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道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바른길.
유(有)ㆍ공(空)의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진실(眞實)의 도리(道理).
고락(苦樂)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行法).
中庸 - 치우침이나 과부족(過不足)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狀態)나 정도(程度)
道자, 庸(用, 體와用)자 붙었다고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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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단하다는 대학 나와서 몇 십년 연구하여 불려 다니면서 강의했다는 걸 들어보면
불교는 관점놀이고 관점 잘 바꾸어서 요리조리 하는 게 진짜로 묘용이라고 한다.
희론戱論이다.
같은 것을 진실하게 이야기 했더라도 소위 말로 떠드는 강의식은 형식이 틀린거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관념놀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중도中道를 설명할 때, 중간쟁이는 아니라고 하니까...
극단, 변이 없다고 하여 견해를 낸다.
양극단을 배제하니까 중도라고 말을 한다. 그러니까 자꾸 말장난이라고 .. 맞아야 한다.
양극단을 배제한다면 튀어나온 모난 거만 배제하면 중도냔 말이냐에 대해 답해야 한다.
단순 선형적이라면 끝없이 양극단이 되서 배제하다 끝내 없어질 것이고
입체적 다극단이라면 헤메다 끝날 것 같은데...어쨌든 배제하다 보면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어떤 상황의 것이건 모두 없애야 한다는 배꼽 큰 데 가 있게 된다.
이런 변이라면 쉽게 설명이 가능한데 중中은 리離다.
예를 들어, 주,객하면 주,객 하는 그것 유무하면 유무 하는 그것이 중이다.
그래서 주,객을 떠났다하고 유무를 떠났다 하는데
유,무 주,객 하는 그것은 유,무 주,객이 아니다.
또 유,무 주,객 할 때나 하지 않을 때도 한결같다.
식별이 대별이 일어날 때, 식별 대별은 아니지만 식별,대별하는 것.
그래서 자꾸 뭐뭐뭐 하는 그놈이라 말하는 것이다.
다시 극단, 변이 없다. - 전혀 다르지 않나?
이것이 모든 일어나는 일을 관통하고 있다.
중도는 중심.핵심 꿰뚫는다 관통 되어 있다는 말이다.
딱 거기라는 말이다. 딱 이거. 이런 뜻이 중도다.
중심 근처에 가도 딱 중심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변화만 보면 중심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관통되어 있지 않다면 벗어나기 쉽다.
완전하다. 조금만 엇나가도 바로 감지할 수 있는 지점이 된다.
기하적 시각적 중간을 떠나지 못하니까 이 중이 잡히지 않는다.
기하적 시각적인 것은 관념으로만 있을 뿐 없다.
직관되는 실제 모양은 모두 다 모든 곳 모든 때 여서 없어 보이고, 관념적.개념적으로는 없다.
그래서 그 상태를 체크해 보니 어느 모로도 치우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균형이 유지되고 안정된 조화를 찾을 수 있으니까...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그냥 부처가 가리키는
해탈.열반을 바로 찍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식識 어떤 관점이고 그것이 심경에 집集해서 파하는데
온과 식, 식에서도 전5식, 6식 7식 8식은 어떻게 다르고
8식 또는 9식과 열반과는 어떻게 다른지.
상수멸진이라는데 그것은 식인지 아닌지.
해탈(벗어나)하여 열반에 이른다는데 무엇을 해탈하여 어떤 상태에 이른 것인지.
이런 것도 없이 탈해탈이니 해해탈을 이야기하면
개념 단어 많이 아는 지식자랑인가?
일단 해탈을 시켜 놓고 이런 하던가...
강단이건 법석이건 올라서도 이런 가르침을 할 때는
중언부언(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주절거리는) 할 것이 아니다.
많거나 깊은 연구성과를 들이댈 때도 가는 핵심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기존의 틀린 것을 지적할 때도 핵심에 부합되지 않음의 예로서 들어야 한다.
점검은 또 다른 영역이다. 좋은 점검은 핵심을 떠나지 않는다.
꼭 보태 준 것도 없는 것들이 자빠뜨리기 좋아하고 희론하기 좋아하지...
두들겨 패고 시끄럽게 꽥꽥대고...그 짓 못해 환장하고 그럴라고 태어난 놈들처럼...
무엇이 인간세를 험악하게 하나? 그거부터 깨쳐라...
수행은 힘을 나게 하고 실상을 드러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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