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영화 - 통역사 Interpreter 2005

통역사 Interpreter 2005 영화.

주연 : Nicole Kidman. Sean Penn

UN, Africa 내전... 뭐 그런 영화인데
대사가 아주.....시詩적이랄까. 연인들의 대사만큼.

영화 내용은 글쎄..
인간이란 짐승들은 예측 못할만큼 잔인하다는...
그리고 혼란에 빠져있다는.

세상의 말과 행동들은 대체로 이해관계 대한 것이 많다.
평생 그러다 말 것인지... 다시 새겨봤으면 싶다.
지금까지의 실험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어찌 욕망에 쩔어있는 짐승으로 규정받고 행동하는가....
스스로 만든 시스템이 아니라 욕망이 만든 시스템이라 그렇다.

모든 견해를 내려 놓으면 되는데, 다 놓고 좀 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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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눈을 돌리죠?
Why do you look away?
내가 말하기 싫어하는 걸 당신은 거짓말한단다고 하죠.
There are things I don't like to talk about, you call it lying.
당신이 할 땐, 아니고.
But not when you do it.
--

비버들이 주로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다거 알아요?
Did you know the leading cause of death for beavers is falling trees?
---
우린 케펠라네요. 강 반대편에 서 있다는 뜻이에요.
We're Kepela. It means standing on opposite sides of the river.
내가 반대쪽으로 갈 이유를 줘바요.
Give me a reason to get to the other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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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단지 버스에 있었어요.
시끄러워서 생각할 수 없잖아요.
좀 조용해바요.

I was just on that bus! I can't think with all this noise. I can't! You have to stop!

It was once. 한번이요.
It's not any more. 이젠 아니에요.
After the rallies, 그 시위 후
after my parent and sister were killed, 부모와 여동생이 죽고
then the rifles came out. 총을 들었죠.

It was the only way to get anyone to listen. 누구라도 듣게 하려면 그게 유일했죠.
Just to listen. 단지 듣게 하려고.


I killed a boy who had nothing to live for beyond the money he'd get for killing me.

I shot him in the head so he wouldn't shoot me.
날 죽여 얻은 돈으로 연명할 수 밖에 없는 소년을 죽였어요.
소년이 쏘지 못하도록 그 머리에 대고 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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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28일 일요일

독재 - 열등감 우월감 - 탄압하거나 탄압받거나

독재 : 자기가 아닌 것을 탄압하는 행위
자기의 바램이 잘 안되고 타인은 잘 된다고 생각하는 결과로 나타나기 쉽다.
자기 탄압으로 안되면 자기 아닌 것을 탄압한다.
자기는 결여 되었다는 것도 비슷하다.

탄압하거나 받거나... 길들여짐은 무섭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 - 양쪽다 심한 피해를 입는다.
자기를 탄압하거나 자기 아닌 것을 탄압하거나 또는 받거나 같다.

이렇게 열등감 우월감은 비슷하다.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은 충족이다.
원만이란 것이 고루 차다는 말인데,
이런 상태만이 결여의 상태를 벗을 수 있다.

탄압의 구체적 행태는 폭력인데, 폭력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오히려 결핍을 유발하거나 늘여갈 뿐이다.

모든 생명은 원만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폭력이 나타나면 원만으로 회복하기 위해 즉각 반응을 시작 한다.
만일 회복되지 못하는 단위는 유지되지 못한다.
숨을 쉬는 것과 같다.

꾸밈없이 산다는 게 이렇게 어렵다.

2013년 4월 24일 수요일

3840 x 2160 - 2160p 영상물 - 브라우저로 감상법

youtube에서 4k 클립들을 받을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V3U8bw9nPE4
http://www.youtube.com/watch?v=a9LDPn-MO4I

받는 법은
http://userscripts.org/scripts/show/25105 에서
25105.user.js 를 (javascript file)을 다운받는다.

크롬브라우저에서 주소장 옆에 상병마크() 를 눌러 '설정'을 선택하면 설정창이 열린다.
'확장프로그램'을 선택하면 한두개 설치된 플러그인 들이 보인다.

다운받은 25105.user.js 드래그하여(끌어다) 놓으면 플러그인 설치된다.

그러면 youtube 가서 영상을 볼 때 영상 아랫쪽에  '다운로드' 버튼이 생긴다.

