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0일 일요일

법구경 3장 마음 - 35 - 마띠까 촌장 어미니의 수행과 공양(음식의 중요성)

3개의 같은 이야기를 모아 보았다.

법구경(담마빠다) - 마음에 대한 가르침의 배경 이야기 중 하나다.
제목이 달라질 정도로 방점을 찍는 부분이 다르다.

내가 더 중요하게 본 것은 음식이다.
신통으로 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음식이 수행의 속도차 낸다.

선禪 안내하는 글에서도 주의 깊게 보면
몸을 떠나 따로 수행이 있지 않다는 구절을 볼 수 있다.

몸,맘은 같이 간다.
몸이 원만하면 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맘이 원만하면 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만하지 않은 몸을 몰아치면 문제가 생긴다.
맘이 산만한데 몸이 원만해질 리가 없다.

몸즉맘이다. 하나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무극이란 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끝.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무심이란 말이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처럼 고요하다는 말이다.

(마음이) 아프다 -> 마음에 아픔이 일어났다.
(마음이) 슬프다 -> 마음에 슬픔이 일어났다.
(마음이) 기쁘다 -> 마음에 기쁨이 일어났다.
너무나 명쾌하지 않은가?
*(마음이) 생략하고 쓰는 경우가 흔하다.

이게 일반인이 쓰는 용어와 불교 관련 말쟁이가 구분하지 않고 혼란을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는 근본이란 의미의 본本이란 말을 붙여 본심本心이라 하기도 한다.
이것이 본래 있는 것이라 성품性品이라고도 한다.
경계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지만 깨달음의 체험은 이것을 체험한다는 뜻이다.

불교를 한마디로 줄이면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상태를 진여, 공적영지, 본각, 해탈, 열반, 진공묘유 등을 말의 맥락에 따라 쓴다.

이제 이 없는 것 같은 상태와 모든 것이 일렁이는 상태가 명쾌해졌으니
인식의 변화들이 일어나고 두 상태가 공존하게 된다.
이랬다 저랬다면 번뇌로 당장 문제가 생기겠지만 동시에 간다.
없는 것 같은 상태를 배경으로 일렁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렁임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6GHB8GJCX8 에 낭송된 이야기이다.


한 때에 육십명의 비구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수행 주제를 받아 마띠가라는 자가 촌장으로 있는 마띠까 마을로 갔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비구들이 머물 정사를 짓고 비구들에게 항상 공양을 올렸다.
그 덕에 비구들은 그 마을에서 우안거雨安居를 보낼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비구들에게 명상 수행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비구들은 그녀에게 몸이 늙어가는 과정과 죽어가는 과정을 깨닫게 하는,
몸의 구성요소에 대한 명상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명상 주제와 수행방법을 잘 배워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비구들보다 더 일찍 높은 수행의 경지에 이르렀고 신통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녀는 신통력으로 비구들이 아직 깊은 수행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음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녀는 수행에 맞는 적절한 음식을 비구들에게 올렸다.

그녀가 올린 음식으로 바르게 정진할 수 있었던 비구들은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안거가 끝나자 비구들은 부처님을 찾아뵙고 그간의 일들을 다 말씀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 마띠까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한 비구가
부처님께 수행 주제를 받아 미띠가 마을로 향했다.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미띠까의 어머니는 이 비구가 마을에 도착하자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다 챙겨주었다.

어느 날 이 비구가 그녀를 직접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을 회피하였다.

그러자 이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깨닫지 못하여 아직 범부일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청정하지 못한 생각을 할 때도 있는데,
이 재가여신도는 나의 그런 생각을 다 알아내겠구나!'

비구는 이런 생각으로 그녀가 두려워져서 그 마을을 떠나 부처님께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마띠가의 어머니가 저의 부정한 생각들을 간파할까봐 두려워서 마을을 떠났습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단 한 가지만 잘 단련할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는 바로 마음이다.
그대는 마띠까 마을로 돌아가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마음만 잘 단련하도록 하라."

비구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며 다시 마띠까 마을로 돌아가
마띠까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수행 정진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설하였다.

제어하기 어렵고 재빠르며
내키는 곳 어디든지 내려앉는
이 마을을 잘 단련해야 한다
단련된 마음은 행복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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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미디어 본은 이야기의 맛이 많이 다르다.

법구경 이야기

http://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Amp.html?idxno=8975

노파(老婆)의 타심통(他心通)

코사란 왕의 통치하에 여러 부족이 어울려 사는 마티카라는 산중턱 마을이 있었다. 촌장의 이름도 마티카였다.

한 번은 60명의 비구들이 안거할 곳을 찾아 유행하던 중에 이 마을로 왔다. 마침 우기가 앞서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마티카의 늙으신 어머니는 이들을 맞아 크게 환희하며 시주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좋은 인연을 맺도록 부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감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덕들이시여! 이곳에서 머무소서, 늙은이가 귀명(歸命) 삼보하여 정덕(淨德)의 인연을 맺고자 발원하나이다." 비구들은 좋은 인연으로 알고, 노파가 시주한 정사에서 안거하기로 했다. 결제일이 되어 비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이런 의논들을 했다.

"친구여! 우리의 앞에는 여덟 지옥의 문이 열려 있다. 설사 집안일지라도 삼가 경솔함이 없도록 하자! 우리는 부처님의 뜻을 따라 이곳에 모인 것이다. 어디 부처님의 은혜가 함부로 있을 수 있던가. 사악한 자는 부처님의 꽁무니를 따라 붙어도 그의 은혜를 빌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가 삼가하여 부처님의 말씀대로 둘이 함께 걷거나 머물지도 말자. 다만 아침 일찍은 탁발을 돌기 위해서 한 차례, 그리고 저녁에는 상좌 장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렇게 하루 두 차례만 서로 만나도록 하자. 그리고 환자가 생기거나 급한 일일 때는 정사 마당에 달아둔 종을 울려 알리도록 하자."

서로 약속들을 하고는 각자의 요사(거처하는 집)로 헤어져 정진에 들어갔다. 그 뒤 촌장의 노모가 별난 음식을 수레에 채워 왔다. 그러나 정사는 쥐 죽은 듯 고요하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행여나 하고 노파가 종을 두드렸다. 그제서야 팔방에서 모여드는 대중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기고 그들이 서로 다투고 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들 다투셨나요?"
"아닙니다만---"
"다투지 않으셨다면 오실 적에 모두 함께였었는데 어쩐 일로 뿔뿔이 흩어져 계시나요?"
"모두가 정진하느라고 흩어져 있을 뿐입니다."

