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만萬가지 보이지 않는 모양의 단어 - 마음.
먼저 정리하면 이렇다.
마음이 이렇다 저렇다의 표현에는 생략된 것이 있다.
마음에 ..... 일어났다.
마음이 편안하다. 마음에 편안함이 일어났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에 아픔이 일어났다.
마음이 답답하다. 마음에 답답함이 일어났다.
마음이 불편하다. 마음에 불편이 일어났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마음에 홀가분함이 일어났다.
그 사람은 맘씨가 좋다. 나의 마음에 그 사람의 맘씨좋음이 일어났다.
마음에 만상이 지나간다.
불교를 한마디로 줄이면 마음이라고 한다. 그때 마음이란 말이 이 마음이다.
이런 것도 없이 바로 마음 마음 하면 듣는 사람은 각자 해석하게 돼서 혼란스럽다.
답답한 일이다.
이 마음은 의식,생각이라 이름할 때도 있다. 역시 두루뭉스르한 말이다.
사람마다 말을 하는데 쓰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이하는 읽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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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6근根=감각기관 6경境 6식識
눈-빛-봄
귀-소리-들음
코-냄새-맡음
혀-맛-맛
몸-닿음-느낌
뇌-뜻.생각-앎
이것을 앞 5개를 전5식이라 하고
이 5개 각에 대해 일어나는 이어지는 반응을 의意식識 이라고 한다고...
*촉觸
뜨거움,차가움,메마른,축축한,까칠한,따가운 등의 피부와
눌림, 충격, 뒤틀림, 엉킴 등 근육으로 느껴지는 것들.
몸에 눈.귀.코.혀가 있고 촉觸 닿음은
빛.소리.냄새.맛도 다 촉觸이다. 과학적으로도 그렇다.
즉 촉觸과 식識으로 간단히 볼 수 있다.
도道.선仙 의 내경은 전혀 다르게 부정관으로 펼쳐진다.
식識은 기억,생각,분별,판단,감정을 다 아우르는 애매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 의식. 생각 뭐지? 다 혼란스럽게 말한다.
불교도 유식唯識, 유심唯心이란 단어가 나오고.
어찌보면 생각思은 정리되지 않고 반응.작용 정도의 떠돌이처럼 쓴다.
이렇게 작용하는 것을 퉁하여 마음이라 하는데
유식체계는 깊은 3개의 식을 더한다.
7식識은 감정, 마음
8식識은 변화를 알아차림
9식識은 순수의식.청정식.본성
9식이 가장 아래 근본이며 8식은 9식에서 나오고 7식은 8식을 거친다고...
불교의 마음이란 단어는
확장인지 비틀기인지 재정의인지 전제바꾸기인지 인지교정인지
그 마음 말고 근본마음(8.9식)... 불교는 한마디로 마음 등.
쉽게 말해 저 각覺 알아차리는 걸 마음이라고
다시 마음이란 단어를 일반의미와 다르게 사용한다.
(지각과 식별 중에 지각 - 혼용하는 것 같기도...)
이 경계 없이 내부적인 상상만으로도 일어나는 반응이 꿈 같은 것이다.
여기까지 포함하면 근심,걱정,공포...
수만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졸--------
마음 마음 해 대는데
개인적으로는 의학에서 신경계다.
신경계는 바로 아는 것도 있고 인지 모르는 것도 있다.
그런데 선정이나 관찰과 사유를 통해
모르는 영역도 알게 되고
그것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의 관계도 알게 되어
원리를 알게 된다.
선가仙家 쪽이 더 우수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본래 마음은 8식 쯤
무심無心은 9식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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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의학상식으로는 신경 자극에 의한 반응이다.
의학에서 말하는 몸의 체계는 상상 밖으로 복잡하다.
(골격계,혈관계,근육계,소화계,분비계,신경계,호흡계,배설계,생식계,피부계,면역계 아따...)
몸이 있기 전에 이런 반응이 있었나?
몸이 있고 많은 경계에 부딛혀서 그 정보가 쌓이고 알아차림이 있고 하는 것이지...
몸은 생명체계이고 생명은 나고 자라고 발달하고 늙고 아프고 죽는다.
어린시절이라지만 자라는 변화가 빠르고 청소년기부터 더 복잡해진다.
그 안팎으로 일어나는 일들에서 일어나는 반응인 마음이란 것은 말해 뭐하랴.
다만 변한다고 하고
변하니 믿을 것이 못된다라고 해 지나가게 내버려 두라 그게 현명하다고 한다.
몸도 없는 것 같고, 마음도 없는 것 같다.
몸 없이 그 맘이란 것이 생겼나? 반문도 가능하다.
그것을 뇌신경변화를 자료화하고
보인다고 여기는 부분을 몸, (보이지 않고) 느끼는 부분을 마음이라 한다.
생명체계는 생존과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쪽으로 반응한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내부적 경계를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 몸에 기반해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생존에 대한 위협을 없애주고 원만한 몸의 흐름일 때 마음은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운 것
신비한 것은 그저 신비한 것
무료한 것은 그저 무료한 것
무슨 일이 일어나도 위험도 없고 원만할 때는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즉 모르는 몸 이전과 몸 이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허황되다 할 것이다.
물질이 변화하여 재구성 되었다면 윤회인가?
영혼 형태의 맘(의식체계)이란 것이 다시 다른 몸을 갖는다면
무아,공이 윤회와 충돌하기 때문에 많은 말들과 설이 있다.
왜 이런 것을 방편으로 썼을까? 의문이다.
티벳 라마들의 환생이 사실이라고 해도
일반인들로서는 확인이 어렵다.
그의 대상에는 신앙으로 전개된다.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걸 본래마음, 참마음, 참나, 하나, 열반이라 이름 한다.
생각으로 추론할 수도 있고
허공처럼 느껴볼 수도 있다.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몸으로 있는데 몸 이후 일어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그것이다.
그것이 몸을 나투었다.
그것은 몸의 경계에 있기도 하지만, 몸 바깥도 인식하고 다룬다.
그것은 태어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는 ...
이런 설명은 여래장(8식,9식)이라는 걸 활용한다.
그것이 현생의 개체 특성이 어떻게든 저장되는 곳이 있다는 것이고
윤회 한다고 한다. 역시 증명할 길은 없다.
개인이 처하는 환경적 조건 과보라고 한다.
다시 복종적 신앙이나 수행행위에 대한 빌미가 된다.
공空 - 공이 텅빈 허공이 아니라 무자성... 말이... 어렵다.
그네들이 읽거나 들었던 걸 그대로 읊는 것 같다.
색과 그 성질만 이야기하는 것이 되잖아.
즉 모든 것은 연기로 존재할 뿐이다.
역시 공空도 허공과 열반처럼 연기제외?
티벳밀교는 끊김없이 이어져 온 대승불교 정통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가행도(加行道: 方便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티벳불교의 스승들은 능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티벳불교의 형식이 여기에 부합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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