우게 된다.
많은 군.관청들이 좋은 자리 점유했다.
관청은 평하고 편리한 자리에 편재해야 한다.

체제를 정비하더라도 좋은 양터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되어야 했다.

왕 무덤 잡는데 높은 관료가 지명되고, 
유교가 자랑하는 것과 거리가 먼 온갖 것을 다 동원하여 사사로움을 추구하였다.

옛날 고관대작 명당 설화는 와 닿지 않겠지만
가까이 살아온 시대, 명당의 혜택을 입었다는 자들이 뭐 얼마나 이 사회에 좋은가?

경제 논리로 누군가 돈을 많이 벌면 배 아픈 건 당연한 것이다.
그만큼 편차를 증가시킬 것이고 자본에 의한 기회를 박탈 당하는 것이 때문이다.

고용되어 살아가는 삶은 기본적으로 불편하다.
먹는 것을 위해서 자신을 얽어 매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인구는 많고 치밀하고 활발하게 살아서 전개되어야 할 체제가
구닥다리 관념으로 굳어져서 결국 불행한 시기를 맞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언제나 그랬지만 눈 뜨고 보면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워 살아가기 참 어렵다.

그래서 난 지금 윤회를 믿지 않는다.
그만큼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불가에서도 해탈을 이야기하지.



2023년 7월 1일 토요일

남전南泉이 고양이를 죽였다(참묘斬猫)

무문관(無門關) 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南泉) 화상은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전은 마침내 그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그날 밤 조주(趙州)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일을 조주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남전은 말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선문답 공안은 상황극 코메디 같기도하고
고약한 다리걸기 놀이 같기도 하다.
그래도 쓰는 용도가 있다고 하니... 뭐


조주에게 던져진 질문은

한 손에 고양이를 쥐고
다른 손으로 칼을 쥐어 고양이 목에 대고
한마디 못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한 상황이다.

조주의 대답은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갔다.

처음 이 이야기를 봤을 때 '뭐지?' 몇 번을 문답이 납득되지 않는다.

'발에 싣는 신발을  머리에 이십니까?'며 나갔다.
또는
'차라리 신발을 이고 다니지 그러십니까?'며 나갔다.
또는
'미쳤다'

뭐 이 정도다.

선禪 문답 한답시고 고양이 목숨 쥐고 밑도끝도 없는 협박하다 결국 죽였다.
먼저 시비 건 것이 가장 큰 허물이다.
법거량이니 이상한 문답 방,할 ... 그저 자기들끼리의 놀이다. 칭얼대는 거거나.

허공이 뭐라던가 햇빛이 뭐라던가 구름이 뭐라던가 바람이 뭐라던가
선禪하고 싶다면 자연과 하라.

그 무문관 해당 칙에는 아래와 같이 나와있다고 하니...

趙州若在 만약 조주 선사가 있었다면,
倒行此令 거꾸로 이 명령을 행하였으리.
奪却刀子 칼을 도리어 빼앗으니,
南泉乞命 남전이 목숨을 구걸하였으리라.

2023년 6월 29일 목요일

12연기

12연기 -
12단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연기 이야기다.

단순하게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김으로써 그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렇다.

석가의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다. 다른 말로 자각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 봄을 깨달았다.

모든 힘이 가라앉고
모든 집착이 포기되며
갈애가 파괴되고 
탐욕이 사라지며
번뇌가 소멸되는 열반

7일간 3번

해탈의 지복을 누리고 난 후에 관찰했다는 것을 잊지 말...
해탈의 선정에 있다가 나오면서 관찰된 것.

이런 설명을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C%8B%AD%EC%9D%B4%EC%97%B0%EA%B8%B0%EC%84%A4

오온五蘊(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과 순서와 범위가 다르다.

무명 無明 - 알지 못함, 헤맴
행 行 - 몸,말,뜻 - 몸으로,입으로,생각으로
식 識 - 여섯가지 식
명색 名色 - 5온 명-수,상,행,식 색-물질
여섯 감각영역 感覺領域 - 여섯가지 들어 옴, 안이비설신의
촉 觸 - 봄,들음,냄새,맛,닿음
느낌 受 - 받아들임  - 고통, 즐거움,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갈애 渴愛 - 강렬한 사랑 - 욕망, 물질, 정신
집착 執着 - 잡음, 취取-바램,견해,계율,나我
존재 存在 - 있다,없다 유有
생 生 - 태어남, 화합
노사 老死 - 늙어 죽음...

율장 마하박가에는 아래와 같이 

생겨남 순으로
소멸하는 순으로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생겨나고
행을 조건으로 식이 생겨나며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며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가지 감각영역이 생겨나며
여섯가지 감각영역을 조건으로 촉이 생겨나고
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과 비탄,
고통과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렇게 모든 괴롬움의 다발들이 생겨나게 된다.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며
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가지 감각영역이 소멸하며
여섯가지 감각영역이 소멸하면 촉이 소멸하고
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과 비탄,
고통과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렇게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하게 된다.

2023년 6월 27일 화요일

만가지 의미의 단어 - 마음이 무엇인가...

이 만萬가지 보이지 않는 모양의 단어 - 마음.

먼저 정리하면 이렇다.

마음이 이렇다 저렇다의 표현에는 생략된 것이 있다.
마음에 ..... 일어났다.

마음이 편안하다. 마음에 편안함이 일어났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에 아픔이 일어났다.
마음이 답답하다. 마음에 답답함이 일어났다.
마음이 불편하다. 마음에 불편이 일어났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마음에 홀가분함이 일어났다.
그 사람은 맘씨가 좋다. 나의 마음에 그 사람의 맘씨좋음이 일어났다.

마음에 만상이 지나간다.
불교를 한마디로 줄이면 마음이라고 한다. 그때 마음이란 말이 이 마음이다.
이런 것도 없이 바로 마음 마음 하면 듣는 사람은 각자 해석하게 돼서 혼란스럽다.
답답한 일이다.
이 마음은 의식,생각이라 이름할 때도 있다. 역시 두루뭉스르한 말이다.

사람마다 말을 하는데 쓰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이하는 읽지 않아도 된다.

===

불교에서는 

6근根=감각기관 6경境 6식識

눈-빛-봄
귀-소리-들음
코-냄새-맡음
혀-맛-맛
몸-닿음-느낌
뇌-뜻.생각-앎

이것을 앞 5개를 전5식이라 하고

이 5개 각에 대해 일어나는 이어지는 반응을 의意식識 이라고 한다고...

*촉觸 
뜨거움,차가움,메마른,축축한,까칠한,따가운 등의 피부와
눌림, 충격, 뒤틀림, 엉킴 등 근육으로 느껴지는 것들.

몸에 눈.귀.코.혀가 있고 촉觸 닿음은
빛.소리.냄새.맛도 다 촉觸이다. 과학적으로도 그렇다.

즉 촉觸과 식識으로 간단히 볼 수 있다.

도道.선仙 의 내경은 전혀 다르게 부정관으로 펼쳐진다.

식識은 기억,생각,분별,판단,감정을 다 아우르는 애매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 의식. 생각 뭐지? 다 혼란스럽게 말한다.

불교도 유식唯識, 유심唯心이란 단어가 나오고.
어찌보면 생각思은 정리되지 않고 반응.작용 정도의 떠돌이처럼 쓴다.

이렇게 작용하는 것을 퉁하여 마음이라 하는데

유식체계는 깊은 3개의 식을 더한다.
7식識은 감정, 마음
8식識은 변화를 알아차림
9식識은 순수의식.청정식.본성
9식이 가장 아래 근본이며 8식은 9식에서 나오고 7식은 8식을 거친다고...

불교의 마음이란 단어는
확장인지 비틀기인지 재정의인지 전제바꾸기인지  인지교정인지
그 마음 말고 근본마음(8.9식)... 불교는 한마디로 마음 등.
쉽게 말해 저 각覺 알아차리는 걸 마음이라고
다시 마음이란 단어를 일반의미와 다르게 사용한다.
(지각과 식별 중에 지각 - 혼용하는 것 같기도...)

이 경계 없이 내부적인 상상만으로도 일어나는 반응이 꿈 같은 것이다.

여기까지 포함하면 근심,걱정,공포...
수만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졸--------

마음 마음 해 대는데
개인적으로는 의학에서 신경계다.
신경계는 바로 아는 것도 있고 인지 모르는 것도 있다.
그런데 선정이나 관찰과 사유를 통해
모르는 영역도 알게 되고 
그것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의 관계도 알게 되어
원리를 알게 된다.

선가仙家 쪽이 더 우수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본래 마음은 8식 쯤
무심無心은 9식이라고 본다.
=========================

요즘 의학상식으로는 신경 자극에 의한 반응이다.
의학에서 말하는 몸의 체계는 상상 밖으로 복잡하다.
(골격계,혈관계,근육계,소화계,분비계,신경계,호흡계,배설계,생식계,피부계,면역계 아따...)

그런데 
생각(새김:되새김질)해보자

몸이 있기 전에 이런 반응이 있었나?
몸이 있고 많은 경계에 부딛혀서 그 정보가 쌓이고 알아차림이 있고 하는 것이지...
몸은 생명체계이고 생명은 나고 자라고 발달하고 늙고 아프고 죽는다.

그래서 일반적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몸의 반응이다.
어린시절이라지만 자라는 변화가 빠르고 청소년기부터 더 복잡해진다.

결국 보인다는 몸도 의사들도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이고
그 안팎으로 일어나는 일들에서 일어나는 반응인 마음이란 것은 말해 뭐하랴.

반응이 있는 줄 알지만 그게 뭔지 모를 때 
대응하는 반응도 살아가는 삶이 다양한 만큼 다양하다.

그래서 마음은 모르겠다고 하고
다만 변한다고 하고 
변하니 믿을 것이 못된다라고 해 지나가게 내버려 두라 그게 현명하다고 한다.

결국 몸,맘은 하나에 대한 다른 이름인 것 - 둘 다 잘 모른다.
다만 몸의 체계가 원만하게 잘 돌아가면
몸도 없는 것 같고, 마음도 없는 것 같다.

어느 경계로부터 반응이건 아니면 상상으로의 반응이건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

몸이 먼저냐 맘이 주이냐. 이런 질문들을 하곤 하는데
시체는 몸이 있는데 맘이 주인 같다..고 한다면
몸 없이 그 맘이란 것이 생겼나? 반문도 가능하다.

생각이란 것도 내부적 변화가 있다.
그것을 뇌신경변화를 자료화하고 
분석해서 정보를 추출하여 이용하기도 한다.

보인다고 여기는 부분을 몸, (보이지 않고) 느끼는 부분을 마음이라 한다.
생명체계는 생존과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쪽으로 반응한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내부적 경계를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 몸에 기반해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생존에 대한 위협을 없애주고 원만한 몸의 흐름일 때 마음은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운 것
신비한 것은 그저 신비한 것
무료한 것은 그저 무료한 것
무슨 일이 일어나도 위험도 없고 원만할 때는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태어나기 전과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말할 것은 없다.
당장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야기해도 되겠지.
즉 모르는 몸 이전과 몸 이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허황되다 할 것이다.

=========여기까지 가름이다.

윤회라는 것도 다시 태어나 나투는 이야기이다.
물질이 변화하여 재구성 되었다면 윤회인가?
영혼 형태의 맘(의식체계)이란 것이 다시 다른 몸을 갖는다면
그건 불교의 무아, 공이 거짓말이 된다.
무아,공이  윤회와 충돌하기 때문에 많은 말들과 설이 있다.

생을 건너는 것은 사실 확인이 어려운데
왜 이런 것을 방편으로 썼을까? 의문이다.

예를 들어 민간의 몇몇 예화가 사실이라고 해도
티벳 라마들의 환생이 사실이라고 해도
일반인들로서는 확인이 어렵다.

그래서 이적에 가까운 사실 확인 되면
그의 대상에는 신앙으로 전개된다.
티벳불교를 들어보면 이에 해당한다.

뒤집는 다른 설명이 있는데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걸 본래마음, 참마음, 참나, 하나, 열반이라 이름 한다.
생각으로 추론할 수도 있고
허공처럼 느껴볼 수도 있다.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몸으로 있는데 몸 이후 일어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그것이다.
모양이 없지만 각覺(아는 것)이 있다고...

그것이 몸을 나투었다.
그것은 몸의 경계에 있기도 하지만, 몸 바깥도 인식하고 다룬다.
그것의 입장에서 보면 몸은 지나가는 것?
그것은 태어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는 ...

이런 설명은 여래장(8식,9식)이라는 걸 활용한다.
그것이 현생의 개체 특성이 어떻게든 저장되는 곳이 있다는 것이고
윤회 한다고 한다. 역시 증명할 길은 없다.
개인이 처하는 환경적 조건 과보라고 한다.