노파는 비구들에게서 정진이 무엇인지 참선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건지를 배웠다. 그리고 밤낮 없이 몰두했다. 뜻밖에도 결과는 빨랐다. 비구들 보다도 먼저 오도(悟道)하고 타심통(他心通)을 얻은 것이다.

인연법을 믿고 새 인연을 닦고자 했던 노파로서는 너무나 돌연한 큰 인연이었다. 인연법을 따라서 새 인연을 창조하고자 했던 그녀는 이로서 인연의 올가미를 벗어나 인연 자체를 창조하는 인생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제 도인이 된 노파는 회중(會衆)의 대덕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삼독(三毒: 탐진치(貪 · 瞋 · 癡)의 중생들이었다. 그러나 도인이 될 소양도 깊고 원력도 대단했다. 그리고 환경도 좋았고 도반(道伴: 길벗)도 좋았다. 다만 한 가지 의식(衣食) 생활이 부족하여 거칠었다. 그날로부터 노파는 비구들의 의식생활에 각별한 관심으로 뒷바라지를 다했다.

그 결과 대중들은 더욱 정화(淨和)롭고 윤기있는 생활로 마음의 평정을 더해갔고 평정을 통해 관심(觀心)의 경지를 더욱 승화하여 함께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

이렇게 하여 마티카 마을에서의 안거를 훌륭히 끝낸 60명의 대중들은 사위성의 죽림정사로 돌아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자신들의 오도를 점검받고 인가받았다. 그때 비구들이 말했다.

"저희들의 오도는 훌륭한 신도의 보살핌을 받은 덕택입니다. 마티카 촌장의 늙으신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의 생활의 부족함을 낱낱 미리 알아 정진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셨고 생각의 낌새를 먼저 알아차려 탁마하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범상한 외호(外호) 신도가 아니라 빼어난 선지식이요, 보살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때 한 비구가 여럿의 한결같은 찬탄의 말을 듣고는 자신도 마티카 마을로 가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거기에 가서 살기만 하면 자신도 꼭 아라한이 되리라 생각하니 더욱 간절히 가고 싶어졌다.

부처님께서 그의 마음을 읽으시고, 삿된 기미가 있긴 하나 오도의 인연이 성숙하였음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마티카로 갈 수 있고 누구나 도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일을 주저하거나 믿지 못하여 다른 일로서 안락을 구하는 이는 마티카로 갈 수 없다. 행여 가더라도 돌아올 것이다. 갈 수 있는 이는 모두 가도록 하라."

아까의 그 비구는 선걸음에 나섰다. 바루 조차 챙기지 않은 상태였다. 허둥지둥 당일 저녁으로 마티카에 도착한 그는 몹시 지치고 시장했던 차에 이런 생각을 했다.

'청소는 커녕 세숫물을 길어올 기력도 없구나. 이리 배고픈 일도 처음이고, 생각만 하면 노파가 도와준다고 했으니 소식이 있을 테지.'

과연 얼마 안 기다려 촌장의 집에서 하인이 왔다. 청소를 하고 발 씻을 물을 길어주고 음식도 주고 갔다. 배를 채워 먹고나니 시각은 한밤이었다. 갈증이 났다. 그러나 물이 있는 곳 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때 다시 하인이 물을 가져왔다.

그는 물을 마시고 나서 다음날 아침에는 촌장이 먹는 맛있는 음식과 철 맞은 과일들을 먹고 그리고 노파를 만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그의 생각대로 어김없이 촌장의 노모가 정사로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촌장의 노모께서는 남의 마음을 낱낱이 아신다지요?"
"정진하여 아라한이 된 스님들은 흔히들 남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더군요."
"남의 일이 아니라 노모의 경우를 묻고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이들은 흔히들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는 자신이 못 올 곳을 왔다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노파는 사람의 생각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있구나. 나는 아직 신심으로 삼보에 귀명치 못하여 정명(淨命)에 들지 못했으니, 삿된 나로서 어찌 지옥의 판관과 같은 저 노파 앞에서 배길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황급히 사위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때에 부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그대는 왜 그대의 관심을 노파에게 두고 노파의 신통 앞에 절절 매는가? 그대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다스려야 할 바는 다만 그대의 자신이요, 마음이 아니든가? 그래야 노파의 신통을 이기지"

그리고는 다음의 게송을 설하셨다.

가볍고 날뛰며 변덕스러운
요사한 마음을 길들여 부려라
길들인 마음에 선이 따르고
다스려진 마음은 행복일지니. 

<제35송> 佛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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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본 

https://blog.naver.com/byunsdd/60210944150


법구경(法句經)

제3장 마음의 장

게송 35

생각을 다스리기 힘든 빅쿠 이야기

어느 때 빅쿠 예순 명이 부처님으로부터 좌선 수행에 관한 설법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수행을 하기 위해 적합한 장소를 찾다가 마띠까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그 마을의 촌장은 마띠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띠까의 늙은 어머니는 예순 명의 빅쿠들을 보자 기꺼이 빅쿠들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빅쿠들의 발 아래 절하고 빅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쭈었다. 그래서 빅쿠들이 수행할 장소를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된 마띠까의 늙은 어머니는 말했다.

"테라님들, 테라님들께서 우기 석 달 동안 여기서 수행하기로 결정하시면 저는 그동안 삼귀의와 오계를 받들고 초하루와 보름의 제일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테라님들이 수행하시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과 음식을 잘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이 같은 제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이 마을에 머물러 수행해 주십시오."

그러자 빅쿠들은 이번 왓사를 마띠까 마을에서 보내기로 결정하여, 침묵으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빅쿠들이 자기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마띠가의 어머니는 가족을 동원하여 건물을 지어 빅쿠들이 거처할 수도원을 짓고 빅쿠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띠까의 어머니의 열성적인 후원에 감동한 빅쿠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렇게 결정했다.

“우리는 아주 좋은 장소에서 이곳 주민들과 마띠까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아무런 불편 없이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소. 그러니 이런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 우리는 각기 자기 방에 있으면서 다만 열심히 수행할 뿐 둘이 모여 앉아 이야기 하지 맙시다. 우리가 수행하는 동안 만약 급한 상황이 생기면 말을 하지 말고 수도원의 종을 울려 알리기로 하고, 하루 한 번 마을로 탁발 나가는 시간에만 모여서 나가되, 그때에도 침묵을 지킵시다. 우리가 한가하게 놀며 신자의 시주나 받아먹고 지내면 부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열심히 수행하여 하루 빨리 생사 윤회를 벗어나는 것만이 부처님과 신자들의 은혜를 갚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이서 한 군데 앉지 말고, 혼자서 한 곳에 앉아 수행할 것이며, 높은 경각심을 유지합시다. 그리고 저녁 때 한 자리에 모여서 법랍이 높은 빅쿠 선배의 훈계를 듣고, 아침에는 일찍 탁발을 나갑시다.”