해상도별도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다.
4k영상을 다운로드하여 적당한 폴더에 놓고
html파일을 다움과 같이 작성한다.



<html>
<body>
<iframe width="4320" height="2160" src="downloaded_2160p.mp4" frameborder="0"></iframe>

<!- - 또는 html5 의 video tag를 써서 -->
<!--
<video width="4320" height="2160" controls>
  <source src="downloaded_2160p.mp4" type="video/mp4">
</video>
-->

</body>
<html>

그리고 위의 파일을 크롬브라우저로 연다.(끌어다 브라우저에 놓으면 된다)

1080p 해상도(1920 x 1080) 해상도의 모니터라면
영상물의 실제 해상도의 1/4만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스크롤링하면서 2160p의 영상품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
알아둘 상식.
고품질의 1080p (full HD) 영상물을 만들 때,
2160p (4320 x 2160) 소스로 작업을 한단다.

위의 사실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
1080p 해상도로 미디어플레이를 통해서 플레이하면
'다운스케일'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원래의 해상도는 아니지만, 고품질의 1080p)

KMPlayer로 다운받은 4k 영상을 한 번 보시기 바란다.

2160p -> 1080p로 다운스케일 된 영상이 보인다. (1/4)
(video tag에서 width height 를 320 240 정도 하면 전체화면 버튼이 보이는데
동일한 효과다)

제대로된 1080p 모니터의 능력이 어느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아주 선명하고 자연스럽다.

물론 아주 좋은 원본으로 2160p 를 잘 만들었다면
2160p 모니터로 보는 것이 제격이겠으나

1080p 영상이라도 아주 좋은 품질의 것은 드믈다.

이 다운스케일 영상품질을 보면서
sony 같은 회사에서 데모용으로 만든 고품질 2160p 영상은
8k 소스 (7680 x 4320 = 4320p)로 작업했음을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UHD (8k, 4320p) 고품질은 16k 소스가 필요한 건가?
카메라 자체가 이런 기능이 없고
영상처리로 과정으로 고품질을  얻어야 한다면 계속되겠지....

---
요즘에 모某사에서 4k TV의 활용도를 설명면서
위와 반대개념인 업스케일링 효과를 광고하기도 한다.

즉 1080p의 영상물을 2160p로 업스케일링하여
여러 부가 기술을 써서 단순 업스케일링보다 선명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때도 원본이 되는 1080p 영상물의 품질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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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 정도 감상해 보았는데 4배만큼 픽셀수가 증가해서 선명하다.
html5 의 mp4 지원을 이런 형태로 해서 4k 영상품을 가늠해볼 수 있다.
--
크롬외에 다른 브라우저는 되지 않았다.
요즘은 스마트폰 프로세서의 그래픽능력이 훌륭하다.
몇번만 진화한다면 PC,laptop 에서 지긋지긋한 그래픽 불균형이 해소될지도...
(SSD-Ramdisk가 IO 불균형을 해소해 가듯.....)

작고 저전력이라 PC용 프로세서보다 훨씬 활용도가 높을 것이다.(시장이 넓다는 말이다.)

펄럭거리는 OLED, 16HD의 3천3백만 화소, 색재현범위, 정밀한 픽셀...

조금만 더가면 실사와 구분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2013년 4월 20일 토요일

MSG가 나쁜 이유

http://ko.wikipedia.org/wiki/%EA%B8%80%EB%A3%A8%ED%83%90%EC%82%B0_%EB%82%98%ED%8A%B8%EB%A5%A8

http://ko.wikipedia.org/wiki/%EC%9A%B0%EB%A7%88%EB%AF%B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61537

감미료 MSG가 몸에 해롭니 않느니 좋으니 나쁘니... 헛갈릴 정도로 난리다.

맛이란 (생존까지) 감별하는 기능 중에 하나다.
그래서 맛이 좋으면, 몸에도 좋다는 것이
오랜동안 음식을 섭취해 온 인간의 몸에도 적용된다.

간단하게 판단한다.

가장 많이 쓰는 곳이 음식점일 것이라면, 넣지 않고 요리하게 만든다.
먹어본다. 동일한 음식맛에 의한 기대가 충족되는가?
아니다.