어쨌거나 윤회라는 굴레의 장치는
다시 복종적 신앙이나 수행행위에 대한 빌미가 된다.

말 어렵게 하는 대승불교
공空 - 공이 텅빈 허공이 아니라 무자성... 말이... 어렵다.
공空 : 비다 없다 헛되다 뜻인데 불교해석만 다시 의미부여를 해서 꼬였다.

(번역될 당시는 비다 없다 원래 의미였을 것이다.
항상 원래의미에다 얹어 중의적으로 무자성이라 해 먹는다.
그네들이 읽거나 들었던 걸 그대로 읊는 것 같다.
그래서 정반대로 해석하잖아 그냥 없다는 뜻이 아니라고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렇게 대중을 희롱하고 존경하라고?
무자성無自性이란 뜻이라면 경에 대입을 해보라.
색과 그 성질만 이야기하는 것이 되잖아.
색즉시무자성 무자성즉시색 - 색이 무자성이고 무자성이 색이다. 이씨~ 
시고 무자성중무색 - 이와 같이 무자성에는 색이 없어...아놔~무자성)

그럼 변치 않는 자성을 가진 것을 들어야 하는데 - 허공과 열반이란다.
그것은 원인이나 대상 없이 그냥 있단다.

공空은 연기緣起(인연으로 일어남)없는 존재는 없다.
즉 모든 것은 연기로 존재할 뿐이다.
예외는 2가지 허공과 열반.

그럼 공空은 공空인가 공空이 아닌가?
공성空性은 공성空性인가 공성空性이 아닌가?

논리적으로 양비에 걸릴 수 있다.
공空이라면 공空이 공空이니 모든 공空도 뒤집힐 수 있고
공空이 공空이 아니라면 공空의 자기부정이 된다.

역시 공空도 허공과 열반처럼 연기제외?

희론은 낭비일 뿐...

공空은 방편설이고 도구이다 - 이 정도로...

서산,진묵 대사 이후로 한국의 불법은 끊겼다고도 한다.
티벳밀교는 끊김없이 이어져 온 대승불교 정통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자량도(資粮道, Sambhara: 깨달음의 준비, 밑천) 
가행도(加行道: 方便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이런 체계를 갖추었다고 한다.
견도(見道)도 요즘 말하는 견성(見性)과 진정한 의미에서 다르다고 한다.
그때에 갖추어야 할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듣고 있다.
티벳불교의 스승들은 능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방만한 인간문명을 변화시키고 방향을 제시하는가?
티벳불교의 형식이 여기에 부합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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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화두는

'이 모든 것이 왜 이런가?'

이다.

2023년 6월 26일 월요일

참나이론은 허공계 매트릭스 자연스럽다

자각하면 괜찮은 비유같기도 한데
참나이론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대승 불교는 이것에 대한 관찰정밀도가 높은 것 같다.

허공계를 자각하면?되면?
인식.인지의 변화가 오는데
처음 자각할 때, 매우 충격적일 수 있다.

허공계 매트릭스,
허공계
허공계를 인지.인식했다?
순식간에 엄청난 인식체계의 변화가 올 수 있다.

개인적 체험은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연기법,인연법으로 보면 당연하다.
연기에 의한 인연 조합으로 개개물물이라면 다 다를 것인데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생주이멸도 자연스럽게 들여지게 된다.
인지되는 모든 사물이 생주이멸하기 때문이다.

관찰은 정확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교차검증으로 확인 할 수 밖에 없다.

허공과 물질에 대한 것이
대상으로든 존재인식으로든
인지,인식이 자연스럽다.
색이나 공이나 - 뭐 이런 식이다.

몸과 감각(촉각)으로 한정해서 가르던 인식체계도
순식간에 아무런 저항감 없이 자연스럽다.
물속에서 할랑거리던 몸으로 물을 느끼는 것처럼
허공을 인지,인식하고 느끼고 거리낌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 대승불교의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具空의 설명을 들으면
너무 편하고 쉽다.

본래부터 이랬다. 

여기에 여러가지 표현이나 말이 덧씌워지면
사족처럼 걸리적거리고 거추장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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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늘 무無 상태가 되면 그렇듯)

지금의 자기가 드러난다.
악惡인지 선善인지
그 어떤 자기인식도 교차검증될 수 있다.
그러니, 모르고 악행을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악인은 항상 오 그래? 그렇게 잘 알면서 그것을 이용하고 악행을 더한다.
어떤 형태의 악이던 가리지 않는다.
되지도 않은 자기 충동만 충족시키려 한다. 그런데 그게 될까?
선은 참 어렵다.
인지부터 정확하게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공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제는 분명 옳고 좋고 맞는 것 같았는데
오늘 다시 보니 달리 보이고 그것으로 보니 최악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악은 좋지 않은 것이 검증되어도 계속한다는 거다.
악은 자기 탐욕이고 폭력이다.
선은 균형을 맞춰 조화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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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쩌다 인간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바른 먹거리, 편안한 집
이런 거  합시다.

공해 0인 삶은 괴롭지 않을 것.

2023년 6월 18일 일요일

Dollar supremacy is collapsing, as the backward US system is collapsing.

cheat in the name of economy

make lose balance,

make misfortune,

using of misfortune to suck blood

also for the whole world

so long time


no intention of changing


never stop to end of blood feeding or life span


What is more certain and not good is not because other countries are good at it.


This is what happened because earth people let them do as they pleases.


Things from other countries that do dirty hybrids with dollar based blood suckers.


===


Human civilization? It's just a hateful slave system.

능엄주 - 원문, 한글

출처 : https://m.blog.naver.com/bucherhansub/110185363205

<자료출처;cafe.daum.net/ebuddha의 [자료실]의 '능엄주' 게시판 >

능엄주

능엄신주는 《수능엄경(首楞嚴經)》에 나오는 ‘대불정능엄신주(大佛頂楞嚴神呪)’를 말한다.
이 주문을 읽거나 외우거나 몸에 간직하면 처음
보리심을 낼 때부터 부처님 몸을 얻을 때까지
세세생생 나쁜 곳은 물론이고 천하거나 가난한 곳에도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계를 파한 사람은 계를 청정하게 하며,
계를 얻지 못한 이는 계를 얻게 하며,
정진하지 못한 이는 정진하게 하며,
지혜가 없는 이는 지혜를 얻게 하며,
재계를 가지지 못하는 이는 재계를 이루게 한다고 한다.

정성으로 이 주문을 외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온갖 재앙이 모두 소멸하게 된다고 한다 .   



 "능엄주해석" 뜻과 발음 (반자밀제 번역본)

사타타타가타 우슈니샤 시타타파트라 아파라지타 프라티앙기라 다라니
satatha tagata usnisa sitatapatra aparajita pratiangira dharani
如來頂髮白傘蓋無敵反呪詛陀羅尼(여래정발백산개무적반주저타라니)
(여래의 머리를 덮는 흰비단 덮개라 불리우는 무적의 저주를 막는 다라니)

나마스 타타수가타야 아르하트 삼먁삼붓다샤 사티야타 붓다 코티슈니삼
namas tatha sugataya arhat samyaksam buddhasya satyata  buddha kotisn isam
(지극하신 如來, 阿羅漢, 等正覺, 七俱 佛께 진실로 다같이 귀의합니다.)
(지극하신 여래, 아라한, 등정각, 칠구 불께 진실로 다같이 귀의합니다.)

나무 사트봐 붓디 봇디사타봐야
namu sattva buddhi boddhisattavaya
(佛菩薩에게 귀의합니다.)
(불보살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삽타남 삼먁 삼붓다 코티남 사 슈라봐카상가남
namu saptanam  samyak sambudda kotinam sasra vakasam ghanam
(七俱 等正覺과 聲聞僧伽에 귀의합니다.)
(칠구 등정각과 성문승가에 귀의합니다.)

나무 로케 아르하타남
namu loke arhata na m
(세상의 阿羅漢에게 귀의합니다.)
(세상의 아라한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스로타판나남
namu srota panna na m
(預流에게 귀의합니다.)
(예류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사크리다가미남
namu sakr da ga minam
(一來에게 귀의합니다.)
(일래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로케 삼먁가타남 삼먁프라티판나남
namu loke samyakgatanam samyakpratipannanam
(세상에서 不還으로 바르게 가는 자에게 귀의합니다.)
(세상에서 부환으로 바르게 가는 자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데봐리쉬남
namu devar s ina m
(神仙들에게 귀의합니다.)
(신선들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싯디 뷔디야 다라리쉬남 사파남 그라흐사마르타남
namu siddhi vidya dhararsinam  sapanam grahsamartanam
(呪力神通을 성취한 神仙과 모두를 이롭게 하는 呪에 귀의합니다.)
(주력신통을 성취한 신선과 모두를 이롭게 하는 주에 귀의합니다.)

나무 브라흐마네
namu Brahmane
(브라흐만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인드라야
namu Indraya
(인드라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루드라야 우마파티사히타야
namu Bhagavati Rudraya umapatisahitaya
(우마와 함께 계시는 성스러운 루드라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나라야나야 판챠마하삼무드라 나마스크리티야
namu Bhagavati Narayanaya pancamaha sammudra namaskrtya
(성스러운 나라야나의 五大무드라에 예배하고 귀의합니다. )
(성스러운 나라야나의 오대무드라에 예배하고 귀의합니다. )

나무 바가봐티 마하칼라야 트리푸라나가라 뷔드라봐나 카라야 아디묵티카 슈마샤나 니봐사네 마트리가남 나마스크리티야 namu Bhagavati mahakalaya tripuranagara vidravana karaya adhimuktika smasana nivasane matrganam namaskritya
(성스러운 마하칼라에게 귀의합니다. 트리푸라 都城을 불태우고, 아디묵티카神과 묘지에 사는 마트리가女神에게 예배합니다.)(성스러운 마하칼라에게 귀의합니다. 트리푸라 도성을 불태우고, 아디묵티카신과 묘지에 사는 마트리가여신에게 예배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타타가타쿨라야
namu Bhagavati tathagatakulaya
(성스러운 如來部에게 귀의합니다.)
(성스러운 여래부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파드마쿨라야
namu padmakulaya
(蓮華部에 귀의합니다.)
(연화부에 귀의합니다.)

나무 봐즈라쿨라야
namu vajrakulaya
(金剛部에 귀의합니다.)
(금강부에 귀의합니다.)

나무 마니쿨라야
namu manikulaya
(寶部에 귀의합니다.)
(보부에 귀의합니다.)

나무 가자쿨라야
namu gajakulaya
(象部에 귀의합니다.)
(상부에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드리다수라세나 프라하라나라자야 타타가타야
namu Bhagavati drdhasurasena praharanarajaya tatha gata ya
(용맹한 군사를 격파하는 王이신 성스러운 如來에게 귀의합니다.)
(용맹한 군사를 격파하는 왕이신 성스러운 여래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아미타바야 타타가타야 아르하티 삼먁삼붓다야
namu Bhagavati amitabhaya tatha gataya arhati samyaksambuddhaya
(正等覺을 이루신 성스러운 아미타如來佛에게 귀의합니다.)
(정등각을 이루신 성스러운 아미타여래불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악쇼브야야 타타가타야 아르하티 삼먁삼붓다야
namu Bhagavati aksobhyaya tathagataya arhati samyaksambuddhaya
(정등각을 이루신 不動尊如來佛에게 귀의합니다.)
(정등각을 이루신 부동존여래불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바이샤즈야구루봐이두리야 프라바라자야 타타가타야
namu Bhagavati  Bhaisajyaguruvaidurya prabharajaya tathagataya   
(성스러운 藥師琉璃光如來佛에게 귀의합니다.)
(성스러운 약사류리광여래불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삼푸슈피타 샬렌드라라자 타타가타야 아르하티 삼먁삼붓다야
namu Bhagavati sampuspita salendra-raja tathagataya arhati samyaksam buddhaya
(정등각을 이루신 娑羅樹華普遍開敷王如來佛에게 귀의합니다.)
(정등각을 이루신 사라수화보편개부왕여래불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사캬무니예 타타가타야 아르하티 삼먁삼붓다야
namu Bhagavatisa khyamuniye tatha gata ya arhatisam yaksambuddha ya
(정등각을 이루신 석가모니如來佛에게 귀의합니다.)
(정등각을 이루신 석가모니여래불에게 귀의합니다.)

나무 바가봐티 라트나케투라자 타타가타야 아르하티 삼먁삼붓다야
namu Bhagavati ratnaketuraja tathagataya arhatisam yaksam buddhaya
(정등각을 이루신 寶幢王如來佛에게 귀의합니다.)
(정등각을 이루신 보당왕여래불에게 귀의합니다.)

