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6일 토요일

운문(雲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운문(雲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擧 雲門垂語云: 운문이 늘어 놓기를

十五日以前 不問汝, 十五日以後 道將一句來.
십오일이전은 너에게 묻지 않는다, 십오일이후  딱맞는 한구가 온다면?

自代云: 日日是好日.
스스로 대신해  말하길 나날이 좋은 날.
(벽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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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을 잘 몰라 그렇지만,
내게 느껴지는 것은 그저 평범한 것이다.

십오일이전은 전이고
십오일이후는 이후다.

십오일이전을 묻는 것이 아니다.
십오일이후를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후 평,찬 들이 있는데
대체로 운문이 시비를 걸었다고 여겼는지
한마디라도 하면 어긋난다는 태도가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말없는 청중이 정답을 했는데
운문의 자답이 이상하지 않은가?

어찌 왔던 상관하지 않겠다.
와서보니 어떻더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 나날이 좋은 날.

이것에도 뭐 그따위냐..식의 말이 많은데
운문이 그랬다는데 뭐~! 운문은 그랬구나...하면 될 일이지.

내포야 어찌됐던 말로는
십오일이후는 나날이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

운문은 그랬단다.

2015년 12월 16일 수요일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먼저 나오는 이유

먼저 인지해야 할 것은 석가가 말하는 부분의 불경에서는
사유전개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논리로 타파하고 있다.
(요즘의 과학에서 쓰는 논리라는 도구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

마음이란 것을 비추어보기 위한 도구로서의 심경(心經)은
리드미컬한 반복구조 생략구조 서술구조를 갖추고 있다.

12연기도 이런 관점으로 보면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순(順)역(逆)으로 전개되고 소멸됨을 애매모호한 마음이란 것의 작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시(是) 제법공상(諸法空相)...


심경에서 논리적 전개의 근거는 제법공상인데
제법공상의 예시로서 색불이공...역부여시이고
이것은 가름으로 대표되는 색(色)과 가름없는 공(空)이 다르지 않다.로 보는
것으로부터 유추된다.(정밀한 부분이 있지만 생략...)

소위 대승(大乘) 사상의 기초가 유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 그런데
학자,학술가가 아니고 수행자라면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입장이 다르다.
수행자는 행하고 증명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색(色), 공(空)이 다르지 않다. 쯤 오면
학자, 학술가는 더 이상할 짓이 없다.
모든 개념을 와해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콱 막혀 버린다.
대개 학자,학술가의 leading을 받아왔던 일반인들도
여기서 맹~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수행자는 여기서 단초를 잡을 수 있다.

왜 색불이공(色不異空)이 공불이색(空不異色)보다 먼저 나올까.
학자,학술가는 앞뒤가 바뀌어도 같지 않느냐.라고 할 지 모르지만
수행자는 그것이 아니다.

색불이공(色不異空)이 되고 공불이색(空不異色)이 되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되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되고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역부여시(亦復如是)구나
그래서 색.수.상.행.식도 다 이와 같구나.

가 되어야 수행자다.

이해를 위해서는 12연기를 다시 참조하게 될 것이다.
색.수.상.행.식은 주요 작용 말하는 것이고
12연기는 전개를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라는 생물로서 내면에 흐르는 마음.의식과
그것으로 발생하는 행동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눈치채야 한다.

빌미를 잡고 모든 이식된 분별관념을 제거해 가다보면
혼란을 겪을 수도 완공에 빠질 수도 있고 팽개쳐 버릴 수도 있다.

아주 거치른 단계를 지나서 '이제 뭐가 뭔지 좀 알아보겠네' 쯤에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아서 무릎꿇고 자포자기 할 수도 있다.

이때 잘 살펴야 한다. 심중(心中).관점(觀占)이 옮겨져야 한다.
사실은 기존 관점.체계가 허물어져서 혼란도 온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거두어지는 것이 있어서 조금 더 드러난 것이다.
이런 것을 잘 알아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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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연 키워드라 가면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色)은 '물질'이라고 한다. '사물'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일반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공(空)은 '무자성' 독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개념으로 표현되어질 수도 있다.
다시 새겨보면 상대개념도 아니다.
인식체계의 현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된다.

(요즘의 초미시 과학이란 것으로 이해해보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보다는 보이지도 않는 단위의 물질을 이야기하는
초미시 과학이란 체계는 개념의 세계이다.는 것을 지목하는 것이다.
초미립자 가속기를 가지고 매일 매일
실험하고 추적하고 추론하고 증명하고 하는 것이 생활이 아닌 사람에게는
그것은 개념의 세계일 뿐이다.
그 일부분이 일상생활의 상품화된 물건으로 온다.)

다시 인식체계 부분만 물질이란 것이 비춰지는 작용과 그 부대작용을 살핀다.

그러면서 다시 드러나는 이 인식체계.인지체계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 인식체계.인지체계를 빠져나가 살펴보면 어떨까?
수행자의 접근방식이란 이런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인식체계.인지체계를 걷어 버리면 어떨까?
스스로 걷어낼 힘이 된다면 빌미를 잡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인식체계가 겹쳐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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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뇌과학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이름으로
다음 세대 세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뉴스가 되는 세상이다.

내 눈에는 농사짓사람이나 미시과학자나 천체물리학자나
다 똑 같아 보인다.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다만, 사회체계가 편파적이고 왜곡적이다.

인류의 당면과제는 에너지.식량.그것을 공급하는 체계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문명상 언제나 당면과제였다.
이것이 기초이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 수행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수행의 기초가 잘 된 사람이
공공서비스와 정치등 사회체계를 이루는 역할에 배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자연계에 인간이 있지만 있는 듯 없는 듯한 문명까지 가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거나, 동물을 부리고, 인간을 부리는 시대는 정점에 이른 것 같다.
이대로는 더 나빠질 것이 자명하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쓰고 인간 닮았으면 빤한 것 아닌가?

2015년 12월 14일 월요일

음악 프로그램

작곡 프로그램
내 - Cubase, Nuendo, Protool
외 - FL Studio, Logic Pro

가상악기(VSTi)

악기 없이 악보
Sibelius, Finale, Ancore




큐베6 - 668800원 ( 교육용 401500원 )
누엔도5 - 2398000원 ( 교육용 1199000원 )
Pro tools 9 - 790000원 ( 교육용 490000원 )
Sonar X1 Producer - 680000원 ( Sonar X1 Studio 340000원 )
Logic Studio - 750000원 ( 교육용 690000원 )

2015년 12월 12일 토요일

국가의 본질 - 조직화된 폭력의 독점 (Psycho-Pass : Japanimation)

일본 Animation(Japanimation) 영화

Psycho-Pass 의 대사에서
어떤 학자, 예술가, 정치가 들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적어도 한국에서는)
인상깊은 표현이 나온다.

.....
국가가 붕괴한 세계에선 폭력의 민간화가 이뤄지지

왜냐면 조직화된 폭력의 독점이 바로 국가의 본질이기 때문이지

폭력이 확산되면 그건 정치 이하의 문제가 되지

사회적 분노를 원천으로 한 경제활동을 통한 조직 폭력이지
....

2015년 12월 7일 월요일

영화 추천

영화라는 도구는
태생적으로 꾸며질 수 밖에 없고 어떻게는 왜곡된다.

다양한 요소가 집약되어 말만 많아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단컷 사진조차도 어떤 관점만 있는 것이다.

분류될 수 있는 인간문명의 소산 중에 그렇지 않은 것이 몇이나 될까?
이유도 헤아려보길 바란다.

지금까지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평가는 보는 이의 몫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나아 보이는 자세다.

보는 이는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작용을 살펴보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이롭다.

Beasts of No Nation - 2015

2015년 최고의 수작으로 꼽고 싶다.
아프리카 내전 상황에서 어린 아이가 겪게 된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인간사회의 응축판이며 인간문명에 대한 조롱을 담은 영화다.
있는 그대로 묘사하니 인간사회의 정수를 담고 있다.

과학의 정점에 있는 놈도 어쩌지 못하는...
동물로 태어나 동물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주인공이 어린이라고 해서 어린이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전쟁을 겪은 이 나라도 그 어떤 세대에 있었던
폭력앞에서 모두 이 영화의 하나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라가 있어도 없어도 발전한 환경에서도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이 영화속의 변전된 형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명 위한다면서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지독한 역설.

동물의 생리작용을 사랑이라 우겨댄다고
먼지털만큼이라도 고귀함이 있는 것처럼 꾸미고 또 꾸민다.
어떤 행위가 얼마나 지독한 고문이고 또 하찮은 것인지도 모르고.

부지불식간에 굴절과 필터링을 해내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인간들이 읊어대는 어떤 가치에도 다가갈 수 없음이 절절하다.

오죽 했으면 누군가는 모든 것을 던져버렸을까.....

끝부분의 어린아이의 독백과 대사 참.......

독백
She thinks that my no speaking is because
I can't be explaining myself like baby,
but I am not like baby.

I am like old man and she's like small girl
because I am fighting in war
and she's not even knowing what war is.

대사...
---
I'm thinking about my future.
---
I saw terrible things...
and I did terrible things.

So if I'm talking to you,
it will make me sad...
and it will make you, too, sad.

In this life...
I just want to be happy in this life.

If I'm telling this to you...
you will think that...
I am some sort of beast...or devil.

I am all of these things...

but I also having mother...father...brother and sister once.
They love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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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h - 2015
영국영화
영국인들은 그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 지 알게되면 매우 부끄러울 것이다.
하기야 그렇지 않은 나라는 상대적으로 삥 뜯기는 후진국 뿐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엉뚱한 곳에서 역동성을 찾으려 한다.
그런 자유의 영역에서 가끔은 호~ 하는 것이 나오는 수준...

이 영화가 표현하려는 것이 뭔지 모르겠으나
내가 느낀 것은 - '별것없다'가 주제다.
인생이니 행복이니 뭐니 뭐니 떠들어 대는 모든 것이 '별것없다'.
들여다보면 그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는 태생에 불행해지겠으나
'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니다'로 가볍게 접근하면
많은 것이 놓아져서 소란스러움을 벗어나는데 도움된다.
그 출발이 악하면 결과는 매우 악해지거나
잘해도 처음의 악 수준이다.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 손해다.
그래서 인류는 몇백년은 발전속도가 뒤처지게 되었다.

Rush - 2013
이름도 기억 못하지만 주연배우가 해머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해서 눈에 띌 것이나
영화는 레이서 이야기다.

미치게 하는 인생에서 미쳐 버린, 그리고 계속해서 미치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F3, F1 레이서들 이야기다.
왜! 를 던졌을 때 쉽게 보이는 배경이 특징이랄까.
경쟁구도는 왜 만들어지는가?
경쟁 프레임은 판떼기 깐 놈 빼고 모두를 악한 패배자로 만든다.
그들이 달아주는 돈꽃도 그들이 던지는 미끼에 불과한 것이다.

Nothing But The Truth - 2008
초반에 대통령 암살 시도 장면이 나오고
백악관이 베네수엘라를 배후로 지목하여 보복폭격을 했는데
Sun Times 에서 일하는 여기자가
어린 아들 학교동기인 여자아이[취재원?]의 이야기를 스쿨버스에서 듣고(맨 끝에 나옴),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CIA요원인데 베네수엘라가 배후국가 아니라는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는 것 등을... 취재하여
백악관이 엉뚱한 보복을 한 것이 아니냐는 기사를 썼는데

정보원을 색출하려 특별검사가 파견되고(전형적인 일검 같은 검사를 떠올리게 된다.)
'정보기관 요원 취재원보호법 1982'들어
여기자에게 정보원을 대라고 온갖 협박과 수단을 써서 강요한다.
여기자는 불복하여 법정모독죄로 구치소에 1년을 수감된다.
판사재량으로 겨우 풀려나는데
특별검사는 다시 쫒아와서 '정부조사를 지연시킨 죄'로 5년을 감옥에 넣을 것이라고 또...
검사는 2년에 합의를 제안하고
그래서 결국 아들을 보게 해주는 조건으로 합의?된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나이 많은 변호사가 현실과 합의하자고
'난 원칙이 아니라 레이첼 암스트롱을 변호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자
'한 남자가 원칙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뒤로하고 감옥에 갔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공휴일을 지정했어요.
한 남자는 아이들을 두고 전쟁에 나갔고
사람들은 그의 기념비를 세웠어요.
한 여자도 같은 일을 하는데 그 여자는 괴물이랍니다.
여기서 물러서면 뭐라고 할 건데요.
"엄마가 아닌 기자만 믿어라 엄마들은 약하니까"
사실 이 망할 기사 때문에
아이와 떨어지게 될 줄 알았다면 쓰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기사는 나갔고
길은 이미 택해졌고 돌아갈 길은 없어요.........'

이에 변호사는 대법원 취재원보호법에 대한 심의(열심인 변호사)에서
정부에게 기자를 수감할 권력이 부당함을 이야기한 와중에..

"해가 갈수록 정부의 힘은 점점 강해진다"
"힘을 가진자들은 어느 당이던 간에 그 힘이 영속되길 바라고
 국민은 피해자다"
...
대통령이 범뵈를 은폐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군 장교가 고문을 묵인했다면요?
국가로서 우리는 권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부터
더 이상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 정부의 본질은 무엇이되는 것입니까?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쳐질 일입니다.

저널리스트를 가두는 일은
국민을 두려워하는 나라가 하는 짓입니다.
국민을 소중히하고 보호하는 나라가 할짓은 아닙니다.
..
얼마전 저는 레이첼 암스트롱에 개인적인 압력을 가하고
원칙이 아닌 그녀를 변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바로 원칙 그 자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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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요원의 어린 딸이 '내가 말했다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알았지?'
라고 한 말에 약속을 지키려고 이 기자는 구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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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 2003

이야기 배경은 불교의 인과다.
제목을 보면 순환하는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호수에 떠있는 절에서 일어나는 동자승의
유년, 청년, 장년으로 순환구조로 그려지고 있다.
물고기, 개구리, 뱀을 괴롭히다 노스님이 돌매달고
괴롭힌 것들 풀어주라며 그사이 죽었으면 그만큼 받을 거라한다.
노스님도 그렇고 다시 절로 돌아와 거하는 사이 찾아온
얼굴가린 여인과 그녀의 아기도 그렇고
호수에 물얻이 구멍에 빠져죽은 여인을 건져
얼굴가린 천을 걷으니 부처상이 되는 것도 그렇고..
뭐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이런 인과를 다루는 숙명적인 반문이
악마의 화신같은 인간은 왜 그런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지...
당장 죽어도 천만번은 죽어야할 인간이 오히려 길길이 날뛰니..
스스로를 착하다고 여기는 이들의 억울한 분심이 폭발하는 지점이다.

그들도 다 받을 거야, 혹은 절대자의 시험이야..같은
가당찮게 들리는 소리 말고....

겨우 들려줄 수 있는 말은
크게 보면 그것도 이 세상의 욕망이 만든 것이다.정도.
하나 하나가 모두 부처고 보살이라면
설령 악마 하나가 날쳐도 자정해 내겠지.
핍박받고 겁에 질린 중생계에서 어떻게든
의지할 곳이 있으면 깃들려고 한다.
그 정도면 좋게 살도 뜯고 피도 빤다.
늘 약한 쪽으로 폭력은 가해지고....악순환은 계속된다.

무명으로 인한 탐욕이 강요하고 싶을 때 폭력이 나타난다.
권력과 힘이 주어졌을 때 숨겼던 모습이 드러난다.


Black Hawk Down - 2001

2시간 20분 동안 4/5 정도가 전투가 나오는 전쟁영화다.
지금까지 진행 중이라는  아프리카 소말리아 내전의 1993년 UN평화유지작전이었단다.
미군 19명 소말리아 1,000여명 사상 되었다한다.
설정이야 UN이 제공하는 식량을 착취하는 민병대장을 잡겠다는
미군 중심의 스토리는 배달의 기수 같은 ~~~한 이야기 접어두고
중간 중간 소말리아 배경이 실날하게 다가온다.

애초의 미군 장군이 상부의 압박으로 지리한 상황을 타개하려
불확실한 정보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는데서 비극적 결말은 예견된다.

소말리아 등 여러 아프리카 내전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인지 알 것이고
일제 후 6.25를 거쳐 군부로 이어지는 한국 상황까지 추정했다면
소름끼치게 실감이 날 것이다.

한 번 미치기 시작하면 폭주를 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지옥을 만드는 주인공이 된다.

인간은 천국도 지옥도 본 적이 없다.
천국 지옥을 이야기하는 자는 하찮은 인간이다.
다만 지옥은 그들 스스로 만드는 것 같다.
전염병이나 천재지변은 광인을 만들지는 않는다.

굶주림의 트라우마로 탐욕이 자라나고 무지로 증폭시킨다.
늘 공포를 무기로 지옥을 만드는 자들이 나타난다.
공포를 강압하기 위해 살상한다.

2차대전 후 가장 큰 휴유증은
전쟁무기와 전쟁과 전쟁위협으로 큰 돈을 버는 방식이고
아직까지 극복될 기미도 없다.

지식정보사회 인공지능도 따지고 보면 다 그와 같다.
나는 동물이 나은지 인간이 나은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인간 중에 석가 노자처럼
길을 여는 자들이 있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석가 노자는 아니지 않는가?
그 몇을 놓고 인간은 괜찮은 존재라고 할 것인가?

인간은 그 잘난 문명이라는 것으로 자멸하는 최초의 종이 되려 한다.

인간의 소망들을 보라.
그들의 행을 보라.
있는 그대로 보라.

난 인간이 왜 하염없이 대를 이어가는지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

The Beauty Inside - 2015

장르에 전형적이지 않은 흔하지 않은 한국영화이다.
유전적?으로 일어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사람과 어떤 여자와의 사랑이야기다.
(역시 한국영화는 사랑만 해... 이상한 기독교 나라.)

신선한 설정의 이야기는 아기자기 이어지지만,
영화의 연출방식은 이것저것 모았지만 전형적인 한국영화다.
하나의 주인공에 가장 많은 배우가 출연하기 때문에
그 맥락을 이어가는 연출이 돋보인다.

정체성인지 집착인지 습관인지 모를 것에 대해
관점이 변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The wall (Die Wand) - 2012
독일 영화다.
주인공이 도시를 떠나 알프스 계곡 휴양지에 도착하자마자
투명한 벽에 의해 고립되고 끝까지 간다.
미국드라마 Under the dome 과 같은데, 없는 것 처럼 투명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하나만 나온다고 보면 된다.
타이틀 빼고도 러닝타임이 1시간 40분이나 되니 길게 느껴진다.
알프스의 사계절이 지나가기 때문에 자연경관을 감상하기도 좋다.

혼자 남겨진 생활...
보기에 따라 고립일 수도... 자유일 수도...
인간사회의 수많은 일들이 아무 의미없는... 좀 더 깊은 내면의 성찰도 할 수 있다.


Out of Africa - 1985
30년 된 영화다. 이 영화의 사랑타령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때는 다큐보다더 상세하게 자연경관을 표현하는 영화가 있다.
2시간 40분 거의 내내 아프리카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배경으로 나오는 아프리카의 풍경이 영화속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웠다.
그 풍광이 주는 대자연의 마력과 인간들의 상념이 교차하면서
깊은 사유에 빠지게 된다.

Cloud Atlas - 2012
2시간 50분. 상대적으로 긴 영화다.
훨씬 대박난 Inception 보다 여러 방향의 사유가 나온다.
영화의 내용이나 의도는 어설픈 인과 이야기 정도이다.
인과-윤회란 주제의 불교 이야기는 윤회에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어떻게 해야 벗어나는 지도 이야기 한다.
소설은 어떤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다.
사실 어떤 영화도 그렇다. 욕망을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다.
욕망을 하나씩 놓았을 때마다, 시각도 바뀌어서
다시 정립하고 또 그러고 하다가 모든 관점을 놓아야 함을 알고 놓는다.
수많은 관점들이 걷혀질수록 조금씩 더 선명해진다.

Margin Call - 2011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비극(subprime mortgage crisis) 당시
어떤 투자회사가 감지하고 하루만에 팔아치우는 시작점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이 지금보다 오래 된 세상의 인간사회에서는 운(運)이라는 것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시 갇히고 모든 가치를 화폐-수치화하고 그 탐욕이 통제하는 사회로 진입한
지금에는 그런 것은 없어 보인다. 그저 바쁜 도시에서 목적없이 사육되는 동물처럼 ...
가끔은 괜찮아 보이는 인간이 있기는 하지만,
탐욕과 잔혹한 폭력이 잘사는 능력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자가 치유능력을 회복하기는 요원해 보인다.
그 피해는 인간 모르는 영역까지 아주 크게 번지고 있다.


Watchmen - 2009
3시간 30분. 보통 배달의 기수식 미국 영웅주의 표출인데,
이 영화에서는 어울리지 않게  갈등 번민 고뇌를 한다.
유명한 노래들이 장면에 맞게 삽입되었고 이야기속 이야기도 있다.
케릭터들은 인간의 관념, 주의를 표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Calvary 2014
캘버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 Golgotha 언덕의 라틴 이름이라 한다.
가정이 있다가 좋은 신부가 된 신부와 그 주변의 이러저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신부의 딸, 동료 신부, 술집 주인,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부자,
바람이 일상인 유부녀, 유부녀의 애인, 인종차별주의자,
자살을 꿈꾸는 주정뱅이 소설가, 성당에서 생활하는 어린 소년,.......등등의 캐릭터가 나온다.
연출과 연기력이 자연스럽다.
일상 살이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 흐르는 의식을 펼치고 있다.
어렸을 때 신부로부터 성적학대를 받던 한 아버지가
위의 좋은 신부를 죽이는 이야기다.
좋은 신부를 죽여야 세상의 이목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이유에서.
그래서 영화 제목이 캘버리가 된 것 같다.
쓸모없이 수많은 편견으로 살이 삼고 살아하는 사람들과
종교적 삶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2015년 12월 3일 목요일

대개의 앎이란 의도.지향이 있는데

대개의 앎이란 의도.지향이 있는데
과거의 정보가 분석되어 관점이 취합되고 지향을 갖는다.
자기가 중심되면 생존에서부터 자존까지의 정보가 취합되는데
소멸,잃음에 대한 두려움,공포가 핵심이 되므로 어두어진다.

좋다고 나쁘다고 여겨지지 않거나
두려움,공포가 아닌 것은
취합에 쓸 기억이나 되어 있을라나?

2015년 11월 25일 수요일

어린왕자 - 나는 이책의 내용을 통~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이 책은 늘 그렇다.
당췌 머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어린왕자가 자기가 만든 자기인지
조그만 별은 어린시절의 자기세계인지..

이런 류의 전개나 비유는 그저 애매할 뿐이다.

---
이 책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렇다.
대학시절에 한 살 어린 후배가 술자리에서 이야기 도중 문득 질문을 해왔다.

"형 어린왕자 읽어봤어"
"응"
"여우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길들임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

난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후에 그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몇 번 되뇌이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 말의 뜻은 알겠는데
하필 그 후배가 그 느낌의 후배가 그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나의 행위에 기인한 것 같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대학시절에
교우들 간에도 이견이 있으면 난 거침없이 말했다.
선배가 대접안해준다고 때려서 뼈가 상하도록 맞기도 하고....

그런 입바른 소리가 그 친구의 뭔가를 자극했고,
그것으로 인해 그 친구에게 나에 대한 어떤 상相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에 대해 기대치를 갖게 했다는 것.

그때 난 적어도 잘 지내자고 인사하고
술취하면 인사불성되서 싸우는 인간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겉으로 선배님하고 뒤돌아서 개새끼 하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행동에 일관성을 갖는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나 또한 폭력 앞에서는 항상 무기력했으니까...