이같이 서로 결정한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마띠까의 어머니는 자기의 가족과 이웃 신자들을 데리고 우유, 버터, 치즈 등을 준비하여 수도원에 갔는데, 이상하게도 빅쿠 스님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보니 빅쿠 스님들은 각자 자기 방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스님들을 만나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종을 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수도원의 종을 쳤다. 그러자 빅쿠들은 누가 급한 병이라도 걸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제각기 자기 방으로부터 따로따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빅쿠 스님들이 각각 한 사람씩 따로따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테라님들이 혹시 서로 다투시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그녀는 빅쿠들에게 여쭈어 보았다.

“테라님들, 혹시 서로 다투시기라도 하신 건가요?”

빅쿠들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난번에 제가 테라님들을 집으로 초청했을 때는 모두들 같이 오시더니, 오늘은 왜 따로따로 모이시는 것입니까?”
“신자님, 우리는 각각 자기 방에서 서로 떨어져 앉아 좌선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선 수행이라니요? 좌선 수행이 무엇입니까?”
“좌선 수행이란 우리 몸의 서른 두 가지 부분을 세심하게 분석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구성되어진 양태와, 늙어가는 과정, 죽어가는 과정, 모든 기능이 일어나고 사라져 가는 현상 등을 예리하게 밀착 관찰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바르게 보아, 그것들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며, 무상한 것이며, 자아가 없는 것임을 깨달아, 모든 집착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생사를 해탈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가르침을 들은 마띠까의 어머니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테라님들, 그렇다면 그런 수행은 빅쿠 스님들만 하실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누구든지 수행하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요?”

“이것은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그렇다면 제게도 그 수행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빅쿠들은 그녀에게 수행법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부인은 배운 것을 그 자리에서 세 번 네 번 외더니 곧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후부터 열심히 정진했고, 아주 짧은 기간에 아나가미 팔라를 성취했으며, 네 가지의 신통력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성취한 자기 수행에 대해 만족한 마띠까의 늙은 어머니는 신통력으로써 빅쿠들의 수행 정도를 가늠해 보았다. 그 결과 그녀는 빅쿠들이 아직도 탐심과 진심, 치심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빅쿠들은 아직도 내적 현상 관찰이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삼매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다시 빅쿠들에게 아라핫따 팔라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보았다. 그 잠재력은 충분했다. 다시 그녀는 그렇다면 빅쿠들이 적합한 장소에서 수행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역시 장소도 적합하였다. 그렇다면 벗은 좋은가? 역시 벗도 좋았다. 음식은? 그녀는 바로 음식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마띠까의 어머니는 그때부터 특별한 음식을 공양했다. 그녀는 각종 쌀죽과 여러 가지 견고하고 부드러운 음식에 향미를 넣어서 빅쿠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빅쿠들의 마음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그 안정된 마음으로 내적 현상을 바르게 관찰했으며, 결국 사대오온의 자연적인 성품을 보아 삼매를 이루어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신통력까지도 갖추었다.

빅쿠들은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마띠까의 어머니 같은 위대한 신자의 도움으로 수행의 궁극적인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부인은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자, 이제 우리는 우기가 끝나는 대로 부처님을 찾아뵙고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기로 하자.”

마침내 우기가 끝나 빅쿠들은 마띠까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빅쿠들을 배웅하여 떠나 보냈다.

빅쿠들은 제따와나 수도원에 도착하여 부처님을 뵙고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다음 부처님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부처님께서 물으시었다.

“빅쿠들이여, 너희들은 수행과 생활에서 모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는구나. 그런데 혹 음식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 적은 없었느냐?”

빅쿠들이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매우 신심 있고 매사에 배려가 깊었던 마띠까 촌장의 어머니로부터 넉넉하게 음식을 공양 받았습니다. 음식에 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다른 필요한 물품도 잘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부처님과 빅쿠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한 빅쿠가 있었다. 그는 마띠까의 어머니가 빅쿠들을 잘 공양한다는 말에 자기도 그곳에서 수행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수행 주제를 받아 마띠까 마을로 떠났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듣기로 그 여자 신자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아는 신통력을 지녔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먼 길을 가느라고 피곤하니 수도원과 방을 미리 청소해 놓았으면 좋겠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띠까의 늙은 어머니는 그의 마음을 읽고 곧 심부름꾼을 보내면서, 수도원을 청소하여 도착하는 빅쿠 스님에게 인계해 드리라고 지시했다. 수도원에 도착한 빅쿠는 이번에는 마실 물과 일용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띠까의 어머니는 그것들을 보냈다. 그리고 빅쿠가 죽과 버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녀는 착오 없이 죽과 버터를 보냈다.

그때 빅쿠는 또 생각했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과연 듣던 대로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보내 주시는구나. 이제 나는 그 신자를 보고 싶다. 마띠가의 어머니가 여러 가지 양념으로 부드럽고 맛있게 만든 음식을 가지고 직접 와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은 마띠까의 어머니에게 전해졌으므로 그녀는 곧 빅쿠가 필요로 하는 음식을 준비하여 수도원으로 갔다. 빅쿠는 공양이 끝나자 물었다.

“신자님이 마띠까 촌장의 모친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바를 아시나요?”

마띠까의 어머니는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곤란하여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요?”
“당신은 내가 원했던 것을 착오 없이 다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같이 묻는 것입니다.”

“테라님, 저는 어쨌건 간에, 많은 다른 빅쿠 스님들도 남이 생각하는 바를 아시는 줄로 아는데요.”
“나는 다른 빅쿠들의 경우를 묻는 게 아니오. 단지 당신이 남이 생각하는 바를 아는지 모르는지를 묻고 있소.”

그러자 마띠까의 어머니는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뭣해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 같은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빅쿠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마띠까의 어머니가 타심통의 능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여,‘나는 이제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져 버렸구나. 생각이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어서 남에 대해 좋은 생각도 하고 나쁜 생각도 하기 마련인데, 이 여자 신자는 내가 일으키는 나쁜 생각을 다 알 게 아닌가? 그러니 이 여자는 도적을 붙잡아 돈주머니와 멱살을 꽉 쥐어 잡는 사람처럼 나를 쥐어 잡을 것이다. 얼른 이곳을 피해 떠나는 것이 상책이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신자님, 나는 이곳을 떠나겠소이다.”
“어디로 가시고자 하시는지요?”
“나는 부처님께 갈 것이오.”
“테라님, 그러지 마시고 이곳에서 더 수행하도록 하시지요.”
“나는 이곳에서 더 머무를 수가 없소이다.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오.”