테브요 나마스크리티야 에타드 바가봐티 사타타가토슈니삼 시타타파트라 나무아파라지타 프라티앙기라
tebhyo namaskritya etad Bhagavati satatha gatosnisam sitatapatra namuapara jitapratiangira
(성스러운 여래들의 머리를 덮는 흰비단 덮개라 불리우는 무적의 저주를 막는 呪에 귀의하고 기원하나니,)
(성스러운 여래들의 머리를 덮는 흰비단 덮개라 불리우는 무적의 저주를 막는 주에 귀의하고 기원하나니,)

사르봐부타그라하 니그라하카라니
sarvabhu tagraha nigrahakarani
(일체의 마귀를 折伏 시켜주시고,)
(일체의 마귀를 절복 시켜주시고,)

파리뷔디야체다니 아칼라므루티유 파리트라야나카리 사르봐 반다나목샤니
parividyachedani  akalamrtyu paritrayanakari sarva bandhanamoks ani
(갑자기 죽게하는 주문으로부터 보호하고, 주문을 絶斷하며, 일체의 繫縛을 풀어주시고,)
(갑자기 죽게하는 주문으로부터 보호하고, 주문을 절단하며, 일체의 계박을 풀어주시고,)

사르봐두슈타 두슈타스봐프나 봐라니
sarvadusuta dusutasvapna varani
(모든 惡夢을 없애주시고,)
(모든 악몽을 없애주시고,)

차투라쉬티남 그라하사하스라남 뷔드봠사나카리
Caturasitinam grahasahasranam vidhvam sanakari
(84,000의 邪魔를 파멸시켜 주소서!)
(84,000의 사마를 파멸시켜 주소서!)

아슈타뷤샤티남 낙샤트라남 프라사다나카리
asutavim satinam naks atranam prasa danakari
(28星宿들을 청정하게 바로잡아 주시고,)
(28성숙들을 청정하게 바로잡아 주시고,)

아슈타남 마하그라하남 뷔드봠사나카리 사르봐샤트루니봐라니
asutanam maha grahanam vidhvam sanakari sarvas atrunivarani
(8개의 大惡星을 파멸시켜, 일체의 敵을 막아주시며,)
(8개의 대악성을 파멸시켜, 일체의 적을 막아주시며,)

고라두슈타 스봐프나남 차나샤니
ghoradusta svapnanam canasani
(惡夢을 없애주시고,)
(악몽을 없애주시고,)

뷔샤샤스트라 아그니우다카웃타라니
visasastra agniudakauttarani
(毒, 劍, 火, 水로부터 구원하여 주소서!)
(독, 검, 화, 수로부터 구원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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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라지타 고라 마하발라찬다 마하디파타 마하테자
aparajita gora  mahabalacanda mahadhipata mahateja 
(不敗의 고라, 큰힘을 가진 찬다, 大火炎女尊, 大成德女尊,)
(불패의 고라, 큰힘을 가진 찬다, 대화염여존, 대성덕여존,)

마하슈붸타즈봘라 마하발라판다라봐시니
mahasvetajvala maha balapandaravasini
(太白炎光女尊, 大力白衣女尊,)
(태백염광여존, 대력백의여존,) 

아리야타라 브루쿠티
aryatara Bhrkuti
(성스러운 타라 蹙額女尊,)
(성스러운 타라 축액여존,)

차이봐뷔자야 봐즈라말라티
caivavijaya vajrama lati
(항상 승리하시는 봐즈라말라티,)

뷔슈루타 파드마카 봐즈라지흐봐차
visruta padmaka vajrajihvaca
( 蓮華坐로 유명한 金剛舌女尊,)
(연화좌로 유명한 금강설녀존,)

말라차이봐아파라지타 봐즈라단디
malacaivaaparajita vajradandi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신 불패의 金剛杖女尊,)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신 불패의 금강장여존,)

뷔샬라차 샨타뷔데하푸지타 수마야루파 마하슈붸타
visalaca santavidehapujita sumayarupa mahasveta
(위대하고 평화로운 靈이시며, 供養받으시는 뛰어난 呪術士의 모습을 하신 太白女尊,)
(위대하고 평화로운 영이시며, 공양받으시는 뛰어난 주술사의 모습을 하신 태백여존,)

아리야타라 마하발라 아마라 봐즈라삼칼라차이봐
aryatara mahabala amara vajrasam kalacaiva
(성스러운 타라이시며, 큰힘을 가진 不死의 金剛銷女尊,)
(성스러운 타라이시며, 큰힘을 가진 부사의 금강소녀존,)

봐즈라쿠마리 쿨라다리 봐즈라하스타차 뷔디야 칸차나 말리카
vajrakumari Kuladari vajrahasta ca vidya kancana malika
(金剛童女尊, 長女尊, 金剛手女尊, 明呪女尊, 金 女尊,)
(금강동녀존, 장녀존, 금강수여존, 명주여존, 금 여존,)

쿠숨바라트나
kusumbharatna
(황금의 보물을 가진 女尊,)
(황금의 보물을 가진 여존,)

봐이로차나크리야 야라투슈니샴
vairocanakriya yaratus nisam
(佛頂의 빛을 두루 비추어 淨化하는 女尊,)
(불정의 빛을 두루 비추어 정화하는 여존,)

뷔즈림바마나차
vijr mbhamanaca
(開口女尊,)
(개구여존,)

봐즈라 카나카 프라바 로차나 봐즈라툰디차
vajra kanaka prabha locana vajratundica
(번개와 황금의 빛이 나는 눈을 가진 女尊과 金剛嘴女尊,)
(번개와 황금의 빛이 나는 눈을 가진 여존과 금강취녀존,)

슈붸타 차 카말라 악샤샤쉬프라바
sveta ca kamala aksasasiprabha
(白蓮의 눈을 가진 月光女尊,)
(백련의 눈을 가진 월광여존,)

이티에테 무드라카나하 사르붸 락샴 쿠르봔투 이땀마마샤   
itiete mudrakanah sarve raksam kurvantu ittam mamasya
(위와 같이 무드라를 보이는 諸尊들께서는 저를 守護하여 주소서!)
(위와 같이 무드라를 보이는 제존들께서는 저를 수호하여 주소서!)

옴 리시가나 프라샤스타 사타타가토슈니샤
om  rsigana prasasta satatha gatosnisa
(옴 聖仙衆에 讚美되는 如來佛頂이여!)
(옴 성선중에 찬미되는 여래불정이여!)

훔 트룸 잠바나 
hum trum jambhana
(훔 트룸 破壞者여!)
(훔 트룸 파괴자여!)

훔 트룸 스탐바나
hum trum stambhana
(훔 트룸 制御者여!)
(훔 트룸 제어자여!)

훔 트룸 파라뷔디야삼바크샤나카라
hum trum paravidyasambhaksanakara
(훔 트룸 다른자들의 呪를 삼켜버리는 자여!)
(훔 트룸 다른자들의 주를 삼켜버리는 자여!)

훔 트룸 사르봐락샤락샤샤 그라하남 뷔드봠사나카라
hum trum sarvaraksaraks asyagrahanam vidhvamsanakara
(훔 트룸 一切의 夜叉, 羅刹, 惡魔들을 滅하는 자여!)
(훔 트룸 일체의 야차, 나찰, 악마들을 멸하는 자여!)

훔 트룸 차투라쉬티남 그라하사하스라남 뷔드봠사나라
hum trum caturasitinam gra hasahasranam vidhvamsanara
(훔 트룸 84,000의 악마를 멸하는 자여!)
(훔 트룸 84,000의 악마를 멸하는 자여!)

훔 트룸 락샤 바가봔 마 타타가토슈니샤 프라티앙기라 마하사하스라 부자사하스라쉬르샤 코티 사하스라네트레 아뷔디야 즈봘리타 나타케 마하봐즈라다레 트리바봐나 만달레슈봐라
hum trumraksa Bhagavanma tathagatosnisa pratiangira maha sahasra Bhujasahasrasirsa kotisahasranetre avidya jvalita natakemaha vajradhare tribhavana mandalesvara
(훔 트룸 성스러운 大如來佛頂 反呪咀를 지키시며,거대한 천개의 손과 천개의 머리, 천개의 눈으로 無明을 비추시고,大金剛杵를 가지고 춤을 추시며 三界의 만달라를 지배하시는 自在神이여!)
(훔 트룸 성스러운 대여래불정 반주저를 지키시며,거대한 천개의 손과 천개의 머리, 천개의 눈으로 무명을 비추시고,대금강저를 가지고 춤을 추시며 삼계의 만달라를 지배하시는 자재신이여!)

옴 스봐스티르 바봐투 마마 이땀마마샤
om svastir bhavatu mama ittammamasya   
(옴 나는 승리하리라!)
(옴 나는 승리하리라!)

라자 바야트 차우라바야트 아그니바야트 우다카바야트
raja bhayat caurabhayat agnibhayat udakabhayat
(왕의 危難, 盜賊의 危難, 火難, 水難으로부터,)
(왕의 위난, 도적의 위난, 화난, 수난으로부터,)

뷔샤바야트 샤스트라 바야트 파라차크라바야트 두르빅샤 바야트
visabhayat sastra bhayat paracakrabhayat durbhiksa bhayat
(毒難, 武器의 危難, 敵兵의 危害, 飢饉難으로부터,)
(독난, 무기의 위난, 적병의 위해, 기근난으로부터,)

아샤니 바야트 아칼라므루티유바야트 다라니부미캄파 카파타바야트 울카파타바야트
asani bhayat akalamrtyubhayat dharani bhumikampa kapatabhayat ulkapa tabhayat
(雷靂의, 때아닌 죽음의, 지진에 떨어지는, 流星이 떨어지는 위난으로부터,)
(뇌력의, 때아닌 죽음의, 지진에 떨어지는, 유성이 떨어지는 위난으로부터,)

라자단다 나가바야트 뷔디유트바야트 수파르나 바야트
rajadanda nagabhayat vidyutbhayat suparna bhayat
(王의 형벌, 뱀의 위난, 雷電의 위난, 독수리의 위난으로부터,)
(왕의 형벌, 뱀의 위난, 뇌전의 위난, 독수리의 위난으로부터,)

약샤그라하트 락샤그라하트 프레타그라하트 피샤차그라하트
yaksagrahat raksagrahat pretagrahat pisacagrahat
(夜叉魔, 羅刹魔, 死靈魔, 屍肉鬼魔로부터,)
(야차마, 라찰마, 사령마, 시육귀마로부터,)

부타그라하트 쿰반다그라하트 푸타나그라하트 카타푸타나그라하트
bhutagrahat kumbhand agrahat putanagrahat kataputan agrahat
(精靈의 魔, 邪鬼魔, 小兒病魔, 죽게하는 小兒病魔로부터,)
(정령의 마, 사귀마, 소아병마, 죽게하는 소아병마로부터,)

스칸다그라하트 아파스마라그라하트 운마다그라하트 차야그라하트
skandagrahat apasma ragrahat unma dagrahat chaya grahat
(스칸다天魔, 顚狂病魔, 狂病魔, 惡魔로부터,)
(스칸다천마, 전광병마, 광병마, 악마로부터,)

레봐티그라하트 자타하리냐하 가르바하리냐하 루디라하리냐하
revati grahat jataha rinyah garbha harinyah rudhiraharinyah
(女魅의 魔, 生兒를 먹는 鬼女, 胎兒를 먹는 鬼女, 피를 먹는 鬼女로부터,)
(여매의 마, 생아를 먹는 귀녀, 태아를 먹는 귀녀, 피를 먹는 귀녀로부터,)

맘사하리냐하 메다하리냐하 마짜하리뇨 오조하리냐하
mamsaharinyah meda harinyah majjaharinyo ojoharinyah
(血食鬼女, 膏血을 먹는 鬼女, 骨髓를 먹는 鬼女, 吸精氣鬼女로부터,)
(혈식귀녀, 고혈을 먹는 귀녀, 골수를 먹는 귀녀, 흡정기귀녀로부터,)

지뷔타하리냐하 봐타하리냐하 봔타하리냐하 아슈챠하리냐하 치타하리냐하
jivitaharinyah vataharinyah vantaharinyah asucya harinyah cittaharinyah
(奪命食女鬼, 呼吸을 먹는 鬼女, 吐物을 먹는 鬼女, 不淨物을 먹는 鬼女, 心을 먹는 鬼女로부터,)
(탈명식녀귀, 호흡을 먹는 귀녀, 토물을 먹는 귀녀, 부정물을 먹는 귀녀, 심을 먹는 귀녀로부터,)