한 고비를 넘어선 지금에도 역시 난 나의 길을 가고 있을 뿐,
애매하고 한가하게 비유나 묘하게 전개하는 것은 아주 멀리한다.

그런 비유나 전개들은
물리적 우주공간과 마주 했을 때 막막함에는 비교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들 사이에 그렇게 애매한 것이 있을까?

누군가의 비유처럼 살아온 삶이 다른 정도겠지.
하지만 춥고 배고프면.아프면.피곤하면.폭력을 당하면
- 괴로운 것은 대개 비슷한 것 아닌가?

길들여지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길들일 대상은 자기 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

어린왕자...길들임을 이야기했던 친구는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2015년 11월 24일 화요일

스탠포드 감옥 실험 Stanford prison experiment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3%A0%ED%8D%BC%EB%93%9C_%EA%B0%90%EC%98%A5_%EC%8B%A4%ED%97%98

https://en.wikipedia.org/wiki/Stanford_prison_experiment

소위 교수라는 작자가 이런 실험을 구상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지한 놈인지 반증한다.

세상에 나타난 생명체 치고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사회가 탐욕과 폭력에 기반한 질서를 가진 면이 있고
그것으로 얼마나 불행해지는 지 몰랐다면 그런자가 어떻게 교수냐.


1971년 일 $15 (2015년 일 $88)
이것만으로도 시발이 폭력이다.

이런 실험은
지 급여의 10배씩을 개인 사비로 지출하게 했어야 했고
엄격한 룰이 있어야 했다.

왜 하필이면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허용했을까?

하긴 핵폭탄연구도 몰두하는 시기에 놈들이라...

실험을 준비하는데도 어떤 룰(법)도 없이
그저 흥미로운일이 벌어질 것이란
미친 생각이 두개골에서 일어났겟지.

바로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
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던
그것이 알고 싶었다면,

진짜 죄수와 간수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과 인터뷰했으면 될 일이었다.

폭력을 축으로 보면
인간은 폭력에 의해 태어나고 두려움과 폭력에 기인하여 행동한다.

그런 인생은 그저 헛되이 소모되는 것이다.

폭력을 자행하는 것도
폭력을 당하는 것도.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2015년 10월 15일 목요일

Web Service - CXF, Srping

import javax.xml.bind.annotation.XmlAccessType;
import javax.xml.bind.annotation.XmlAccessorType;
import javax.xml.bind.annotation.XmlElement;
import javax.xml.bind.annotation.XmlType;

@XmlType(name = "SomeInfo", namespace = "http://reverse.package.path.as.domain/")
@XmlAccessorType(XmlAccessType.FIELD)
public class SomeInfo{
private String SOME_ID;

public String getSOME_ID() {
return SOME_ID;
}
public void setPJT_NO(String _SOME_ID) {
SOME_ID = _SOME_ID;
}
}



import javax.jws.WebMethod;
import javax.jws.WebParam;
import javax.jws.WebResult;
import javax.jws.WebService;
import javax.xml.bind.annotation.XmlElement;
@WebService
public interface Some{
@WebMethod(operationName = "operSomthing")
@WebResult(name = "result")
public RETURN sendSomeInfos(@WebParam(name = "someInfos") @XmlElement(required = true, nillable = false) SomeInfo[] someInfos);
}


import javax.jws.WebService;

import org.apache.log4j.Logger;
import org.springframework.stereotype.Service;

@WebService(serviceName = "Some", endpointInterface = "package.path.Some")
@Service("package.path.SomeService")
public class SomeService implements Some {
....
}




<?xml version="1.0" encoding="UTF-8"?>
<beans xmlns="http://www.springframework.org/schema/beans"
xmlns:xsi="http://www.w3.org/2001/XMLSchema-instance"
xmlns:context="http://www.springframework.org/schema/context"
xmlns:cxf="http://cxf.apache.org/core"
xmlns:jaxws="http://cxf.apache.org/jaxws"
xsi:schemaLocation="http://www.springframework.org/schema/beans http://www.springframework.org/schema/beans/spring-beans-2.5.xsd
        http://www.springframework.org/schema/context http://www.springframework.org/schema/context/spring-context-2.5.xsd
        http://cxf.apache.org/core http://cxf.apache.org/schemas/core.xsd
        http://cxf.apache.org/jaxws http://cxf.apache.org/schemas/jaxws.xsd">

<import resource="classpath:META-INF/cxf/cxf.xml" />
<import resource="classpath:META-INF/cxf/cxf-extension-soap.xml" />
<import resource="classpath:META-INF/cxf/cxf-servlet.xml" />

<cxf:bus> <cxf:features> <cxf:logging /> </cxf:features> </cxf:bus>
<!--
<bean id="inInterceptor" class="com.secc.cmm.wsLogging.interceptor.InInterceptor">
<property name="onlyFaultLogging" value="true"/>
</bean>
<bean id="outInterceptor" class="com.secc.cmm.wsLogging.interceptor.OutInterceptor">
<property name="onlyFaultLogging" value="true"/>
</bean>
<cxf:bus>
<cxf:inInterceptors><ref bean="inInterceptor" /></cxf:inInterceptors>
<cxf:outInterceptors><ref bean="outInterceptor" /></cxf:outInterceptors>
<cxf:inFaultInterceptors><ref bean="inInterceptor" /></cxf:inFaultInterceptors>
<cxf:outFaultInterceptors><ref bean="outInterceptor" /></cxf:outFaultInterceptors>
</cxf:bus>
-->


<jaxws:endpoint implementor="#package.path.SomeService" address="/Some" />



</beans>

2015년 9월 18일 금요일

자바라 거위목 마이크 스탠드 - 영어로

스탠드 조명에 쓰이는 유연한 지지 파이프 같은 것을
무어라 부를까?

자바라... 이거 일본 말이라는데 '뱀의 배'라는 한자어 유래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아래와 같은 용어로 검색하니
부품으로 검색이 되었다.

한국어로는 정확한 용어가 없는 것 같다.

flexible tube arms
flexible spring tube arms

gooseneck
metal gooseneck
Long & Heavy Duty Flexible Gooseneck

2015년 8월 24일 월요일

오라클 시스템 계정 암호를 잃었을 때



OS prompt> orapwd file="C:\oracle\db11gR2\database\PWD[SID].ora" password=[password] entries=5 force=y
SQL> alter user [user] identified by [password];
SQL> alter user [user] account unlock;

SQL> select name from v$database;


OS prompt> sqlplus user/pass@ip:port/SID

SQL> ALTER PROFILE DEFAULT LIMIT PASSWORD_LIFE_TIME UNLIMITED

2015년 8월 22일 토요일

RealForce 리얼포스 86, 87 사용기 - 사용감 비교

리얼포스 87 저소음 차등 영문버전

5년 이상 리얼포스86(55g)을 사용해 오고 있었다.
딱히 리얼포스 86에 대적할만한 기계식 키보드는 없었다.
- 딱한가지 불편한 점이 Cap-Lock indicating light가 없다는 것.
그럭저럭 만족하고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몇 해 전 리얼포스87이 나왔다.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사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리뷰를 검색해 읽곤 했다.
45g+-5g 타건압과 Cap-Lock indicating light
86과 비교해 87의 특징이다.

2014년부터 데스크탑 뿐 아니라 노트북 pc도 본격적으로 침체되어
좋은 것이 나오지 않고, 완성도.품질도 떨어지고 있다.

CPU, chipset ram등 세대가 바뀌고 있어
2016년 중반까지도 안정적이고 완성도와 품질을 갖춘  랩탑은 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모니터를 먼저 구매하고, 키보드도 구매하게 되었는데
그게 리얼포스 87이다.

처음부터 86과는 차원이 다른 87이다.

지금까지 최고의 키보드의 기억으로 남아 있던
80말 90년대 초에 만져 보았던
휴렛패커드 작은 워크스테이션에 꽂혀 있던 키보드였다.
아무도 쓰지 않아서 실험실 한쪽 구석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던 그 키보드.
매우 인상깊은 키감이었다.

그 후로는 그런 키보드를 듣지고 보지도 못했는데,

리얼포스 87이 그 키감을 연상시킨다.
86은 55g이라도 상대적으로 무겁고 딩겅거리는 키감이라면
45+-5g 로 구성된 87은 사분사분 사각사각한 느낌이다.

86은 약간 걸리는 키감이라면
87은 그 걸리적거리는 감이 많이 줄었다.

만족하면서 쓸 것 같다.

딱한가지...
Cap-Lock indicating light 불빛이 파란색이란게 거슬린다.
고급이라면 휘도만 높지 않은 파스텔톤의 녹색 불빛이
indicator의 불빛으로는 좋다.

8,9,10,20만원대 다 써 봤지만
현재로서는 키감만으로는 이만한게 있을까 싶다.

Thinkpad 노트북 키감이 그렇게 좋다는데
내 느낌으로 나쁘지는 않다, 무난하다 수준이고,
키보드 레이아웃이 좋다는 것
다만 펜타그래프 방식으로는 86이나 87같은 키보드가 없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빠르고 전기 적게 먹고 소음 없고 이런 것이 최고이고,
컴퓨팅에는 모니터와 키보드,마우스가 접점이다.

직업적으로 키보드에 만족하고 싶다면 리얼포스 87추천한다.
그 이하로는 키보드로 취급하지 않게 되는 부작용은 있다.









2015년 8월 19일 수요일

노트북 윈도우 설치 후 CPU 사용률 낮고 느릴 때

Lenovo W520, Dell M4800 등

윈도우 7, 8, 10 설치 후

CPU 사용률은 낮으면서 아주 느리게 동작하는 경우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을 만날 때
답답하고 당혹스러울 것이다.

보통 새로운 윈도우 같은 OS를 설치하기 전
거기에 맞는 BIOS를 업데이트 하고
부팅순서를 바꾸고 진행할 것인데

해결책은 CMOS의 들어가서
Speed Step 부분을 한번 들ㄴ러줘서
모두 활성화 되어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따로 할 일은 없고 들러주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하니 해결 되었다.



reload cyclone character

↻ ↺® 🐚 🌀 🌀🌀

2015년 7월 30일 목요일

접이식, 접는 스마트폰 - Folding Smartphone

접는 스마트폰을 그려본 것...

실용적인 사이즈로 잘 디자인 되어서 나왔으면

Power point로 간단히 그려본 것.






2015-07-30 09:45 KST

2015년 7월 24일 금요일

삼성 Samsung 11k 2250ppi display 디스플레이 - 개발한다고 보고는 되고 있지만,

http://bgr.com/2015/07/11/samsung-11k-display/

2015년 7월에 보고되고 있는 디스플레이계에 도약정도의 뉴스는
삼성이 11k 2250ppi 스마트폰을 개발한다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몇년전을 보자.
2012,2013년 쯤, 2015년에는 4k UHD 스마트폰이 일반화될 것이라
많이도 떠들었었다.

지금은 2015년 어디있지?
Sharp가 5.5인치 3840x2160 시제품을 발표했을 뿐이다.

더 이전으로 가보면 지금은 OLED TV가 완연히 대중화 되었어야할 정도로
OLED 디스플레이 뉴스가 많았지만... 지금 보면 글쎄...

21:9의 경우 5120x2160의 두배가 10240x4320 이니까
11k면 아마도 16:9가 될 것인데 8k도 아니고 11k라니
맥락이 어찌되는 지 모르겠다.

게다가 스마트폰용으로 개발한다니...
이때까지 대부분은 스마트폰에 4k UHD도 필요없다 무용론을 펼치지 않았었나?

SS가 수익성도 없는 일에 먼저 나선적이 있었던가?
저 스마트폰은 도대체 용도가 뭘까?

2015년 6월 11일 목요일

IoT,IoE의 허구의 세계.

IoT,IoE의 허구의 세계.

공통인식체계 - 이것도 역시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생성된 것일까?
교육이다.
교육... 무엇을 가르치는가?로 진짜와 가짜가 나뉜다.
진짜는 무엇이냐?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사는 것이다.
실상에서 파생적인 인간문명자락은 제외된다.
가짜는 무엇이냐.
이름 붙이기 인간이 부여해 놓은 모든 것.
그 전단계의 의식의 흐름도 마찬가지.

IoT,IoE
인간문명생활의 파생적 응용
동기는 탐욕.
학자인척 하는 자들의 웃기는 소리.

잉여는 생겼는데 어떻게 쓰는 지 모르니...

인터넷으로 매체가 다양해져서 정보접속경로가 많아진
것을 더 확대한 것으로 보며
인간인식체계를 시각작용에 덧씌우는 작업일 뿐이다.

또하나의 도구일 뿐.

인간은 왜 기꺼이 정기를 낭비하는가?
혹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이 그것에 있지 않을까 해서.
원인 - 정보의 오류로 인한 그릇된 인식체계.

언제나 안식의 길을 찾을지...

2015년 6월 5일 금요일

양자점 태양전지

URL : 주소 복사가 안돼서 그냥 갈무리해둠

일본지식리포트
한일재단 일본지식정보센터[www.kjc.or.kr]
- 1 -
東京大學, SHARP「양자 dot형 태양전지」
세계 최초 이론적 변환효율 75% 달성
東京大學 荒川泰彦교수팀과 SHARP 연구그룹은 차세대 태양전지로
서 기대되는「양자dot형 태양전지」의 이론적 변환효율이 75%에 도
달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
□ 東京大學 荒川泰彦교수팀은 차세대 태양전지중의 하나인‘양자 dot
태양전지’의 이론적 변환효율 75%달성에 성공
ㅇ 東京大學 荒川泰彦 교수와 샤프의 연구그룹은 차세대 태양전지
인‘양자dot형 태양전지’의 이론적 변환효율이 75%에 도달한
다는 연구결과를 Apply Physics letters에 발표 (2011. 4. 25)
- 1997년에 Luque 등이 제시한 63%가 최고 이론값으로 알려졌지만, 양
자dot 태양전지의 밴드갭에 4개의 중간밴드를 설치하면 태양광
스펙트럼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변환효율이 최대 75%
가 되는 것을 컴퓨터시뮬레이션을 통해 밝혀냄
※ Tomohiro Nozawa and Yasuhiko Arakawa, Detailed balance limit of the efficiency of multilevel
intermediate band solar cells, Appl. Phys. Lett. 98, 171108 (2011); doi:10.1063/1.3583587
□‘양자 dot’배치를 최적화하여 기존의 태양전지에서는 사용 못한 적외
선광도 전기로 변환시켜 변환효율을 대폭 상승 가능
ㅇ 화합물반도체로 형성된 수나노 크기의‘양자 dot'를 빈틈없이 채
일본지식리포트
한일재단 일본지식정보센터[www.kjc.or.kr]
- 2 -
워 넣은 면을 여러 층 쌓아 올려 두께를 수십마이크로로 하여 양면
에 전극을 부착하여 변환효율을 높임
- 기존의 이론적 변환효율은 중간밴드 1개의 구조가 전제였지만양자
dot 태양전지의 구조 최적화를 실험적으로 검증
※ 현재 연구개발 중인 제3세대 태양전지: (화합물 태양전지) 구리(Cu), 셀렌(Se),
인듐(In), 갈륨(Ga) 등의 금속화합물을 이용한 태양전지; (집광형 태양전지) 렌즈를
이용해 태양전지에 집광시키는 시스템으로, 평면식과 비교하면 태양 전지의 사
용량이 적은 것이 특징이며,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실리콘 부족 해소책으로 기대되고
있는 태양전지
□ 시사점
ㅇ‘양자 dot형 태양전지’를 비롯하여 제3세대 태양전지 개발로 높
은 변환효율을 나타내는 태양전지의 개발 및 상용화가 이루어
진다면 재생가능에너지 중에 시설투자비가 높은 태양광발전
의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
- 태양전지 세계시장이 '09년말 2조엔 규모이지만, 조만간 10조엔 시장
으로 성장 예측
ㅇ 태양전지(태양광발전) 하나만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기에
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생산된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이차전지
(축전지)와 쌍두마차를 이루면서 산․학․연의 시스템적인 재생가능
에너지의 R&D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 함
자료 : 東京大學, ナノ量子情報エレキトロニクス硏究機構
日刊工業新聞(2011. 4. 11)

2015년 5월 27일 수요일

安貧樂道 안빈낙도

安貧樂道 안빈낙도
①구차(苟且)하고 궁색(窮塞)하면서도 그것에 구속(拘束)되지 않고 평안(平安)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
②가난에 구애(拘礙)받지 않고 도(道)를 즐김

사전적의미로는 위와 같은데
貧 물질적으로는 부족과 결핍을 뜻하나 심적으로는 없음, 빔이다.
집이 가난하다는 것은 재화가 없다는 말이다.


安貧樂道 편안히 비우고 도를 즐긴다.는 뜻이 된다.

편안히 비우지 못하면 도를 즐길 수 없다.
배든, 욕심이든, 물질이든 비우지 못하면 편안할 수 없다.

비울 때 갈망의 상태에 있으면 불안하다.
그때는 갈망의 인과를 한참동안 지켜보아야 한다.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사띠 sati ?

원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jgp&articleno=15781067&categoryId=15&regdt=20140606191052

사띠(sati / smṛti : 念)는 왜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염의 교설에 대한 재검토 -
조 준호

1. 들어가는 말
2 현재까지의 사띠 이해
3. 왜 사띠는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4. 마치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사띠(sati / smṛti : 念)는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체계에 있어 그 중심에 놓여있다.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과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그리고 팔정도(八正
道)로 구성되어 있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대부분의 수행도에 있어 사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념처는 물론 오근(五根)과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그리고 팔정도(八正道)에 각각 염근과 염력, 염각지 그리고 정염 등으로 구체적인 수행 항목으로 들어 있고 사정근(四正勤)과 사여의족(四如意足) 또한 그 내용에 있어 직접 ․ 간접적으로 사띠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띠는 모든 불교 수행에 있어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요즘에 들어서 더욱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해서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이러한 삽십칠조도품을 모두 아우르는 말로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도를 한마디로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사띠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바로 위빠사나는 물론 초기불교 전체의 실천적 행법을 적합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상이한 이해는 불교의 근본 수행도는 물론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에 대한 입장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때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 우리의 학계에서도 sati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도되어 그 이해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이전의 한 졸고에서 sati에 대한 번역어로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말을 제시하였다.1) 당시에는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나 이후 차츰 몇몇 연구가에 의해 새로운 주장과 함께 필자의 주장에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사실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옮기게 된 필자는 초기불교의 일반적인 교리적 분석에서 제시되었지만 구체적인 경전 근거는 생략되어 있다. 본고의 목적은 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한지를 빠알리경전은 물론 한역 아함 경전을 통해 그 근거와 이유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부수적으로 그 동안의 필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서 제기된 주장에 대해서도 검토해 본다.

Ⅱ. 현재까지의 사띠 이해

1. 고대 인도 종교 문헌
고대인도에서는 불교문헌 이외의 다른 문헌에는 smṛti / sati가 기억의 의미 말고 불교처럼 선정 수행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우는 아직 찾아 볼 수가 없다. 오로지 불교문헌만이 다른 인도문헌과는 달리 ‘기억‘의 의미로 볼 수 없는 수행도로서 좀 더 특별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초기불교 경전 상에 있어 sati가 기억이라는 의미로 설명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던 반면에 후기 주석 문헌으로 갈수록 산스끄리뜨 어원을 바탕에 둔 어휘 풀이가 늘어간다. 이는 논서나 주석 시대에 경전 주석에 있어 다분히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방법으로 일차적인 어의를 중심으로 설명해나갔던 경향에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일반의 sati의 일차적인 의미인 ’기억‘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는 한역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도 여러 역어들이 제시되다가 결국 ’생각’이나 ‘기억’을 의미하는 염(念)이나 억념(憶念) 등으로 정착된 이유와 맥락이 일치한다.

하지만 원래 불교 경전어는 산스끄리뜨가 아니었고 고대 중기 인도어에서 어느 때부터 산스끄리뜨화하면서 본래 sati의 의미와는 달리 산스끄리뜨 의미로 전와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염처수행에 있어 기억의 sati라는 말이 사용하게 된 하나의 가능성은 무엇일까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적절한 해석의 시도는 찾아볼 수 없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한 가설로서 고대 인도인들의 문헌의 보존과 전승 방식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바로 기억(smṛti)에 의존한 사자상승(師資相承)이었다. Veda 등의 바라문 성전은 물론 사문종교의 자이나교나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즉, 성현이나 경전의 가르침이 암송되어 기억 속에 항상 머물고 있었고 다시 그것을 상기(想起)한 상태에서 수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행의 지침은 항상 의식 속의 기억으로 마치 ‘객관적 대상’처럼 머물며 작용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더더욱 집중되고 뚜렷한 의식상태가 형성되면 기억 자체가 생생하게 대상화되어 마치 기억 자체가 저절로 떠올라 스스로 작용하는 것처럼 느끼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자연스럽게 바라만 보는 눈이 있었을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경문의 기억이 저절로 떠올라 작용하는 것을 바라보는 또다른 눈과의 적당한 거리가 형성되어 단지 ‘수동적으로 주의를 보내고 있는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 수행에 있어 ‘기억’이라는 말이 동시에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를 뜻하는 말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오취온(五取蘊)과 같이 자신의 존재 상황이 깊은 선정의 단계에서 마치 생생한 기억처럼 눈앞에 저절로 선연하게 떠올라 있는 것에 비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경구의 기억을 능동적으로 변조를 시도하지 않은 채 단지 수동적으로만 대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는 사념처 수행에 있어 단지 바라만 보고 있는 상태로서 sati가 확립된 상태를 말하는 맥락과 비슷한 상황으로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억’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특히 불교의 전문 수행 집단에서는 수행도의 성격인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로까지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원과 관련해 여러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sati를 단순히 기억의 뜻으로 한정할 수 없는 점은 이후 논의의 여러 방면에서 잘 나타나겠지만 가장 간단한 이유 중의 하나는 신념처의 안반념(安般念 또는 出入息念 : ānāpānasati)수행과 관련하여 ‘호흡을 기억한다’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영역과 한글역
현재까지 서구 인도학 불교학계에서 sati를 mindfulness로 옮겨질 수 있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아직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번역 과정에 있어 고심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있으나 그럴듯한 분량으로 논의되어있지 못하고 또한 그러한 논의조차 별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이미 한자문화권의 불교전통에서는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도 이와 비슷하게도 여러 역어들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가장 이른 시기에 있어 수의(守意)와, 의지(意止) 그리고 억념(憶念)과 염(念) 등으로 옮겨지다가 최종적으로는 염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이 말의 한자 뜻으로 sati에 대한 이해를 해 왔는데 우리나라에 있어 한글역을 ‘생각’이나 ‘기억’으로 옮기는 이유가 되었다.

영어권의 서구에서는 sati에 대한 역어로 대략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memory, awareness, recognization,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recollecting, remembering, heedfulness and mindfulness 등인데 여기서는 mindfulness라는 역어가 현재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그리고 영어권 이외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한글역에서도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에도 어원적으로 유사한 느낌을 갖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연유한지도 모른다.

현재 국내에 있어 sati를 한역 염(念)에 따라 ‘생각’이나 ‘기억’이라 옮기가 하면 일부에서는 ‘알아차림’, ‘주시’, ‘관찰’, ‘마음챙김’‘마음지킴’ 그리고 ‘각성’ ‘마음 새김’ ‘마음집중’, ‘마음모음’ 등으로 다양하게 옮기고 있다. 이 가운데 ‘마음챙김’ 경우 현재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용어이다.