빅쿠는 이렇게 말하고 그곳을 떠나 다시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그가 수도원에 도착하자 부처님께서 그에게 물으시었다.

“빅쿠여, 너는 왜 그곳에 있지 않고 떠나왔느냐?”
“부처님이시여, 저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부처님이시여, 그 여자 신자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을 떠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빅쿠여, 그곳이야말로 네가 꼭 머물러 수행해야 할 장소이니라.”
“부처님,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빅쿠에게 다짐하시었다.

“빅쿠여, 그렇다면 너는 한 가지를 꼭 지킬 수 있겠느냐?”
“부처님, 그것은 무엇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처님의 자비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빅쿠여, 너는 이제부터 네 마음 하나만을 잘 보호하도록 하여라. 마음은 매우 보호하기 어렵고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니라. 빅쿠여, 이제부터 너 자신에 관한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말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마음은 가볍게 움직여 다스리기 매우 힘든 것
어느 곳이건 좋아하는 곳에 쉽게 머문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진정 훌륭한 것
잘 다스린 마음이 행복을 가져온다.

이 빅쿠는 부처님의 이 같은 설법을 듣고 다시 마띠까 마을의 수도원으로 돌아가 마띠까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수행을 했고, 머지 않아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하였다.

[출처] 제3장-게송 35 : 생각을 다스리기 힘든 빅쿠 이야기


헛갈리는 불교 용어 - 무아無我, 법法

언어란 체험과 인지에 기반한다. 불교식으로는 오온이 언어 기반이 된다.
생활이 다르면 언어의 차이로 번역이 불가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라는 우리말은 한자로 번역되기 어렵다 그래서 나 오吾를 써서 오등吾等이라고 썼다.
한자가 지식을 대표하는 조선 직후라
기미독립선언의 시작도 '우리는' 이란 말을 쓰지 않고 오등吾等은 이라고 썼다.
한자로 조어특권 누리던 우월 버르장머리가 남아서 그렇다.

한자와 범어는 더 차이가 컸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어인지라 지금의 의미와도 차이가 크다.
인도의 사고체계와 한자의 의미개념이 너무 달라서 직역이 불가할 정도다(빠알리어 번역 보면서).

무아無我 - 아낫따 an-Atta(빠알리), 안아트만an-Atman(산스크리트)의 한문번역
Atta,Atman은 변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 그것에 an은 '아니다'의 부정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각되는 나 Atta,Atman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것이 불변독립이란 것을 부정한 것이다.

在,存,體 이런 말들은 애초에 체험,인지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의 의미로 쓸 때는 本을 붙인다. 근본이 그래서 체험,인지가 그랬다의 뜻을 담고 있다.
본本, 실체實體 란 말을 쓸 때도 체험에 따라 인지에 변화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드러났다는 뜻이지,
그것이 작용에 따라 어떻게 체험이 예측가능하다는 것이지 고정됐다는 의미는 희박하다.

왜냐.. 이쪽 문화는 계속 체험되듯 자연은 변화한다는 것을 깔고
음양, 오행, 역, 모두가 변화를 설명하는 문화다.

거기에 그렇게 되는 이유와 규칙성이 있다는 의미로 리理를 쓴다.
그렇다고 이걸 다 받아들였냐? 아니다. 왜냐
꼭 그렇게만 되는 게 아니었거든.

한자의 구성
我는 발음에 따라, <-'아'라는 나,자기의 뜻을 가진 말이 있었나보다 
吾는 口가 입,먹다,말이 뜻에 五가 소리다.

다시 무아無我 를 보면 我는 이상하다.
Atta는 개체個體, 자기自己, 영혼靈魂  이런 말에 더 가깝다.
한글자로 떨어지는 한자는 짧은 지식으로 못찾겠다.
기己가 있는데 이것은 몸이란 나란 의미를 깔고 있으니 이것이 더 적합하다 하겠다.

인도의 힌두,브라만 사상에는 현상계에 현현하는 것 안에 아트만 있다고 생각했으니
기己 이것이 주관으로든 대상으로든 더 가깝다 하겠다. Atta - 기己
an은 부정어. 영어에서도 쓰인다.

한자로는
부不,弗-아니다
미未-아니다,아직~못하다
비非-아니다,그르다,나쁘다
무無,无-아니다非,없다,않다不 
부否-아니다
물勿-아니다,없다, 말다
피彼-아니다怫,저,그
모毋-아니다不,말다
부𠀚-아니다
비匪-아니다,떼도적

중에서 부不,弗이 일반적이다. 不己 약간 고어적으로 弗己이겠지만
불교는 '아니므로 그런 건 없다'의 의미가 강하므로 무기無己가 적합하다 하겠다.

무아無我 -> 불기弗己 또는 무기無己

* 佛 - 人 + 弗 -> 사람 아님?
불교가 부정하는게 많아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되지만
붓다를 발음이 비슷한 弗를 취하고 사람을 뜻하니까...쓰게 된거라.

법法 - 자연의 또는 보편적으로 체험되는 원리,이치,질서,법칙 등의 의미

다르마Dharma[담마Dhamma]
자연계의 법칙,
인간계의 질서 ...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행위...
지켜야할 고귀한 것
삶에 대한 가르침
물질적.정신적 모든 현상

인도의 담마Dhamma, 지나국의 법法은 주술의 시대에 권위를 가지려는 온갖 것이 녹아 있는 단어다.

불교적 의미에는 

진리와 그 합리성
법칙과 그 보편성
인간의 도덕.윤리
붓다의 가르침
실상과 진리
사물
현상
깨닫는 방법

석가모니부처가 말을 헛갈리게 한 것인지 제자들이 혼란하게 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체로  진리,사물,현상, 붓다의 가르침 정도로 되는데 최소한 말할 때
지금 말하는 법法 이런 의미다를 어눌이 하던가.
...로써의 법法이라 수식하던지
더 간명하게 ...을 직접 쓰던지
스님도 말의 정연함 있어야 한다. 누가 지맘에 들려고 말듣나? 듣는 나 도움 되라고 듣지.