테샴사르봐샴 사르봐그라하남 뷔디얌체다야미 킬라야미
tesam sarvasam sarvagrahanam vidyam chedayami kilayami
(一切의 모든 惡魔들의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일체의 모든 악마들의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프라브라자카 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pravrajaka 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 mi
(行乞者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행걸자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다키니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dakini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다키니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다키니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마하파슈파티 루드라 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mahapasupati rudra 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大獸主 루드라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대수주 루드라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나라야나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narayana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나라야나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나라야나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타트봐가루다사하야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tattvagarud asahaya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진실한 가루다를 데리고 다니는 자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진실한 가루다를 데리고 다니는 자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마하칼라 마트리가나 크리얌 뷔디얌체다야미 킬라야미
maha kala matrgana kriyam vidyam chedayami kilayami
(마하칼라 聖母衆이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마하칼라 성모중이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카팔리카 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kapalika 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카팔리카派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카팔리카파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자야카라마두카라 사르봐르타사다나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jayakaramadhukara sarva rthasa dhana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자야카라, 마두카라, 사르봐르타사다나 삼형제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자야카라, 마두카라, 사르봐르타사다나 삼형제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차투르바기니크리탐 뷔디얌체다야미 킬라야미
caturbhagini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四姉妹尊이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사자매존이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브링기리티 난다케슈봐라가나파티 사하야크리탐 뷔디얌체다얌 킬라야미
bhrngiriti nandakes varaganapati sahayakritam vidyam chedayam  kilayami
(브링기리티와 난다케슈봐라, 가나파티의 侍子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브링기리티와 난다케슈봐라, 가나파티의 시자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나그나슈라봐나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nagnasravan a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裸形行者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나형행자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아르하트크리탐 뷔디얌 체다야미 킬라야미
arhat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阿羅漢이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아라한이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뷔타라가크리탐 뷔디얌체다얌 킬라야미
vitaragakritam vidyam chedayam kilayami
(離欲者가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이욕자가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봐즈라파니 구흐야카구흐야카 아디파티크리탐 뷔디얌체다야미 킬라야미
vajrapani guhyakaguhyaka adhipatikritam vidyam chedayami kilayami
(金剛手 구흐야카와 구흐야카의 주인이 행한 呪文을 切斷하고 結縛하겠다.)
(금강수 구흐야카와 구흐야카의 주인이 행한 주문을 절단하고 결박하겠다.)

락샤맘 바가봔 이땀 마마샤
raksamam Bhagavan ittam mamasya   
(이와 같이 나를 수호하소서 聖스러운 이시여!)
(이와 같이 나를 수호하소서 성스러운 이시여!)

바가봔 시타타파트레 나무 아스투테 아시타날라루카 프라바스봐타 뷔카시타타 파트레
Bhagavan sitatapatre namu astute asitanala ruka prabha svata vikasitata pattre
(白光으로 빛나는 활짝핀 꽃처럼 성스러운 白傘蓋에 귀의하고 예배합니다.)
(백광으로 빛나는 활짝핀 꽃처럼 성스러운 백산개에 귀의하고 예배합니다.)

즈봘라 즈봘라 다라 다라 뷔다라 뷔다라 체다 체다 훔 훔 파트 파트 파트 파트 파트 스봐하
jvala jvala dara dara vidara vidara cheda cheda hum hum phat phat phat  phat phat svaha   
(光輝 光輝 粉碎 粉碎 破裂 破裂 切斷 切斷 훔 훔 파트 파트 파트 파트 파트 祈願합니다.)
(광휘 광휘 분쇄 분쇄 파열 파열 절단 절단 훔 훔 파트 파트 파트 파트 파트 기원합니다.)

헤헤 파트 아모가야 파트 아프라티하타야 파트 봐라프라다야 파트
hehe phat amoghaya phat apratihataya phat varapradaya phat 
(오직 오직 파트, 아모가야 파트, 無 者여 파트, 은혜를 베푸는 자여 파트,)
(오직 오직 파트, 아모가야 파트, 무 자여 파트, 은혜를 베푸는 자여 파트,)

아수라뷔드라봐카야 파트 사르봐데붸브야하 파트 사르봐나게브야하 파트 사르봐 약슈 브야하 파트
asuravidra vakaya phat sarvadevebhyah phat sarvana gebhyah phat sarva yaks bhyah phat 
(阿修羅를 물리치는 자여 파트, 一切의 天神이여 파트, 一切의 龍神이여 파트,一切의 夜叉여 파트,)
(아수라를 물리치는 자여 파트, 일체의 천신이여 파트, 일체의 용신이여 파트,일체의 야차여 파트,)

사르봐간다르붸브야하 파트 사르봐부테브야하 파트 카타푸타네브야하 파트 사르봐두르랑기에브야하 파트 sarvagandharvebhyah phat sarvabhutebhyah phat kataputanebhyah phat  sarvadurlanghiebhyah phat 
(一切의 乾 婆여 파트, 一切의 鬼靈이여 파트, 카타푸타나魔여 파트,一切의 이기기 어려운 것이여 파트,)
(일체의 건 파여 파트, 일체의 귀령이여 파트, 카타푸타나마여 파트,일체의 이기기 어려운 것이여 파트,)

사르봐 두슈프렉쉬테브야하 파트 사르봐즈봘레브야하 파트 사르봐파스마레브야하 파트 사르봐슈라봐네브야하 파트
sarva duspreksitebhyah phat sarvajvalebhyah phat sarvapasmarebhyah phat sarvasravanebhyah phat
(一切의 추악함이여 파트, 一切의 熱病이여 파트, 일체의 癲癎이여 파트, 一切의 聲聞이여 파트,)
(일체의 추악함이여 파트, 일체의 열병이여 파트, 일체의 전간이여 파트, 일체의 성문이여 파트,)

사르봐티르티케브야하 파트 사르봐운마데브야하 파트 사르봐 뷔디야다레브야하 파트 자야카라마두카라 사르봐르타사다케브야하 파트
sarvatirthikebhyah phat sarvaunmadebhyah phat sarvaVidyadharebhyah phat jayakaramadhukara sarvarthasa dhakebhyah phat
(一切의 外道여 파트, 一切의 狂亂者여 파트, 一切의 呪文을 가지는 자여 파트,勝利하는 자, 꿀을 만드는 자, 一切의 利益을 성취하는 자여 파트,)
(일체의 외도여 파트, 일체의 광란자여 파트, 일체의 주문을 가지는 자여 파트,승리하는 자, 꿀을 만드는 자, 일체의 이익을 성취하는 자여 파트,)

뷔디야차레브야하 파트 차투르바기니브야하 파트 봐즈라쿠마리 뷔디야라즈니브야하 파트 마하 프라티앙기라브야하 파트 vidyacarebhyah phat caturbhaginibhyah phat vajrakumari vidyarajnibhyah  phat maha pratiangirabhyah phat
(明行呪를 가진 者여 파트, 四姉妹尊이여 파트, 金剛蓋 明呪女王尊이여 파트,위대한 저주를 막는 여신들이여 파트,)
(명행주를 가진 자여 파트, 사자매존이여 파트, 금강개 명주여왕존이여 파트,위대한 저주를 막는 여신들이여 파트,)

봐즈라삼카리야 프라티앙기라자야 파트 마하칼라야 마하마트리가나 나마스크리타야 파트
vajrasamkarya pratiangirajaya phat mahakalaya mahamatrgana namaskritaya phat
(金剛連鎖反呪咀王이여 파트, 마하칼라, 마하마트리가나, 禮拜받는 자여 파트,)
(금강연쇄반주저왕이여 파트, 마하칼라, 마하마트리가나, 예배받는 자여 파트,)

뷔쉬나붸 파트 브라흐마네 파트 아그나예 파트 마하칼라야 파트
visnave phat Brahmane phat agnaye phat mah kalaya phat
(비슈누여 파트, 브라흐만이여 파트, 아그니여 파트, 마하칼라여 파트,)
(비슈누여 파트, 브라흐만이여 파트, 아그니여 파트, 마하칼라여 파트,)

칼라단다야 파트 마트레 파트 루드라야 파트 차문다야이 파트
kaladandaya phat matre phat Rudraya phat camundayai phat
(死神이여 파트, 聖母神이여 파트, 루드라여 파트, 차문다여 파트,)
(사신이여 파트, 성모신이여 파트, 루드라여 파트, 차문다여 파트,)

칼라라트리야이 파트 카팔리네 파트 아디묵티카 슈마샤나 봐시네 파트
kalaratryai phat kapaline phat adhimuktika smasana vasine phat
(破壞하는 밤의 神이여 파트, 해골을 가진이여 파트, 기쁘게 묘지에 사는이여 파트.)
(파괴하는 밤의 신이여 파트, 해골을 가진이여 파트, 기쁘게 묘지에 사는이여 파트.)

이예 카치트 사트봐스 마마 이땀 마마샤
Iye kacit sattvas mama ittham mamasya 
(이들과 어떠한 진실된 존재들도    를 수호하소서!)
(이들과 어떠한 진실된 존재들도    를 수호하소서!)

두슈치타하 아미트라치타하
duscittah amitracittah 
(惡心을 가진 자들, 敵意를 가진 자들,)
(악심을 가진 자들, 적의를 가진 자들,)

오자하라하 가르바라하 루디라하라하 봐사하라하
oja harah garbharah rudhiraharah  vasaharah
(精氣를 먹는 자들, 胎兒를 먹는 자들, 鮮血을 먹는 자들, 膏를 먹는 자들,)
(정기를 먹는 자들, 태아를 먹는 자들, 선혈을 먹는 자들, 고를 먹는 자들,)

맘사하라하 자타하라하 지뷔타하라하 발리야하라하
mamsaharah  jataharah  jivitaharah baliya harah
(肉을 먹는 자, 生兒를 먹는 자, 生命을 먹는 자, 供物을 먹는 자들,)
(육을 먹는 자, 생아를 먹는 자, 생명을 먹는 자, 공물을 먹는 자들,)

간다하라하 푸슈파하라하 파라하라하 사샤하라하
gandha harah puspa harah paraharah sasya harah 
(香을 먹는 자들, 꽃을 먹는 자들, 後果를 먹는 자들, 穀物을 먹는 자들,)
(향을 먹는 자들, 꽃을 먹는 자들, 후과를 먹는 자들, 곡물을 먹는 자들,)

파파치타하 두슈타치타하 루드라치타하
papacittah dustacittah  Rudracittah 
(罪惡心, 惡心, 暴惡心이 있는 자들,)
(죄악심, 악심, 폭악심이 있는 자들,)

약샤그라하하 락샤그라하하 프레타그라하하 피샤차그라하하
yaks agrahah raks agrahah pretagrahah  pisacagrahah
(夜叉魔들, 羅刹魔들, 死靈魔들, 鬼神魔들,)
(야차마들, 나찰마들, 사령마들, 귀신마들,)

부타그라하하 쿰반다그라하하 스칸다그라하하 운마다그라하하
bhutagrahah  kumbhandagrahah skandagrahah unmadagrahah
(精靈魔들, 甁과 같은 睾丸을 가진 惡鬼들, 스칸다天魔들, 狂亂魔들,)
(정령마들, 병과 같은 고환을 가진 악귀들, 스칸다천마들, 광란마들,)

차야그라하하 아파스마라그라하하 다카다키니그라하하 레봐티그라하하
chayagrahah apasma ragrahah  dakhadakinigrahah revatigrahah
(影鬼들, 癲癎病魔들, 다카와 다키니들, 레바티 女魔들,)
(영귀들, 전간병마들, 다카와 다키니들, 레바티 여마들,)

자미카그라하하 샤쿠니그라하하 마트리난다카그라하하 아람바카그라하하간타파니그라하하
jamikagrahah  sakunigrahah  matrnandakagrahah arambhakagrahah ghantapa nigrahah
(쟈미카 魔들, 샤쿠니 魔들, 母喜鬼魅들, 아람바카 鬼들, 간타파니 鬼들,)
(쟈미카 마들, 샤쿠니 마들, 모희귀매들, 아람바카 귀들, 간타파니 귀들,)

즈봐라에카니카 드뷔티야카 트리티야카 차투르타카 니티야즈봐라뷔스마라
jvaraeka hnika dvitiyaka tritiyaka caturtaka  nityajvaravismara
(一日의 熱, 二日째의 熱, 三日째의 熱, 四日째의 熱, 계속되는 意識不明의 熱,)
(일일의 열, 이일째의 열, 삼일째의 열, 사일째의 열, 계속되는 의식부명의 열,)

봐티카 파이티카 슐라이슈미카 삼니파티카
vatika  paittika slais mika  samnipatika
(風質에 의한 병, 膽汁質에 의한 병, 痰의 병, 體液의 不調로 인한 질병,)
(풍질에 의한 병, 담즙질에 의한 병, 담의 병, 체액의 불조로 인한 질병,)

사르봐즈봘라 시로루자 아르다봐베다카 악쉬로가하
sarvajvala siroruja  ardha vabhedaka  aksirogah
(一切의 熱病, 두통, 편두통, 眼疾,)
(일체의 열병, 두통, 편두통, 안질,)