MSG는 속임수로 쓰는 도구다.
나쁜 재료로 음식을 만들거나, 재료를 적정한 과정을 거치면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맛을 속여 괜찮은 음식으로 오인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MSG는 물질이다. 
따라서 그 쓰임을 보면 간단하게 판단할 일을 논란을 하는 것은 
100% 어떤 부류의 이익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기준은 간단하다.

가족의 음식을 책임지는 정보와 경험이 정확한 어떤 주부가 있다.
이 주부에게 MSG와 여려 양념재료 중 어떤 것을 쓸래... 하면.

그런데, MSG로 요리해버리는 달관한 주부도 있다.
요리가 귀찮기 때문이다. 할 줄도 모르고 하기도 싫고 지식도 정보도 경험도 없을 때,
먹고 안죽으면 요리지... 하는 것이다. 

어쨌던 자기 세상이니 어떤 세상인가는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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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더 심하다.
소위 학자들의 실험 - 일명 블라인드 테스트 를 통해서
음식을 먹고나서의 불쾌감을 무시하고
식습관에 의한 관성을 무시한다.

나는 MSG,삭칼름 자체가 해롭니 해롭지 않니의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음식을 먹지말고, 필요 영양소 물질만 물에 타서 식사를 대신하지..

아직까지 음식에 대해 다 밝혀진게 아니다.

난 아직도 우유를 먹지 못하고, 중국음식 대부분은 정도차이지만 먹고 나서 복통과 설사를 한다.

그리고, 밖에서 사먹는 음식을 수개월씩 먹으면 어찌되는 지를 잘 체험하고 있다.

한끼 식사로 먹는 음식 전체의 조합과 소화과정으로 논해야지...
블라인드 테스트???

미량의 독성물질을 블라인드 테스트로 가려낼 수 있나?
기자에게 퍼먹이고 싶다.

비싼음식이 아니라, 좋은 음식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기
음식값의 큰 부분이 부동산비용으로 들어가는 국가경영의 왜곡은 말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다.

2013년 4월 16일 화요일

여자가 화장하는 이유

자기가 여자인걸 까먹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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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적으로는
- 수컷에게 우월한(또는 매력적인) 암컷으로 보여 좋은 수컷을 고르기 위해

일반적으로는

- 화장은 여자에게 옷같은 것, 화장 안하고 있으면 발가벗은 느낌?
- 마스크:가면놀이:다르게 보이고 싶다. 또는 감추고 싶다.
   * 가면을 쓰면 공주놀이도 재미있게 해볼 수 있다. 가림의 용기. 꾸밈의 자유로움.
- 세상이 여자들의 전장이라면 무장하는 것:some-ware.
   * 얼굴색이 변하는 것도 안보일 수 있다.

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꾸밈,약함의 보강으로 보이며 화장자체로도 그 이후의 캐릭터로도
자유로움이 증가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음.

2013년 4월 15일 월요일

네트워크 레이어 스위치

출처
http://suns.tistory.com/entry/L2-L3-L4-%EC%8A%A4%EC%9C%84%EC%B9%98%EB%8A%94-%EB%AC%B4%EC%8A%A8-%EA%B8%B0%EB%8A%A5%EC%9D%84-%ED%95%A0%EA%B9%8C

L2 스위치, L3 스위치, L4 스위치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합시다.
이 스위치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우선 OSI 7 Layer 부터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래 그림은 전산과 학생들이 학부과정에서 열심히 배우는 네트워크의 7개의 계층적 
모델을 나타낸 것입니다.