아비담마, 아비다르마, 아비달마 -> 붓다 가르침의 주석, 논장
담마湛磨  담마談磨 담마𤯌磨 이런 조합도 가능했을텐데...지나국 소리가 또 시대가 그렇다 하니... 

그런데 리理를 쓰지 않고 법法을 썼을까.
다른 뜻은 수렴되어도 '사물'의 뜻은 수렴할 길이 요원하다.
리理는 사물物의 돌아가는 원리라는 뜻이지만 법法이 사물로 되는 것은 엉뚱하다. 이때는 물物이 더 적합하다.

그런데

한국불교가 따라 주창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法은 '사물'을 가리킨다.

제법무아諸法無我 -> 제물불기諸物弗己 또는 제물무기諸物無己

물物의 뜻이 법法이란 글자에 없다 해도

제법무아諸法無我 -> 제법불기諸法弗己 또는 제법무기諸法無己

이 정도가 가깝다 하겠다.
해 놓고 보니 뜻이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많이 다르다.
연기에 의해 나타난다 또는 존재한다는 불교의 기반이 없으면
말로 다가오는 느낌... 생소함인지 조금 어색하다.



2023년 7월 22일 토요일

밝은 에너지 최고의 가수 - 남진

가수 남진南珍 본명 金南鎭 1946년생 - 1967 신인상. 1967 10대가수

- 아주 밝은 에너지
- 전대역이 개방된 독특한 목소리
- 다양한 울림과 톤 기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보컬
- 스토리와 이미지를 완전히 그린 후 노래로 표현하는 실력
- 브라스밴드(금관악기 위주의 악단)의 남성적이고 한 번에 흐르는 원테이크 최적
- 노래의 맛,멋이 좋다.

대중적이며 소탈한 무대, 환상적인 무대연출의 나~아와 완전히 다르다.
나~아는 히트곡이 많다면 남진은 멋진 곡들이 있다.

1959 이미자 '열아홉 순정' 1961 한명숙 '노란 쌰스의 사나이'
등의 노래로 시절로는 봄은 시작 되었지만
전후라 경제.문화기반도 그렇고 군부쿠데타로 어둡게 바뀌고 했는데
그걸 뚫고 남진과 함께 한국의 봄바람이 불었다.
(얼마 뒤 일이지만 등려군과 함께 중국의 봄이 시작되었듯 月亮代表我的心 1977 甜蜜蜜 1979)
(미국은 아마도 1960 Chubby Checker - Let’s Twist Again)

시대 유행에 따라 슬픈곡조의 트롯(뽕짝)이 많지만
다음 곡들을 보면 얼마나 파격이었는지 알게 된다.

마음이 고와야지 1967
님과 함께 1972
젊은 초원 1972 (정말 멋진 노래다)
그대여 변치마오 1973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1974

꽃분이 1977
마워도 다시 한번 1977
빈잔 1982

잘 어울릴 다른 곡
복면달호 - 이차선 다리위...뒷부분은 좀 바꿔야 할 듯.

이 나라는 스스로 만든 삶이 척박한지라
삶의 애환이 노래의 주제가 되고 아직도 밝아지지 않고...
인간도 동물인지라 본능적으로 흐르는 것이
대중음악에도 사랑이란 이름의 탐닉이 많지만

이 애환의 시대와 환경이 어찌보면 이도저도 아닌..

히트곡으로 본 전성기는 1972~1974년인 듯하다.

송창식 한번쯤, 피리부는 사나이 1974,  왜불러 1975 이니까...

시대상이 구슬픈 트롯 시대였고 스스로 트롯을 선택했지만
밝은 에너지 폭사되는 밝은 노래가 어울린다.

밝고 간결하고 단순한 주제. 목소리 기교 무대매너야 보시다시피 뭐~
이런 이미지와 주제(테마)를 잡는 훌륭한 사.곡이 인연이고 인연일 것이다.
트롯 대부분이라 위 5~6곡이다.
음악적으로 다양한 접점이 있었다면, 더 많은 곡을 남겼을 것이다.
활동기간으로 보면 20~30곡은 나왔어야 ...

밝은 에너지와 실력을 갖춘 가수는 의외로 아주 희귀하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밝은 에너지와 노는 법을 잊은 것 같다.
그만큼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 많은 것이고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2023년 7월 19일 수요일

휴정休靜 - 선가귀감禪家龜鑑 유가귀감儒家龜鑑 도가귀감道家龜監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禪을 잘  정리했다고들 한다.

유가귀감儒家龜鑑은 심오한 부분이 선禪과 겹쳐서 인지 유교儒敎의 선禪적 이해라 할만큼
약간의 예禮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유가 선비들을 위한 선禪,노자老子 가이드'라 할 정도로
해박,깊이를 드러낸다.

반면 휴정 당시에 승려가 핍박받는 시절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완전 딴판으로 도가귀감道家龜監은
노자老子처세학 정도의 구절들을 모아 놓았다.

도가道家는 잡술이나 할 정도고 유가儒家 불가佛家는 비슷해... 이런 걸 어필한 것일까?
절이 무당집 같은 것이 만갈래 도가道家와는 먼 것이 불가佛家다는 것을 티내는 건지 알 수 없다.

도가道家의 출발이 노자,장자로 알고 있는데 잘 못 알고 있는 건가?


2023년 7월 15일 토요일

불교의 공空이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 있다는 말이잖아 왜 뜻이 반대로 바뀌냐?

왜냐
공空은 구멍, 빔, 비어 있음, 비었다, 없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게 왜 문제냐
같은 글자를 썼기 때문에 기본뜻에 얹어 항상 중의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고의적으로 얹어먹기 한 의도가 분명하다.

아니면 공空이 기본 뜻과 같다로 이해했을 때
'뭘 모르셔서 그러는데, 불교에서 공空이란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는 뜻이에요'...
결국 있다는 말이잖아. 형태는 변전하다를 모르는게 아니잖아.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 - 이 말도
일반인에게는 지금 감각할 수 있고  있다는 뜻이잖아.

있는데 딱 이거다 할 수 없고 모든 것은 변해간다. 마치 유물론 같다.
결국 있음에 대한 이야기잖아. 그러면 기본뜻에 완전히 반대개념이잖아.
없음은 있음의 상대개념 아니냐? 있음즉없음이니 ... 식이라면
공空 = 유有가 되겠네?

불교가 좀 치열한 종교인가? 혼돈은 말할 수 없으니 분명해라.

이래도 틀렸고 저래도 틀렸다 언어도단이다 이런 식의 말을 구사하려면
말로 되었을 때는 정확해야 한다.