필자의 ‘수동적 주의집중’에 반해 ‘마음챙김’에 대한 설명으로 챙긴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sati를 “대단히 능동적인 마음의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렇게 옮길 수 있는 경전적 전거나 교리적 설명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 마음챙김과 관련한 sati 이해 가운데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선정 수행이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는 선정수행과 무관한 행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사선의 기초 없이도 sati를 통한 Vipassanā 수행이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의 많은 곳에서 sati는 정학(定學)에 포함시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주목하고 있지 않다.

다음으로 ‘마음챙김에 이어 거의 비슷한 말로 ‘마음지킴’이라는 한글역이 있는데 이는 졸고의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역어에 대한 재검토에 따른 반론 형식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문제는 ‘마음지킴’ 역어에 대한 정의는 하고 있지만, 초기 경전에 따라 납득할 만한 구체적인 전거 제시가 없고 그에 따른 교리적 분석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A. D. 5세기에 작성된 후대 논서인 Visuddhimagga의 비유를 통해 ‘마음지킴’으로 옮길 수 있음을 들고 있다가 이후 이같은 비유를 초기경전에서 찾아 제시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처럼 경전에서 sati를 문지기로 비유한 것을 바로 sati의 정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문제이다. 사실은 경전에서 sati에 대한 많은 비유가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문지기와 같은 지킴의 성격이 이후의 다른 sati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성격에 있어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맥락에서 ‘감관의 문을 지키는 것(indriyesu guttadvāro)’을 들고 있으나 사실은 초기불교의 많은 경전에서 ‘sati-sampajaññā 수행’과 다른 영역의 행법으로 항상 나열되고 설명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음지킴’ 또한 ‘마음챙김 같이 작위적 성격으로 sati를 “의지적 노력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교리상의 상충된 문제는 이후에 자세히 검토되어질 것이다.

다음으로 sati를 ‘알아챔’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전문 학술 논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초기불교내의 용어에 대한 엄격한 개념차를 간과한 것으로 sati와 sampajañña는 그 내용상 분명히 구분되어 있음은 이후에 잘 설명될 것이다. 더 나아가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 모두 sati를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즉 작위의 개념으로 보는 것과 같이 ‘알아차림’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sati와 Vipassanā를 인위적이고 조작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Ⅲ. 왜 사띠는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이처럼 sati의 정의는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고 최근에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경전의 근거를 들어 이에 대한 자세한 교리적 논증은 없었다. 여기서는 이전에 다시 필자에 의해 이전에 제시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역어로 옮기게 된 몇 가지 경전의 근거와 교리적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역어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검토를 해보고자 한다. 그러기전에 먼저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정의한 이전 졸고의 압축적인 문구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선정을 통해 지극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계속되면 언제부터인가 사유나 감정이 능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러면서 마음은 분명하게 깨어있는 상태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念이란 자신을 포함한 일체에 대해 의식적으로나 능동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은 상태가 되어 단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대상화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것은 이후의 Vipassanā 수행을 위한 단지 바라볼 준비 태세가 완비되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念 그 자체로서 바로 觀을 의미하지 않는다. 念의 작용적인 측면을 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念을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스스로의 사유와 감정,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능동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이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의식상에 있어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念 즉, sati는 일체(五蘊․十二處․十八界)를 대상화시켜 바라 볼 준비 태세를 갖춘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옮기면서 생략한 구체적인 경전 근거이며 다 자세한 교리적 분석으로 큰 의미가 있다. 왜 ‘수동적 주의집중’ 역어가 적절하지를 빠알리경전은 물론 한역 아함 경전을 통해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본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현재 일부 연구들의 이해와는 어떠한 큰 차이가 있는지를 또한 검토해 본다.

1. 삼염주(三念住 : tayo satipaṭṭhānā)를 통해 본 sati의 성격
사념처를 사의지(四意止)나 사념주라 한역하였듯이 삼염주 또 한 삼의지(三意止)로 한역되었는데 사념처와 정확히 같은 용어이다. 그런데 sati 이해와 관련하여 삼염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념처 수행과 관련하여 소홀히 해온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는 초기불교 이후 차츰 불타관의 상승과 함께 다른 제자들과 함께할 수 없는 붓다에게만 있는 특유한 공덕으로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 주어지는데 그 가운데 삼념주를 넣었기 때문에 사념처 수행과 관련한 설명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초기경전에서는 삼념주를 붓다만의 공덕으로 명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내용상 수행에 뛰어난 제자들도 있을 수 있는 덕목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를 말하는 경전에서도 성인(聖人)이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 외의 경전의 많은 곳에서 붓다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덕목이 강조되는 가르침이나 사례들이 나타나거나 이러한 덕목을 지닐 것이 권장되기도 한다. 따라서 초기 빠알리 경전을 바탕한 불타관의 연구에 의하면 본래 붓다 개념과 그의 수승한 제자들 간에 차이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없었던 것으로 증명된다.

삼염주는 3가지 종류의 sati와 sampajāna 상태에 머무름을 말하는데, 첫째 염주는 사람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잘 따르더라도 기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sati와 sampajāna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하고, 둘째 염주는 그 반대로 신봉하지 않고 불신하여도 침울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셋째 염주는 양자 모두에도 기뻐하거나 침울해 하지 않고 sati와 sampajāna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sati 확립의 경지는 그 어떠한 반응에도 초연하여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한 상태(upekhā)와 같은 선상의 심리적 지경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upekhā와 sati 그리고 sampajāna와 언급되는 제삼선과 제사선과도 같은 선상의 심리적 지경임을 나타내준다. 즉 삼염주에서 기쁜 마음(歡喜)이나 침울한 마음(憂慼)을 나타내는 attamata와 attamanata는 제사선(第四禪)의 기쁨과 근심(somanassa-domanassānaṁ)과 그대로 동의어로 사용된다. 제사선에서 “행복감이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지고, 이전의 기쁨과 근심(somanassa-domanassānaṁ)도 제거된다. 그리하여 괴로움도 그치고 행복감도 그친 완전한 평정심(upekhā)에 의한 sati가 청정해진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가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삼염주에 나타나는 사(捨)는 그에 대응되는 빠알리 경전의 upekkha로서 지극히 초연해진 평정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다시 제사선의 사(捨)와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고 삼염주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는 평정의 상태에서 sati와 sampajāna에 머무른다“하여 염주(sati의 확립)의 상태가 제사선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음을 두 경구의 비교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한역에서 상념상지(常念常智)라 했던 것은 말 그대로 sati는 어떠한 심리적 상태가 단속적이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임을 간파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sati 확립’ 상태는 제사선의 심리적 지경과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삼염주에서 sati는 지극히 평정된 상태(upekhā)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적 반응을 쉽게 일으키지 않는 초연한 대응으로서 sati는 제사선의 지경과 일치하여 나타난다는 점이다.

2. sati와 sampajāna 개념 차이를 통해
흔히 sati와 sampajañña의 개념을 같은 것으로 잘못 보는 경우는 물론 양자의 뜻을 애매하게 혼용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러한 개념상의 혼란으로는 sati는 물론 sampajañña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 하지만 다음의 [사띠 경(Sato sutta)]를 통해서 sati 와 sampajāna가 동의어가 아닌 서로 간에 개념상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잘 알 수 있는데, 이로써 양자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주어진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Sato와 Sampajāno에 머물러야 한다. 이러한 것이 그대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Sato에 머무를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ātāpī)’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sampajāno)’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 (satimā)’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법에서 법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어진 상태에서이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비구의 Sampajāno는 무엇인가? 비구는 나아갈 때나 뒤로 물러설 때나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다.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 (팔, 다리
를) 구부리거나 펼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다. 가사(겉옷)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먹거나 마시거나 먹고 난 후에나 씹고 맛볼 때에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고 있을 때(sutte)’나 (잠에서) 일어나있을 때에도 그리고 말하거나 침묵할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다.”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점은 이처럼 독립된 한 경전에서조차 sati와 sampajāna에 대한 교설이 나누어 제시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sati는 어디에서나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와 같은 문구가 정형적인데 이 때 ātāpī는 물론 sampajāno까지 일렬로 묶여 서술된다. 이 때문에 팔정도의 정념의 경우에서처럼 이같은 문장 전체를 통해 sati 개념을 이해하려다 보니 도대체 어디까지를 정념의 범위로 한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물론 다른 용어들과의 갖가지 개념상의 혼란이 초래되어 왔다. 심지어는 sati의 작용적 측면으로서 anupassī의 Vipassanā와 sati를 같은 개념으로 혼용하여 sati는 바로 Vipassanā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다음의 설명은 그러한 개념의 구분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사념처의 정형구인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에서 anupassī는 kāye kāyā에 의한 작용적 측면으로 Vipassanā를 말한다. 즉 anupassī의 Vipassanā을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필수조건이 기본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첫째, ātāpī 둘째, sampajāno 셋째, satimā이다. 달리 팔정도로 다시 세분하면 ātāpī의 경우 정정진에 해당하고 sampajāno는 정정 그리고 satimā는 정념이 그것이다. 그리고 anupassī는 법염처의 사성제와 관련해서도 정견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 가지 가운데 원래 경전에서 지시하는 sati의 범위는 kāye kāya까지 만이라는 것이다.

문장 구조상 sati는 ātāpino sampajānā 뒤에 위치하여 kāye kāya를 다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념처 설명하는 또 다른 정형구에서 kāyekāya 말이 사용되면 ātāpino sampajānā는 생략되지 않지만 sati라는 말은 생략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즉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에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kāye kāya 자체가 sati라는 말을 의미하기에 여기서는 sati라는 말의 생략과 함께 후반부의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대신 “ekodibhūtā vippasannacittā samāhitā ekaggacittā kāyassa yathābhūtaṁñāṇāya”가 부가되고 있으며 여기서 사념처 수행에 있어 선정에 대한 전문용어들이 반복적으로 부가되어 강조된 것이 큰 특징이다.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다.

'몸에서 몸을 따라 관하는데 머문다. 이는 ‘오롯한 정진력(ātāpī)‘과 sampajāna(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전일(專一)하고, 투명하게 청정해진 마음, 삼매에 든 심일경(心一境) 상태에서 몸의 여실한 지견(知見)을 위한 것이다.'

이 경구는 sati 확립과 관련한 vipassanā 수행에 있어 높은 수준의 선정삼매를 배제한 이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구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sati의 생략은 kāye kāya 자체가 바로 sati임을 지시함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수 ․ 심 ․ 법염처에서도 동일하게 각각 Vedanāsu vedana, Citte citta, Dhammesu dhammā가 sati를 의미하는데 이를 각각 ‘몸에서 몸을 / 느낌에서 느낌을 / 마음에서 마음을 / 법에서 법’으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런데 sati의 의미는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쓰면서 앞 말을 처소격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다. 즉 이러한 표현의 경우는 빠알리 경전에서 매우 드문 예인데 이러한 표현이 목적하는 바는 몸과 몸이, 느낌과 느낌이, 마음과 마음이, 그리고 법과 법이 일정한 거리를 갖고 서로 대응해 마주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심신의 활동상이 분명히 대상화 또는 객관화가 되어 있는 상태라는 의미에서 “대상화된 몸 ․ 대상화된 느낌 ․ 대상화된 마음 ․ 대상화된 법”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30) 사실 마주 대응해 있는 상태가 될 때만이 이후의 작용으로서 Vipassanā가 가능한 것이다. 이로서 sati의 개념이 대체로 드러난다 할 것이며 다음으로 Sampajāno의 의미이다.

3. sampajāno를 통해 본 sati의 성격 - sati는 반드시 삼매 상태가 바탕되어 있다.
sati는 이처럼 관찰 대상과의 형성된 ‘거리 두기‘라고 할 때, Sampajāna는 앞의 경문을 통해 볼 때 일체의 신체적 행위에 대한 ’ 생생한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전에서 sampajāno에 대한 설명은 이같은 내용의 범위 안에 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과 같은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생생한 깨어 있음인데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할 점은 ‘잠자는 동안(sutte)’에도 sampajāna 상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sampajāna상태란 사실 대단히 높은 성성(惺惺)한 지경의 선정 상태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잠자는 동안에도 잠자고 있다는 사실에 생생히 깨어있음은 보통의 의식상태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선정의 성성한 지경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대상과의 거리를 갖고 마주 대응하여(sati), 생생하게 깨어 있을 때(Sampajāno)만이 (삼법인에 대한) 위빠사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Sampajāno는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로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철저하고 투철한 각성(覺醒) 상태를 의미한다.31) 다시말해, ‘분명한 각성상태‘이며 ’오롯하게 깨어있어 지극히 성성(惺惺)한 지경으로 이러한 ’생생한 깨어 있음‘은 후대 선가의 내외명철(內外明徹)과 비견될 것이다. 다시 취침 상태속에서 까지 Sampajāno라는 것은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경지와도 또한 비견될 것이다. 다시 이는 sati와 Vipassanā를 설하는 한역 [염처경(念處經)]에서도 이러한 지경을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비구는 안으로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 한다. 밖으로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한다. 염(念)을 세워 몸이 있고 지(知)가 있고 견(見)이 있고 명(明)이 있고 달(達)이 있다. 소위 이것을 비구가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 하는 것이다. 다시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과 같이 관하는데 있어 광명상(光明想)을 염하여 잘 받아 지녀 염(念)한 바를 잘 억(憶)하기를 앞과 같이 뒤에도 또한 그러하고 뒤와 같이 앞도 또한 그러한다. 마찬가지로 낮과 같이 밤도 그러하고 밤과 같이 낮도 그러하고, 아래와 같이 위에도 또한 그러하고 위와 같이 아래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처럼 뒤바뀌지 않고 , 다음에는 얽매임이 없이 광명상을 닦아 마음은 마침내 어두움에 덮히지 않는다."

한역의 광명상(光明想)에 대한 빠알리어는 āloka-sañña나 āloka-saññī이다. 깨어있음이 밝은 빛과 같은 상태로서 경전의 많은 곳에서 오개(五蓋) 설명 시 sati-sampajāno를 수식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빠알리 경전 또한 sati와 sampajāno와 관련한 맥락에서 분명히 '삼매 수행(samādhi bhāvanā)'의 범위로 설명하고 있다.33) 이러한 경구를 통해 볼 때 후대 선가의 내외명철(內外明徹)의 표현에 있어 내외는 물론 더 나아가 전후와 밤낮 그리고 상하 등 일체에 있어 밝은 빛과 같이 뚜렷하고 분명하도록 한역 아함경이나 빠알리경은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삼매경(Samādhisutta)]에서도 수념처 확립으로 인한 Vipassanā 설명 시에도 sampajāno와 sati는 삼매의 범위와 내용 자체로 설해진다.

다음으로 sampajāno와 sati의 성격을 제삼선과 사념처의 정형구를 들어 다시 확인해 보자.

“희열감이 사라지는 것으로 평정한 마음(upekha)과 sati와 sampajāno에 머문다. 그러면서 온 몸으로 행복감을 느끼면서, 성인들이 말하는 ‘평정한 마음과 念을 지니고 행복감에 머문다’라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는 삼염주의 내용과 일치하고 다시 사념처의 정형구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ātāpī)‘과 sampajāna(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sati의 상태에서이다.”

이렇게 제삼선과 사념처의 정형구에 sati와 sampajāno가 각각 언급된다. 그런데 사념처에서는 삼염주와 달리 “평정한 마음(upekha)이 생략되어 있음이 다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경구는 사념처 수행이 기본적으로 제삼선과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sati의 사념처 수행과 관련한 선정의 수준은 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초기경전의 이른 층에서부터 sampajāno는 sati와 함께 계정혜 삼학 가운데 정학으로 선정을 나타내는 말로 분명히 한정적으로 명시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이처럼 sati 이해에 있어 sati가 선정의 지경 속에 있음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이에 대한 중요성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 반면에 이를 간과하고 sampajāno를 선정 밖의 개념으로 보고서 선정의 바탕이 없는 Vipassanā의 주장은 물론 낮은 초입단계의 선정에서도 가능함이 주장되여 왔다. 그러한 입장에서 sampajāno를 단지 일상생활에서의 행동거지를 ‘알아차리고’ 감지하는’ 정도의 인지활동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4. 마치 앉아있는 사람이 누워있는 사람과 마주하듯,누워있는 사람이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하듯
다음으로 이러한 sati의 정의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경전은 다름아닌 사염처를 말하는 빠알리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에 대응되는 경 중아함의 [염처경]과 다른 빠알리 경을 통해서이다.

'비구는 안으로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 한다. 밖으로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한다. ‘염(念)을 세워 몸이 있고(立念在身)’ 지(知)가 있고 견(見)이 있고 명(明)이 있고 달(達)이 있다. 소위 이것을 비구가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 하는 것이다. 다시 비구는 몸을 보는데 있어 몸같이 한다. 비구여, 잘 받아들여 서로 마주 보고(또는 마주하여 보는 대상을 단지 느끼고) 염(念)한 바를 잘 억(憶)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있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보듯이, 누워있는 사람이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보듯이 해야한다. 이와같이 비구는 잘 받아들여 서로를 마주 보고 염한 바를 잘 억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한다.'

이러한 비유는 너무나 극명하게 sati의 성격과 개념을 잘 보여준다. 즉,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마치 어떤 사람이 있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보듯이, 누워있는 사람이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보듯이 해야한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1:1 거리 두기’나 ‘1:1 간격 형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맑은 거울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입념재신(立念在身)은 ‘sati의 확립(satipaṭṭhāna)’을 말하여 몸에서 몸으로 ․ 느낌에서 느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법에서 법으로’으로 대상화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좀 더 부연하자면 대상과 직면한 ‘대칭적(對稱的)주의집중’으로 Vipassanā는 시작된다.

5. sati가 동사보다도 형용사(satimant나 satimā)와 명사로만 쓰이는 이유
이러한 맥락에서 또한 필자의 염에 대한 앞의 인용문 가운데 “念 그 자체로서 바로 觀을 의미하지 않는다. 念의 작용적인 측면을 觀이라 할 수 있다.”와 관련하여 sati는 동사보다도 주로 형용사(satimant나 satimā)와 명사로만 쓰인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sati의 상태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수심법(身受心法)을 마치 거울과 같이 생생하게 대면해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에 형용사 아니면 그러한 상태의 확립을 결국 명사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동사로의 쓰임새는 찾아볼 수 없다. 동사가 되면 작용적 측면이 되어 곧 Vipassanā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의만 집중해 있는 상태의 표현만이 가능하고 주어나 목적어의 움직임과 같은 동사적인 설명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sati가 의미하는 바가 능동적으로 쫓아서 알아차리거나 보거나 집중하는 것이 아
니라는 것이다. ‘수동적 주의집중’ 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상태에 대한 최선의 말로 동사적인 표현이 배제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sati를 담는 동사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 정지 또는 정적인 말로 ‘머무름(viharati)’이 항상 쓰이는 맥락도 이러한 이유이다.

6. 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hapetvā의 의미는 무엇인가?
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hapetvā은 사념처 수행을 설명하는 도입부에 항상 공한처 또는 나무 아래서의 좌선 수행과 함께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 앞에’라는 뜻의 parimukha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원적인 분석을 하자면 pari + mukha로 pari는 ‘~의 주변에’라는 의미와 mukha는 얼굴이나 입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여러 종류의 한역에 대한 해석과 함께 현대학자들에 의해서도 무성한 추측성 의견들이 많이 대두되었다. 초기불교 경전의 어디에도 무엇을 지시하는지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빠알리 논장이나 후기층의 경전에서는 ‘코 끝에’ 나 ‘입 주변에’ 또는 양 사이인 인중에 등으로 보는 설명이 있고 이에 따라 현재 빠알리 불교권의 수행법 지도에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sati 이해를 통해 보면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는지 쉽게 풀릴 수 있다. 즉, sa
tiṁ upaṭṭhapetvā이라는 구절에서 parimukhaṁ이 뜻하는 바는 바로 몸에서 몸(kāye kāya), 느낌에서 느낌(vedanāsu vedanā), 마음에서 마음(citte cittā) 그리고 법에서 법(dhammesu dhammā)의
‘서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몸과 몸이, 느낌과 느낌이, 마음과 마음이 그리고 법과 법이 대면(對面 )또는 마주 직면(直面)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7. 추수철과 추수 후의 목동의 소나 염소, 양들 돌보는 것에 대한 비유를 통해
마찬가지로 sati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는 재미있는 비유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에는 현재에도 들판에 소를 방목한다. 소 떼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과 함께 가끔 논밭에 들어가 작물을 뜯어먹는 경우를 보게 되고 이를 황급히 몰아내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Dved hāvitakka Sutta 경에서 추수 전과 추수 후의 목동이 소를 돌보는 것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가 대비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여기에 sati의 수행이 비유된다. 즉 곡물이 여문 추수철에는 소들이 논밭에 들어가 뜯어먹지 않도록 바짝 가까이에서 신경을 써서 논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채찍으로 치고 때려 막아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밭의 주인으로부터 화를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반면에 똑같은 상황에서 사띠 수행(satikaraṇīya)의 언급과 함께 추수 후의 일로 비유 ․ 설명하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비교는 sati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는데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비유하자면 여름의 마지막 달에 모든 곡물을 수확하여 마을로 거둬들인 후 소치는 자는 나무 아래나 공터에 머물면서 소들을 지켜 보는데(rakkheyya) 있어 ‘여기 소들이 있다’라고만 주의를 집중한다(satikaraṇīyam). 비구들이여, 그리고 다시 이와 같이 ‘여기 모든 것들이 있다’라고만 주의를 집중한다.”

추수 전처럼 소들이 논밭에 들어가 뜯어먹지 않도록 가까이 바짝 신경 써서 채찍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아래나 공터에 머물면서 단지 소들에 ‘일정한 거리만을 유지한 채 집중’한다는 것으로 sati 수행이 언급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마치 곽암(廓庵)의 '심우도(尋牛圖)’의 한 장면을 보는듯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켜본다’(rakkheyya)라는 말이 사용되었어도 추수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국에서의 지켜봄이다. 이 부분은 앞에서 sati를 ‘마음지킴‘ 등으로 역하면서 “의도적이고 의지적 노력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여기 소들이 있다’고 할 정도만 집중한다(satikaraṇīyam)는 것은 바로 ‘주의의 수동성’을 말한다. 그리고 satikaraṇīya에서 karaṇīya라는 단어 자체가 어근에 수동적 의미를 담는 수동분사라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Satipaṭṭhāna Sutta 등에서의 사념처 수행 즉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중요한 정형구인 “몸이 있다’라고 하는 수동적 주의 집중 상태가 확립되어 단지 그러한 사실을 알뿐이고 단지 주의 집중만을 뚜렷하게 할 뿐이다.”42)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한다 할 때’ anupassī라는 말의 anu라는 접두사가 ‘‥을 따라’ 수동성과 소들을 논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채찍으로 ‘‥을 쫒거나’, 들어간 소들을 ‘찾아내는’ 뜯어먹지 않도록 하는 소치기와 대비된다. ‘쫒고’, ‘찾는’ 능동성과 단지 간격 형성에 ‘따른’ 수동성의 차이이다. 여기저기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소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rakkheyya)’ 쫒거나 찾지 않고 단지 거리를 가지고 응시할 뿐이다. 지켜보는데 있어 그저 지켜보는 수동성의 지킴을 의미한다. 이는 대단한 수준의 능동성과 의도성을 강조한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 등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로서 sati 수행은 추수 전이 아닌 추수 후라는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능동적으로 조절과 제어 그리고 억제가 따르는 계학(戒學)과 함께 정학 수행의 완성단계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8. 높은 탑의 정상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의 비유
앞의 비유는 수평의 상태에서 간격 유지를 보여주는 반면 다음의 비유는 수직의 상태에서 마찬가지로 sati 수행의 성격과 수준을 잘 나타내준다.