Layer1 은 Physical Layer이며, 물리적인 접속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Ethernet이란 기술이 Layer1에 해당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Layer2 는 Data link Layer이며, 데이터를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위와 같이 Ethernet이 Layer2에도 해당하는 기술이며, 실제로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은 MAC어드레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Ethernet에서 데이터를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인데, Ethernet에서는 데이터 전달을 위해서 Frame이란 단위로 전송하며,
Frame 헤더에 출발지 MAC어드레스와 도착지MAC어드레스가 포합됩니다.
Ethernet은 기본적으로 브로드케스팅 방식으로 데이터를 전송하며,
어느 Host가 Frame을 발생시키면, 그것은 네트워크의 모든 호스트에 전달되며,
자신의 MAC어드레스가 들어있을 경우에만 받습니다.
Layer3 는 Network레이어입니다.
TCP/IP 프로토콜에서는 IP프로토콜에 해당하며,
모든 호스트들이 MAC어드레스와는 별도로 IP어드레스를 가지고, 통신을 할 수 있습니다.
IP에서는 네트워크 구성이 가능하게 됩니다.
(Layer2에서는 네트워크가 아닌 하나의 모임(?)만이 가능하죠..)
Layer4 는 Transport레이어입니다.
TCP/IP 프로토콜에서 TCP프로토콜에 해당합니다.
Transport레이어에서 드디어 정상적인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IP레이어에서 전달 받은 데이터를 정확하게 받았는지 검증하고,
응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IP레이어는 일방적인(?) 전송만 가능하죠..)
Layer5 이후에는 Session, Presentation, Application이 존재하는데.
TCP/IP에서는 우선 뭉쳐서 Application레이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시 원점을 돌아가서, 이제 스위치에 대한 설명을 바로 이해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선 L2 Switch 라고 하면 OSI 7 Layer 의 "Layer 2" 를 이해하고 처리 할 수 있는 녀석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 L2 Switch 는 MAC 어드레스를 읽고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Ethernet은 기본적으로 Broadcasting을 사용한다고 했는데, 이것을 개선한 것이 L2 Swtich 입니다. 백날 Broadcasting하던 것을 MAC어드레스를 읽어서 해당 호스트에만 전달할 수 있게 해주게 되어 호스트간의 Dedicated 대역폭을 제공하게 됩니다. 물론, Broadcasting을 할 경우 10/100/1000Mbps를 모두 공유하므로, 하나의 허브에 N개의
호스트를 넣으면, 1/N의 속도로 각각 통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L3 Swtich 는 위의 OSI 7 Layer 의 "Layer 3" 를 이해하고 처리 할 수 있는 녀석이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 IP(네트워크 주소)를 읽고 처리 한다는 뜻입니다.
IP는 네트워크를 구분하는데 사용되니 L3스위치는 네트워크간의 전송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실제로 라우터 에서 하던 라우팅에 해당하며, 라우터를 대신하는 기능으로
사용됩니다.
다음으로 잘 알고 계신 L4 Swtich 도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L4 는 OSI 7 Layer 의 Layer 4 를 이해 하고 처리 한다는걸 말씀 안드려고 아실수 있으시겠
지요.

Layer 4 의 TCP를 읽고 처리한다는 뜻이며 TCP의 정보를 읽고 처리(제어)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로 활용되는 분야는 Load Balancing 과 같은 기능이며, 웹서버의 포트로 많이 사용되는 TCP 80번 포트의 트래픽과 같은 것을 인지할 수 있으며 그 트래픽을 연결된 서버팜의 서버들에게 균등하게 할당할 수 있게 됩니다.
L4 Swtich 다음으로 L5~7 Switch 가 있는데 이는 앞서 설명드린 L4 Switch의 영역을 를 좀더 세분화하여 처리하거나 서버단의 Application 에서 처리 하던것을 Switch 에서 처리해보자~ 라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개헌 - 임기 대선, 총선 2년 2년 2년마다 교대로

현재의 한국은 두 조직 다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다.
서로 살피라 했더니, 서로 짜고 엉뚱한 짓을 해서 그렇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크서 그렇다고 한다.
대통령이 빼어나고 국민의 필요에 따라 잘 쓴다면야 뭐가 문제겠는가.

둘이 서로 감시하게 하려면,

대통령 4년 연임으로 하되, 국회의원 4년과 임기를 딱 가운데 놓고 했으면 한다.

대통령이 연임하여 8년까지 가능한데, 아차 싶다면,
2년, 2년, 2년 세번의 고칠 기회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도 탄핵같은 강한 제지가 아니라...
대통령에 대해 몇개월 전면 또는 일부 직무정지...
인사권 명령권... 정지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의회의 감시는 시민에게 줘야할까?
역시 자격정지 권한정지 전체,일부..

지자체도 위와 같다.

따라서 대선과 지자체단체장, 국회의원과 지방의회의원은 같이 선거하게 된다.

모든 선거일은 4~5월 중에 한다.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신,공,부처 그 무엇이든.


검색질을 하다 우연히 들어간 링크이다.