색色 물질이란 뜻이라며... 물질적으로 유有
공空 비었다 없다 의 뜻이지... 물질적으로 무無

컵을 들고
이걸 컵이라 아니라면 뭐라고 할래?
이런 질문을 받거든 말장난 하는 놈이니
그 놈의 대갈통을 딱 그 컵으로 제대로 후리쳐라.
컵이든 대가리든 둘 다든 박살나거든 한마디 해라.
이건 뭐라고 할래? 

부처가 뭡니까? 뜰앞에 잣나무 이런 대답을 하거든.
잣나무에게 3,000배 시켜라.
살불살조라 하거든 잣나무를 베라 하라.

이런 걸 흉내내고 다니는 놈은 당장 만나지 마라.


어원에 가깝게 글자 풀어서 보면

허虛 - 비었다. 없음. <-> 실實 열매,꽉차다.
공空 - 구멍, 비었다.

虛空허공 텅빈 공 중
空虛공허 속이 텅 빔

머리통을 때리고 싶어진다.

무상無常이니 무상無相 - 4相? 아상我相이면 끝 아닌가?

진제眞諦,속제俗諦 해가면서 불경을 구라로 만들지 말고
이제는 진제眞諦만의 분명한 흐름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다른 의도가 있지 않다면, 이 시대에는 진제眞諦만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설說로 되는 게 아니라면 설說할 필요가 있나?

(모양 - 형이상 형이하의 모양, 유무형상)
아상(我相 atman samjna) - '나' 나라는 유무형상
인상(人相, 개아個我, pudgala samjna) - 나 아닌 사람이라는 유무형상
중생상(衆生相, sattva samjna) - 다른 생명체라는 유무형상
수자상(壽者相, jiva samjna) - 윤회하는 주체.영혼이라는 유무형상

오온五蘊 과정에서 대상으로 보는 것을
실상實相으로 보지 않는다.

금강경 구절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모양이 있다는 것은 다 허망하다.
만일 모든 모양을 상으로 보지 않은 즉 여래를 본다.

에서 상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은 '나'라는 것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다 '나'라는 것에 있다.

나라는 모양만 없으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다른 생명체라는, 영혼이라는 모양이 있을 수 없다.

자아,영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자아가 없다면
다른 사람의 자아도 없고 다른 생명체의 자아도 없고
없는 자아가 생을 넘어갈 수도 없다.

만일 나 아닌 모든 것이 영혼이 있다고 증명된다고 해도
나의 영혼을 발견할 수 없으면 나는 그냥 다른 현상인거다.
다른 현상에 대해 같은 기준으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맞지 않다.


공空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공空 - 인연가합의 몸에 오온이 흐른다.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법(法: 존재)

아공(我空) -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법공(法空) - 대상이라고 할 것이 없다.
구공(俱空) - 아공(我空),법공(法空) 후 아공(我空),법공(法空)을 벗어나 본성계합

이것도 자아.본체를 넣어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아공(我空)이면 법공(法空)이고 공空에 대한 집착을 떠나면 구공(俱空)
아공(我空)인데 법공(法空)이 안될 수 있나?
그럼 다른 현상이므로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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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브놀이
https://www.youtube.com/watch?v=kSMI5OPyDzI

향봉스님이 대중의 언어로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아상(我相 atman samjna) -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군지 알고?
인상(人相, 개아個我, pudgala samjna) - 니가 뭔데?
중생상(衆生相, sattva samjna) - 끼리, 무리짓기, 편가르기, 패거리 
수자상(壽者相, jiva samjna) - 오래오래 누릴려는 경향.
*중국에서 수壽를 목숨이란 것도 있지만, 누리다 누림의 의미도 많다고 한다.
'충족도 변한다' 것에 방점. 충족은 많은 인연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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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相이란 가름,차별이다.
상相없으면 평등지에 든다.

2023년 7월 10일 월요일

완등록 13. 무연자비 無緣慈悲

묻습니다.
모든 부처는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데 대자비를 행함이 어떻습니까?

諸佛 如何行大慈悲 爲衆生說法

스승이 말하길,
부처의 자비라는 것은 인연이 없어서 이름이 자비다.
師云
佛慈悲者 無緣故 名大慈悲 

자慈란 이룰 부처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비悲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慈者 不見有佛可成
悲者 不見有衆生可度 

그 법을 설한다는 바가 말하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다.
그 법을 듣는다는 것도 듣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其所說法 無說無示
其聽法者 無聞無得 

비유하자면 환사가 환인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 같다.
譬如幻士爲幻人說法 

이런 법을 내가 선지식을 따라 말에 이치를 알고 이해하고 깨달았다 하겠나
이런 자비를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다른 견해를 배워 얻었다 하겠나
者箇法 若爲道我從善知識言下領得 會也悟也
者箇慈悲 若爲汝起心動念 學得他見解 

스스로 본심을 깨닫지 않으면 끝내 이로울 게 없다.
不是自悟本心 究竟無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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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을 떠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고
알 것도 얻을 것도 없다 하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하고
이 없는 것에 의지하여 열반에 이른다니...

알송달송 한 것이 알아지는 게 아니라잖...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없는 거라잖...

말로 이르름 끊겼다. 언어는 생각의 집이라니 생각으로는 끊겼다.

몸의 일(먹고 자고 싸고 쉬고)외에
아무것도 어떤 것도 하지마?


흠 흠 흠.

2023년 7월 6일 목요일

The Beginning of Japan's Self-Destruction - Fukushima Nuclear Contamination

Japan is using their scheming techniques to discharge contaminated water in Fukushima.
This is an attack on Earth's life-ecosystem and humanity.

The way is - spend 1/10 of your national budget on nuclear waste disposal.

On the one hand, we are trying to find a way for the world to stop generating any more nuclear waste.

On the other hand,
Classify and separate all polluting nuclides according to characteristics and half-lives,
bury long and toxic ones in stable bedrock,
and dig short and less dangerous ones in drainage wells several kilometers deep underground and store them there.

2023년 7월 5일 수요일

헛갈리는 불교 언어 및 개념 - 법 공 무아.무상 윤회

불교 문헌이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사용된 문자들
원래 쓰이고 있던 개념과 달리
자기들만의 용어인 듯, 지멋대로 써서
쓰던 개념 깔고 얹어 먹는 효과를 노리고 쓴 듯
그 위에 또 '그 뜻이 아니고 - 백퍼'라고 하고 싶어서 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그리고 지네 스스로 새로운 용어를 개발하거나
기본 개념과는 달리 분명하게 이런 뜻이라고 밝혀주는 놈고 없고
대중법문에서도 알고 쓰는지 모르고 쓰는지
알아 듣던 못알아 듣던 막 쓴다.
한자 유교쟁이들처럼 똑 같은 말을 한다. '그것도 모르고...'