무카로가하 칸타로가하 갈라로가하 카르나슐람
mukharogah  kan t harogah  galarogah  karn as u lam
(입병, 목병, 인후병, 귓병,)
(입병, 목병, 인후병, 귓병,)

단타슐람 흐리다야슐람 마르마슐람 파르슈봐슐람
dantas u lam hr dayas u lam marmas u lam pa rs vas u lam
(치통, 心痛, 관절통, 脅痛,)
(치통, 심통, 관절통, 협통,)

프리슈타슐람 우다라슐람 카티슐람 봐스티슐람
prsthasulam udarasulam katisulam vastisulam
(脊痛, 복통, 요통, 방광통,)
(척통, 복통, 요통, 방광통,)

우루슐람 장가슐람 하스타슐람 파다슐람 사르봐앙가프라티앙가슐람
urusulam janghasulam hastasulam padasulam sarvaangapratia gasulam
(大腿痛, 脚痛, 手痛, 足痛, 一切의 肢體痛,)
(대퇴통, 각통, 수통, 족통, 일체의 지체통,)

부타 붸탈라 다키니즈봘라
bhuta vetala dakinijvala 
(鬼神과 베탈라鬼, 다키니에 의한 熱痛,)
(귀신과 베탈라귀, 다키니에 의한 열통,)

다드루 간다 키티발루타 뷔사르팔로하 링가하 슈샤트라사나 카라 뷔사요가
dadru ganda kitibhaluta visarpaloha lin gah susatrasana kara visayoga
(瘡鼠瘡小痘疹 거미의 毒으로 인해 增加하는 赤斑과 강한 공포,)
(창서창소두진 거미의 독으로 인해 증가하는 적반과 강한 공포,)

아그니우다카
agniudaka
(火神과 水神,)
(화신과 수신,)

마라뷔라 칸다라 아칼라므루티유트리얌부카
maravira kandara akalamr tyutryambuka
(魔神英雄 칸다라, 不測의 죽음벌,)
(마신영웅 칸다라, 부측의 죽음벌,)

트라일라타 브리슈치카하 사르파나쿨라 심하브야그리약샤타레슈
trailata vrscikah sarpanakula simhavyaghri yaksataresu
(말등에(馬 ), 전갈, 사르파나쿨라, 사자, 호랑이, 夜叉등과)
(말등에(마 ), 전갈, 사르파나쿨라, 사자, 호랑이, 야차등과)

마라지봐스 테샴사르붸샴
marajivas tesam sarvesam
(一切의 惡神와 生物에 대하여)
(일체의 악신과 생물에 대하여)

시타타파트라 마하봐즈라우슈니샴 마하프라티앙기람
sita tapatra maha vajrausnisam maha pratiangiram
(白傘蓋 大金剛頂 大反呪詛로서)
(백산개 대금강정 대반주저로서)

야봐트드봐다샤요자나 아브얀타레나 뷔디야반담카로미
yavatdvadasayojana abhyantarena vidya bandham karomi
(내가 十二由旬동안 內面에서 呪文을 결박하겠노라!)
(내가 십이유순동안 내면에서 주문을 결박하겠노라!)

데샤반담카로미 파라뷔디야반담카로미
des a bandham karomi paravidyabandham karomi
(내가 있는 지역을 結界하고, 다른 이의 呪文을 결박하겠노라!)
(내가 있는 지역을 결계하고, 다른 이의 주문을 결박하겠노라!)

타디야타
tadyata
(그리하여 呪는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주는 다음과 같다.)

옴 아날레 뷔샤디 뷔라봐즈라다레 반다 반다네 봐즈라파네 파트 훔 트룸 파트 스봐하
om anale visadi vira vajradhare Bandha bandhane vajrapane phat hum trum  phat svaha
(옴 불이여! 빛나는 것이여! 용감한 金剛杵여! 呪縛! 呪縛이여! 金剛手여! 파트 훔 트룸 파트 스봐하)
(옴 불이여! 빛나는 것이여! 용감한 금강저여! 주박! 주박이여! 금강수여! 파트 훔 트룸 파트 스봐하)


견성 - 말 순서의 미美도 갖춰야 - 돈황본 육조단경 중에서

돈황본 육조단경 중에서 

17. 見性 - 견성

"모든 경서(經書) 및 문자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과 십이부(十二部)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으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다.

만약 내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된다.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알라.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眞如)의 본성(本性)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이르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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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란 거 보면 말 순서를 지 꼴린대로 해서 듣는 이 짜증만 일으킨다.
다른 것들에는 불법(佛法)이 위대하다 오묘하다 심오하다는 것만 부잡이 잔뜩인데
이것에만 직설에 가까운 표현이 있다.

법문 자리 말이라 순서가 조금 뒤로 왔지만
요즘이라면 이것이 첫 순서가 아닐까?

- 내가 없다면 모든 게 없다.
- 모든 경서, 경전이 사람이 있고 있게 되었다.
- 모든 것이 자기 몸과 마음 가운데 있다.
- 깨면 부처요 안깨면 중생이다.

얼마나 쉽고 간단해.
대체 왜 그렇게 말을 알아듣기 어렵게 하는가? 장사여 사기여 가우여?
말은 들었는데 모르면 괜한 수고 아닌가? 소란 피우는 겨?

2023년 6월 16일 금요일

선가구감 (禪家龜鑑)

원문 http://seosan.buddhism.org/

출처 http://kr.buddhism.org/%ec%a1%b0%ec%82%ac%ec%96%b4%eb%a1%9d/?mod=document&uid=69&pageid=1


예전에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행실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보배로 여기는 것은 오직 불경의 거룩한 글뿐이었다.그러나 오늘날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전해 가면서 외는 것이 사대부의 글이요, 빌어지니는 것이 사대부의 시뿐이었다. 그것은 울긋불긋한종이에 쓰고 고운 비단으로 꾸며서 아무리 많아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가장 큰보배로 생각하니, 아! 예와 지금에 불법을 배우는 이들의 보배 삼는 것이 어찌 이 다지도 다른가?

내가 비록 불초하나 옛 글에 뜻을 두어 경 가운데 신령한 글로써 보배를 삼거니와, 그러나 그 글이 오히려 번다하고 장경의 바다가 아득히 광대하여 훗날의 도반들이 가지를 헤쳐 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로움을 면치 못할까 염려하여, 글 가운데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것 수백마디를 간추려서 한 장에 적나니, 가히 글은 간략하나 뜻은 두루 깊다할 만하다. 만일 이 말씀으로써 스승을 삼아 갈고 닦아 묘한이치를 얻으면 자자 구구에 석가 세존이 나타나실 것이니, 부디 힘쓸지어다. 그렇더라도 글자를 여읜 한 글귀와 격 밖의 기묘한 보배를 쓰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거니와, 또한 장차 특별한 기틀을 기다리고자 한다.

嘉靖 甲子(1564) 夏 虛堂 白華道人 序


1. 한 물건

여기에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 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2.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3. 불법의 방편

그러나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여러가지 근기가 있으니 여러가지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다.

4. 굳이 이름하건데

굳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였으나, 이름에 얽매어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법체가 그러하니 한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나게된다

5. 삼처전심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三處傳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禪是佛心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敎是佛語이다.

6. 마음에서 얻으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 버리면 꽃을 듦에 미소로써 답한 것拈花微笑도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밖에 따로 전한敎外別傳 선지가 될 것이다.

7. 한 마디 하노니

내가 한 마디 하노니, 생각을 끊고 반연을 쉬어 하는 일없이 망연히 앉아있으니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8. 한마음법과 견성법

교문에는 오직 한마음 법一心法만을 전하고 선문에는 오직 견성하는 법見性法만을 전하였다.

9. 교와 선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에는 먼저 여러 법을 가려 보이시고, 나중에 공空한 이치를 말씀하셨지만, 조사들의 가르침은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마음의 근원에 드러났다.

10. 활과 활줄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無碍之法이란 바로 일미一味 에 돌아감인데, 이 한 맛의 흔적마저 떨어 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보인 한 마음이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에잣나무 이니라庭前柏樹子話'고 한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다龍藏所未有底 고한 것이다.

11. 먼저 참다운 가르침부터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변치 않는 것과 인연 따르는 두 가지 뜻이 곧 내 마음의 성품과 형상自心之性相이고, 단박 깨치고 점차 닦는 두 가지 문頓悟漸修兩門이 공부의 시작과 끝임을 자세히 가려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교의 뜻을 놓아 버리고放下敎義 오로지 그 마음이 두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써 참구한다면 반드시 얻은 바가 있으리니, 그것이야말로 몸을 뛰어나는 살길이다.

12. 활구

대저 배우는 이들은 활구活句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

13. 고양이 쥐 잡듯

무릇 공안을 참구 함에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짓되,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이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하고,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며,목마른 이가 물 생각하듯 하며, 어린애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어 사무칠 때가 있을 것이다.

14. 참선의 세 가지 요건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大信根이고, 둘째는 큰 분심大憤志이며, 셋째는 큰 의심大疑情이다.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이 소용없는 물건이 되고 말 것이다.

15. 개에게 불성이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도 오직 '어찌하여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狗子無佛性'라고 한 화두를 올 때도 들고 갈 때도 들고, 들어 올 때도 의심하고 나갈 때도 의심하여,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할 길도 끊어져, 아무 재미도맛도 없어지고, 마음꼬투리가 답답할 때, 그때가 바로 그 사람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대목이다.

16. 화두를 듦에 있어서의 병통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도 말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라.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지니, 더 생각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서, 생각하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 할 것이다. 또 평소이런가 저런가 따지고 맞춰보는 것이 식정識情이며, 생사를 따라 굴러 다니는 것이 식정識情이며, 무서워하고 갈팡 질팡하는 것도 또한 식정識情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통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가라앉았다떴다 할뿐이다.

17. 조사관을 뚫어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이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걸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 째 들어갈 것이다.

18. 공부는 거문고 줄 고르듯

공부는 마치 거문고 줄을 고르듯 팽팽하고 느슨한 정도가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성성惺惺하고 역력歷歷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密密綿綿 해야 한다.

19.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

공부가 걸어가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모르게 되면, 이 때 팔만 사천의 마군이가 육근문六根門 앞에 지키고 있다가 마음을 따라 온갖 생각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20. 마의 경계란?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天魔요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음마陰魔요, 혹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도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煩惱魔이다. 그러나 우리 바른 법 가운데에는 본래 그런 일이 없다.

21. 타성일편打成一片

공부가 만약 때려 부수어 한 덩어리를 이룬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때에 악업에 끌리지는 않을 것이다.

22. 대저 참선하는 이는

대저 참선하는 이는 이렇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더러운 몸四大醜身이 순간순간 썩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이를 만나고서도 그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서도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 버리지않았는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수도인 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분주하게 시비나 일삼고 있지 않는가? 화두가 어느 때이든지 또렷또렷 매하지 않았는가 明明不昧?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도 한결같은가?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금생에 꼭부처님의 지혜를 이룰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 여덟 가지 바람이 불어올 때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내 몸을 이 생에 못 건지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릴 것인가?'

23. 말을 배우는 무리들은

말을 배우는 무리들은 말할 때에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지 경계에 당하게 되면 그만 아득하게 된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 자들이다.

24. 칠통을 깨뜨려야

만약 생사를 막아내려면 이 한 생각을 탁 깨뜨려야 비로소 생사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25. 눈 밝은 스승을 찾아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라도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알이 바른가를 점검 해 보아야 決擇正眼 한다.

26. 다만 그대의 눈 바른 것만을 귀하게 여기네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을 귀하게 여길 뿐只貴子眼正이지, 자네의 행실을 보려고 하지 않네不貴汝行履處,라고 하였다.

27. 굽히지도 높이지도 말라

바라건대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28. 먼저 마음을 깨달아야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오직 무명만을 도와줄 뿐이다.

29. 다만 범부의 생각을 없애라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을 없애는 것뿐이지, 달리 성인의 성인의 알음알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30. 버리고 구함이 모두 더럽힘이다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성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삿된 것이다.

31. 번뇌를 끊어야 열반이다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이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 열반大涅槃이다.

32. 한 생각도 생겨남이 없다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비춰 보아, 한 생각이 인연 따라 일어나지만 실상은 생겨남이 없음을 一念緣起無生믿어야 한다.

33. 일어나는 그 곳이 원래 비어 있다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등이 모두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 없는데 무엇을 다시 끊으리요.

34. 환을 여의면 곧 깨달음이다

환상인 줄 알면 곧 여읜 것이라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상을 여의면 곧 깨친것이라 또한 점점 닦아 갈 것도 없다.

