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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공에 대한 견해
출처 : http://graspace.egloos.com/m/217639
<<침묵의 대담>>
- 신과 공에 대한 견해 -
* 토마스 키팅:
신은 우리밖에 있는 존재이고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신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생각은
성경과 거리가 멀다.
이것은 이단이다.
주관과 객관을 나누게 되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공업기술의 결실을 이루었으나
정신적 차원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신은 곧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또한 신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신과 구분은 되지만
신에게서 전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 는 없다.
신과 참된 자아는
같은 것이다.
신은 우리 안에 살아 있고,
또 우리도 신의 신성한 삶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도 신이다.
*주디스 르프:
공을 정확히 번역하면
"한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있음"이라 할 수 있다.
공은 곧 마음이 열리는 것이며
이것, 저것, 나, 너의 자기 보호적이고
생존하려 애쓰는 마음을 누그려 뜨려준다.
이것은 실제로부터 움츠려드는 도피가 아니라
툭 트인 광활함의 상태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홉코 신부:
신을 개념화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우상이지 신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성은
신성을 초월해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알 수 없는 것 너머의 것은,
자신의 알 수 없는 것 너머의 상태를,
알 수 없는 것 그 너머의 것을 통하여 알게 해 준다.
다시 말해서
신은 스스로를 나타내신다.
'텅빈 것'과 연관지어 볼 때,
이것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인 실재, 곧 神은
"신성 그 이상"의 것이지만
우리의 전통에서 "신의 에너지" 즉,
신의 행위, 언어, 직관, 현현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짐으로서
우리에게 스스로 보여 주셨다.
"공이나 궁극적 실체처럼
신은 존재하는가?"란
질문에는 신은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신도 존재하는가?"란
질문에는 신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에이도 로시:
'자신'은 항상
어떤 생각(관념)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념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그 관념의 현현이 부처, 그리스도,
어머니라 할 지라도 죽여야 한다.
*홉코 신부:
저 혼자만이
제가 관련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는 없다.
우리가 뵐 수 있는 유일한 신의 영광은
완전히 성숙된 인간에게서 볼 수 있으며
신은 곧 자신을 드러내신다.
신은 형태, 이미지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을 볼 수 있는 것은
은총에 의한 자신과 닮은 꼴을 지닌
성상을 보는 것이다.
성상은 우리들
각자를 의미한다.
신의 영원한 성상은
오직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보여준 신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똑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우리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에고를
죽이도록 해야한다.
* 씨뚜빠 린뽀체
불성은 우리에게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또 잃어버려서
명상수행을 통해
되찾아야 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시 일깨워야만 한다.
그리스도와 상이하게 만드는 것이나
불성을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한 이원성은, 내가 주체가 되고
그리스도나 부처가 객체라는
일반적 관념에 속박되는 것이므로
불성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데에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은
이 이원성이다.
이러한 이원성을 죽일 때
우리는 자신의 궁극적 본질을 부처,
신의 궁극적인 본질로서 깨닫게 될 것이다.
* 에이도 로시:
공이란 말은
우리의 "관념을 비운다"는
적극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공에 대한
관념까지도 비워야 한다.
*홉코 신부:
신은 나인 동시에 전적으로 타자이고,
전적으로 저 너머이고 심지어 부정신학 그 이상이다.
그럼에도 신은 또한 우리와 연관되어 있다.
이 둘 다 모두 신이다.
(단순히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씨뚜빠 린뽀체:
(유신론과 무신론)
내가 보기에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없다.
어떤 종류의 이즘을 고집하는 것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나와 타인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영적인 길을 진정 걸어본다면
당신은 자신과 타인이 하나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종교를 통하여 실재와
더 가깝게 접근하게 된다.
당신은 실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당신의 고유 에너지를
기꺼이 탐구하게 된다.
실재로 당신은 존재의 본질로서
행동하기로 선택한 것이며,
바로 그것이 진실함이다.
종교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당신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존재의 공허함을
종교적인 잡동사니로
보상 받고자 함도 아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은
실재와 접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숭배하든
자신을 숭배하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인격적으로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전념치 않는다면
유신론, 무신론 둘 다 문제 투성이다.
보통 유신론적 전통에서는
외부의 대상을 숭배하고,
무신론적 전통에서는
외부의 대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양쪽 다
단지 보모를 어디서
구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보모를 안이나 밖에서
구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그 어느 쪽에서든
당신의 존재는 적절하게
완전히 발현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대치물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돈을 아무리 세어 보라.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 것은 아니지 않는가)
*로제 도제: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에고'의 문제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나'라는 실체라고 느끼는 것이 '에고'이다.