그래서 산스크리트나 팔리어 쪽을 보면 또 다른 개념처럼 들린다.


우스꽝스런 선문답 같다.
즉심시불... 짚신이 부처다.
삼강은 아냐? ... (떡) 다섯개 먹었다.


법法 - 분명 단어다.
불교서적 읽거나 불교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골치아픈 단어다.
다르마 담마 dharma 달마達磨 담마曇摩
이건 다른 단어인데 왜 법法을 썼을까?

달마가 음차라서?

1 붓다가 말한 가르침, 교리.
2 붓다가 깨달은 진리, 곧 불교의 진리.
3 붓다의 말을 기록한 경전 곧 법보(法寶).
4 독자적인 본성, 속성, 특성을 지니고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 '제법諸法'

dharma  윤리적 의무,계급적 의무 사회적 윤리 라는 뜻이 있다고 하니
인도에서 당시에도 얹어 먹기 했다는 것이다.

요는 붓다 관련은 붓다가 진리의 말을 했다고 했으니 그렇게 크게 묶으면
법法 - 가르침,진리,교리,경전(법보)는 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뭐 이런 ... 그냥 마구잡이 썼다에 1원 건다.

그런데 제법諸法무아無我 제법諸法공상空相 이 때는 모든 법法은...
독자적인 본성, 속성, 특성을 지니고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

불교가 논리적 분석이 많다. 따지는 영역은 애매하지 않다.
그 지녔다는 성질이 독자적이란 뜻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의미?
성질은 개체의 색.수.상.행.식 작용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데

개체에 따라 달리 파악되면 법法은 달라지는 건가?
법法 다르다고 인식되는 유무형의 것인가?

---

공空 - 비었다,없다.
그래서 한 때 텅빈...이런 표현 자주 쓰더만.

이게 정반대의 뜻이 된다.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성이 없다는 뜻이란다.
더 구체적으로는 2가지
- (스스로의 성질)자성(본성,속성,특성)이 영원하지 않다.
- 정해진 특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용에서 드러난다.
  예. 종이컵 - 물잔,찻잔,커피잔,술잔,음료수잔, 재털이,쓰레기통,모종그릇,받침대
  이러면 이것이 되고 저러면 저것이 되어서
  즉 자성이 정해지지 않아서 비었다는 것. 자성이란 위치는 있는데 비어서 없다는?

그럼 자성이 비었다 해서 性空으로 쓰던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할 때 공空을 쓰면 다시 없다 비었다의 뜻이다.
이건 또 석가의 장광설 뒤에 - 나타나는(일어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의 뜻으로
무극.태극.천지... 이런 노.장 선가의 개념에 얹는다.
어쩌라는 거냐?

이런 거 하나 정리안하고 뭐가 어쩌고 어째?
그래놓고 불교는 포용적이라서 다 수용한다나 어쩐다나...

차라리
애초에 정해진건 없어 살다보니 이름도 붙이고 그렇게 된거지
특히 인간문명의 산물은..하다보니 그런거지... 
이러고서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탈,열반이나 알려주셔요.

이런 말이 훨씬 쉽고 좋잖아.
지네끼리 알아 듣기 어려운 용어 만들어 놓고 비용만 높이는 꼴이라니...

-

무자성 공空은 개념이라서 또 다른 문제가 있어.
그렇다면 공空은 공空이야 공空이 아니야?

---

윤회 

1. 생이 돌고 돈다. - 생과 생을 넘어간 것
2. 괴로움이 반복된다. - 현생

현생은 바로 되짚어 확인할 수 있지만 윤회라는 말보다 다른 단어들이 많다.
(수행의 이유도 되지만, 이건 윤회라는 개념정의를 바꾸고 다른 이야기를 함.
1을 보완하려고 하는 경우도 더러 봤음)

생을 넘어 윤회라는 개념은
물리적으로 우주안의 생명현상을 원소의 이합집산보면 물질적으로 윤회인가?
그런데 이건 앞의 어떤 모양이 사라지고 뒤에 어떻게 이어지는 밝혀진게 없잖아.
앞의 모양으로 겪은 것이 어떻게 뒤의 모양으로 이어지는지 밝혀 놓고... 윤회를 들먹여야지.

조상-후손으로 소위 업.식이 이어진다는 뜻의 윤회인가?
유전자가 물질적으로 확인 되었으니 과학적으로도 확실한 기반이 있다.
또 부모-자식이 어떻게 닮아가는지 직접 보고 확인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에 맞으면 개체의 성격이 반복되서 발현된다.
이건 생명체에 한정된 것이다. 
이것이 조건에 따라 업.식이 발현된다는 이론도 증명된다.(입양)
유사과학 연구 동기 같은 것이다.(과학이라면 유전자,환경 너무나 방대하다)
사이비들이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많이 활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 윤회의 관점이 아니다.

복 지으면 좋은데 간다고..음. 이건 윤회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석가의 전생에 대해 본생경本生經이란 것까지 있는 거 보면
경이니까 분명 석가가 이야기 했다는 것인데...그렇다면
영체,의념체 같은 것이 있어서 생을 넘어 간다?
정해진 자성이 없어서 공空하다는 말은 빈말?
일체가 공空하고 무일물無一物이라매 윤회가 성립하나?
(정견은 여러가지 견 중에서 바른 견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견이 본래 없었고 인연따라 견이 발생/소멸한다 정견인가?
그럼 정견도 인연따라 발생/소멸하는가?
있는 그대로라면 있는 그대로는 뭔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건가?
이런 수행파 있고 만능 공空처럼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 )

해탈.열반 떠들기 전에 그것을 증명을 해줘야지 

모두에게 그것을 서비스 해야하고 그에 따라 가장 적합한 해탈.열반의 길을 안내해야하고.
중생이 몸.맘을 잘 모른다고 이렇게 막~하면...

---

무상無常 무상無相 

1. 고유한 형태나 모양이 없음. 불변하는 실체나 형상이 없음, 고유한 실체가 없는 공(空)의 상태.
2. 대립적인 차별이나 분별이 없음. 대상에 가치나 감정을 부여하지 않음. 형상을 떠남. 집착이나 속박에서 벗어남. 

2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므로 해탈 전에는 할 말이 아니고

1의 경우는 그럼 작용하는 색.수.상.행.식은 뭠?
이 작용도 없는 거라는 뜻? 공空처럼 ... 있지만 없어?
해탈,열반도 모양이 없음? 상락아정,해탈지견... 아니아니 해탈.열반은 있음? 없음?