35. 생사와 열반이 본래 없는 것

중생이 나는 것 없는 가운데서 망녕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허공에서 눈꽃이 기멸起滅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36. 다시 열반을 따로 얻은 바가 없다

보살이 중생을 건져 열반을 들게 했다 할지라도 실은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는 것이다.

37. 버릇은 한번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치를 단박에 깨칠 수 있으나, 버릇은 한꺼번에 가시어지 지 않는다.

38. 이것이 마도이다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물이 차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다 악마의 길을 이룰 뿐이다.

39. 마음계율을 깨뜨리지 말라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을 지키지 않는다. 함부로 놀아 게을리 지내며, 남을 깔보아 따 지고 시비하는 것을 일삼고 있다.

40. 계를 지켜야

만약 계를 지킴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 한다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41. 애욕을 끊어야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 버려야 한다.

42. 걸림없는 지혜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다 선정禪定에서 나온다.

43. 선정에 들게 되면

마음이 정定에 들면 세간의 나고 꺼지는 모든 현상을 능히 알게 된다.

44.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어떤 경계를 당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나지않음不生이라 하고, 나지않는 것을 무념無念이라 하며 무념의 상태를 해탈解脫이라 한다.

45. 본래 그대로 열반이다

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修道證滅도 또한 진리가 아니다. 심법이 본래 고요한 것心法本寂임을 알아야 그것이 참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부터 그대로 열반이다常自寂滅相'라고 하신 것이다.

46. 보시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힘 닿는대로 나누어 주라. 한 몸처럼 가엾이 여기면 同體大悲 이것이 참 보시布施니라.

47. 성내지 말라

누가 와서 나를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번 성내는 데에 백만 가지 장애 의 문이 열린다.

48. 인욕

만약 참는 일이 없다면 만가지 행실이 이루어지지 못하느니라.

49.마음을 지키는 일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정진이다.

50. 진언을 외우는 것은

진언을 외우는 것은 금생에 지은 업은 비교적 다스리기 쉬워서 자기 힘으로도 고칠 수가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은 지워 버리기가 어려우므로 반드시 신비한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51. 예배

예배란 공경이요 조복받음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52. 염불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誦佛이요, 마음으로 하면 염불이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도움도 없다.

53. 경을 듣는 일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친 인연도 있게 되고, 따라 기뻐한 복도 있게된다. 물거품 같은 이 몸은 다할 날이 있으나, 참다운 행은 헛되지 않는다.

54. 간경

경을 보되 자기 마음속을 돌이켜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55. 입만 배우지 말라

배워 도를 이루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갓 말재주만 부려 서로 이기려고 한다면 마치 측간에 단청하는 것과 같다.

56. 외전

세속을 떠난 이가 세속 글을 익히는 것은 마치 칼로 흙을 베는 것과 같아서 흙은 아무 소용도 없는데 칼만 망가지게 된다.

57. 출가하는 뜻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의 편안함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 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 혜를 이으려 는 것이며, 삼계三界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58. 덧없는 불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태운다無常之火가 燒諸世間'하셨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방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 하셨으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 하셨다. 그러므로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해야 한다.


59.명리를 버리라

세상의 뜬 이름을 탐하는 것은 쓸데없이 몸만 괴롭게 하는 것이요, 세상의 잇속을 따라 허덕이는 것은 업의 불에 섶을 더 보태는 것이다.

60. 명리승

이름과 재물을 따르는 납자는 초의草衣를 걸친 야인만도 못하다.

61. 가사입은 도둑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도둑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나쁜 업을 짓고 있느냐'고 하셨다.

62. 한 덩이의 밥

아! 불자여. 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들의 피요, 직녀들의 땀이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찌 소화해 낼 수 있단 말인가!

63. 시주받은 과보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 인 줄 아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주는 것을 함부로 받아먹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이 무슨 심사인가? 도대체 눈앞의 쾌락의 바로 후생이 괴로움인 줄을 생각지 않는구나.

64. 차라리 쇳물을 마시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차라리 뜨거운 철판을 몸에 두를 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옷을 입지 말며, 차라리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있는 이가 주는 음식을 먹지 말고, 차라리 끊는 가마솥에 뛰어들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집에 거처하지 말라' 한 것이다.

65. 시주를 받을 때 화살받듯 하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에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하라'고 한 것이다.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66. 칼 가는 숫돌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한 개의 숫돌과 같아서 장 서방이 와서 갈고, 이서방이 와서 갈아가면 남의 칼은 잘 들겠지만 나의 돌은 점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도리어 남이 와서 돌에 칼을 갈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67. 가사 아래 사람의 몸을 잃음

그러므로 옛말에 또한 이르기를 '삼악도의 고통三途苦이 괴로움이 아니라, 가사를 입었다가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 진짜 괴로움이다'라고 하였다.

68. 더러운 가죽주머니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백 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 놓았구나. 또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덩어리라. 냄새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나거나 아까울 것이 없다. 더구나 백년을 잘 기른다 해도 숨 한 번에 은혜를 저버리고 마는 것이랴.

69. 참회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곧 부끄러워 할 줄 알면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다.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70. 하나의 바리때와 한 벌 옷

도인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검박하고 곧은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아 한 개의 표주박과 한 벌의 누더기 옷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것이 없다.

71. 무심도인

범부들은 눈앞의 현실에만 따르고, 수도인은 마음만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과 바깥 현실 두 가지를 다 잊는다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법이다.

72.보살과 마군

성문聲聞은 숲 속에 편히 앉아서도 마왕에 붙잡히고, 보살은 세간에 노닐어도 외도와 마군이 보지 못한다.

73. 임종시에

누구든지 임종할 때에는 다만 오온五蘊이 다 빈 것이어서 네 가지 원소가 나라고 할 것이 없고四大無我, 참마음은 모양이 없어眞心無相 가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다. 날 때에도 성품은 또한 난 바가 없고, 죽을 때에도 성품은 또한 가는 것이 아니다. 지극 히 맑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이 단박 깨친다면 삼세 인과에 이끌리거나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세상을 뛰어난 자유인이다. 만약 부처님을 만나더라도 따라 갈 마음이 없고, 지옥에 가더라도 두려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되면 법계와 같이 될것이니 이것이 바로 요긴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좋은 씨를 심고 임종 할 때에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곳에 주의하여야 한다.

74. 마지막 순간에 분별을 두지 말라

사람이 임종할 때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이다 범부다 하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되면 나귀나 말의 뱃속에 끌려들 거나 지옥의 끊는 가마 속에 처박히게 되며, 혹은 개미나 모기같은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75. 학인의 병통

참선하는 사람이 본래 면목을 만약 밝히지 못한다면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때때로 어떤 이는 아주 끊어 없어진 빈 것으로써 참선을 삼기도 하고, 아무 것도 기억이 없는 빈것으로써 도를 삼기도 하며, 일체 모두 없는 것으로써 높은 소견을 삼기도 하나니, 이것은 컴컴하게 비기만 한 것이라 병든 바가 깊다. 지금 천하에 참선을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이런 병에 걸려 있다.

76. 종사의 병통

종사宗師도 또한 병病이 많다. 병病이 귀와 눈에 있는 자는 눈을 부릅뜨고, 귀를 기울이며,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선禪을 삼고, 병病이 입과 혀에 있는 자는 횡설수설되지 않은 말과 함부로 '할' 喝하는 것으로써 선禪을 삼는다. 병病이 손발에 있는 자는 나아 갔다 물러갔다 이쪽저쪽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선禪을 삼으며, 병病이 마음 가운데 있는 자는 진리를 찾아내고 오묘한 것으로써 선禪을 삼는다. 사실대로 말하면 어느 것이고 병病 아닌 것이 없다.

77. 장승의 노래

본분 종사本分宗師가 이 구句를 온전히 들어 보임은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紅爐點雪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石火電光하여, 배우는 자가 참으로 생각하고 의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하기를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는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78. 마조의 일갈

대저 배우는 사람은 먼저 종파 宗途의 갈래부터 자세히 가리어 알아야 한다. 옛날에 마조스님이 한 번 '할'하는데, 백장스님은 귀가 먹고, 황벽스님은 혀가 빠졌다. 이 한 '할' 이야말로 곧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소식이며, 또한 달마대사의 처음 오신 면목이다. 아! 이것이 임제종의 근원이 된 것이다.

79. 선종의 다섯 갈래

무릇 조사의 종파에 다섯갈래가 있다. 즉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曺洞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仰宗, 법안종法眼宗 등이다.

80. 임제종

임제종은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33대 되는 육조 혜능대사 六祖慧能大師의 밑에서 곧게 전하여 내려가기를 남악회양南嶽懷讓, 마조도일馬祖道一,백장회해百丈懷海, 황벽희운黃檗希運, 임제의현臨濟義玄, 흥화존장興化存奬, 남원도옹南院道○, 풍혈연소風穴延沼,수산성념首山省念, 분양선소汾陽善昭, 자명초원慈明楚圓, 양기방회楊岐方會,백운수단白雲守端,오조법연五祖法演,원오극근圓悟克勤,경산종고선사俓山宗○禪師등이다.

81. 조동종

조동종曺洞宗은 육조의 아래에서 곁 갈래의 청원행사靑原行思, 석두희천石頭希遷, 약산유엄藥山惟儼, 운암당성雲巖曇晟, 동산양개洞山良价, 조산탐장曹山耽章, 운거도웅 雲居道膺선사 등이다.

82. 운문종

운문종雲門宗은 마조馬祖의 곁갈래로 천황도오天皇道悟, 용담숭신龍潭崇信, 덕산선감德山宣鑑, 설봉의존雪峰義存, 운문문언雲門文偃, 설두중현雪竇重顯, 천의의회天衣義懷선사 등이다.

83. 위앙종

위앙종은 백장百丈의 곁 갈래로 위산영우○山靈祐, 앙산혜적仰山慧寂, 향엄지한香嚴智閑, 남탑광용南塔光湧, 파초혜청芭蕉慧淸, 곽산경통○山景通, 무착문희無着文喜선사 등이다.

84. 법안종

법안종法眼宗은 설봉雪峰의 곁갈래로 현사사비玄沙師備, 지장계침地藏桂琛, 법안문익法眼文益, 천태덕소天台德韶, 영명연수永明延壽, 용제소수龍濟紹修, 남대수안南臺守安 선사 등이다.

85. 임제종의 가풍

임제 가풍은 맨손에 한 자루의 칼을 들고 부처도 조사도 죽이고, 예와 지금을 삼현삼요三玄三要로써 판단하며, 용과 뱀을 주인과 손님의 위치로서 알아낸다. 금강이 보검으로 도깨비를 쓸어 내고 사자의 갖은 위엄을 떨쳐 여우와 이리의 넋을 찢는다. 임제의 종지 를 알겠는가? 푸른 하늘에 벼락치고 평지에 물결 인다.

86. 조동종의 가풍

조동 가풍은 방편으로 다섯 자리를 열어 세 가지 근기를 잘 다루며 보검을 빼어들고 나쁜 소견이 자라는 빽빽한 숲을 베어 내며 널리 통하는 길을 묘하게 맞추어서 천만가지 모든 생각을 끊고 천착하여 가도다. 위음왕불威音王佛 나시기 전의 눈에 의젓한 풍광이요,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부터 있던 풍경이다. 조동종을 알겠는가? 부처님과 조사도 안 나시고 아무 것도 없는 그대로, 바른 것, 치우친 것, 있다 없다 하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威音王佛; 이 세계전에 맨 처음 부처가 되신 분이라 함

87. 운문종의 가풍

운문 가풍은 칼날 위에 길이 있고, 철벽에 문이 없다. 온 천하의 갈등을 흔들어 엎고 범부의 식견을 베어 버린다. 번개처럼 빠른 생각으로도 미칠 수 없는데, 활활 타는 불꽃 속에 어찌 발붙일 수 있으랴. 운문종을 알겠는가? 주장자가 날아 하늘 높이 오르고 잔 속에서 모든 부처님이 설법을 한다. 

88. 위앙종의 가풍

위앙 가풍은 스승과 제자가 부르면 화답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 살고 있네. 옆구리에 글자가 씌어있고, 머리 위에 뿔이 높이 솟았구나. 방안에서 사람들을 시험하니 사자가 허리가 꺽인다. 네 가지 시비를 여의고, 백 가지 아닌 것도 모두 끊어 버려 한 망치로 쳐 부수었네. 입은 둘이 있으나 혀는 하나도 없는 것이 아홉 구비 굽은 구슬을 꿰뚫었도다. 위앙종을 알겠는가? 부러진 비석은 옛 길에 비켜 있고 무쇠 소는 작은 집에 잠을 잔다.

