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5일 토요일

열반사덕涅槃四德,법신사덕法身四德 -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열반사덕涅槃四德,법신사덕法身四德 - 상常 락樂 아我 정淨

대승경전 -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여래장경如來藏經 승만경勝鬘經
에 나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대승경전은 추천하지 않는다.
빠알리어 5경이라는 걸 추천한다.

불교사에 보면 석가붓다열반 후
500 아라한이 모여서 가장 먼저 정리한 것이 율장이라고 하고
다른 경장들을 교차검증해서 정리하여 합송(외워 함께 낭송) 한다.
인도서부 아람어로 기록되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 후에 두번째 모여서 부파화 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을 정리하고
200년 후 세번째 모인다고 한다.
이 결집에 의해 문자화(산스크리트어,팔리어,마가다어 추정) 되었다고 한다.
문자화 되었다 -> 상징체계에 밝은 지식층이 정리했다는 것이다.

석가붓다가 대중언어인 팔리어로 설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 한 갈래가 소승 남방불교라는 스리랑카로 전파되어 필사를 반복하면서 전승되고
팔리어어본도 최근 200~300년 전의 필사본이지만 그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고 평가 받는다고.
산스크리트어 본은 중국으로 전해져 번역되고 아함경이 된다고.

산스크리트어는 브라만(엘리트집단)계급이 쓰던 고급언어이고
한자 또한 계급을 구분짓는 지배집단의 것이어서
팔리어 번역을 읽을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다.

남아 있는 기록물로는
법구경의 코뿔소경,대반열반경 기원 2세기 본이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삼장三藏 -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
아함경 - 장아함,중아함,잡아함,증일아함
니까야 - 디가(긴 장부長部), 맛찌마(중간 중부 中部), 쌍윳다(잡부 雜部),앙굿따라(늘어난 증지부增支部),쿳다까(작은 소부小部)

쿳다까(작은 소부小部)는 아함에 없다고...

아는 척하려는 것이 아니다.

계.정.혜 삼학(三學)이라는 것이 디가니까야에 나오는 수십편의 대담의 뼈대였다.
계를 지켜 청정해지면 정에 들고 4선정을 지나 적멸해지면 혜가 나오는 순서다.
긍까 하고자 하는 말은
계.정.혜 삼학(三學) 이렇게 정리하면 똑똑하고 유식해 보일지 모르지만,
딱딱하고 재미없고 본질과도 동떨어진 이상한 데 가 있게 된다. 말의 오용이다.

해서 이런 방식으로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을 보자

법신사덕法身四德,열반사덕涅槃四德(팔리어 nicca-sukha-atta-subha)
상常,락樂,아我,정淨
상常,락樂,아我 기己,정淨

불교는 환幻(변화)을 걷는 방식이다.
그래서 정리된 계->정->혜 순이 나온다.
사유를 하되 혜로서 하여 환幻 걷는 것이다.

8정도도 마찬가지다

정견(正見)봄,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생각
정어(正語)말, 정업(正業)행동, 정명(正命)생활
정념(正念)알아차림,정정(正定)삼매

이것이 구른다,순환한다. 하여 해탈,열반에 이른다.

상常 <-> 무상無常
락樂 <-> 고苦
아我 <-> 무아無我
정淨 <-> 부정不淨

이렇게 대별 된다.

불교는 출리심出離을 강조한다.
출리出離는 벗어나 떠남이다.

무상無常에 집集쌓음이 있기 때문에 고苦가 있음으로 
아我(기己) 상相(집集)이 고苦의 원인이라 벗어나 떠난다.

그래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면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즉 본연의 상태가 이렇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열반,여여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어야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 겪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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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은 집중.몰입沒入하여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한 환幻의 념念이 몰락沒落하여
즉 정념(正念)알아차림, 정정(正定)삼매 되면서
깨지는 것, 벗어나는 것, 깨닫는 것, 체험하는 것이다.

이게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한 환幻.념念 의 경계를 벗어나니
상락아정常樂我淨
열반적정涅槃寂靜
원성실성圓成實性
공적영지空寂靈知
의 본연의 상태에 든 것이라 말로 표현한 것이다.

본연이 이와 같으므로 이 상태에 익숙해지면 원만해진다고 한다.
이 원만히 해갈 때 경전을 보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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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른 수련의 기본이다. 
선仙 수행修行의 착수는 많이 나오지만 전제 조건이 있다. 
성性(마음)을 무심無心으로 놓고 시작한다.
예를 들어 성명규지性命圭指 - 성性(마음)과 명命(몸)을 규圭하나로 꿰는 지指 가르침.
를 보면 '무심無心으로'라고 가볍게 넘어가지만
대체 무심無心이 어떤 상태인지 모를 때는
관觀이 안되고 응應이 안되니 상기,주화,입마에 대한 경고가 가득 차 있다. 

이 때부터는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선仙,수행修行이지만,
티벳불교의 정광명수련(마하무드라)이다.

불교를 성性에 대해 밝은 면이 있지만, 이면은 상대적으로 가려진 것이 많고
선정과 관법 (~지관) 대해서는 능엄경이 밝지만 또 선수仙修와는 다른 용어를 쓰니
어찌 보면 본연이 원만해져 가면 자연으로 성불 한다 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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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妄想)은 이것을 직접 체험 증명하지 않고
이런가,저런가 심지어 이렇다,저렇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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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식 용어를 떠난 말로 하자면
다 떠나 보내고 다 놓아 버리니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때 체험경계는 사람마다 상태마다 다양하다.

얻었어도 없는 것을 얻었으니 얻었다고 할 수도 없고
본래 있었던 것이니 얻었다기 보다 이르렀다,든다고 한다. 

몸은 괴로우면 계속해서 버둥거리기 때문에
쓸데없이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원만히 해가는 것이다.

석가붓다도 보면
때가 되어 구걸하러 나가고 돌아와 먹고 정리하고 나서
입으로 먹은 음식에 대해 조용히 앉아 소화 한다.
자연스럽다. 무위無爲라 할까.

당시 인도에 걸식 문화가 있어서 이렇게 한 것이지
다른 문화에서는 달리 알맞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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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나 기복은 방편일 뿐,

수修와 관계 없다.

가르침을 행하여 증명하는 것보다 강한 신앙,기복이 있을 수 있나?
가르침을 행하여 증명하는 것보다 강한 앎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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