해탈,열반 은 공空, 공空 아님? 

상수멸진想受滅盡이라 공空도 아니고 공空하지 않은 것도 아님? 공을 벗어남?
상相에 이미 무상無相이 있고 무상無相도 이미 상相을 포함한다?

그러면 상대계에서 안그런게 어딨나?
그것이면 그것이 아닌 것을 전제로 그것이라 하는 거지.

절대계라면 상相 무상無相은 말할 대상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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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모든 존재에는 고정 불변의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는 뜻이라는데
일반인 쓰는 말 '나' 이건 뭐여?
육근육식의 작용이건 일체가 인연으로 존재하던 말던
본인의 느낌이건 당사자에게 '나'라는 분명함이 있고
인간사회의 기반이잖아...부처법은 출세간법이라 세상의 개념은 무시하는 거?
생로병사하니 고정 불변이 아니라고 해 놓고 무아無我라는 말을 쓰는 거?
해탈했다는 부처가 쓰는 여래如來라는 뜻이
문맥상 말하고 있는 이것 '나'란 의미 아님?

이거 말 막해...

대승에서 부처설법은 광명설법 해설이라는데 봤어야 말이지.
불교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은 아니라면서?

2023년 7월 2일 일요일

유교가 기독교를 비판하지 못하는 이유

유교는 참 이율배반적이다. 그리고 신분제의 강압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어려운 글자 마저도 배울기회를 박탈해 놓고 '그것도 모르면서...'라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속이고 빼앗고 고혈을 빠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공자가 그러라고 시키디?
공자도 책 읽고 공부하다가 이렇더라, 그러니 이랬으면 하네... 라는 것이었잖아.
근데 쓰는 놈들은 잔혹한 도구로 썼잖아.

쟁투기에서 중세 조선의 암흑기로 ...

신성을 주장하고 싶으면 신성부터 보여라. 
기독교는 빨아 먹던 로마제국의 도구가 되면서 초장부터 변질 되었다.
그래서 장구한 전쟁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런 면에서 유교는 기독교에 비하면 까마득한 아래고
초록은 동색이라 비판하지도 못한다.

들어보면 유교가 학문적으로 좀 심오하다 싶은 거는 
불교의 것을 선별적으로 축소되어 용어 바꾸기에 불과한 것들이 허다하다.

불교를 탄압한 목적도 결국 그들이 누린다고 여기던 것들을 빼앗기 위한 목적이었다.
불교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고 개선하는 쪽으로 정리해주지 못했다.
그럴 역량이 안됐으니까... 그래서 한 것은 빼앗기...

사람이 다양한 만큼 크고 다양한 세계관을 제시해 주지도 못했고
더 좁아지다 못해 차단된 경우가 너무 많다.

노자 기준으로 조선왕조를 보면... 

역사도 그렇다.
도대체 진짜 고려나 그전의 삼국은 어땠는지도 알 도리가 없다.

게다가 대대손손 오래오래 해 먹고 싶어서
풍수로 좋다는 자연환경은 다 독점하려 했다.

불가 승의 다비와 부도보다 훨씬 낭비적이다.

음택은 공부터로만 썼어야 했고
양택은 공용으로 활용되었어야 했다.
그것을 관청이 독점하는 것도 좋지 않다.
권력이 언제 바르기만 하던가?
권력은 기본적으로 강압이고 
언제든 가혹해질 수 있어서 양택을 점유하면 나쁜 것을 더 키우게 된다.
많은 군.관청들이 좋은 자리 점유했다.
관청은 평하고 편리한 자리에 편재해야 한다.

체제를 정비하더라도 좋은 양터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되어야 했다.

왕 무덤 잡는데 높은 관료가 지명되고, 
유교가 자랑하는 것과 거리가 먼 온갖 것을 다 동원하여 사사로움을 추구하였다.

옛날 고관대작 명당 설화는 와 닿지 않겠지만
가까이 살아온 시대, 명당의 혜택을 입었다는 자들이 뭐 얼마나 이 사회에 좋은가?

경제 논리로 누군가 돈을 많이 벌면 배 아픈 건 당연한 것이다.
그만큼 편차를 증가시킬 것이고 자본에 의한 기회를 박탈 당하는 것이 때문이다.

고용되어 살아가는 삶은 기본적으로 불편하다.
먹는 것을 위해서 자신을 얽어 매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인구는 많고 치밀하고 활발하게 살아서 전개되어야 할 체제가
구닥다리 관념으로 굳어져서 결국 불행한 시기를 맞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언제나 그랬지만 눈 뜨고 보면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워 살아가기 참 어렵다.

그래서 난 지금 윤회를 믿지 않는다.
그만큼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불가에서도 해탈을 이야기하지.



2023년 7월 1일 토요일

남전南泉이 고양이를 죽였다(참묘斬猫)

무문관(無門關) 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南泉) 화상은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전은 마침내 그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그날 밤 조주(趙州)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일을 조주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남전은 말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선문답 공안은 상황극 코메디 같기도하고
고약한 다리걸기 놀이 같기도 하다.
그래도 쓰는 용도가 있다고 하니... 뭐


조주에게 던져진 질문은

한 손에 고양이를 쥐고
다른 손으로 칼을 쥐어 고양이 목에 대고
한마디 못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한 상황이다.

조주의 대답은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갔다.

처음 이 이야기를 봤을 때 '뭐지?' 몇 번을 문답이 납득되지 않는다.

'발에 싣는 신발을  머리에 이십니까?'며 나갔다.
또는
'차라리 신발을 이고 다니지 그러십니까?'며 나갔다.
또는
'미쳤다'

뭐 이 정도다.

선禪 문답 한답시고 고양이 목숨 쥐고 밑도끝도 없는 협박하다 결국 죽였다.
먼저 시비 건 것이 가장 큰 허물이다.
법거량이니 이상한 문답 방,할 ... 그저 자기들끼리의 놀이다. 칭얼대는 거거나.

허공이 뭐라던가 햇빛이 뭐라던가 구름이 뭐라던가 바람이 뭐라던가
선禪하고 싶다면 자연과 하라.

그 무문관 해당 칙에는 아래와 같이 나와있다고 하니...

趙州若在 만약 조주 선사가 있었다면,
倒行此令 거꾸로 이 명령을 행하였으리.
奪却刀子 칼을 도리어 빼앗으니,
南泉乞命 남전이 목숨을 구걸하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