‘sati의 확립‘이라는 높은 건물의 정상에 올라가 보니 내가 이전에 유신견(有身見)에 사로잡혀 집착하고 즐거워했던 그들을 본다.'

사념처 수행은 상당히 높은 지경으로 올라간(āruyha) 상태에서 아래의 군상들과 간격을 유지한 채 내려다본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올라갔다는 의미는 다른 행법에 비해 사념처가 상대적으로 높은 단계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와 비견되어 자신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유신견(有身見 : 실체론적 유아론)에 빠져있는 아래의 다른 사람들을 본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념처 가운데 심념처에 해당시킬 수 있다. 밖으로 타인의 마음에 탐욕이 있는지 없는지, 성냄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리고 높고 큰마음인지 아닌지 등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염처이다. 낮은 곳에서는 높은 곳을 올려다보더라도 볼 수 없는 것이 있으나 높은 곳에서는 낮은 곳이 한 눈에 포착된다는 것 또한 사념처 행법의 범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도 ‘지켜 본다’ 또는 ‘바라본다’가 근접해 일일이 ‘지키고 챙기는’ 식의 관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유지된 간격에서의 바라봄이라는 것이다.

9. sati 행법의 가장 결정적인 경전적 근거에서 핵심은 ‘단지 바라 볼 뿐’이다.
여기서는 sati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경전적 근거는 아래 의 경구이다. 이 경전의 일부는 이전에 필자에 의해 sati를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결론 내리게 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경전 근거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에 의해 필자의 sati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이 부분을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 중요성을 재인식하기 위하여 다시 이전에 인용되지 않았던 후반부까지 모두 인용하여 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말루끼야뿟따여, 그대가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안다고 하자. 이때 보는데 있어 단지 바라 볼 뿐이며(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 듣는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지각하는데 있어 단지 지각할 뿐이며, 아는데 있어 단지 알뿐이다. 그러므로 말루끼야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는데 있어 단지 바라보게 되고, 듣는데 있어 단지 듣게 되고, 지각하는데 있어 단지 지각하고, 아는데 있어 단지 알게 될 때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대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때, 너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루끼야뿟따여, 그것 안에 있지 않을때, 그대는 이것과 이것의 너머 혹은 그 사이에도 너는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苦)가 다하는 길이다.”

이러한 세존의 요긴한 가르침을 받은 늙은 말루끼야뿟따는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간략하게 말씀하신 바를 다음과 같이 (다시) 풀어 이해해봅니다”

“만약 색(色)을 봄에 있어 sati를 잃으면 좋아하는 색상을 보고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좋아하는 대상에 탐욕을 느끼고, 그것에 집착하여 머물게 된다. 그러한 느낌의 치성과 집착에 머물러 수많은 색상의 일어남과 탐욕과 진심(嗔心)이 생기고 그의 마음은 더욱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이같은 고통이 쌓이면 열반은 더욱 멀다고 한다.․․․(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된다.)
….
만약 색을 보는데 patissato(sati)가 있어, 색을 보는데 있어 탐욕이 없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없고, 단지 느낄 뿐이어서 색에 대한 탐욕을 느끼지 않고 집착이 없다. 만약 그가 이와 같이 하게되면 (색을 보고 단지 보게 되고 탐을 일으키지 않으면) sati에 머물러 두루 행하게된다. 그래서 고통이 집적되지 않고 열반은 가까워져 있다고 한다.․․․(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된다.) ….”

sati가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붓다에 의해 그 진수가 먼저 시설되자 이를 받아 말루끼야뿟따는 재확인하고 증명 받는 형식으로 경이 구성되어 있다. 먼저 붓다는 보는데 듣는데 냄새 맡는데 맛보는데 접촉하는데 그리고 인식하는 데 있어 그 어떠한 것도 싣거나 개입시키지 않고, 첨가하지 않고, 단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인식해야 그 어떠한 경계에도 떨어지지 않고 궁극적으로 고의 소멸로 갈 수 있다는 요긴하게 설한다. 이에 말루끼야뿟따는 스승의 가르침을 게송으로 그 핵심을 다시 정리하는 것으로 인가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부연하는데 다름아닌 sati라는 말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으로 sati의 성격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하면 모든 것에 보는데 있어 단지 바라 볼 뿐이며, 듣는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냄새 맡는데 있어 단지 냄새를 맡고, 접촉하는데 있어 단지 접촉할 뿐이며, 아는데 있어 단지 알 수 있는 것이 sati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보는 데에 있어 단지 바라볼 뿐이다’(ditthe diṭṭhamattaṁ bhavīssati)에서 ditthe는 처소격으로 바로 다음의 diṭṭha와 말이 반복된 것은 바로 사념처의 정형구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에서 kāye kāya 등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다시 바로 다음의 문구인 matta‘는 단지 ~뿐’ 뜻으로 이 또한 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의 핵심적인 항목마다 계속 반복되는 구절로서 “‘atthi kāyo 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 eva ñāṇa-mattāya patissati-mattāya"(‘sati의 확립으로 여기에 몸이 있다’라는 정도의 사실을 단지 알뿐이고 단지 주의 집중만을 할 뿐이다.)와 정확히 일치한다. 더 나아가 patissato라는 말이 양쪽 모두에서 동시에 쓰였는데 sati와의 동의어이다. 여기서 sati가 있고 없고의 기준은 단지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는 것에 그치지 못하고 탐욕을 일으켜 집착하는 유전연기 구조로 가느냐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로서 사실 sati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10. Sati와 ‘기억’의 문제
사념처 수행에 의해 천(千)의 겁(劫)을 기억한다할 때 동사 anussarati가 사용된다. 이에 대한 명사는 anussaraṇa라는 말로서 같은 문장 내에서 수행도의 염인 sati와 정신 작용의 기억이 어떠한 용어상의 구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경전의 많은 곳에서 설해지는 삼명의 숙명지(宿命智 : pubbenivāsānussati-ñāṇa)에서 과거생의 기억은 깊은 선정 상태에서 회상되는 것으로, 여기서는 anussati라는 명사형으로 수행도와의 sati라는 말과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

몸의 sati를 설하는 경인 Kāyagatāsati Sutta경에서도 ‘세속과 관련된 기억과 의도가 사라진다’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anti)할 때에도 기억이란 sara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수행도로서 sati와 함께 호환되는 용어는 anussaraṇa나 anussati 등이 아니라 아래에서 설명
될, 다름 아닌 sati의 성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경전에서 언급되는 patissato나 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의 patissati라는 말이다. 즉, 일상 활동 시의 기억과는 달리 깊은 선정의 상태 속에서 떠오르는 과거로서 기억과 마주해 있거나 선정 상태에서 드러나는 대상과의 직면 상태를 지시할 때는 구분된다. 결론적 말해, 수행도의 기억의 sati와 단순한 의미 또는 일반적인 의미의 ‘기억’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단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다음 경구는 sati의 동사형인 sarati(기억하다)와 함께 염근(念根 : satindriya)의 설명 시 앞의 anussarati가 쓰인 예를 통해 기억과 관련한 sati 수행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염근(念根)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성제자(聖弟子)는 sati와 nepakka을 가지고 지난 과거에 말하고 행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회상한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염근이라 한다 .'

기억이란 과거에 지었던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과거가 떠오는 것이 기억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일상사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필요에 의해 잊었던 것을 쫒아 일부로 또는 억지로 상기(想起)하거나 회상(回想)한다는 그러한 의미의 기억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떠오른다’는 말 표현에서처럼 삼매의 상태에서 저절로 일어나고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말한다.

불교의 업보설에 따라 현재는 항상 과거에 바탕되어 있다. 과거와 단절한 현재는 없다. 항상 과거는 현재의 신구의(身口意)라는 통로로 끊임없이 나타난다. 우리의 일상이란 과거의 기억에 끊임없이 재반응하고 과거에 말려있고 따시 휘말리는 현재가 반복될 뿐이다. 그렇지만 수행도의 sati는 선정 속에서 과거의 것이 끊임없이 현재화되어 떠오르되 거품처럼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것은 떠오르는 기억들을 단지 마주하여 지켜볼 뿐 그 어떠한 재반응도 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따라서 과거에 말려들거나 끄달리거나 또는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즉 무심히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이 요구된다. 이러한 환경이 바로 제사선과 같은 높은 수준의 선정 상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sati 수행은 과거의 기억에 대해 더이상의 재해석이나 조작이 가해지지 않고 다만 무심한 대응만을 하는 것으로서 과거를 정화시켜 현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 할수 있는 수행도이다.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anussarati로서 sati 수행을 설명하는 것은 같은 Nikāya라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대로 극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이다. 이러한 경문은 초기경전에서도 이른 층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늦은 층과 논장에서만 주로 발견된다. 따라서 이는 논장의 성립 시와 맞닿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전의 구성양식이나 내용을 볼 때도 후기층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논장 시대의 부가물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anussarati를 과거형으로 사용하는 것을 통해 어떻게 수행도로서의 sati가 나타나는가를 잘 보여준다.

Ⅵ. 마치는 말
본고는 필자가 제시한 sati의 정의로 ‘수동적 주의 집중’을 경전을 통해 교리적으로 증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기존에 제시되었던 역어들의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고 비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까지의 분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 ․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삼염주의 성격에서 볼 수 있듯이 ‘sati 확립’ 상태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가운데 지극히 초연한 평정심이 지속되는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그 내용 상에 있어 제삼선에 이어 제사선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동적 주의 집중’은 ‘무심한 주의집중’ 또는 ‘취사(선택)없는 주의집중’이나 ‘재반응없는 주의집중’으로도 바꿀 수 있다.

둘째, sati와 sampajāna는 분명한 개념상 차이가 있다. 먼저 sati는 ‘몸에서 몸, 느낌에서 느낌, 마음에서 마음 그리고 법에서 법과 같이 ‘1 : 1 거리 두기의 확립’만을 한정한다. 다시 말해, 대상과 직면한 ‘대칭적(對稱的) 주의집중’이라는 말로도 통하는 말이다.

셋째, sati와 달리 sampajāna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선정 상태로서 잠 자는 동안에도 잠자고 있음을 각성하고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sati는 밝은 빛처럼 밝게 깨어 있는 분명한 상태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이로서 sati는 높은 선정상태의 sampajāna와 항상 함께하고 또한 삼염주나 제삼 ․ 사선에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초연한 ‘평정심(upekhā)’과도 함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sati와 sampajāna 그리고 upekhā는 세발 달린 솥과 같은 상의상관 관계로 볼 수 있다.

다섯째, 경전에서 sati 확립의 비유는 “마치 어떤 사람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 대하듯, 누워서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고 나타난다. 이는 ‘1 : 1 거리 두기의 확립’으로 sati가 확고한 ‘대칭적(對稱的) 주의집중’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작을 나타내기보다 단지 상태만을 지시하는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말의 적절함 또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sati 자체가 바로 Vipassanā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필자의 주장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하지만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에 의해 sati를 바로 Vipassanā로 대입시키고 있는데 이같은 개념상의 혼란은 양자 모두 부적절하고 불완전한 개념 파악임을 스스로 반증한다.

일곱째, 마찬가지로 추수 후 소 떼를 그저 관리한다는 비유는 ‘수동적 주의집중’이 최선의 역어임을 나타내준다. 즉 추수 전 소떼를 쫒아 채찍으로 ‘챙기고’ ‘지키는’ 능동적 관리는 추수 후 단지 거리만을 뚜렷이 유지한 상태와 대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동적 주의집중’은 ‘노력없는 노력의 집중’이라는 의미에서 ‘무작위(無作爲) 주의집중’ 또는 ‘무공용(無功用) 주의집중’도 가능하다.

여덟째, 앞의 수평적 sati 비유와 함께 높은 탑의 정상에 올라 거리두기 확립을 의미하는 수직적 비유 또한 발견된다. 이는 sati 확립이 높은 수준의 선정의 바탕과 무욕(無欲)이 전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이러한 의미에서 관찰대상을 건드릴 수 없는 ‘수동적 주의집중’ 과 멀리 떨어져 ‘객관적 주의집중’할 수 있는 것은 서로 통하는 말이다.

아홉 번째, sati의 유무(有無) 상태를 설하는 경전은 sati 생성의 조건을 극명히 보여준다. 즉, 인식 상에 있어 탐욕이 일어나면 sati를 잃고, 탐욕없이 ‘단지 인식’할 수 있는 바탕이 되면 바로 sati의 언급이 나타난다.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옮기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같은 경전의 대비를 통해서이며, 이는 ‘단지 바라만 볼 수 있는 상태’ 다른 표현이다. sati 개념의 핵심은 여기에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무욕의 주의집중’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열 번째, (과거의) 기억도 sati 확립에 따른 관찰대상이다. sati는 ‘의지의 활동 또는 작용(行 : saṅkhāra)’을 쉬고 멈추게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모든 행의 지멸를 목표로 하는 선정 체계 속에 sati가 위치해 있는 이유이다. 이처럼 ‘수동적 주의집중’은 선정의 범위속에 ‘능동적 의지작용이 쉰 상태’에 있다. 따라서 목동의 비유에서처럼 쫒고 헤아리거나 ‘챙기고’ ‘지키는’ ‘작위적 ․의지적 또는 능동적 활동’으로서의 sati 이해와 바로 앞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필자의 ‘수동적 주의집중’ 이해와는 상당한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사실 그러한 불일치로 현재까지 sati를 중심으로 한 시시비비는 계속되어왔다. 즉 출발선이 달라 이후 간격이 컸고, 출발점이 달라 이후 많은 쟁점이 있어 온 것이다

2015년 5월 8일 금요일

픽셀 정밀도 - 높아지면서 해결할 일

단지 ppi(pixel per inch)정밀도가 원인이 아니고.

배광(백라이트)의 직진성,
눈부심 만드는 과장된 휘도의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빛의 굴절과 그로 인한 간섭현상으로 인한 빛순도의 저하로
눈의 감각작용의 노이즈로 작용 눈이 피로한 것임.

정밀한 픽셀로 고해상도를 만들더라도
정밀도의 정도에 따라 빛의 굴절.회절 정도를 실험하여
빛의 품질이 어떻게 나오는지 그 결과로 픽셀사이즈를 정해야 한다.

충분히 작은 픽셀사이즈라면
충분히 큰 가상해상도(예. x4)로 렌더링 후
다운스케일링하여 디스플레이 하면
매우 안정된 품질의 화면을 얻을 수 있고
다운스케일링 과정에서 다양한 해상도로 디스플레이가 가능하다.
(이것이  apple의 방식이다.)

2015년 4월 22일 수요일

아나파나사띠

출처 : http://tranquilwisdom.blogspot.kr/2012/11/blog-post_22.html

번역해 둔 것 같은데 영문서를 번역한 것 같다.
정확히 주제전개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인 불교의 수행개념 관점으로 참조용.

중략....

The Anapanasati Sutta
아나빠나사띠 경 (호흡에 대한 사띠수행을 말한 경전)

Introductory Section (서문)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유명한 장로 제자들인 사리뿟따 존자, 마하목갈라나 존자, 마하깟사빠 존자, 마하깟짜야나 존자, 마하꼿티따 존자, 마하깝삐나 존자, 마하쭌다 존자, 아누룻다 존자, 레와따 존자, 아난다 존자와 그 외 여러 잘 알려진 장로 제자들과 함께 사왓티에 있는 동승원의 녹자모 강당에 머무셨다.

[2] 바로 그 때에 장로 비구들은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어떤 장로 비구들은 열 명의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고, 어떤 장로 비구들은 20명의 …30명의…40명의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그래서 새로 입문한 비구들은 장로 비구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아서, 차차 고귀한 경지들에 도달하였다.

[3] 그 때에 세존께서는 우안거 해제일인 포살일 [9] 보름달 밤에 상가의 비구들에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고요함 속에 있는 비구 상가를 둘러보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4]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진전에 만족한다. 나의 마음은 이런 진전에 흡족한다. 이와 같이 더욱더 정진해서,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도록 하라. 나는 여기 사왓티에서 네 번째 달의 보름달 꼬무디를 맞기 위해 기다릴 것이다.”

비구들은 이 특별한 달에 명상을 계속 수행을 하거나, 새로운 옷을 만든다. 그리고, 다른 승려와 제가신도들에게 담마를 가르치거나 두타수행을 하기 위해 준비하기도 한다. 까티나 의식도 같은 달에 열린다. 까티나 의식 때, 제가신도는 상가 수행자에게 가사나 다른 필수품을 드려서 특별한 공덕을 쌓는 보시를 실천한다.

[5] 지방에 거주하는 비구들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네 번째 달의 꼬무디를 맞이할 것이라 들었다. 그래서 지방에 거주하는 비구들은 마땅히 세존을 뵈러 사왓티로 떠났다.

[6] 그러자 장로 비구들은 더욱더 열심히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어떤 장로 비구들은 열 명의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고, 어떤 장로 비구들은 20명의 …30명의…4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그들 새로 입문한 비구들은 장로 비구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아서, 차차 고귀한 경지들에 도달하게 되었다.

[7] 그 때에 세존께서는 네 번째 달의 꼬무디 포살일, 보름달 밤에 상가의 비구들에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고요함 속에 있는 비구상가를 둘러보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8] “비구들이여, 여기 모인 이들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잡담을 하지 않는다.[10] 여기 모인 이들은 마치 순수한 나무 재질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상가가 이러하고, 여기 모인 이들이 이러하다. 비구들이여, 여기 모인 이들은 공양 받아 마땅하며, 환대 받아 마땅하며, 보시 받아 마땅하며, 합장 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비할 데 없는 복전(福田)이다. - 여기 모인 이들은 이러하다. 여기 모인 이들에게 적게 보시해도 많은 결실을 가져오고, 많이 보시하면 더 많은 결실을 가져온다. - 이 비구상가는 이러하고 여기 모인 이들은 이러하다. 여기 모인 이들은 세상에서 친견하기 어렵다.- 이 비구상가는 이러하고 여기 모인 이들은 이러하다. 여기 모인 이들을 친견하기 위해서 여행채비를 하고, 먼 길 떠날 가치가 있다. - 이 비구상가는 이러하고 여기 모인 이들은 이러하다.”

[9] 이 비구상가에 아라한이 된 비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번뇌가 다하였고 성스러운 삶을 살아 왔고,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진정한 목적지에 도달했고, 존재의 족쇄가 소멸되었으며 궁극적 지혜(final knowledge, 구경지)로 해탈했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것은 모든 족쇄들이 소멸되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지이다. 열 가지 족쇄들은 [1] 영원한 자아나 영혼이 있다는 믿음 [2] 올바른 길에 대한 의심 [3] 찬송, 의식, 제사가 열반으로 이끈다는 믿음 [4] 갈망 또는 탐욕 [5] 미움이나 혐오 [6] 순수한 물질적 존재나 비물질적 존재에 대한 욕심 [7] 자만이나 자부심 [8] 나태, 무감각, 졸음, 둔한 마음 [9] 들뜨고 동요된 마음 [10] 무지이다.
(빨리어로는 [1] Sakkayaditthi(유신견) [2] Vicikiccha(의심) [3] Silabbataparamasa(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4] Kanasmaraga(감각적 욕망) [5] Patigha(적의) [6] Ruparaga Aruparaga(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집착) [7] Mana(자만) [8] Middha(혼침) [9] Uddhacca(들뜸) [10] Avijja.(무명) 이다.)

마지막 경지인 아라한은 이렇게 말해진다. “그들은 성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이다. 짐을 내려놓았으며 진정한 목적지에 도달했고, 존재의 족쇄가 소멸되었으며 궁극적 지혜로 해탈했다. 그들은 방일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할 일을 다했다. 그들은 더 이상 부주의해질 수 없다.” (맛지마 니까야의 70번째 경 12절에서 인용하였다.)

[10] “이 비구상가에는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제거하여 청정한 거처(정거천)에 마땅히 태어날 비구들이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 경지에 있는 성인의 지위를 ‘아나가미(불환자)’라고 한다. 갈망과 미움이 더 이상 마음에 일어나지 않고, 다섯 가지 낮은 족쇄들([1] ~ [5])은 소멸되었다. 그러나 ,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다.
[11] “이 비구상가에는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하고 탐욕과 성냄과 미혹이 엷어진 일래자(한 번만 돌아 올)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은 한 번만 이 세상에 돌아와서 괴로움을 끝내 버릴 것이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 경지에 있는 성인의 지위를 ‘사까다가미’ 또는 ‘일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영원한 자아에 대한 믿음(유신견), 찬송이나 의식이나 제사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올바른 길에 대한 의심을 제거했다. 또한 이 경지에 도달한 이는 다른 나머지 족쇄들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약한 탐욕과 성냄을 갖는다.

[12] “이 비구상가에는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하여 흐름(길)에 든[예류] 비구들이 있으니, 그들은 [나쁜 곳에] 떨어지는 법이 없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 경지의 깨달음에 이른 이를 “소따빠나” 또는 흐름에 든 자(예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낮은 족쇄(유신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를 버렸다. 그들은 다시 낮은 존재로 결코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낮은 존재로 태어나지 않고, 일곱 번 태어남 안에서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

[13] “이 비구상가에는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 [11]를 닦기에 몰두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 비구상가에는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을 … 네 가지 정신적 힘에 대한 기초(네 가지 성취수단, 四如意足)를 … 다섯 가지 기능들(오근)을 … 다섯 가지 힘(오력)을 …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 팔정도(고귀한 여덟 겹의 길)를 닦기에 몰두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런 비구들이 있다.”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 네 가지 정신적 힘에 대한 기초(네 가지 성취수단), 다섯 가지 기능(오근), 다섯 가지 힘(오력),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 그리고 팔정도(고귀한 여덟 겹의 길)는 Mahasakuludayi Sutta(마하사꾸루다위 경, 맛지마 니까야의 77번째 경, 16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유익한(wholesome) 상태들을 계발하는 길로서 말해진다. (이 경전은 제자들이 존경하고, 공경하며 의지하는 붓다의 자질을 기술하였다.) 우리는 지금 이 용어들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 팔정도(고귀한 여덟 겹의 길)은 경전을 설명하면서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The Four Right Kinds of Striving)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을 계발하는 길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불건전한 (의식) 상태들(unwholesome state)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열의를 가지고 깨어있다. 그리고 그는 정진하고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열의는 빨리어로 ‘칸다(chanda)’는 또한 ‘기쁨에 찬 흥미(joyful interest)’ 또는 ‘열심’을 의미한다. ‘기쁨’같은 유익한 대상을 향해 있는 마음은 이렇게 “기쁨에 찬 흥미”라는 성질을 가진다. 그래서 , 첫 번째 바른 노력은 마음이 맑아지고 불건전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도록,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를 갖는 마음을 계발시키는 것이다.
명상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이 미소 짓고 행복할 때, 기쁨이 자란다. 그 결과, 마음은 고양되고, 유익한 상태(wholesome)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 네 가지 바른 노력은 보통 네 가지 바른 정진으로 불린다.
어떤 명상 지도자들은 수행자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들 인지하는데(note) 엄청난 노력을 쏟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 이 경전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형태의 주시가 분명히 아니다.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를 가진 사띠 즉, ‘미소 짓는 마음을 갖는 것’은 밝고, 열려 있고, 받아들이고, 긴장함이 없는 마음으로 이끈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바른 노력(right effort)에 대한 적절한 정의이다. 이것은 결코 어떤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그 현상을 인지하는 것(noting)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이미 일어난 나쁜 불건전한 (의식)상태들(unwholesome states)을 버리기 위해서 열의를 가지고 깨어있다. 그리고 그는 정진하고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두 번째 바른 노력에 대한 가르침은 분노, 슬픔, 시기, 걱정, 정신적 긴장(스트레스), 침울, 공포 같은 어두운 감정 상태들을 버리고, 미소 짓는 마음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감정에서 생긴 매우 미묘한 긴장도 완화시킬 것이다. 미소 짓는 마음 상태는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가 있는 유익한 상태(wholesome state)이다. 미소 짓는 마음을 계발함으로써, 불건전한 감정 상태를 “내 것”으로 여기는 자아-동일시를 극복하게 된다. 정신적 수행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자신에 대해 미소 짓는 능력은 계발되어야 할 바른(skillful) 도구이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의식) 상태들(wholesome states)을 일으키기 위해서 열의를 가지고 깨어있다. 그리고 그는 정진하고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이것은 유익한 상태들(wholesome)이 마음에 있지 않을 때, 마음에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를 기르는 것이다. 즉, 사띠를 계발하는 것은 기쁨과 미소 짓는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다. 마음이 이것저것 단지 생각만 하는 중립적인 마음 상태일 때에도, 미소 지음을 연습하고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를 체험할 때이다.