89. 법안종의 가풍

법안 가풍은 말 속에 메아리가 울려퍼지고, 글 속에 칼날이 숨었구나. 해골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콧구멍은 어느 때나 그 가풍을 풀무질 한다. 바람 부는 나뭇가지와 달 비치는 물가에 실상을 드러내고 푸른 대와 누른 국화 묘한 법을 환히 드러낸다. 법안종을 알겠는가? 바람은 구름을 몰아 산마루로 날리고, 밝은 달은 물과 함께 다리지나 흘러오네.

90.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망이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망이가 다 나고 죽음이 없는 진리에 사무쳐 들어가 도리를 철저하게 증득하여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꿰뚫었다. 큰 기틀과 큰 작용이 자유자재하여 어디나 전신으로 출몰하며 전신으로 짐을 져, 물러나 문수와 보현의 대인 경계를 지킨다 하더라도 실상대로 말한다면 이 두 분도 또한 도깨비가 됨을 면 치 못할 것이다.

91. 부처와 조사보기를 원수같이 한다

대장부는 부처님이나 조사 보기를 마치 원수와 같이하여야 한다. 만약 부처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부처에게 얽매인 것이요, 만약 조사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조사에게 얽매이는 것이 된다. 무엇이든 구하는 것이 있다면 다. 고통이 되므로 아무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92. 거룩한 빛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여라.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수심결 修心訣

원문출처 : http://kr.buddhism.org/%ec%a1%b0%ec%82%ac%ec%96%b4%eb%a1%9d/?mod=document&uid=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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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지눌스님 수심결 修心訣


1. 밖에서 찾지 말라

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것 보다 더한 것이 없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데서 찾으려고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마음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애닯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 모르고 있다.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멀리 성인들에게 미루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밖에 법이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항상 앉아 눕지 않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대장경을 줄줄 외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아무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의 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하시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한 변화가 다 여래의 밝은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이 마음을 닦은 분들이며 미래에 배울 사람들도 또한 이 법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찾지 말라. 마음의 바탕은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만 떠나면 곧 당당한 부처다.

2. 불성은 어디에

[질문] 만약 불성(佛性)이 지금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몸 안에 있으면서도 범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어째서 나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해설하여 깨닫게 하소서.

[대답] 그대의 몸 안에 있는데도 그대 자신이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또 이 육신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 인연이 모여 된 것이므로 그 바탕이 둔해서 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깨닫고 알겠는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불성이다.

그러므로 임제(臨濟)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수·화·풍 사대(四大)는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런데, 다만 그대 눈앞에 뚜렷이 홀로 밝으면서 형용할 수 없는 그것만이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 줄을 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이며, 그대 본래의 마음이다.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그것을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는가. 그대가 믿지 못하겠다면 옛 성인들이 도에 들어간 두어 가지를 들어 의심을 풀어 줄 테니 잘 듣고 믿어라.

옛날에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존자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견성(見性)한 이가 부처입니다."

"스님께서는 견성을 했습니까?"

"나는 견성을 했습니다."

"그 성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무슨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 버젓이 작용하고 있는데도 왕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내게 있단 말입니까?"

"왕이 작용한다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체(體)도 보기 어려울 뿐입니다."

"그럼 작용할 때는 몇 군데로 나타납니까?"

"그것은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왕이 그 여덟 군데를 말해 달라고 하자 존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하고, 손에 있으면 쥐고, 발에 있으면 걸어다닙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누리를 다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精魂)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이 열리었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歸宗和尙)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화상은 말했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지만 그대는 믿지 않을 것이다."

"큰스님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닦아가야(保林)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가려 있으면 허공의 꽃(空華)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단박 깨달았다.

옛 성인의 도에 들어간 인연은 이와 같이 명백하고 간단하다.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법문으로 말미암아 알아차린 바가 있다면, 그는 옛 성인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갈 것이다.

3. 신통변화

[질문] 앞에서 말씀하신 견성이 진정한 견성이라면 그는 바로 성인입니다. 그는 마땅히 신통 변화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수도인들은 어째서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대답] 그대는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말라. 삿되고 바른 것을 가릴 줄 모르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곧잘 진리를 말하면서 마음은 게을러 빠져 도리어 분수 밖의 잘못을 범하고 있으니, 다 그대가 의심하는 데에 떨어진 것이다. 도를 배우면서 앞뒤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면서 근본과 지말을 가리지 못하면, 그것은 삿된 소견이지 진실한 공부라고 할 수 없다. 자기 자신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남까지 그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데는 그 문이 많으니 요약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頓修)가 가장 으뜸가는 근기의 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을 두고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 차츰 익혀 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일시에 단박 마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도 이것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근기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의지할 길이다.

예전부터 모든 성인들은 먼저 깨달은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에 의해 증득했다. 그러니 이른바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해 닦아서 차츰 익혀야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을 때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이치는 단박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을 따라 번뇌를 녹일 수 있지만, 현상은 단번에 제거될 수 없으므로 차례를 따라 없애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봉(圭峰)스님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뜻을 상세히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얼어붙은 못이 모두 물인 줄은 알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을 깨달았지만 법력으로써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흘러야 대고 씻을 수 있고, 망상이 다해야만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 광명의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통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익혀감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통이란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요망하고 괴이한 짓이며, 성인에게 있어서도 하찮은 일이다.

혹시 나타낼지라도 요긴하게 쓸 것이 못되는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을 때 한량없는 묘용(妙用)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고 하니, 이와 같은 생각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근본과 지말을 알지 못한 탓이다. 앞과 뒤, 근본과 지말을 모르고 불도를 구한다면, 모가 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절벽을 대하 듯 미리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나 부처의 씨앗을 말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깨달음도 믿지 않으며 신통이 없는 이를 보고 업신여긴다. 이는 성현을 속이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4. 돈오점수(頓悟漸修)

[질문]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이 의지할 길이라고 말씀하였는데, 깨달음이 단박 깨달음(頓悟)라면 왜 차츰 닦을(漸修) 필요가 있으며, 닦음이 차츰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닥박 깨달음이라 합니까?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씁하여 의심을 풀어주소서.

[대답] 범부가 어리석어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성(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 부처인 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바른 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본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 없는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끝없이 익혀온 버릇(濕氣)은 갑자기 없애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母胎)기르기를 오래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니, 이를 점수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갓 태어났을 때 모든 감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질문]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대답]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이 따로 있겠는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해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볼 필요가 무엇인가. 없어지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신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애써 알려고 하면 곧 알 수 없으니 다만 아는 대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다. 자기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하러 또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려고 한다면 얻을 수 없음을 알 것이니, 알지 못한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見成)이다.

5. 공적영지(空寂靈知)

[질문] 상상(上上)의 뛰어난 사람은 들으면 쉽게 알지만 중하(中下)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말씀하여 이들도 알아듣게 해 주소서.

[대답] 도는 알고 모르는데 있지 않다. 그대가 어리석어 깨닫기를 기다리니 그 마음을 버리고 내 말을 들어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은 본래 고요하고 티끌 세상은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신령스러운 앎(靈知)이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공적(空寂)하고 영지한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이며, 또한 삼세의 부처님과 역대 조사아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한 법인(法印)이다. 이 마음만 깨달으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를 올라 걸음마다 삼계를 뛰어넘고 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리(自利) 이타(利他)를 갖추고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그대가 이와 같다면 진짜 대장부이니 평생에 할 일을 마친 것이다.

[질문] 제 분수에 따르면 어떤 것이 공적 영지의 마음입니까? [대답] 그대가 지금 내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의 마음인데, 어째서 돌이켜보지 않고 밖으로만 찾는가. 내 이제 그대에 분수에 따라 본심을 가리켜 깨닫게 할테니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잘 들어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듣고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만약 이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사람이 일단 죽게 되면 몸은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귀는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혀는 말하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며,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를 못하는가. 그러므로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는 그 성질이 공하여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분명히 알며 어둡지 않고 한량없는 묘용(妙用)을 느끼는 대로 통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긷고 나무를 나름이로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치에 들어가는 데는 길이 많으나 그대에게 한 문을 가리켜 근원에 들어가게 하리라.

"그대는 지금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 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는지.

"이 속에 이르러서는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관음보살께서 진리에 드신 문이다.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말하기를 이 속에 이르러서는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얻을 수 없다면 그 때는 허공이 아니겠는가?"

"본래 공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실체인가?"

"모양이 없으므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

이미 모양이 없는데 어디에 크고 작음이 있겠으며, 크고 작음이 없는데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안팎이 없고, 안팎이 없으므로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멀고 가까움이 없으므로 피차(彼此)가 없다. 피차가 없으므로 가고 옴이 없으며, 가고 옴이 없으므로 생사가 없고. 생사가 없으므로 옛날과 지금이 없으며, 옛날과 지금이 없으므로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없으므로 범부와 성인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으므로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더럽고 깨끗함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도 없고, 옳고 그름이 없으므로 모든 이름과 말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없어지니 모든 감관과 대상과 망념, 나아가서는 갖가지 모양 과 온갖 이름과 말이 다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본래부터 공적하고 본래부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영지(靈知)가 어둡지 않아 무정(無情)한 것과 같지 않고 성품이 스스로 신기롭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하는 청정한 마음의 실체이다. 이 청정하고 공적한 마음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의 본원각성(本源覺性)이다. 이 것을 깨달아 지키는 이는 한결 같은(一如)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해탈할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 등지는 자는 육도(六道)에 나아가 한량없이 헤맬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한 마음이 어리석어 육도로 나아가는 자는 가는 사람이고 움직이는 사람이며, 법계(法界)를 깨달아 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이는 오는 사람이고 고요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다. 그래서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이 공적한 마음은 성인이라고 해서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고 해서 덜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성인의 지혜에 있어서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있어도 어둡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성인이라 해서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 해서 덜하지도 않는다면, 부처님과 조사가 보통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보통사람과 다른 점은 스스로 그 마음을 살피는데 있다. 그대가 이 말을 믿고 의문이 단박 풀리며 대장부의 뜻을 내어 진정한 견해를 일으켜서 몸소 그 맛을 보고 스스로 긍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 닦는 사람의 알아 깨닫는 곳이고, 따로 계급과 차례가 없기 때문에 돈(頓)이라고 한다. 이것은 '믿음의 인(因) 중에서 부처의 과덕(果德)에 계합하여 털끝만치도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믿음을 이룬다'고 한 말과 같다.

6. 소먹이는 행

[질문] 이 이치를 깨달으면 다시 계급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무엇 때문에 깨달은 뒤에 다시 닦으면서 차츰 익히고 차츰 이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답] 깨달은 뒤에 차츰 닦는 이유는 앞에서 이미 누누이 설명하였는데 아직도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거듭 설명하겠다.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들어라. 범부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도를 유전하면서 나고 죽음에 '나'라는 관념에 굳게 집착하여 망상과 뒤바뀜과 무명의 종자와 익힌 버릇이 오랫동안 한데 어울려 그 성품을 이루었다. 금생에 이르러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문득 깨닫더라도, 그 오랜 버릇을 갑자기 끊어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역경과 순경을 당하면 성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르다는 생각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고, 바깥 대상에 대한 번뇌가 이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지혜로써 공부를 더하고 힘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박 깨치면 부처와 같으나 여러 생에 익힌 버릇이 깊어서, 바람은 멎었지만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드러났지만 망상이 그대로 침노한다'고 한 말과 같다.

또 종고선사도 말씀하기를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일을 깨치고는 아주 쉽다는 생각을 내어 더 닦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헤매면서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한번 깨쳤다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려 두어서야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피어 망상이 문득 일어날지라도 아예 따르지 말고, 덜고 또 덜어 무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구경(究竟)이 된다. 천하 선지식이 깨친 뒤에 소 먹이는 행(牧牛行)을 닦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뒤에 닦는다고 하지만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공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으려 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으려 해도 닦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닦고 참으로 끊는 것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온갖 행(萬行)을 두루 닦더라도 오로지 무념(無念)으로 근본을 삼으라' 하였고 규봉(圭峰) 스님께서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이치를 통틀어 이렇게 결론지었다. '

이 성품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지혜가 본래 갖추어져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고 여기에 의지해 닦는 것을 최상승선(最上勝禪)이라 하고, 또 여래의 청정한 선이라 한다. 만약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 저절로 차츰 백천삼매(百千三昧) 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전해 오는 것이 바로 이 선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이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선악의 성품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억제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미혹(迷惑)이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성문(聲聞)들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둑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등이 성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피면 일어나도 일어남이 없어서 그 자리가 곧 고요함(寂)이니 어찌 다시 끊을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깨달음이 더딜까를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으라. 깨달으면 곧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외부의 번뇌가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제호(醍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음식. 불성에 비유한 말)가 될 것이다. 미혹이란 그 근본이 없음을 살피면 허공의 꽃인 삼계(三界)는 바람이 연기를 거둠과 같고, 허깨비인 육진(六塵)은 끓는 물에 얼음 녹듯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서 살피고 돌아보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면, 사랑과 미움이 저절로 사라지고 자비와 지혜가 밝아질 것이다. 죄업은 자연히 소멸되고 공덕이 늘어나 번뇌가 다할 때 생사도 곧 끊어질 것이다. 미세한 번뇌의 흐름조차 아주 끊어지고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뚜렷이 홀로 드러나면, 천백억 화신(化身)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해 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달이 허공에 떠오르면 그 그림자가 물 위에 두루 비치는 것과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 있는 중생을 건지면서 근심없이 즐거울 것이다. 이를 가리켜 크게 깨달은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7.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라

[질문] 깨달은 뒤에 닦는 법문 가운데 선정(定)과 지혜(慧)를 고루 가진다는 이치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설명하여 의혹을 풀고 해탈의 문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대답] 법과 이치를 말한다면, 이치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이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그 요점을 들면 자성의 본체와 작용 두 가지 뜻인데, 앞에서 말한 공적 영지가 바로 그것이다. 선정은 본체고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의 작용이기 때문에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고, 작용의 본체이기 때문에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선정이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 자성(自性)의 선정이고,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성의 지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런 도리를 깨달아 고요함(寂)과 앎(知)에 자재하여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니게 되면, 돈문(頓門)에 들어간 이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이 된다.