우리는 경험에는 항상
중심 되는 인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누군가를
연속되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에고는
영역을 창조해 내는 존재로서
개인의 왕국을 만들고자 한다.
이것을 "개성의 에고"라고 한다.
깨달은 이들은
'개성이란 실재로 지어내는 과정'이라 고 했다.
자기 정체성이라는 좁은 집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양된 자아,
정신적이고 순화된 자아
또한 존재치 않는다.
석가모니불은 참된 모습인
브라만 자체도 헛된 것이라 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의 주체로서의 자아와
이 자아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는
서로 의존적이며 서로 끊임없이
확인 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바즈라야나 불교에서는 에고는
원초적인 지성의 왜곡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에고는
단순히 순진무구가 아닌
완고한 고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길"이란
어떻게 이 에고를 통찰하여 순화하고,
또 어떻게 이것을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이 에고가 없는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데는
외부의 구세주가 있지 않다.
(개인이라는 관점을 넘어선 경험에 대해)
*팀코 신부:
'내'가 있다고 하면
초월적 경험은 불가능하다.
각설탕은 하나하나 구분된 개체로 되어있지만
커피 잔에 넣어 녹음과 동시에
그 커피와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설탕의 성질이
사라져 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설탕의 성질에는 변함이 없다.
이때 더 이상 개별화된 중심이나
자아로서의 '나'가 아니다.
이제 '나'란 없다.
'나'는 죽은 것이고
그 다른 것 속에 녹아
다른 실체에 동화되었다.
*조지프 골드스타인:
(정신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경지에 이르는 두 가지 방식)
첫째, 자아를 점점 키워서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과정-->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
둘째, 제로상태의 경험에서 오는 일체감-->
모든 것을 내버리는 마음
*로제 도제의 이에 대한 답변:
대승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를 이렇게 본다.
하나는,
우주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자신의 마음씀을 넓힘.)
다른 하나는,
자아를 녹이는 것이다.
이 두 양자는
마치 막대기의 양끝과 같다.
(상대적 에고와 절대적 에고의 관계)
상대적인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개별적으로 고립된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버림으로써
타인에 대한 자비심도 일어날 수 있다.
절대적인 면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자아도 없고
타인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근본적인 무아이다.
(어떻게 상대적인 세계가 초월되는가)
*로제 도제:
첫째로 개인의 자존심이 허물어지면서
개인의 에고가 의지처를 잃게 되는 과정이다.
둘째로 어떤 조건적인 경험을
놓아 보겠다는 관념만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상대적인 세계를
재음미하게 된다.
다시 말해,
상대적 세계가 환원된다.
이때는
상대적 경험들도 변현된다.
이것을 넘어서면
상대계와 절대적인 실재가
처음부터 이미 함께 있었다는
인식이 있게 된다.
(에고의 정의)
*트룽빠 린뽀체:
에고는 근본적으로 공격심과 격정,
그리고 무지를 유발시키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에고를
악의 작품이라 여기진 않는다.
에고는
각성으로 전환 될 수 있으므로 즉,
자비와 온화함으로 변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에고는 무엇일까.
곧 무아이다.
혹은 공이라 해도 좋다.
무아는 에고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과 합일되는 존재는
여전히 자기의식적 이거나
인격적 자아이다.
즉, 변형된 에고인
선한 에고조차도 사라진 무엇이
곧 '무아'이며 '공'이다.
신과의 진정한 합일은
티끌만한 에고가 존재해도 일어나지 않는다.
*키팅 신부: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느님의 아들로써의 관계를 초월한 즉,
그리스도는 인격적 자아를 초월한 단계를 통과했다.
무에서 새로운 삶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삶은 자신의 것만이 아닌,
자아가 사라져 버린 전체와 결합된 삶이다.
그러한 경험은 영광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분은 궁극적인 실재와 하나라서
그 실재 속에 완전히 녹아있다.
*트룽빠 린뽀체:
궁극적인 실체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非이어야 한다.
즉 비존재..............
불교에서는 이것을
'평상심'이라고 한다.
너무나 평범한 마음 그것이다.
또한 一味라고도 한다.
자아가 없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체험되는 신도 없고
타인과의 어떠한 관계도 없다.
http://suntaokorea.com/naum5/gheart.htm (현일자)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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