“그는 이미 일어난 유익한 상태들(wholesome states)을 계발하여, 사라지지 않게 끊임없이 강화시키고, 증장시켜 유지하기 위하여 열의를 가지고 깨어있다. 그는 정진하고,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그것으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올바른 지혜의 완성과 성취에 도달하여 머문다.”

네 번째 바른 노력은 부단한 수행을 말한다. 이 끊임없는 수행은 공식적인 명상시간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포함한다. 언젠가 나에게서 배우는 이들이 이렇게 물었다. “미소 지음을 수행하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지는 것이 정말로 열반에 도달하게 합니까?”
그 사람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놓치지 않고 고찰하는 것이 열반에 도달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행을 그렇게 매우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다. 그들은 붓다가 가르친 밝고 행복한 방법으로 수행해 오지 않았었다. 나는 그들에게 반문하여 물었다. “어떻게 마음에 미소 지음과 기쁨에 찬 흥미 없이 열반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기쁨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희각지)가 아닌가요? 붓다는 ‘우리는 행복한 이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미소 짓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갖는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쁨에 찬 흥미와 미소를 가지면, 마음에 진정한 견해의 변화가 일어난다. 상황이 어려워져도 마음이 많이 무거워지거나 기분이 언짢아지지 않게 된다. 이것은 자아-동일시화가 그다지 크지 않고, 수행자가 상황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미소 지음과 기쁨에 찬 흥미가 없을 때, 모든 것이 힘겨워지고, 정신 상태와 생각이 의기소침해진다. 마음은 너무 심각하게 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예를 들면, 당신이 매우 행복할 때, 내가 와서 당신에게 장미 한 송이를 준다고 하자. 당신은 장미를 받고 나서 장미의 색, 모양, 향기에 감탄할 것이다. “아름다운 꽃이구나! 단지 보기만 해도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 당신이 의기소침해 있거나 화가 나 있다면, 내가 와서 당신에게 똑같은 꽃을 주어도 당신의 마음은 꽃 대신 가시를 볼 것이다. “우, 이 꽃은 매우 흉측하군. 이 꽃이 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때 보이는 것은 가시이다. 그러나 , 실제로 같은 꽃이지만, 당신의 기분이 이런 차이를 만든다. 기쁨에 찬 흥미와 미소 지음은 당신 주위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든다.
그러나 , 이 말은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 갈 것이다! 그러나, 기쁨이 있는 마음으로 바라볼 때 큰 문제를 작은 것으로 바꿀 것이다.


(The Four Bases for Spiritual Power)
네 가지 정신적 힘의 기초(네 가지 성취수단, 四如意足)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네 가지 정신적 힘에 대한 기초’를 계발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평온한 마음을 성취하게 하는 ‘기쁨’(chanda)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

첫 번째 정신적 힘은 ‘기쁨’(joy)을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정진’(viriya)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여기서의 집중은 평온을 의미한다.)

이것은 두 번째 정신적 힘이다. 붓다의 길을 걷는다면, 게을러지거나 느슨해질 수 없다. 특히 붓다의 길이 일생에 걸친 수행임을 깨달을 때, 그 길에 머무르기 위해 많은 힘이 필요하다! 이것은 마음이 긴장되고 굳어 있을 때,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있는 힘을 말한다. 호흡으로 되돌아오기 전에 생각을 놓아버리고, 머리와 마음에서의 생긴 긴장을 이완하는 힘을 말한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마음의 정화’(purity of mind)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여기서의 집중은 평온을 의미한다.)

세 번째 정신적 힘은 마음의 정화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상의 대상에 가능한 오래 머무를 때 계발된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나 명상하기 힘들 때마다, 있는 그대로 그 장애를 놔두어서 장애에 대해 사고하여 개입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수행의 장애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이완하고 나서, 부드럽게 명상의 대상, 즉 호흡과 마음이 평온해지고 넓어짐으로 주의를 되돌리는 것이다.
마음이 미혹과 수행의 장애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이 아무리 여러 차례라도 괜찮다. 이완시키고, 그리고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기만 하라. 이것이 모든 번뇌와 장애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이다.
기억해라. 명상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순간 속에서 마음과 알아차림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자비로운 받아들임(loving acceptance)’으로 표현되는 상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미지와 언어를 갖는 생각들이 완전히 소멸하게 될 때, 명상은 고요함(silence)이다. 그러나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마음을 수축시켜 죄이고, 배척하는 형태이며 끊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수행의 장애를 억눌러 저항하며 투쟁하는 형태이다. 명상하는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평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배척, 억누름, 저항이 아니다. 집중된 마음으로는 붓다의 수행법에 따라 명상할 수 없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고찰’(investigation)의 정신적인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여기서 집중은 평온한 마음을 의미한다.)”

경험되는 현상을 탐구하는 습관은 정신적 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수행의 장애나 고통, 다른 미혹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 마음이 그 특별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명상할 때 졸음이 온다고 하자. 졸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수행자가 더 주의 깊게,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지고 그 명상의 대상에 머무르는 것이다. 마음이 졸음에 어떻게 슬며시 빠지게 되는지 직접 보도록 노력해라. 즉 더 많은 노력과 힘을 수행에 쏟아야만 한다.
수행자가 마음이 어떻게 수행의 장애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는지 안다면, 그는 더 빨리 놓아버리고, 오랫동안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 수행자가 졸음에 완전히 사로잡히면, 이 수행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잠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는 마음이 장애를 극복하고 싶어하지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탁구경기’처럼 명상의 대상과 졸음사이를 왔다갔다할 지 모른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더 밝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질수록, 더 빨리 수행의 장애를 놓아버리고 다시 명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이와 유사하게, 고통이 일어날 때 고통으로 마음이 향하지 않다가, 주의가 고통으로 이끌려지면, 그때서야 마음이 어떻게 고통이란 감각에 저항하는지 볼 수 있다. 만약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고통은 더 커지고 강렬해 질 것이다.
그래서 , 이러한 미혹들(고통, 수행의 장애, 무거운 감정 등)을 언어화하는 마음속의 생각을 먼저 놓아버린다. 그리고 , 마음을 완화시키고 그 감각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매듭을 푼다. 그리고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완화시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그리고서, 명상의 대상으로 주의를 되돌린다. 고통이 다시 마음을 끌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것을 행한다.
이것은 명상자가 주의를 고통의 한 가운데에 놓고 ‘고통...고통..고통.’ 하며 고통을 인식하라는 어떤 명상 지침과 아주 다르다. 그 명상 지침에 따르는 동안, 그들은 고통의 진정한 본성을 보고, 고통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 고통은 본래 불쾌한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계속 지켜보기 위해서 긴장하고 굳어 있는 마음을 갖는 경향이 있다. 명상자는 이러한 마음의 경직을 결코 알 수 없고, 그런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없다. 명상자는 결국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집중(고정된 주의)을 계발할 것이다. 그러나 , 이것은 마음을 억누르고 긴장함으로써 도달하는 것이다. 경험에 대한 ‘고찰’의 정신적인 힘의 기초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용함으로써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싸우거나, 조절하거나, 방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자애로운 받아들임(Loving-acceptance)과 인내(영어 사전에서는 ‘반목 없음’의 의미로 정의된다.)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집중, 긴장함, 억압함, 억누름으로 도달되지 않는다.




(The Five Faculties)
다섯 가지 기능들[오근, indriya]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오근)들을 계발하는 길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기능”(saddha)을 계발한다.

믿음의 기능은 또한 확신의 기능으로 불린다. 어떤 사람이 삶의 고통을 놓아버리려는 관심을 가진다. 그의 호기심이 더 커지고 명상 스승을 찾기 시작한다. 다행히 유능한 스승에게 배우게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올바른 수행을 통해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그의 확신은 커지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수행에 대한 열의가 커지고 좀더 수행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정진의 기능’(viriya)을 계발한다.”

확신이 커지면, 자연적으로 더 많은 힘을 수행에 쏟을 것이다. 좀더 오래 앉기 시작하고 마음은 더욱 맑아질 것이다.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한차례 앉기수행 시간은 45분보다 짧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앉기수행이 잘 되면, 계속할 수 있는 한 오래 앉아있기 바란다. 좋은 수행간격을 위해서는 한 시간, 한 시간 십분 또는 그 이상 계속되어야 할지 모른다. 점차 더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은 좋다. 앉기수행에 집착하게 된다고 걱정하지 마라. 집착하게 되는 유일한 방식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함에 의한 것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명상하지 않을 때 그렇다. 충분히 연습해왔다면, 신체적으로 상하지 않을 정도에서 앉기수행을 오래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긴 시간동안 편안하게 앉아 있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한두 시간 또는 세 시간동안 앉기 수행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만약 그 같이 오래 앉아있는 것이 매번 고통을 일어나게 한다면,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신체적 불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앉는 수행자세는 편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수행자가 무언인가에 기대지 않는다면, 걸상이나, 의자 같은 것을 사용해도 좋다. 기대는 것은 졸리고 멍하게 하기 쉽다. 그것은 명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확신을 가질수록 수행에 좀더 많은 힘을 쏟게 된다. 열의도 자연적으로 커진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띠의 기능’(sati)을 계발한다.”

수행자의 정진이 향상됨에 따라, 알아차림과 사띠는 자연적으로 강해진다. 이것은 강제적이 아닌 자연스런 과정이다.
여러분과 나 같은 보통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자. 메뚜기, 나비와 같은 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또한 미친 원숭이와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움직이고, 주변을 뛰어다닌다. 매 순간 공상과 충동이 변화하고 있다. 마음은 자극의 먹이이고, 마음 스스로 자극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한다. 이것은 어떤 자극들이 일어날 때, 늘 해오던 식으로 조건에 되받아 행하는 반응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기억에서 발산된 일련의 연상, 희망, 공포, 기억, 공상, 후회들이 마음에서 항상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마음은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맹목적이고 결코 멈추지 않으며 만족하지 않는다. 마음이 몹시 미쳐있고, 불만족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은 조건이 되는 사건들의 끝없는 정글 속에서, 충분한 과일을 찾아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다니는 들뜨고 미친 원숭이로 묘사된다. 그래서, 명상을 하기 시작할 때 마음은 자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명상의 대상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때때로, 수행자가 알아차릴 수 있기 전에 이삼 분이 걸리기도 한다. 그때는 부드럽게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이완한다. 그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다시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린다.
마음은 습관적으로 스스로 좋아하는 곳으로 돌아 다녀왔기 때문에, 명상의 처음에 이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 수행이 계발되어 잘 알 수 있고 더 빨리 놓아버리게 됨에 따라, 수행자의 사띠는 점차 더 뚜렷해지게 된다. 알아차리기 전에, 단지 일분 동안 마음이 호흡에서 떨어져 있게 될지 모른다. 그때, 놓아버리고, 마음을 이완하고, 호흡으로 돌아온다. 이때 마음이 다시 떠나기까지 호흡에 더 오랜 시간(아마도 삼십 초 정도)동안 머무르기 시작한다.
결국에 마음이 달아난 것을 더 잘 보게 되고, 사띠는 더욱 날카로워져 마음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의 믿음(saddha)이 더 강해질 때, 그들의 정진(viriya)도 커진다. 그리고 그 결과, 사띠(sati)도 자연스럽게 계발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마디(고요하고 평온함)의 기능’(samadhi)을 계발한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사띠가 향상될 때, 마음은 자연적으로 명상의 대상에 훨씬 더 오래 머무르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집중’이란 말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나타낸 말이 아니다. 명상의 대상에 몰입되거나 고정되지 않는 대신, 매우 고요하고 이완된 평온한 마음으로 호흡에 아주 잘 머물러 있다. 이때, 강한 기쁨이 일어나고 몸은 매우 가벼워지고 붕 뜬 것처럼 느껴진다. 그 기쁨이 사라질 때, 강한 평온, 평정, 편안의 느낌이 일어난다.
수행자는 날카로운 알아차림(awareness)으로 이런 느낌들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나 , 수행자가 이 상태를 근사하고 좋은 상태로 생각하여 내적 언어화를 시작한다면,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마음속에 졸음이 매우 자주 들어올 것이다. 이것은 호흡으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그런 느낌에 집착하고 슬그머니 사로잡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상태를 생각하고 내적으로 언어화하기 시작하고 그 상태를 조절하려는 생각에 휩쓸림에 따라, 사띠가 사라진다.
이것은 기쁨과 평온에 대한 갈망을 가질 때에도 일어난다. 이러한 욕망은 마음을 매우 경직되게 하고, 들뜸(restlessness)과 불만족(dissatisfaction)이 일어나게 한다. ‘어떤 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있었으면’하는 바람이 정신적 향상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이렇게 짝이 된 수행의 장애들은 정신적 수행이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 수행자는 이 즐거운 머무름에 대한 생각을 더욱 사띠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믿음이 커지고, 정진도 커진다. 이것이 우리의 사띠를 향상시키고, 사마디(평온하고 고요한 마음)를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되게 한다.

“비구가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혜(또는 이해)의 기능’(panna)을 계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올바른 지혜의 완성과 성취에 도달하여 머문다.”

마음이 더 평온하고 고요해짐에 따라, 담마(실체)에 대한 진정한 본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혜 또는 지성의 계발은 현상이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얻어진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선정(명상의 단계)상태에서 앉기 수행 하는 동안이라도, 어떻게 기쁨이 일어나는지 본다. 그런 상태가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겪는다. 그리고 어떻게 평온과 행복이 일어나는지 본다. 그는 그런 현상이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겪는다. 그는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수행의 처음단계에서도 무상의 진정한 본성을 볼 수 있다.
그는 느낌과 감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한다. 또한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에 불만족함이 있고, 이런 느낌과 감정은 괴로움의 한 형태임을 안다. 특히 원하는 방식으로 이런 느낌과 감정들이 행해지지 않을 때, 괴로움과 불만족함이 있음을 안다. 진실로 이 과정의 불만족함을 볼 때, 이 과정이 비자아적인 과정(impersonal process)임을 분명하게 본다. 이런 현상들의 나타남과 소멸함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정[명상의 단계]에 있는 동안일지라도, 기쁨의 일어남을 실제로 조절할 수 없다. 기쁨은 기쁨이 일어날 조건이 맞으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결코 기쁨을 강제로 머무르게 할 수 없다. 기쁨은 조건이 맞을 때 사라질 것이다. 그런 멋진 기쁨이 사라짐은 불만족을 더욱더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 그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즉 아니짜(무상), 둑카(괴로움), 그리고, 무아(아나따)를 보는 것이고, 이것은 지혜를 계발하는 길이다. 그래서 순관과 역관 모두로 연기를 보도록 점진적으로 이끈다. (연기를 보는 것은 곧 사성제를 보고 체험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수행자가 연기를 보지 못했더라도, 세 가지 존재의 특성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 연기를 볼 때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동시에 본다. 이것을 뒤에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할 것이다.

(The Five Powers)
다섯 가지 힘[오력]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 정신적인 힘들을 계발하는 길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faith)의 힘을 계발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정진(energy)의 힘을 계발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띠(mindfulness)의 힘을 계발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마디(Stillness)의 힘을 계발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혜(wisdom)의 힘을 계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올바른 지혜의 완성과 성취에 도달하여 머문다.”

이것들은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기능들(오근, indriya)과 같다. 그것들은 마음을 정화하고 이롭게 만들어 맑게 하기 때문에 힘(power, bala)으로 부른다. 이제 아나빠나사띠 경전을 다시 계속 살펴볼 것이다.

[14] “이 비구상가에는 자비(metta)를…연민(karuna)을 …더불어 기뻐함(mudita)을 …평정(upekkha)을 …부정관(meditation of foulness)을 …인식의 무상함(perception of impermanence)을 닦기에 몰두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런 비구들이 있다. 이 비구상가에는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를 닦기에 몰두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정(upekkha)은 ‘네 가지 범천의 거처’ 즉 ‘경계와 제한이 없는 네 가지 마음 상태’로 알려져 있다. 이 명상 상태에 있을 때 마음에 경계와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부정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망(lust)에 강하게 끌리는 사람에게 적합하다. 사람 신체부위에 대한 혐오스런 성질과 그 요소들을 비추어 바라봄으로써 수행한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갈망하는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이 갖는 신체 부위의 안과 바깥이 바뀐다면 얼마나 갈망하게 될지 상상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창자와 간인가!” 또는 “와! 얼마나 아름다운 담즙, 고름, 담을 가지고 있다니” 그때 얼마나 많은 갈망이 마음에 있겠는가? 그래서, 이 명상은 갈망이 많은 성향의 사람이 평정에 있도록 돕는다.
인식의 무상함은 모든 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은 고요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보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은 마음이 갖는 무한 공간과 무한 의식의 명상상태를 말하고 있고, 그 때 마음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어떻게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이제 아나빠나사띠 숫따(호흡에 대한 사띠수행을 말한 경전)의 다음 구절로 넘어갈 것이다.


(Mindfulness of Breathing)
호흡(들숨날숨)에 대한 사띠


[15]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가면 , 큰 결실과 이익이 있다.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가면 , 사념처를 성취한다.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를 계발하고 닦아가면 ,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들을 성취한다. 칠각지를 계발하고 닦아가면 , 순수 지혜(true knowledge, vijja)와 해탈을 성취한다.”

우리는 경전 속에서 사념처 수행을 찾을 수 있고, 사념처는 평온하고 지혜로운 명상 상태인 선정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어떤 수행이론에서 ‘선정(명상 단계)을 경험하면서 사념처 수행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매우 다른 견해이다. 붓다는 한 가지 형태의 명상을 가르쳤다. 그것은 ‘사마타’ 또는 ‘평온함’ 또는 ‘사마디’라고 부를 수 있는 “평온-지혜 명상”(tranquil ‘wisdom meditation)이다.

[16] 그리고, 어떻게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야, 큰 결실과 이익이 있겠는가?

[17]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는 숲이나 나무 아래 또는 빈 오두막에 간다. 그리고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전면(in front of him)에 사띠를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확고한 사띠를 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숲이나 나무 아래 또는 빈 오두막에 간다.’는 문구는 수행의 장애가 거의 없는 조용한 장소에 간다는 것이다. 적당한 장소는 거리의 소음, 사람, 동물과 떨어져 있어 크고 끊임없는 음악이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다. 붓다가 살던 시절에, 대부분 사람들은 땅바닥 위에 앉아 명상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의자나 소파에 앉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곧바로 세워 앉는다.”의 구절처럼 바닥에 앉는다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일 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바닥에 앉아서 하고 싶을 때, 방석을 사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불편하고 고통스런 감각을 가지고 앉는 것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바닥에 앉는다고 마법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마법은 될 수 있는 한 편안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만약 바닥에 앉는 것이 매우 고통스런 경험이 된다면, 의자나 등받이 없는 앉음대 위에 앉아도 좋다. 그러나 , 명상자가 의자에 앉을 경우 매우 유의할 점이 있다. 의자에 기대지 말고 앉아야 하는 것이다. 기대는 것은 졸음이 오기 쉽고, 그것은 명상에 좋지 앉다!
‘상체를 곧바로 세운다.’ 는 경직되거나 불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등을 똑바로 잘 세워 앉는 것을 말한다. 똑바로 등을 잘 세우는 것은 척추 뼈가 위 아래로 쌓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야 등에서 에너지가 위 아래로 방해 없이 잘 흐를 수 있다. 기대는 것은 에너지가 흐르는 것을 막고, 졸음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제발 어떤 것에 등을 기대지 말기 바란다. 처음 수행을 할 때, 등을 세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근육들이 반항하고 불평하는 것 같다. 그러나 ,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지고 수행한다면, 사용하지 않아 온 근육들이 점차 적응되고 강해질 것이다.
또, 앉기수행을 할 때 어쨌든지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꿈틀거리지 말고, 손을 문지르거나 긁으려고 움직이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 앉기수행이 끝날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말기 바란다. 움직임은 수행의 연속성을 깨고, 수행을 완전히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어떤 명상 지도자들은 ‘사띠’를 하고있다면 , 움직여도 좋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 배우는 이들이 진정으로 사띠한다면, 마음과 싫어하는 감정을 지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감정을 둘러싸고 있는 마음을 이완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 몸을 움직여야 할 이유는 없다! 사띠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애롭게 받아들이는 것(lovingly-accept)을 말한다. 조절하거나, 저항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띠하는 것은 열려있고, 지금 이 순간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다.
면밀히 조사하는 중에 명상자가 움직인다는 것은 전혀 사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는 움직이려는 욕망에 굴복하여, 그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을 시작하고서 나서 수행의 미혹들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을 고요하게 머무르고 평온하게 유지해야한다. 붓다의 모습처럼 고요하게 앉아있는 것이 최선이다! 명상 중에 허용할만한 움직임은 오직 등이 굽거나 구부정하게 되기 시작할 때, 너무 자주가 아닌 조건에서 등을 똑바로 하는 것이다.
“전면에 사띠를 확립한다.”라는 말은 모든 세속적인 일과 감각적 쾌락에 휩쓸림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부드럽게 눈을 감고, 미혹시키는 소리, 냄새, 맛, 감각,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단순하게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명상의 대상으로 주의를 돌린다.
“확고한 사띠를 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는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수행 방법을 말하고 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말은 들숨을 쉬고 있을 때 알고 있고(being aware), 날숨을 쉬고 있을 때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알아차림(awareness)을 열어놓고, 가능한 호흡을 확고하게 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에서 긴장을 푸는 것이다. (이것은 잠시 후에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18] “길게 들이쉴 때, ‘길게 들이쉰다’고 이해하고 (understand, pajaanaati), 길게 내 쉴 때, ‘길게 내 쉰다’고 이해한다. 짧게 들이쉴 때 ‘짧게 들이 쉰다’고 이해하고, 짧게 내쉴 때 ‘짧게 내쉰다’고 이해한다.”