그러나 먼저 적적(寂寂)으로써 흩어지려는 생각을 다스리고 그 다음 성성으로써 흐리멍텅함을 다스린다 하여, 앞과 뒤에 대치하여 혼침(昏)과 산란(亂)을 고루 다스려 고요함에 들어가는 이는 점문(漸門)에 속하는 낮은 근기의 소행이다. 그는 성성과 적적을 고루 가진다고 하지만, 적적만을 취한 수행이 될 뿐이다. 어찌 할일을 마친 사람의 본래 고요함(本寂)과 본래 앎(本知)을 떠나지 않고 자유자재로 겸해 닦는 것이 되겠는가.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앞 뒤를 따진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통달한 사람의 경지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진다는 뜻은, 힘씀과 작용(功用)에 떨어지지 않고 원래 저절로 무위(無爲)여서 따로 특별한 때가 없는 것이다.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도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도 그러하며, 대소변을 볼 때도 그러하고, 남과 만나 이야기할 때도 그러하다.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잠잠하거나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항상 그러하여, 마치 빈배가 물결을 타고 높았다 낮았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기슭을 돌 때 굽었다 곧았다 하는 것과 같아서 마음마다 분별이 없다. 오늘도 유유자적(悠悠自適) 내일도 유유자적하면서, 온갖 인연을 따라도 아무 장애가 없고 악을 끊거나 선을 닦지도 않으며, 순진하고 거짓이 없어 보고 들음이 예사로워 한 티끌도 맞서는 것이 없다. 번뇌를 떨어버리려는 노력도 필요 없고, 한 생각도 망령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힘을 빌릴 것도 없다. 그러나 업장은 두텁고 익힌 버릇은 무거우며, 관행(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뜨며, 무명의 힘은 세고 지혜의 힘은 약해서, 선악의 경계에서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담담하지 못한 이는 얽힌 인연을 잊고 번뇌를 떨어버리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옛 사람은 이와 같이 말씀하였다.

'여섯 감관(六根)이 대상을 거두어 마음이 인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定)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이 함께 공함을 비추어보아 미혹이 없는 것을 지혜(慧)라 한다.'

이것이 상(相)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행할 바이지만 대치하는 문에서는 어쩔 수 없다. 만약 들뜸이 심하면 먼저 선정의 문으로써 산란을 거두어 마음이 인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계합하도록 하며, 혼침(昏沈)이 많으면 지혜의 문으로써 공(空)을 관하여 비추어보아 미혹을 없애고 본래의 앎에 계합하도록 한다.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써 무기(無記, 선도 악도 아닌 것)를 다스려, 움직이고 고요한 자취가 없어지고 대치하는 공부를 마치면, 어떤 대상을 대하더라도 생각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인연을 만나도 마음마다 도에 계합하여 걸림 없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비로소 일없는 사람(無事人)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불성을 분명하게 본 이라 할 것이다.

8. 깨치기 전은 참 수행이 아니다.

[질문] 스님의 판단에 따르면, 깨달은 뒤 닦는 문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는 뜻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성(自性)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자성의 문에서는 '걸림 없는 고요와 앎이 원래 무위(無爲)여서 한 티끌도 상대될 것이 없으므로 번뇌를 떨어버리려는 수고가 없고, 한 생각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하고 판단하기를 '그것은 돈문(頓門)에 들어간 이가 자성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따른 문에서는 '이치에 맞추어 산란을 거두고 법을 선택하고 공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간다'하고 판단하기를 '이것은 점문(漸門)의 낮은 근기가 행할 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하여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수행할 경우, 먼저 자성의 문에 의해 선정과 지혜를 겸수한 후에 다시 상을 따르는 문의 다스리는 공부를 하는지, 아니면 먼저 상을 따르는 문에 의해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다음에 자성의 문에 들어가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자성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걸림 없이 고요하고 알기 때문에 다시 더 다스릴 공부가 없는데 무엇 하러 또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흰 옥에 문채를 새겨 덕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먼저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로 다스리는 공부를 이룬 다음에 자성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점문의 낮은 근기가 깨치기 전에 점차로 익히는 것이니, 어찌 돈문자가 먼저 깨치고 나서 닦는 데에 노력이 없는 노력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동시여서 전후가 없다면 두 문의 선정과 지혜가 돈. 점이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같이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돈문자는 자성의 문에 의지해 걸림 없이 더 공부할 필요도 없고, 점문의 낮은 근기는 상을 따르는 문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공부에 힘쓸 것입니다. 두 문의 근기가 돈점이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먼저 깨치고 나서 닦는 문 가운데서 어떻게 두 가지를 함께 해석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하여 의문을 풀어 주소서.

[대답] 내 해석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문을 갖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의혹이 더욱 생기고, 뜻을 얻어 말을 잊으면 따질 필요가 없다. 그 두 문에 대해 각기 수행할 것을 판단한다면, 자성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 돈문에서 노력함이 없는 노력으로 두 가지 고요함을 함께 활용하고 자성을 스스로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 깨치기 전 점문의 낮은 근기가 다스리는 공부이고,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는 수행자이다. 이 두 문의 수행은 돈과 점이 각기 다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깨친 다음에 닦는 문에서 겸하여 상을 따르는 문의 대치를 말한 것은, 전혀 점문의 근기가 행할 바를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길을 빌리고 숙박을 의탁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돈문에도 근기가 뛰어난 이가 있고 낮은 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예로써 그 가는 길을 똑같이 판단할 수는 없다. 번뇌가 사라지고 심신이 홀가분해서, 선에서도 선을 떠나고 악에서도 악을 떠나 여덟 가지 바람(八風)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 가지 느낌(三受, 괴로움.즐거움.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자성의 선정과 지혜에 의해 걸림 없이 겸해 닦으며 천진하여 조작이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禪)이므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할 것이니, 어찌 상을 따르는 문의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할 필요도 없다.

먼저 단박 깨쳤다 할지라도 번뇌가 심히 진하고 익힌 버릇이 굳고 무거워 대상과 마주칠 때마다 생각 생각 감정을 일으키고, 인연을 만나면 마음마다 대상을 만든다. 혼침과 산란에 부추김을 당해 고요함과 앎이 한결같지 않은 어두운 이는,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빌어 대치하기를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대치하는 공부에 의해 잠시 익힌 버릇을 억제하더라도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점문의 낮은 근기의 오염된 수행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은 비록 공부를 잊지 않아 생각 생각 익히고 닦더라도 곳곳에 의문을 일으켜 거리끼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 속에 걸린 것 같아서 불안한 자취가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대치하는 공부가 성숙하게 되면 심신이 홀가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홀가분해질지라도 의혹의 뿌리를 끊지 못한 것이 돌로 풀을 누른 것 같아서 생사의 경계에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닫기 전의 수행은 진정한 수행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깨친 사람의 경지로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이 있더라도 생각마다 의혹이 없어 더럽히거나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면 저절로 천진한 묘성(妙性)에 계합하여 걸림 없이 고요하고 분명해서, 생각마다 온갖 대상에 관계하면서도 마음마다 모든 번뇌를 아주 끊되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고, 앞에서 이야기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아무런 차별도 없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가 비록 점기(漸機)의 행할 바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 본다면 쇠로써 금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도리를 안다면 어찌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앞뒤의 순서가 있다고 두 가지로 보는 의문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수도인은 이 일을 잘 되새겨 다시는 더 의혹을 일으켜 스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하라.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위없는 보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다시 또 어떻게 하겠는가. 부디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참뜻을 알아 낱낱이 자신에게 돌리어 근본에 계합하면, 스승 없는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고 천진한 이치가 어둡지 않고 분명해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것에 의해 깨친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오묘한 뜻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기는 하지만, 일찍이 지혜의 씨를 뿌린 대승 근기가 아니면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방하면서 무간지옥의 업을 짓는 이가 많다. 그러나 믿고 받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번 귀를 스쳐 잠시 인연을 맺어 놓으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듣기만 하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될 종자의 인연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우며 이루어서 지키고 잊어버리지 않는 이의 공덕이야 어찌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9. 이 몸 이 때 못 건지면 지난 세월 윤회의 업을 돌이켜보면 몇천 겁을 두고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갖가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 겁을 생사에 빠져 깨닫지 못한 채 갖은 악업을 지은 것이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때때로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방종하여 그전 같은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도 닦는 길을 잃지 않게 하였는고. 실로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남이고, 겨자씨가 바늘 끝에 꽂힌 격이다.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스스로 물러설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지옥에라도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을 때, 한마디 불법을 들어 믿고 받들어 괴로움을 벗고자 한들 어찌 될수 있겠는가. 막상 위태로운 데에 이르러서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바라건대 수도인들은 게으르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에 불을 끄듯 하여 돌이켜 살필 줄을 알아야 한다. 무상(無常)은 신속해서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저녁 노을과 같다. 오늘은 살아 있을지라도 내일은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겨 둘 일이다. 세상의 유위(有爲)의 선을 가지고도 삼악도의 괴로운 윤회를 면하고 천상과 인간에서 뛰어난 과보를 얻어 여러가지 즐거움을 누리는데, 하물며 이 최상승(最上勝)의 심오한 법문이겠는가. 잠시 믿기만 해도 그 공덕은 어떤 비유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전에 말씀하기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사는 중생들에게 칠보로 공양하여 모두 만족하게 하고,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사과(四果, 성자의 네 가지 지위)를 얻게 하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다. 그러나 잠깐동안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여 얻는 공덕보다는 못하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법문은 가장 존귀하여 어떤 공덕으로도 견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道場)이니, 간지스강의 모래처럼 많은 칠보탑을 세우는 것보다 뛰어나다. 보배로 된 탑은 언젠가 무너져 티끌이 되겠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마침내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고 하였다.

원컨대 수도인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하여 간절히 마음에 새겨 두라.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지금 닦지 않으면 만겁(萬劫)에 어긋날 것이고, 힘써 닦으면 어려운 수행도 점점 어렵지 않게 되어 공부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애닯다. 요즘 사람들은 배가 고파 음식을 대하고도 먹을 줄 모르고, 병들어 의사를 만나고서도 약을 먹을 줄 모르니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나. 또 세상 일은 그 모양도 볼 수 있고 그 공도 징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한 가지 일만 얻더라도 희귀하다고 찬탄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 마음 법문은 그 모양을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마(天魔)와 외도(外道)가 비방할래야 문이 없고, 제석·범천 등 모든 천신이 칭찬할래야 미칠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식견이 옅은 범부들이야 어찌 흉내인들 낼 수 있겠는가. 우물 안 개구리가 어떻게 바다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떻게 사자처럼 소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법 세상에서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어 믿고 받아 가지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세월에 모든 성인을 섬기어 온갖 선근(善根)을 심었고, 지혜의 바른 인연을 깊게 맺은 최상의 근기임을 알 수 있다.

『금강경』에 말씀하기를 '이 글귀에 신심을 내는 이는 한량없는 부처님 계신 데서 온갖 선근을 심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대승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해 말한다'고도 하였다. 바라건대 도를 구하는 사람은 미리 겁을 먹지 말고 용맹심을 내야 할 것이니, 지난 세월에 얼마나 착한 인연을 쌓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뛰어난 이 법문을 믿지 않고 열등을 자처하여 어렵다는 생각으로 지금 닦지 않는다면 비록 지난 세상의 선근이 있다 할지라도 이제 그것을 끊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대로 점점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가 쌓인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돌이키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마땅히 삼가하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보배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다가 어찌 오래도록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할 것인가. 보배를 얻고자 한다면 그 가죽 주머니를 놓아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