이해한다”라는 굵게 강조한 이유는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호흡에만 강한 주시를 가지고 집중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지금 이 순간에 호흡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단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이다! 호흡이 길 때 오직 알고 있고, 호흡이 짧을 때 오직 알고 있다. 결코 호흡을 조절하지 말고, 대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을 오직 이해하고 있는 것(understanding)이다.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호흡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집중하면, ‘잘못된 집중’으로 머리에 두통을 키울 것이다. 명상의 대상을 꽉 붙잡고 마음을 강제로 ‘집중’하거나 수행의 미혹들을 쫓아내려고 할 때마다, 매우 경직되고 고통스런 긴장이 머리에서 자랄 것이다.
또, 미혹시키는 생각과 느낌을 거부하면서 앉기수행을 조절하려 하거나 명상의 대상으로 빨리 되돌아가려고 서두를 때, 머리에 긴장과 경직이 일어난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집중’수행방법 뿐만 아니라 ‘순간집중’ 수행에서도 일어난다.
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감각의 한 가운데에 주의를 두고,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다른 것을 일어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배우는 이들에게 강한 고통을 키우게 하고, 오히려 이것은 수행의 미혹이 되게 한다. 이러한 형태의 명상은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고통이 사라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한, 그런 긴장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경직되고 완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실, 이러한 경직되고 완강한 마음은 사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 경직된 마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많은 용기와 참을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경직된 마음을 키우고, 혐오가 저절로 생기게 된다. 그런 경직된 마음은 무상(아니짜), 고(둑카), 무아(아나따)를 알아차릴 수 없다.
결국, 명상하지 않을 때조차 이러한 억누름은 사람의 성격을 경직되게 하고, 그래서 정말 문제를 만든다. 그런 마음은 비평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성향이 있고, 경직된 인성을 계발하게 된다.
다른 형태의 명상을 해 왔던 많은 사람들이 자비관 안거수행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별로 좋은 행동과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이 명상법이 정말 나와 다른 사람을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인가요?”라고 묻는다. 만약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왜 나의 생각을 조화롭게 해 줄만한 또 다른 형태의 명상 수행법이 필요한지?’ 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쨌거나 이런 혐오는 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가르쳐 온 “집중”을 수행해서 억누를 수는 있다. 그러나 , 붓다가 가르친 방법은 결코 어떤 것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붓다의 방법은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 몸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마다, 먼저 고통의 감각에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감각에 대한 어떤 생각도 놓아버리고, 마음을 연다. 그 감각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놓아버린다. 그래서 어떤 정신적 저항이나 혐오 없이 그 감각을 그 자체로 놔둔다.
이것을 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마라. 이 고통이 있어도 괜찮다.” 그 다음에 머리에서 긴장을 푼다...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해짐을 느끼고...그리고서 명상의 대상, 즉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감각이나 고통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감각은 더 커지고 강렬해진다.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느낀다. ‘감각에 대한 이러한 생각’, ‘내적인 언어화’, ‘감각이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고통스런 감각에 대한 “자아-동일시”이다.
이것은 그 감각에 휩쓸리게 되어 조절하려는 것이다. 감각과 투쟁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인 담마(Dhamma)와 싸우는 것이다. 투쟁하고 조절하려고 하고 지금 이 순간의 담마에 마음이 경직될 때마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생기게 한다. 감각을 개인적으로 여기는 것도 담마와 투쟁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것은 고통을 악화시키고, 그 결과 더 심하게 다친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지금 이 순간을 자애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아-동일시’나 ‘생각 또는 내적인 언어화’가 없어야 하고, “나는 그렇다”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사마디), 평정(upekkha), 선명한 알아차림(삼빠잔냐, full awareness)과 사띠(mindfulness)를 얻는 방법이다.
붓다는 명상중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행할 세 가지 행위를 가르쳤다.
그것은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라. 지금 함께 있는 것을 사랑하라.”이다. 이 단순한 설명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받아들이도록 한다.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기”란 앉아서 명상할 때, 원하는 현상이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기”란 마음을 활짝 열고 현재 무엇이 일어나든지,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게 놔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좋은 줄임말은 “DROPS”(Don't Resist Or Push, Soften)로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말고, 부드러워져라.”를 나타낸다. 무엇이 일어나든지,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말고 부드럽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되어,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라. 이것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기” 이다.
“지금 함께 있는 것을 사랑하기”란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집착을 보고 놓아버릴 수 있도록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한 체험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고통과 슬픔을 보고, 자애롭게 그것을 놓아버릴 수 있다. 이것은 생각을 놓아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집착을 놓아버리고, 집착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온 몸(whole body)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경전에서 이 구절의 의미는 명상자가 들숨에서 호흡이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날숨에서 호흡이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이때 호흡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호흡을 과도한 집중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행해지고 있는 호흡을 단지 아는 것이다. 사띠가 충분히 예리해져서,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지 않으면서 호흡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지 항상 알고 있다. 오직 호흡과 알아차림이 자연스런 과정 속에 있게 한다.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tranquilizing)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이 간단한 구절은 명상 지침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의식이 일어날 때마다, 머리에서 긴장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그 긴장을 들숨과 날숨을 쉬는 동안 놓아버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서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되고 평온해짐을 느낀다. 마음이 호흡으로부터 달아난 것을 아는 매 순간마다, 미혹과 긴장을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긴장을 푼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되고, 고요해지고 맑아짐을 느낀다.
다음으로, 마음을 호흡으로 부드럽게 되돌린다. 호흡을 들이쉴 때, 머리와 마음에 있는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하게 한다. 호흡을 내쉴 때, 머리와 마음에 있는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하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오직 그 생각을 놓아버려라. 생각 속에서 중립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생각하지 말라. 그 생각을 오직 부드럽게 놓아버릴 뿐이다. 수행의 미혹이 어떤 감각이라면, 먼저 마음을 열고, 그 감각에 대한 혐오를 놓아버린다. 그리고 명상자의 주의를 호흡으로 돌리기 전에,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게 한다.
이렇게 마음을 열려 있고 넓어지게 하고, 머리에서 긴장을 놓아버리는 것은 미묘한 ‘자아-동일시’를 실제로 놓아버리는 것이다. 자아-동일시는 일어난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 이런 긴장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태어남(rebirth)을 일으키는 무지(ignorance)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명상지침을 열심히 따르는 도중에는 마음에 ‘표시’나 ‘니미따(nimitta)’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즉, ‘집중명상’을 수행할 때, 마음에 생기는 빛이나 마음이 만든 대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 강한 집중으로 억지로 명상의 대상에 마음을 머무르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집중은 머리에서 긴장과 고통을 생기게 한다. 지금 말하는 명상지침으로 모든 현상의 진실한 본성인 무상(아니짜) , 고(둑카, 불만족), 무아(아나따)를 체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머리와 마음의 긴장이 풀려 있음(relaxation)을 알아차린다. 또한 내쉬는 숨과 동시에 머리와 마음의 긴장이 풀려 있음을 알아차린다.
처음에는 들숨이나 날숨을 놓쳐도 괜찮다. 불필요한 압박을 스스로에게 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수행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쉬운 수행이다. 마음을 계발시키는 단순한 방법이다. 그래서 때때로 들숨이나 날숨을 놓친다면, 단지 놓아버리고 다음에 쉬는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린다.
단순하고 쉽지 않은가? 처음에는 호흡이 매우 빠르고 알아차리기 어렵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 계속 수행을 해나가면, 명상은 더 쉬워지고 들숨이나 날숨을 자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수행은 점진적인 훈련이다.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압박을 가할 필요는 없다. 명상 속에서 단지 이완되어 있어라.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호흡이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게 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명상자가 호흡에 너무 많이 ‘집중’할 때 일어나고, 머리에서 긴장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호흡이 다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면, ‘집중’에 초점을 맞추어서 마음이 충분히 평온하지 못한 것이다.
선정(명상의 단계)들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밀어붙여 강제로 하거나, 고정된 마음으로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붓다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런 형태의 명상을 가르쳤다.

[19] ‘기쁨(joy)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기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이것은 첫 번째 두 선정(명상 단계)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이 단계에 대한 설명은 경전에 여러 번 반복해서 정형화되어 나타난다.[12] 우리는 지금 이 초선과 2선정에 대한 설명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sensual pleasure)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명상을 시작할 때, 먼저 눈을 감는다. 이것은 보는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소리가 마음을 미혹할 때, 내가 그 소리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생각하지 말고 소리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라.
소리가 흘러가도록 놔두어라. 소리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라.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껴라. 다시 명상의 대상인 호흡으로 주의를 돌려라. 숨을 들이쉬면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마음이 열리고 넓어지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껴라. 숨을 내쉬면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어라. 마음이 열리고 평화로워지며 고요해지는 것을 느껴라. 미혹이 일어나기 전까지 호흡과 함께 머무르며 긴장을 풀고 마음을 이완시켜라.
마음을 호흡에서 달아나게 하는 냄새, 맛, 육체적 감각, 생각, 감각적 쾌락은 이렇게 대처해라. 감각 기관을 통해 생긴 미혹이 흘러가게 놓아버리고, 미혹에 대한 정신적 집착을 이완시킨다.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마음이 열려있고 넓어지게 한다. 그리고 다시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때때로 감각적 쾌락이 일어나더라도 상관하지 말아라. 감각적 쾌락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오직 놓아버려야 함을 기억하라.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고, 호흡으로 돌아오라.

‘...불건전(unwholesome)한 상태들에서 벗어났다...’

마음이 호흡에서 벗어나 일어나는 느낌들을 생각하게 되면, 마음은 그 느낌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렇게 느낌에 대해 생각하고, 느낌을 조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느낌을 더 크고 강하게 해서 더 큰 고통이 일어나게 한다.
이 정신-물질 과정은 집착에 기인한 오온(다섯 무더기)으로 구성된다. 색온(육체적인 몸, 물질), 수온(정신적/육체적인 느낌), 상온(인식, 인지, 산냐), 행온(의도, 생각, 자유의지, 상카라), 식온(의식)이다. 오온을 보게 된다면, 느낌과 생각이 다른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관찰하게 된다. 불행히도, 우리는 느낌이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하는 습관을 키워왔기 때문에, 느낌을 더 크고 강해지게 만든다. 그 결과, 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붓다의 명상법을 수행할 때, 이렇게 생각하는 오랜 습관을 이해하고, 단지 놓아버려야 한다. 그래서 , 신체적이거나 감정적인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놓아버려라...이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어라...마음이 넓어짐을 느껴라. 그리고서 고요해지고 평온해짐을 느껴라...그 다음에 호흡으로 주의를 돌려라...이럴 때, 느낌의 진정한 본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느낌은 그런 상태로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이렇게 저절로 일어나고 무상하며 변화하고 있다. 이런 엄청난 고통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분노와 슬픔, 공포, 좌절, 의심 등의 느낌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들은 일어났으면 하는 욕망과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 느낌들은 지속될 수 있는 만큼만 머무른다. 이런 느낌을 조절하고 밀어붙여 싸우려 할수록, 느낌은 훨씬 더 커지고 격렬해지며 오래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느낌을 조절하고 싶을 때마다, 그 감각이나 감정을 개인적인 것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얼마나 고통을 주고, 어디에서 왔고, 지금 왜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 생각한다. 그래서 ‘아! 나는 그 느낌이 싫고, 사라지기를 바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느낌에 대한 생각은 그 느낌에 대한 ‘자아-동일시’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거부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의 ‘담마’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고통이나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진리는 바로 그곳에 있다. 어떤 저항, 조절하려는 노력, 생각을 떨치려는 욕망, 느낌에 대한 투쟁은 단지 더 많은 괴로움을 일어나게 한다.
어떤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을 열고...조절하려는 욕망을 놓아버린다...느낌이 존재하는 사실을 자애롭게 받아들이고, 느낌이 거기에 존재하도록 관용하는 것이다.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마라. 부드러워져라...이것의 줄임말인 DROPS(Don't Resist Or Push. Soften)은 평정(upekkha)의 계발로 이끄는 받아들임(accepting mind)과 열린 마음(open mind)을 가지게 하는 열쇠이다. 아무리 작은 저항과 긴장일지라도, 거기에는 집착하려는 자아-동일시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른 아침 당신이 일하러 왔을 때, 한 친구가 당신에게 다가와 욕을 한다면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일어날까? 당신은 보통사람들처럼 화가 나고 싸우고 싶어, 그 사람에게 되받아 욕을 할 것이다. 친구가 가버렸을 때 당신은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했고 말했는가? 당신의 친구는 무엇을 말했으며 무엇을 말했어야 했는가? 당신은 ‘그렇게 느끼고 말하는 것이 옳고,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노의 느낌은 강하고, 그 분노에 집착하고 있는 생각들이 있다.
잠시 후, 다른 일상 활동 속에서 당신의 주의가 흩뜨려진다. 그러나 당신의 분노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말을 건다면, 욕을 한 그 친구에 대해 불평을 토로할 좋은 기회라 여길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불평과 분노를 토로하고, 그것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날 하루, 당신이 집착한 그 느낌과 생각들이 이따금씩 일어난다. 사실, 이런 생각은 녹음테이프에 녹음된 것과 같다. 정확하게 같은 언어와 같은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그 날 하루가 끝나가고 주의가 많이 흩트려져서 당신에게 그런 느낌이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당신은 앉아서 명상할 시간을 갖고 마음을 정화한다. 그러나 명상 중에 무엇이 일어나겠는가? 그것은 바로 분노와 연상되는 생각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느낌과 생각 속에 휩쓸리는 것을 놓아버리면서 무관심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생각들이 느낌을 커지게 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마음이 유연해지기 시작한다.
...‘상관하지 말아라.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유연해져라...‘그대로 놔두어라’...마음을 열고, 그런 생각을 둘러싼 정신적 긴장의 매듭을 놓아버려라...그 느낌에 대한 혐오를 놓아버려라...마음이 커지고 이완됨을 느껴라...이제 머리에 생긴 긴장을 풀어라...마음이 고요해짐을 느껴라... 매우 분명하지 않는가!...이제 호흡으로 부드럽게 돌아가라..들이쉬는 숨에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항상 마음이 열려있고, 커지고 평온해짐을 느껴라.
그런 후에 분노가 다시 일어난다면, 같은 일을 반복해라...그 생각에 휩쓸리지 말고, 생각 그 자체로 놔두어라. 마음을 열려 있게 하고, 정신적인 붙잡음을 이완시켜라...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어라...부드럽게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려라.
마음이 분노의 느낌에 아무리 여러 번 되돌아가도 상관하지 말라. 매번 같은 식으로 다루어라. 그 느낌 그 자체로 놔둘 때, 그 느낌을 자아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라. 그래야 느낌에 대한 자아-동일시가 없다.
이것이 느낌에 대한 진정한 본성을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느낌은 전에 그런 상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무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느낌이 일어날 때, 평온과 평화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분명히 고통스럽고, 사실적인 괴로움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느낌에 휩쓸리거나 생각하지 않고 느낌 그 자체로 있게 한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정신적 긴장을 풀어 사라지게 할 때, 무아의 본성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체험한다.
계속 마음을 이완시키고 모든 미혹을 놓아버림에 따라, 집착은 더 적어지고 약해진다. 마침내 집착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정도가 된다. 이렇게 되면, 해방과 기쁨이 마음속에 채워진다. 이러한 집착의 놓아버림은 불건전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명상자가 놓아버리게 될 때, 기쁨이 일어나고 상당한 시간동안 그 기쁨이 지속된다. 그 결과, 마음은 매우 평온해지고 평화롭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명상의 대상에 매우 쉽게 머무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반복해서 행한다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그때, 평정(upekkha)과 조화가 마음에 계발되기 시작한다.

‘...비구는 일으킨 생각(위따까,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vicara)을 갖추고, 초연함(seclusion)에서 생겨난 기쁨(삐띠, piti)과 행복(수카, sukha)을 가진 초선(명상단계)에 들어가서 머문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초선이라 말하는 명상 단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 초선 상태에서도 아주 약하지만 배회하는 생각(wandering thought)이 여전히 존재한다. 마음이 호흡에서 벗어났을 때에 명상자의 마음이 이완되어 있다면, 배회하는 생각을 매우 빨리 알 수 있다. 오직 놓아버린다...호흡에 돌아오기 전에 긴장을 푼다.
어떤 명상지도자는 이것을 근접삼매라고 부른다. 그러나 , 그들은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이 아닌 “집중명상”이라는 견지에서 보고 있다.

일으킨 생각(위따까,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vicara)은 사유(thinking mind)와 배회하는 생각(산만한 생각)에 대한 설명이다. 어떤 번역은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을 각각 사유(thinking)와 조사(Examining or Pondering)로 옮긴다. 다른 선정 단계에서도 머무는 사유(directed thoughts)가 있을 수 있다. 머무는 사유와 산만한 생각에는 차이점이 있다. 산만한 생각은 과거에 일어난 것, 미래 또는 보고 싶어하는 공상과 관련한 생각이다
머무는 사유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음이 바로 지금 매우 행복하다. 마음이 매우 고요하다. 몸은 바로 지금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다”처럼 관찰하는 사유들이다.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일으킨 생각(위따까)은 마음이 미혹될 때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리는 마음이다.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은 다시 주의가 벗어남 없이 호흡에 머무는 마음이다.
마음이 명상의 대상에 점점 더 오래 머무르게 될 때, 해방과 기쁨이 매우 강해질 것이다. 기쁨은 몸과 마음에 모두 행복한 느낌이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속에서 미소를 느낄 것이다. 그때 몸과 마음은 매우 가벼워져서 거의 붕 뜨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즐겁고 좋은 경험일 것이다. 어떤 명상지도자들은 기쁨이 일어날 때, “집착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 그들의 제자들은 어떻게든 집착하지 않도록, 기쁨에 대해 염려하고 밀쳐 내려고 한다. 그러나 , 이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중립적이거나, 어떤 느낌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마음이 호흡에 머무르며, 열려있고, 마음이 이완되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 어떤 느낌에 끌어당겨졌다면, 느낌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긴장을 풀어라. 그리고 마음이 열려있고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서 호흡으로 돌아가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해서 휩쓸리면 애착과 갈망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생각에서 집착이 일어난다.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존재하게 허용한다면, 집착하지 않고 명상의 대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기쁨이 사라진 후에,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고 편안하게 된다.
편안하고 평온한 이런 느낌을 초연함에서 생겨난 행복(happiness)이라 부른다. 명상자가 이런 명상 단계에서 처음에는 십분 또는 십오 분 앉을 수 있고, 수행함에 따라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초선(명상 단계)이다. 이것은 마음이 미혹되지 않고 감각적 쾌락, 불건전한 습관, 마음 상태를 얼마동안 계속해서 놓아버릴 때 일어난다. 수행자가 이와 같은 고요한 상태를 경험할 때, 명상하는 이유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때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미혹이 거의 없는 행복한 상태이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그런 경험 후에, 수행자는 열의를 갖게 되고, 앉아서 수행할 때마다 그런 상태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 그런 고요한 마음 상태를 가지려는 욕망은 그 상태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더 많은 노력을 쏟는다. 불행히도, 마음은 더욱더 불안하고 동요된다. 이것은 어떤 것이 특별한 방식으로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욕망 때문이다. 그것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몰아붙이고 강제로 고요하고 평온해지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났으면 하는 집착 때문에, 고요한 명상 단계를 경험할 수 없다. 이런 욕망 때문에 현재 그 순간에 치우치게 한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순간을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현재 순간이 원하는 것과 맞지 않으면,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고요한 마음은 그것이 일어날 만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오직 강한 욕망을 이완하고 놓아버려라.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 따라 그것들이 되어갔으면 하는 바램을 버리고, 고요하게 있어라. 초선(명상의 단계)을 경험한 후, 다음 앉기수행에서 상당히 활동적인 마음을 갖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사띠는 예리하고 마음이 벗어났을 때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열려있게 하고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고요해짐과 들숨에 대해 열려있음, 고요해짐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이완됨...
오래지 않아, 마음은 다시 안정되고, 기쁨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기쁨이 사라질 때, 다시 편안한 행복과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을 경험할 것이다.
이때에도 집착에 기인한 오온(다섯 무더기)을 여전히 경험한다. 여전히 들을 수 있고,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모기가 몸에 앉았을 경우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모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미혹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놓아버린다...머리와 마음에서의 생긴 긴장을 풀고 나서 부드럽게 호흡으로 되돌아온다.
수행자가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열고 고요하게 함에 따라, 마침내 더 이상 방황하는 사유(wandering thoughts)가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기쁨이 좀더 강해지고 오래 지속된다. 기쁨이 사라지면, 편안함과 행복이 더 강해지고 고요한 마음이 호흡 속에서 더 깊어진다. 이 상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다시, 일으킨 생각(위따까,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vicara)을 가라앉힘으로, 비구는 위따까와 위짜라가 없고, 확신(self-confidence)이 있으며 고요한 마음 상태에(singleness of mind)있고, 마음의 고요(stillness of mind)에서 생겨난 기쁨(삐띠, piti)과 행복(수카, sukha)을 가진 2선에 들어가서 머문다.”

위따까와 위짜라의 가라앉힘은 마음이 매우 고요하고 명상의 대상에 아주 잘 머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과거나 미래에 대한 산만한 생각이 없다. 그러나 , 여전히 관찰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진정한 명상은 고요하고, 열린 관찰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모든 감각의 문이 활동하기 때문에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 예를 들어, 소리가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어디에 처해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
경전에서 말하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은 스스로 명상이 잘 행해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때 얻는 확신에서 유래한다. 자기-확신은 앉기명상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고요한 마음은(singleness of mind) 마음이 매우 고요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는 상태이다. 호흡에 기꺼이 머무르고, 들숨과 날숨 속에서 열려있고 이완된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초선과 2선에 대한 설명이다. 이제 아나빠나사띠 경전으로 돌아가자.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이 계속 향상되고 고요함과 열린 마음을 유지함에 따라, 마침내 기쁨이 너무 거친 느낌이 된다. 그래서 기쁨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럴 때 한 명상자가 스승에게 다음처럼 희극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제자: 제 명상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스승: 왜 그렇게 말하지?
제자: 더 이상 ‘기쁨(삐띠, joy)’을 느끼지 않습니다.
스승: 그것이 나쁘다는 것인가?
제자: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 ‘기쁨(삐띠)’을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스승: 이전보다 편안하고, 더 고요한가? 마음에 강한 균형감을 느끼는가? 큰 안락함을 느끼는가?
제자: 예, 그 모두를 느낍니다. 그러나 ,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다.
스승: 좋다. 계속 그렇게 해라.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 기쁨(삐띠, joy)이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이완되어 있어라.

기쁨(삐띠, joy)이 저절로 사라지고, 강한 조화와 고요함이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이따금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앉기명상 중에 어떤 사람이 그의 몸을 만진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 마음은 그런 것에 미혹되지 않는다.
경전에서 ‘명상자가 선명한 알아차림 (full awareness)을 가진다’고 할 때 이것을 말한다. 다음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또한 기쁨(삐띠, joy)이 사라짐으로, 비구는 평정(upekkha)에 머문다. 사띠(mindful)와 선명한 알아차림(fully aware)이 있고, 아직 몸으로 행복을 느낀다. ‘그는 평온과 사띠를 가지고 행복에 머문다.’라고 성자들이 설한 것처럼 그는 3선에 들어가서 머문다.”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3선에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음은 매우 맑게 깨어있고 조화 속에 있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명상의 대상에 편안하고 쉽게 머무르고 있다. (사띠하며) 깨어있고, 마음속에 평정(upekkha)을 가지는 것은 평소와는 다른 경험이다. 그리고 이 명상 상태는 전 생애를 통해 가장 높고 최고의 느낌이다. 더욱이 강한 평정(upekkha)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몸과 마음이 매우 이완되고 편안하다. 얼마나 멋진 상태인가! 이것이 성자들이 이 상태를 찬양하는 이유이다. 머리에서 경직이 이완되어 있는 것 외에, 몸의 긴장이 풀려있고 감각적 느낌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정신적 경직은 몸에 긴장을 일으킨다. 하지만 지금 마음이 매우 편안하기 때문에, 몸에서 감각되는 긴장도 사라진다. 이 상태일 때, 몸은 매우 부드럽고 편안해서 느낌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를 만진다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사띠와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음은 주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고, 일어나는 것에 동요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들숨과 날숨에서 행복을 경험한다’ 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정된 집중 명상’을 가르치는 어느 명상지도자는 이 선정상태일 때, 몸이나 모든 감각기관에서 더 이상 어떤 현상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명상자가 어떤 사람이 그들을 막대기로 때리거나, 그들의 손과 발의 위치를 바꾼다해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음이 매우 깊이 명상의 대상에 몰입되어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전을 읽어보거나,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분명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음의 작용(심행, mental formation)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tranquilizing)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마음이 계속 고요해지고 넓어지고 이완됨에 따라, 저절로 더 깊은 상태로 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몸과 마음에서 행복은 너무 거친 느낌이 되어, 마음에서 이례적인 평정(upekkha)과 조화를 경험한다. 이것은 경전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짐과 함께 행복과 괴로움을 버림으로, 비구는 괴롭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평정(upekkha)으로 인해 사띠가 청정한 4선에 들어가 머문다.’

마음이 매우 조용하고 고요할 때, 수행자는 깊은 평온(tranquility)과 평정(upekkha)을 경험한다. 그러나 여전히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몸에서의 감각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런 현상들에 결코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이 명상 단계(선정)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평온한 마음은 청정하고 빛나고 나무랄 데 없으며, 불완전함을 제거했고 유연하고 알맞으며, 안정되어 있고 동요하지 않음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진지한 명상자가 이 단계에 이를 때 기대할 수 있는 상태이다. 마음은 대단히 맑고, 빛나고 깨어있다. 마음은 수행의 미혹이 막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도 알 수 있다. 그때 그것을 놓아버리고 열려 있다.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해지고 호흡에 되돌아온다.
‘행복과 괴로움의 버림’이란 말은 행복과 괴로움이 때때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종종 일어나지만, 마음은 조화 속에 있어서 미혹에 흔들리거나 동요되지 않는다. 마음은 행복과 괴로움이 일어날 때 잘 알아차리고, 평정(upekkha)과 사띠가 매우 강해서 그것에 관심 갖지 않게 된다.
‘그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짐과 함께’의 의미는 마음이 낮은 감정 상태인 좋아함과 싫어함을 놓아버린 것을 말한다. 이 보다 낮은 모든 선정 단계에서부터 감정적인 마음 상태를 놓아버리게 된다. 먼저 명상을 배우기 시작할 때, 마음을 종종 움직여온 매우 낮은 거친 상태들을 놓아버린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알고 난 후, 수행의 미혹이 일어남 없이 오랫동안 앉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과 다른 선정요소들을 경험한다. 마음이 더 깊은 상태가 될 때,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이 사라진다. 기쁨은 잠시동안 더 강해진다. 그리고 점차 기쁨은 너무 거친 요소가 되어, 마음은 기쁨에 너무 많이 동요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적으로 명상의 대상에 더 깊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쁨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이때 마음에 평정(upekkha), 행복(happiness), 사띠(mindfulness),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이 있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매우 행복한 상태이다. 그러나, 결국, 행복은 너무 거친 느낌이어서 마음은 호흡에 더 깊이 나아가고, 동시에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하는 것을 계속한다. 이 때, 호흡과 마음의 이완(relaxing of mind)은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행복은 사라지고 마음에 남아있는 것은 강한 평정(upekkha), 강한 사띠(exceptional mindfulness), 마음의 고요(composure of mind)이다.
이것이 수행자가 마음의 작용(심행)을 경험하고 평온하게 하는 방식이다. 크리슈나무르띠는 진정한 명상상태를 이렇게 말했다. “명상하는 마음은 고요하다. 그것은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침묵이 아니다. 고요한 저녁의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이 가지는 이미지나 언어와 지각이 완전히 멈출 때의 침묵이다. 이렇게 명상하는 마음은 종교적인 마음이다. 이 종교는 교회, 사원, 염송으로 접촉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 “그는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때,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가장 작은 미혹들도 모두 알 수 있고 곧바로 쉽게 놓아버릴 수 있다. 먼저, 마음의 긴장을 놓아버린다...이제 호흡으로 되돌아간다...들숨에서 열려 있고, 넓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날숨에서 느슨하고, 쭉 펴져 있고 이완되어 있다.

“그는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gladdening)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자가 이 명상상태에 이를 때, 더 미묘하고 고양된 기쁨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깨달음의 한가지 요소인 기쁨(Pharana Piti)으로 기술된다. 마음은 매우 평화로운 행복에 있고, 전과 완전히 다른 편안함에 있다. 이것은 마음이 행복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마음의 기쁨(gladdening)이라 부른다. 그때, 마음은 대단히 고양되어 있고, 매우 맑으며 사띠가 전보다 더 예리해져 있다. 평정(upekkha)은 더욱더 조화되고 고요한 상태이다.

“그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stilling)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때 미혹이 거의 없고, 마음은 더욱 미묘하고 고요해진다. 미혹들이 일어날 때, 재빨리 알고 놓아버린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호흡으로 되돌아간다. 호흡과 평온한 마음은 더 자연스럽고 쉽게 고요해진다. 이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일어난다.

“그는 ‘마음을 해탈(liberating)케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의 해탈은 수행자가 호흡에 ‘기쁨으로 가득찬 흥미’를 가지고 호흡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동요하거나 호흡에서 벗어날 때 알아차리고 미혹에 대한 동일시 없이 놓아버린다. 그리고 호흡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음을 이완한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날 때, 재빨리 이것을 알고 주저하지 않고 놓아버린다. 이 상태에서 ‘나태와 무감각’, ‘들뜸과 불안’은 수행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일어난 장애는 선정에서 나오게 하고, 다른 미혹들을 일으킬 것이다. ‘마음의 해탈’이란 말은 어떤 방식이든지 집착하지 않고, 낮은 선정들의 단계와 모든 선정 요소들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동일시하지 않는다.

[21] “그는 ‘무상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무상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호흡과 마음의 고요와 확장에 대한 명상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마침내 마음은 매우 깊어진다. 그리고 마음이 더 넓어지고 커지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마음의 고요와 광대함이 함께 나아간다. 헤아릴 수 없는 고요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마음이다. 이 상태를 실제로 말하자면, 중심이 없고 바깥 모서리가 없다. 계속 커지고 확장된다. 경계가 없고 공간과 마음이 무한한 것을 보기 시작한다. 맛지마 니까야 111 경전, 아누빠다 숫따 경에 이렇게 써있다.

‘다시, 물질(색온)에 대한 인식을 초월하고, 모든 적의(patigha, resistance)의 사라짐과 인식의 변화에 이끌리지 않음으로, 공간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비구는 공무변처(base of infinite space)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 공무변처의 상태-공무변처라는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 됨(unification of mind)-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 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물질(색온)에 대한 인식을 초월한다’의 의미는 수행자가 그때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이 알아차림에서 마음이 몸으로 쉽게 이끌리지 않는다. 이 선정 상태에서는 마음 그 자체와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아차린다.
‘모든 감각적 적의의 사라짐과 인식의 변화에 이끌리지 않음’은 비록 몸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에도 고통을 알아차리지만 그 감각에 개입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몸이 커지고, 변화하고 확장되는 것을 느끼지만, 호흡과 이완된 마음(relaxing of the mind)에서 벗어나 미혹되지 않는다. 명상자의 마음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확장된다. 그러나 명상자의 마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받아들인다. 무상을 보고 어떻게 마음이 변화하고 확장되는지 본다. 수행자는 이러한 현상이 조절하지 않은 무아적인 과정의 일부분임을 깨닫는다.
수행자가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열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마침내 의식(consciousness)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계속해서 다가오고 멀어지고, 중단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의식(consciousness)이 모든 감각기관에서 존재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계속한다. 이것이 아누빠다 숫따 경전에서 이렇게 기술된다.

‘다시, 공무변처(the base of infinite space)를 완전히 초월함으로써, 의식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아차림으로 비구는 식무변처(the realm of infinite consciousness)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식무변처의 상태-식무변처라는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됨-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 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무한 의식 상태에 있을 때, 여전히 무감각이나 둔감한 마음, 들뜸 같은 어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수행의 장애는 수행에 쏟는 에너지가 완전히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에너지가 너무 없다면, 둔감함(dullness)을 경험한다.(이때 명상자에게 졸음이 있는 것은 드물다.)
한편, 수행자가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과도한 에너지를 수행에 쏟는다면, 들뜸(restlessness)이 일어날 것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의 장애가 마음에 존재할 때, 선정에서 나오게 할 것이다. 이 상태에 있을 때, 변화가 매우 빠르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매우 성가신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불만족이 의식상태와 함께 일어나는지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 수행자는 무상, 고를 직접 본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을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사건들은 스스로 일어난다. 그 결과, 수행자는 이러한 정신-물질 현상 속에서 무아의 본성을 본다. 이것이 무상을 주시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얻어질 수 없고, 개인적인 깨달음의 경험을 통해 얻는다.
다시 아나빠나사띠 경전으로 돌아가자.

‘사라짐(탐욕의 여읨)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사라짐(탐욕의 여읨)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자가 들숨에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날숨에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계속 수행함에 따라, 이제 마음은 전에는 서슴없이 보아왔던 모든 의식을 놓아버린다. 그때 마음은 무소유처(the realm of ‘nothingness)에 들어간다. 이것은 마음이 볼 외부 현상계의 것들이 없는 상태이다. ‘마음 외부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고 있는 마음이다. 아누빠다숫따 경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식무변처(infinite consciousness)를 완전히 초월하며,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이와 같이 비구는 무소유처(the base of nothingness)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무소유처의 상태 - 무소유처의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됨-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 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 상태는 매우 흥미로운 상태이다. 비록 보아야 할 외부의 마음과 정신적 요소들(metal factors)이 없더라도, 여전히 지켜보고 관찰할 것들이 많이 있다. 수행자는 여전히 집착에 기인한 오온을 가진다. 그리고 너무 느슨해있거나 힘이 넘치게 될 때마다, 여전히 수행의 장애들이 불쑥 나타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 칠각지가 차례차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기력(torpor)이 일어날 때, 수행자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 현상(법)에 대한 고찰, 정진, 기쁨’의 요소들을 각성시킴으로써 마음을 균형 잡아야 한다.
들뜸이 일어난다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 편안(경안), 사마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각성시켜야 한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이때, 마음은 매우 미묘하고 교묘해진다. 명상상태를 미혹하는 미묘한 과정들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사띠가 매우 강하고 이러한 속임수들을 매우 쉽게 볼 수 있다.

그는 ‘소멸(cessation)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소멸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이 들숨과 날숨에서 계속 더욱 고요해진다. 이때 마음은 작아지기 시작하고, 수축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마음은 매우 미묘하고 고요하게 된다. 아누빠다 숫따 경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다시, 무소유처(the base of nothingness)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구는 비상비비상처(base of neither-perception nor non-perception)에 구족하여 머문다.’

마음은 매우 미세해지고, 거의 움직임이 없다. 때때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렵다. 또한 마음의 인식(perception, 산냐)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렵다. 이렇게 매우 미세한 마음 상태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 마음이 현존하고 있는 것을 아직 인식하고 있을 때, 수행자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넓히는 수행을 계속한다면 여기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수행자는 호흡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러나 , 여전히 어떤 느낌들이 일어난다. 이때 수행자는 오랫동안 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완전히 적정상태(total tranquilizing)에 있고 모든 에너지가 이완되어 있다. 또한 청정무구한 상태에 있고, 더 오래 앉을수록 더 좋은 상태다. 수행자는 서너 시간, 또는 다섯 시간동안 앉기 시작한다. 안거수행 기간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수행하는 집에서도 수행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때, 몸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느낌을 여전히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을 열려 있고 넓어지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매우 미세하고 세밀하게 되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된다. 결국에는 ‘니로다사마빳띠(Nirodha Samapatti)’ 라고 불리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 상태’(상수멸)를 경험한다.

“그는 ‘놓아버림(relinquishment)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놓아버림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 명상상태는 출세간적 열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순간과 매우 가까운 것이다. 출세간적 열반은 순관과 역관의 십이연기(빠띠짜사무빠다)를 모두 보게 될 때 경험한다.
이것은 인식(산냐)과 느낌이 다시 돌아오고, 다시 알아차리게 된 후 일어난다. 궁극적인 무지(final ignorance)를 봄에 따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 탐욕을 여의게 되고,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이것이 모든 연기 고리를 직접 봄으로써 출세간적인 열반상태를 경험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깨어남의 가르침’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누빠다 숫따 경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시,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구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 상태’(상수멸, cessation of perception and feeling)에 구족하여 머문다. 그래서 지혜를 가지고 봄으로써 그의 번뇌는 멸진되었다.”

상수멸의 상태에 있을 때,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어떤 인식(산냐)과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아주 어두운 밤에, 모든 빛이 꺼진 것과 같다.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그 순간에 손을 얼굴 앞에 놓더라도 알 수 없다. 이 상태는 인식(산냐)과 느낌이 전혀 없는 것과 유사한 상태다. 이 상태로 오랜 시간 앉아 있을지 모른다. 인식(산냐)과 느낌이 되돌아오고, 그의 사띠가 충분히 예리해졌다면, 그들은 사성제의 두 번째, 괴로움의 원인(즉, 연기의 원인과 결과 관계)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 모두를 보고 난 후, 수행자는 사성제의 세 번째, 괴로움의 소멸(즉 어떻게 이러한 연기 고리들이 그치게 되고, 하나의 놓아버림이 다른 것의 놓아버림으로 직접 이르게 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수행자에게 저절로 보여지게 된다. 수행자가 연기를 배웠던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기억되거나 학습한 앎이 아닌 지혜이다.
‘그래서 지혜를 가지고 봄으로써 그의 번뇌는 멸진되었다.’는 사성제를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연기를 본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성제를 본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원인을 보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사성제의 세 번째)을 본다면, 수행자는 자연히 사성제의 네 번째를 보게된다.
다른 세 가지 사성제를 보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수행해야만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네 번째 사성제이다. 그래서, 연기를 직접 본다는 말은 수행자가 모든 사성제(고귀한 진리)를 보고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놓아버림을 주시하는 방법이다.

[22]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이렇게 계발하고 닦아가면, 큰 결실과 이익이 있다.”

(Fulfillment of the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의 성취

[2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어떻게 계발하고 닦아가면, 사념처를 성취하는가?”

[24] “비구들이여, 어떤 경우든지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이해하고(pajaanaa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이해한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이해하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이해한다.

어떤 경우든지(on whatever occasion)’라는 말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뜻을 암시한다. ‘어떤 경우든지’라는 것은 단지 앉기수행만이 아닌, 모든 순간을 말한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음이 무겁고 많은 생각들이 일어날 때, 이것을 알아차리고 생각들을 단지 놓아버린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신적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마음이 평온하게 될 때 한두 번 숨쉬는 동안 호흡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사띠를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고, 의식상태에 대한 알아차림을 향상시키는 분명한 실천 방법이다. 매순간 이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때, 삶을 올바르게 보고 인식하게 한다. 일하거나 쉬는 동안에서도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보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어떤 경우든지’ 라는 말은 걷기명상에도 또한 적용된다. 어떤 명상 지도자는 주의를 발에 기울일 것을 추천하지만, 그 대신 걷기 명상하는 동안 들숨과 날숨에서 이완되어 있으면서 마음에 주의를 계속 기울일 수 있다. 이것이 몸에 대한 사띠이고 다른 행동에도 확대하여 적용시킬 수 있다. 마음을 사띠하는 것은 알아차려야 할 매우 중요한 대상이고, 육체적인 몸보다 훨씬 더 쉽게 지켜볼 수 있다. 마음이 긴장하고 경직된 상태를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럴 때 이완되고, 머리에서 긴장이 풀어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완전히 이완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더라도, 한두 번 숨 쉬는 동안 호흡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담마빠다(법구경)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을 기억해라. “모든 선하고 악한 심리 상태는 마음을 뒤따른다. 마음은 그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마음을 뒤따르고, 마음은 어떤 것을 행복이나 고통으로 만든다. 몸의 모든 움직임을 따라가려 한다면 분명하게 그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움직임과 의식으로 일어난 긴장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라고 말할 때 붓다가 의도한 것은 마음과 모든 마음의 움직임과 긴장하게 되는 경향을 직접 알아차리는 것이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몸의 작용(신행, bodily formation)을 평온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 비구들이여, 이렇게 수행할 때 그 비구는 몸을 단지 몸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비구들이여, 이 들숨날숨이란 것은 몸들 가운데서 한가지 [형태의] 몸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 때에 몸을 단지 몸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 선명한 알아차림과 사띠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내는 것이다.”

‘온 몸을 경험한다’와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tranquilizing, passambhayam)하게 한다.’는 말은 앞에서 말했다. 그래서 , 그 부분들을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겠다. “몸을 단지 몸으로써 주시한다.”는 말은 호흡에 대해 자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열심(atapi)이라는 말은 부지런히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음을 말한다.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는 선정상태 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마음 깨어있음과 연관되어 있다. “평온한 선정” 상태에 있을 때,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주 잘 알아차리고, 사띠는 예리하고 분명하다. 그리고 ,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음 상태, 느낌, 감각, 미혹과 선정의 요소(기쁨, 행복, 평온, 고요함, 평정의 요소)를 관찰할 수 있다.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라는 말은 미혹, 감정, 고통스런 느낌, 즐거운 느낌, 행복한 느낌에 대해 마음이 좋아함과 싫어함을 초월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고통을 일어나게 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머지는 호흡명상이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수행의 한 부분이고, 사념처의 첫 번째인 신념처(몸에 대한 사띠수행)와 일치하는 것을 말하는 반복적인 구절이다.

[25] “비구들이여, 비구는 ‘기쁨(joy)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기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행복(happiness)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의 작용(심행, mental formation)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것은 이전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경전의 다음 구절로 넘어가겠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수행할 때 그 비구는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비구들이여, 이 들숨날숨이란 것은 느낌들 가운데서 한가지 [형태의] 느낌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 때에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 선명한 알아차림과 사띠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내는 것이다.”

이 구절은 첫 번째 네 가지 선정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느낌들 중 가장 중요한 느낌은 들숨과 날숨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명상의 다른 단계들을 경험해 나가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호흡의 느낌을 주시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명상의 진전 또한 멈춘다. 호흡의 느낌에 머무르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하다. 이것은 사념처의 두 번째인 수념처(느낌에 대한 사띠수행)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26]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stilling mind)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다시 반복되는 구절이다. 앞의 설명을 참조하기 바란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수행할 때 그 비구는 마음을 단지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비구들이여, 사띠를 놓아버리고 선명한 알아차림을 지니지 않은 자가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닦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 때에 마음을 단지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 선명한 알아차림과 사띠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내는 것이다.”

“사띠를 놓아버리고 선명한 알아차림을 지니지 않은 자가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닦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 경전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문구 중 하나이다. 사띠의 기능은 기억하는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는 것인가? 명상의 대상에 대해 기꺼운 흥미로움(joyful interest)과 분명한 이해(clear comprehension)로써 머무르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평온한 선정’ 상태에 있을 때, 마음은 매우 맑고 밝고, 깨어있게 된다.
수행의 길이 점점 더 깊어짐에 따라, 더 심오한 마음 상태가 드러난다. 사띠와 선명한 알아차림은 매우 순수해지고, 가장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도 주시하고 놓아버릴 수 있다. 마음은 더 이완되고, 더 확대되고 광대해진다. 긴장에서 자유로워지고 호흡을 지켜보기 더 쉽고 분명하게 된다. 수행자의 주의 깊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면, 마음은 이전보다 더 고요하게 된다. 이것이 사념처의 세 번째인 심념처(마음에 대한 사띠수행)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27]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impermanence)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무상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탐욕이 여읨(fading away)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탐욕이 여읨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소멸(cessation)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소멸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놓아버림(relinquishment)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놓아버림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여기서 다시 무색계 선정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출세간적 열반을 성취하고 경험하는 길을 말하고 있다. 이 경전은 어떻게 명상 단계에 도달하고 사성제와 사념처, 그리고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통해 최고의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수행할 때 그 비구는 담마(마음의 대상)를 단지 담마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그는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이 제거됨을 지혜로서 보고서, 평정(upekkha)을 가지고 분명하게 주시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 때에 담마를 단지 담마로 주시하면서, 열심히, 선명한 알아차림과 사띠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내는 것이다.”

더 높은 선정들을 경험하게 될 때, 마음의 조화(balance)가 점점 더 계발된다. 그래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이 제거됨을 지혜로서 보고서, 평정(upekkha)을 가지고 분명하게 주시한다’는 상태를 경험한다. 그때,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속이는지를 분명하게 보게 되고, 불쾌한 것들이 일어날지라도 그 속에서 평정(upekkha)을 유지한다.
명상으로 인한 진정한 조화는 마음이 무색계 영역에 들어갈 때 배우게 된다. 이것은 정신적인 개념과 집착을 진정으로 놓아버리게 되는 때이다. 가장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은 그것에 동요됨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귀한 평정(upekkha)을 계발하게 된다. 이것이 사념처의 네 번째인 담마(마음의 대상)에 대한 사띠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28]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이와 같이 계발하고 닦을 때 사념처를 성취한다”


(Fulfillment of the Seven Enlightenment Factors)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


[29] “비구들이여, 사념처를 어떻게 계발하고 닦을 때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성취하는가?”

[30] “비구들이여 비구가 몸을 단지 몸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그때에 사띠를 확립하고 놓아버리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사띠를 확립하고 놓아버리지 않으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칠각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 대념처경(사띠빳타나 숫따)을 인용할 것이다. 대념처경에 이르기를,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가 있다’고 이해하며(understand),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이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마음이 고요하고 예리하고 맑으며, 호흡과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기꺼운 흥미로움이 마음에 있는 것을 단지 알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사띠가 둔하고, 예리하지 못하고, 마음이 약간 지루해지고 흥미를 잃었을 때, 그 상태를 단지 아는 것이다. 그런 경우, 수행자는 흥미를 살려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정말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서 모든 호흡이 어떻게 다르고, 호흡들이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것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를 계발하여 성취하는 방법이다.

[31] “그는 그렇게 사띠하며 머물면서 그런 현상(담마)을 지혜로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같이 사띠하며 머물면서 그런 현상을 지혜로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하면,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와 친숙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행의 다섯 가지 장애(오개)나 감정 상태, 신체적 고통 등의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무아적으로 탐구한다. 이것은 그 현상에 대한 생각으로 개입되지 않고 해야 한다. 단지 그 현상을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그 현상을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현상을 놓아버린다. 그것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긴장한 정신적 움켜쥠을 열려있게 해서, 이완하고 확대하고 그 미혹에 대해 생각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허용한다 ... 마음과 정신적 긴장을 푼다...그리고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린다... 마음이 긴장하는 매순간, 그 미혹에 대해 다른 면을 보려고 노력해라...그리고 그것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이완하고 호흡으로 되돌아오라. 이런 방법으로, 미혹과 더 친숙해질 수 있고, 그것을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법을 고찰하는 것(택법)은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있다’고 이해하고,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일으키기 위해서, 모든 현상이 작용하는 방식에 강한 흥미를 가져야만 한다. 그 현상을 좀더 탐구할수록, 고통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수행의 장애와 미혹이 갖는, 특별하고 다른 모습을 더욱 쉽게 알게 된다. 이러한 현상들을 분명하게 볼 때, 그것들을 놓아버리는 것이 훨씬 쉽게 된다. 또 이것이 무아의 과정이고, 불만족스럽고 항상 변화한다는 견해를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견해는 수행을 계속해서 향상시키게 한다.

[32] “그가 그런 현상(법)을 지혜로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할 때 불굴의 정진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그런 현상(법)을 지혜로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하여 불굴의 정진이 일어나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 진지한 관심과 주의깊음으로 고찰할 때, 많은 정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정진하고 강한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짐에 따라서, 좀 더 많은 정진이 생기게 된다.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있다’고 이해하고,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33] “정진이 일어난 이에게 출세간적인 기쁨이 일어난다. (출세간적인 기쁨(Ubbega Piti)은 첫 번째 두 가지 선정에서 경험되는 기쁨을 말한다. 더 높은 선정에서 느낄 수 있는 미세하고, 더 높은 형태의 기쁨인 ‘전-충만한 기쁨(Pharana Piti)’이 있다. 이것들은 감각적인 기쁨(즉, 눈, 귀, 코, 혀, 몸)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출세간적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정진이 자리잡기 시작한 비구에게 출세간적인 기쁨이 일어나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호흡에 머무르는 정진력이 더욱 커짐에 따라, 사띠는 더 예리해지고 정진은 조금씩 더 커진다. 이렇게 될 때 호흡에 머무르고 마음을 확대함 속에서, 마음은 매우 행복하고 기쁘다. 이 행복한 느낌에는 일종의 흥분이 있고, 그것을 ‘고양된 기쁨’(Ubbega Piti)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 더 높은 명상 의식 상태에 있을 때 ‘전-충만한 기쁨’ (Pharana Piti)라고 불리는 기쁨이 있다. 이때는 그다지 흥분이 없는, 매우 훌륭하고, 좋은 상태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 상태는 두려워하거나 없애야 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명상 수행이 계발되고 향상됨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호흡에 머무르고, 흥미를 가지고 마음을 열려 있게 하면서, 기쁨을 즐기려고 휩쓸리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런 기쁨에 휩쓸린다면, 기쁨은 곧바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 결과, 대개 졸음, 나태, 무감각을 경험할 것이다.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있다’고 이해하며(understand),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나태와 무감각이 일어날 경우, 첫 번째 네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은 매우 중요하다. 나태는 졸음을 말하고, 무감각은 둔한 마음을 뜻한다. 수행자가 사선정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선정상태에 있을 때, 수행 중 일어나는 두 가지 주요 장애는 들뜸과 무감각이다. 그러나 ,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키워 이 무감각을 고찰하게 될 때, 더 많은 정진도 필요하다. 이것이 둔감함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 더 높은 선정에 들 때, 점차 수행을 미세하게 조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과 친숙해짐으로써, 모든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알게 된다. 이것이 출세간적인 열반상태에 직접 이르게 할 것이다.
명상이 잘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인 사띠(염각지)이다. 사띠가 없다면, 아마 명상의 어떤 경지에도 이를 수 없다. 사띠는 나태와 무감각, 들뜸 모두를 극복하게 하는 주된 열쇠이다.
이러한 수행의 장애는 언제든지 올 수 있으며, 비상비비상처(neither-perception nor non-perception) 같은 명상상태에서도 바로 나오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라. 그래서 , 이런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을 매우 주의해서 알아차리고 있어야 하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세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는 들뜸을 극복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34] “기쁨이 있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몸과 마음이 편안(경안)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기쁨이 있는 마음을 가져 몸과 마음이 편안(경안)하게 되면, 그 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마음에 기쁨이 일어날 때, 몸과 마음에서 매우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 이것은 무색계 선정 처럼 매우 높은 명상상태에서도 그렇다. 잠시 후에, 기쁨이 약간 사라져가고,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게 된다. 이 상태를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라고 부른다. 그때, 몸과 마음은 엄청난 평화로움과 고요함에 있게 된다.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있다’고 이해하며(understand),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안다.”

실제로,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현저히 나타나는 부분은 신체적인 느낌이다. 몹시 평화로운 느낌과 함께 기분이 매우 좋고 고요하다. 이것은 첫 번째 세 가지 무색계 선정인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를 경험할 때, 특히 잘 알 수 있다.

[35] “몸이 편안하고(경안) 행복을 느끼는 자의 마음은 사마디에 든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몸이 편안하고(경안)하고 행복을 느껴서 마음이 사마디에 들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종종 깨달음을 도와주는 집중(concentration, 삼매)의 요소라고 부른다. 그러나 , 이러한 용어는 또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stillness)의 요소라는 용어를 택했다.]

몸과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평온해짐에 따라, 마음은 호흡에 머물러 미혹됨이 없이 자연스럽게 더 확대된다.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열고, 이완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진다. 마음은 마침내 어떤 외적 혹은 내적인 미혹에 동요되지 않고 고요해져 있다. 집중하려고 노력하거나 과도한 힘을 들이지 않고 명상의 대상에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호흡에 아주 오랫동안 머무른다. 물론, 매우 예리한 사띠(sharp mindfulness)와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이 있다. 무소유처(realm of nothingness)에 머무를 때에도 여전히 선명한 알아차림이 있다.

모기가 날아다니는 소리를 듣거나 모기가 앉으려고 할 때도, 마음은 동요하지 않고 호흡에서 떠나지 않는다. 호흡에 대한 사띠와 사마디는 관찰하기에 매우 분명하고 예리하다.
무소유처에 있을 때, 다양한 마음의 모습을 경험하고 지켜본다. 비록 낮은 명상단계에 있을 지라도 마음은 매우 맑다. 또한,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현상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을 ‘고요함의 작용(action of silence)’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매우 고요한 그 순간은 모든 사람이 찾고 있는 축복이다. 지금 이 순간은 그런 고요함 속에서 완전해진다. 사띠빳타나 숫따 경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있다’고 이해하며,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36] “그는 그처럼 사마디에 든 마음으로 안으로 평정(upekkha)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그처럼 사마디에 든 마음으로 안으로 평정(upekkha)하게 되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도 계발해야할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마음이 동요될 때, 마음을 조화 속에 있게 한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는 무엇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든지, 마음이 그것을 자애롭게 받아들이게 하는 최상의 요소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고통이(정신적이든 감정적이든) 일어나더라도 미혹되지 않는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는 현상들을 무아(아나따)로 보고, 미혹들에 휩쓸려서 자아와동일시 하지 않게 한다.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고, 그리고서 조화 속에서 그것을 초월한다.
아나따(무아)를 보는 것은 붓다의 길을 따라 빠르게 나아가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 평정(upekkha)은 다소 조심해야할 것이다. 종종 무관심해지는 것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무관심은 일종의 미혹이고, 무관심 속에는 혐오가 있고, 그것은 평정(upekkha)이 아니다.
평온(upekkha)은 오직 열려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관심은 닫혀있고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무시하려는 것이다.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에서 이것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있다’고 이해하며(understand),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편안함(tranquility), 사마디(stillness), 평정(upekkha), 이 세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는 마음에 들뜸이 일어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들뜸은 마음속에 많은 생각을 만들고, 몸에 불쾌한 느낌들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 결과, 명상이 중단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미혹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것은 고통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매우 격한 마음이다. 들뜸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마음에 사마디(stillness)와 몸에 편안함(tranquility)을 계발하는 것이다. 마음이 들뜸에 있을 때, 조화가 전혀 없고, 그 대신 그 끔찍한 느낌으로 많은 자아-동일시가 있다. 그래서 이 수행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행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한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tranquility), 사마디(stillness), 평정(upekkha)의 요소를 생기게 하고, 이런 요소들에 마음이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들뜸을 극복할 것이다.
명상자를 항상 괴롭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두 가지 주된 수행의 장애는 무감각(또는 둔한 마음)과 들뜸(또는 과도하게 활동적인 마음)이다. 이런 수행의 장애들과 친해지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아라한이 될 때까지, 그것들은 주위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 수행의 장애가 일어났을 때, 그 상황에 저항하는 것을 신속하게 내던지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탐험하기 시작해라. 그러면 더 빨리 수행의 장애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수행의 장애를 더 빨리 놓아버리고, 선정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37] “비구들이여 비구가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이 전체 형태는 30-36절의 반복이다.) …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수행의 장애나 미혹이 일어날 때마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을 이용해야 함을 깨달아라. 앉기수행과 더불어 일상생활에서도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은 수행의 장애나 미혹에 부닥쳤을 때 마음을 조화 속에 있게 한다. 이것은 모든 사념처 수행 내내 적용된다. 그리고 ,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하는 동안, 항상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은 차례로 일어나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선정은 마음의 계발하는데 중요하고, 이 단순한 지침을 따를 때 누리게 될 큰 결실과 이익을 보여주고 있다.

[38] “비구들이여 비구가 마음을 단지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이 전체 형태는 30-36절의 반복이다.) …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39] “비구들이여 비구가 담마(mind-object, 법)를 단지 담마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이 전체 형태는 30-36절의 반복이다.) …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40] “비구들이여, 사념처를 이렇게 계발하고 닦으면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성취한다.”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가 완전한 균형 속에 있을 때, 출세간적인 열반에 이를 가망성이 보이게 된다. 더 높은 선정으로 나아감에 따라,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의 균형은 더 미세해지고 미묘해진다. 이 미세한 마음의 조율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자연히 오랜 시간 앉아 수행하고 싶어진다. 이러한 명상상태는 이제껏 경험해온 가장 멋진 것이다!
어떤 명상자는 매우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기 전에 충분한 시간동안 마음을 지켜보고 마음의 조화를 수행한다. 이 명상은 모든 활동 중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즐거운 경험이다.

(Fulfillment of True Knowledge and Deliverance)
순수 지혜와 해탈의 성취


[41] “비구들이여,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어떻게 계발하고 닦으면 순수 지혜와 해탈을 성취하는가?”

[42]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초연함(seclusion)과 탐욕의 여읨(dispassion)과 소멸(cessation)에 의지하고, 놓아버림(relinquishment)으로 성숙한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를 닦는다. ”

‘초연함에 의지한다’는 적어도 가장 낮은 선정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앞에 말한 것처럼, 초선에 대한 진술은 ‘감각적 즐거움에서 초연해지는 것, 그리고서 “불건전한 상태들에서 초연해지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 마음은 깨어 있고 명상의 대상에 분명하게 머문다. 즉, 마음에 미혹이 없다.
미혹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사띠하며 알고 놓아버린다. 경전에는 ‘그런 초연함으로 행복을 경험한다.’고 나타나 있다. 이것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초연함’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탐욕의 여읨’은 애착과 집착에서 마음이 자유로운 것, 즉 사유하거나 분석하지 않는 것이다. 사선정은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탐욕을 여읜 강한 평정(upekkha)을 갖는 마음이다. 이것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탐욕의 여읨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소멸’은 번뇌와 일어난 현상에 대한 자아-동일시가 그치는 것을 말한다.
‘사띠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파악하기 힘든 의미를 갖고 있다. 단순하고 정확한 사띠의 의미는 ‘관찰하는 마음(observing mind)’이나 ‘주의(attention)’, ‘주의에 대한 깨어있음(alertness of attention)’이다.
진정한 ‘사띠’의 의미는 마음이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보고 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긴장의 원인들을 놓아버리고,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 평온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 전체 과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하고, 연극 같은 현상 속에 휩쓸리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그것을 허용하면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연극 같은 현상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말은 이 무아의 과정을 자아적인 것으로 동일시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띠는 자애롭게 마음을 열고, 미혹에 대해 동일시를 놓아버리고 나서, 머리와 마음에서의 긴장을 풀고, 그래서 실체를 분명하고 고요하게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조절하거나 저항하려고 할 때마다, ‘담마’ 즉 ‘지금 이 순간의 진실(Truth of the Present Moment)’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의 실체와 싸우는 것은 많은 불만족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한다. 그러나 , 이것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임을 사띠를 가지고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을 경직시키거나 어떤 식으로 저항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기쁨에 찬 흥미는 매우 중요하다. 마음이 기쁨 속에 있을 때, 분노, 시기, 혐오, 공포, 불안이 없기 때문이다. 기쁨에 찬 흥미는 명상자가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무아의 시각으로 보는 올바른 견해를 갖게 한다. 기쁨은 마음을 고양시킨다. 마음이 고양될 때, 일어나는 현상은 연속적인 과정의 단지 일부분이고, 그 과정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기쁨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 중의 하나이고 수행에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또한, 기쁨이 마음에 일어날 때, 일어나는 것들이 즐겁게 느껴진다. 매우 유용한 머릿글자인 DROPS을 기억해두어라. 그것은 저항하지 말고, 재촉하지 말고, 미소짓는 것이다.(Don't Resist Or Push, SMILE) 그리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담마의 순간(Dhamma of the Moment)’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마침내 마음이 더 높고 미묘한 명상 상태에 이르게 된다.(무색계 선정) 이때, 마음은 ‘무소유처(아무것도 없음의 영역)’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소멸(cessation)이다. 이것은 마음 외부에 더 이상 지켜 볼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무소유처’를 경험할 때, 마음은 아무것도 지켜보지 않는다. 그러나 , 마음은 여전히 존재하고, 집착에 의해 영향 받은 오온(다섯 가지 무더기)과 함께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몇몇 수행의 장애들이 일어나서 명상의 높은 경지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그래서 마음이 마음 바깥을 관찰할 것이 없지만, 여전히 보아야할 것이 많다. 이것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소멸에 의지하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를 경험하고, 계속 마음을 열고 이완할 때, 마침내 ‘상수멸(인식과 느낌의 소멸 상태, Nirodha-Samapatti)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태가 일어나는 동안, 이 의식의 꺼짐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이나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유일한 명상의 단계이다.
그러나 , 이 명상 상태는 여전히 세간적이다. 이것은 아직 출세간적인 열반이 아니다. 인식이나 느낌이 없다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식과 느낌이 되돌아왔을 때뿐이다. 사띠가 충분히 예리하다면, 수행자는 각각 그리고 모든 연기의 고리가 순차적으로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볼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이것은 출세간적인 열반 상태가 아니다. 이 연기의 고리는 다음과 같다.
무지(無知, ignorance)를 조건으로 하여 형성(行, formation)이 일어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意識, consciousness)이 일어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과 물질(名色)이 일어나고,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여섯 감각장소(六處, six-fold sense base)가 일어나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 만남(觸, contact)이 일어나고, 만남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受, feeling)이 일어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망(愛, craving)이 일어나고, 갈망을 조건으로 하여 움켜쥠(取, clinging)이 일어나고, 움켜쥠을 조건으로 하여 되어짐(有, being)이 일어나고, 되어짐을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生, birth)이 일어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老死, old age, death)이 일어난다.
이 일어나는 현상이 사라진 후에, 연기의 소멸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진행된다. 늙음과 죽음(old age and death)의 소멸로 태어남(birth)의 소멸이 오고, 태어남의 소멸로 되어짐의 소멸이 오고, 되어짐(being)의 소멸로 움켜줌(being)의 소멸이 오고, 움켜쥠의 소멸로 갈망(craving)의 소멸이 오고, 갈망의 소멸로 느낌(feeling)의 소멸이 오고, 느낌의 소멸로 만남(contact)의 소멸이 오고, 만남의 소멸로 여섯 감각장소(six-fold sense base)의 소멸이 오고, 여섯 감각장소의 소멸로 정신과 물질(mentality-materiality)의 소멸이 오고, 정신과 물질의 소멸로 의식(consciousness)의 소멸이 오고, 의식의 소멸로 형성(formations)의 소멸이 오고, 형성의 소멸로 무지(ignorance)의 소멸이 온다.
순관과 역관으로 연기를 보는 것이 마음을 ‘출세간적인 열반’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때 견해의 큰 변화가 있다. 그때 마음은 영원히 지속하는 에고나 자아가 있다는 믿음에 대한 여읨이 있다.
이것은 단지 무아적인 과정이고, 현상이 일어나는 방식을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앎으로 보는 것이다. 현상은 그 조건이 일어나기 적당한 때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불교적인 용어로 이것은 ‘아나따(anatta)’ 즉 ‘자아라는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단지 말, 구절, 경전을 암송하거나, 다른 사람이나 자신들이 행하는 의식과 의례로는 성인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올바른 길(아라한이 될 때까지 더 높은 단계의 마음 정화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의심이 더 이상 없다. 이것이 소따빠나(수다원과)가 되고 진정한 정화의 길에 이르는 것이다.
이 높은 경지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 단지 연기를 봄으로써 사성제를 체험하는 것이다. 오직 세 가지 존재의 특성(무상, 고, 무아)을 보는 것이 ‘출세간적인 열반’에 이르게 하는 희유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붓다가 이 세계에 나타나, 사성제를 깨달음의 길로 보여준 이유이다.

“여기 비구는 초연함과 탐욕의 여읨과 소멸에 의지하고, 놓아버림으로 성숙한,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정각지)의 요소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를 닦는다.”

[43] “비구들이여,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이렇게 계발하고 닦으면, 순수 지혜와 해탈을 성취한다.”

이 경전은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와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사띠빳타나 숫따(대념처경)의 마지막 부분으로 이 책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그 부분은 맛지마 니까야 10번째 경의 46절과 47절에서 인용하였다.

(46)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을 이와 같이 칠 년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궁극적 (해탈의) 지혜를,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 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아나가미’ 또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의 성취를 말한다.

“비구들이여, 칠 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와 같이 육 년을 … 오 년을 … 사 년을 … 삼 년을 … 이 년을 …일 년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궁극적 (해탈의) 지혜를,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 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일 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와 같이 일곱 달을 …여섯 달을 … 다섯 달을 … 네 달을 … 세 달을 … 두 달을 … 한 달을 … 반달을 …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궁극적 (해탈의) 지혜를,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 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반달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와 같이 칠 일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궁극적 (해탈의) 지혜를,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 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47) “그래서, ‘비구들이여, 이것은 존재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초월하고,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진리의 길을 성취하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바른 길(direct path)’이다. 이 길이 바로, 사념처이다.’라고 설한 것은 이와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어떤 번역에서는 ‘이 길은 유일한 길’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방법에서의 바른 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하고 혼란스럽지 않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설법에 기뻐하였다.”

이것은 내가 지어낼 수 없는 매우 위대한 법문이다. 나는 단지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전할뿐이다. 당신이 ‘아나빠나사띠’로 얻어진 평온(사마디)을 통해 마음을 계발하는 수행을 진지하게 실천한다면, 최종적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첫 번째 즐거운 머무름(초선)에 도달하고, 계속 수행해 나간다면,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에 이르게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붓다가 말한 것이다. 수행을 바꾸거나, 멈추지 않고 계속 열심히 노력한다면, 분명히 붓다가 설한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출세간적인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순관과 역관으로 연기를 깨닫는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기 바란다. 다른 길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핵심인 사성제(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직접 보고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에 의해 시설된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결실과 유익이 있을 것이다.

SADHU...SADHU...SADHU...
사두... 사두... 사두...

이 책에 어떤 잘못된 점이 있다면, 모두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에 대한 충고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명상 수행하는 모든 이들이 계속 노력을 기울여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 바로 궁극의 해탈인 출세간적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진지한 모든 이들이 지혜를 통해 사성제를 알고 이해하기를...
그래서 최고의 목적지에 이르기를...
붓다의 길을 걷는 모든 수행자들이 연기의 고리를 쉽고 빠르게 깨달아 그들의 괴로움이 쉬이 극복되기를...

이 책에 써진 유익함을 부모님, 친척, 도움 준 이들, 모든 존재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침내 최고의 행복에 이르고,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말라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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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는 이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엄습한 두려움이 사라지기를...

모든 비탄을 벗어버리고, 모든 존재들이 안식을 찾기를...

모든 존재들이 우리가 이렇게 얻은 공덕을 나누어 행복을 성취하기를...

우주와 지구에 사는 존재들과 힘센 천신/용신(naga)들이 우리가 얻은 이 공덕을 함께 나누기를...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보호하기를...

Footnotes(각주)

[1] 칠각지와 사념처를 포함하는 아나빠나사띠 경전을 언급하고 있다.
[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모리스 왈쉬(Maurice Walshe)가 번역한 ‘The Long Discourses of the Buddha’(장부경전, 디가니까야, Wisdom Publications (1987)의 p.556를 보라.
[3] 맛지마 니까야 경전의 36번째 경인 마하사짜까 경(Mahasaccaka Sutta)을 보라.
[4] 이것은 모두 아홉 가지이다! 그것은 네 가지 색계 선정들, 네 가지 무색계 선정들, 그리고 상수멸을 말한다.
[5] 여기서, ‘선정’이라는 말은 몰입집중삼매(아빠나 사마디), 또는 근접집중삼매(우빠짜라 사마디)의 의미이다. 근접집중삼매는 마음이 명상의 대상 속에 몰입되기 바로 전 단계이다. 이 말은 현재 명상 지도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정의들이다.
[6] 이에 관련해서, 그것은 단지 몰입집중삼매(아빠나 사마디)를 의미하고, 근접집중삼매(우빠짜라 사마디)를 의미하지 않는다.
[7] 어떤 명상 지도자들은 이것을 순간집중삼매 또는 순간-순간 집중삼매(카니까 사마디)라고 부른다.
[8] ‘경전들’이라는 복수형의 의미는 여러 차례 일치하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
[9] 이것은 하안거의 마지막에 비구들이 함께 모여서 그들이 행한 어떤 작은 잘못도 고백하는 포살 의식을 말한다.
[10] 이것은 무의미한 수다와 잡담을 말한다. 비구는 붓다가 말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동안, 고요한 마음을 확대하고 분명한 사띠를 가지고 명상수행을 하고 있다.
[11] 이것은 몸에 대한 사띠, 느낌에 대한 사띠, 마음에 대한 사띠, 담마에 대한 사띠를 말한다.
[12] 예를 들어, 77번째 경인 마하싸꾸루다이 숫따 (Mahasakuludayi Sutta)와 111번째 경전인 아누빠다 숫따(Anupada Sutta)를 보라. 이 두 경전은 맛지마 니까야에 있다.


- 옮기면서 모은 글 (collected short terms)


사띠 : sati(빨리어), mindfulness, 사띠는 ‘알아차림’, ‘마음챙김’, 염(念), ‘주의깊음’, ‘마음 깨어있음’ 등으로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사띠는 마음이 갖는 관찰력으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점진적인 수행으로 이완되어 있음이 더 깊어짐에 따라, 좀더 미묘한 것들을 일어나는 그 순간에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는 한글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사띠의 진정한 의미는 사띠수행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담마 : 법(法), 진리, 본성, 성질, 이론, 마음의 대상(Mind-Objects)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불교 단어 중 가장 중요하고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Dhamma(빨), 이 책에서 종종 ‘지금 이 순간의 진실’(Truth of the Present Moment)로 사용되었다.

아나빠나사띠: 호흡(들숨날숨)에 대한 사띠수행,
mindfulness of Breathing, anapanasati(빨)

사띠빳타나(사념처) : 네 가지 대상(몸, 느낌, 마음, 담마)에 대해 확고부동한 사띠를 확립하는 수행, 네 가지 사띠의 확립,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 satipatthana(빨)

선명한 알아차림: 삼빠잔냐, full awareness(영),
sampajanna(빨)

사마디 : 평온-지혜, 한 가지 대상에 집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tranquil wisdom, samadhi(빨)

평정 : 우뻬카, equanimity, upekkha(빨)

수행의 장애(오개) : [욕망/탐욕], [미움/혐오], [나태/졸음/둔함], [들뜸/후회/걱정/산만해짐], [회의적 의심], the five hindrances, nivarana(빨)

사성제 : 네 가지 고귀한 진리, Four Noble Truths

칠각지 : 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
Seven Enlightenment Factors, bojjhanga(빨)

A practical, Bare-Bones guide
to Loving-Kindness Meditation

자비관 명상에 대한 중요한 실천 지침



By Ven. Bhante Vimalaramsi
위말라람시 스님 저 (담마 수카 명상센터)
옮김 :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