어떤분이 수고하신 것을 가져온 것이다.
그분도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 한다.

글을 읽을 때, 
단어-문장-그려지는 상 너머 
그것이 가르키는 실체에 주목하시고
다른 말들은 모두 잊을 것을 권합니다.


신과 공에 대한 견해


출처 : http://graspace.egloos.com/m/217639

<<침묵의 대담>>

- 신과 공에 대한 견해 - 

* 토마스 키팅: 

신은 우리밖에 있는 존재이고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신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생각은 
성경과 거리가 멀다. 

이것은 이단이다.

주관과 객관을 나누게 되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공업기술의 결실을 이루었으나 
정신적 차원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신은 곧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또한 신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신과 구분은 되지만 
신에게서 전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 는 없다. 

신과 참된 자아는 
같은 것이다. 

신은 우리 안에 살아 있고, 
또 우리도 신의 신성한 삶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도 신이다. 


*주디스 르프: 

공을 정확히 번역하면 
"한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있음"이라 할 수 있다.

공은 곧 마음이 열리는 것이며 
이것, 저것, 나, 너의 자기 보호적이고 
생존하려 애쓰는 마음을 누그려 뜨려준다.

이것은 실제로부터 움츠려드는 도피가 아니라 
툭 트인 광활함의 상태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홉코 신부: 

신을 개념화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우상이지 신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성은 
신성을 초월해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알 수 없는 것 너머의 것은, 
자신의 알 수 없는 것 너머의 상태를, 
알 수 없는 것 그 너머의 것을 통하여 알게 해 준다.

다시 말해서 
신은 스스로를 나타내신다. 

'텅빈 것'과 연관지어 볼 때, 
이것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인 실재, 곧 神은 
"신성 그 이상"의 것이지만 

우리의 전통에서 "신의 에너지" 즉, 
신의 행위, 언어, 직관, 현현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짐으로서 
우리에게 스스로 보여 주셨다.

"공이나 궁극적 실체처럼 
신은 존재하는가?"란 
질문에는 신은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신도 존재하는가?"란 
질문에는 신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에이도 로시: 

'자신'은 항상 
어떤 생각(관념)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념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그 관념의 현현이 부처, 그리스도, 
어머니라 할 지라도 죽여야 한다. 


*홉코 신부: 

저 혼자만이 
제가 관련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는 없다. 

우리가 뵐 수 있는 유일한 신의 영광은 
완전히 성숙된 인간에게서 볼 수 있으며 

신은 곧 자신을 드러내신다. 
신은 형태, 이미지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을 볼 수 있는 것은 
은총에 의한 자신과 닮은 꼴을 지닌 
성상을 보는 것이다.

성상은 우리들 
각자를 의미한다.

신의 영원한 성상은 
오직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보여준 신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똑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우리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에고를 
죽이도록 해야한다. 


* 씨뚜빠 린뽀체 

불성은 우리에게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또 잃어버려서 
명상수행을 통해 
되찾아야 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시 일깨워야만 한다. 

그리스도와 상이하게 만드는 것이나 
불성을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한 이원성은, 내가 주체가 되고

그리스도나 부처가 객체라는 
일반적 관념에 속박되는 것이므로 
불성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데에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은 
이 이원성이다. 

이러한 이원성을 죽일 때 
우리는 자신의 궁극적 본질을 부처, 
신의 궁극적인 본질로서 깨닫게 될 것이다. 


* 에이도 로시: 

공이란 말은 
우리의 "관념을 비운다"는 
적극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공에 대한 
관념까지도 비워야 한다. 



*홉코 신부: 

신은 나인 동시에 전적으로 타자이고, 
전적으로 저 너머이고 심지어 부정신학 그 이상이다. 

그럼에도 신은 또한 우리와 연관되어 있다. 
이 둘 다 모두 신이다. 
(단순히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씨뚜빠 린뽀체:

(유신론과 무신론) 

내가 보기에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없다. 

어떤 종류의 이즘을 고집하는 것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나와 타인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영적인 길을 진정 걸어본다면 
당신은 자신과 타인이 하나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종교를 통하여 실재와 
더 가깝게 접근하게 된다. 

당신은 실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당신의 고유 에너지를 
기꺼이 탐구하게 된다. 

실재로 당신은 존재의 본질로서 
행동하기로 선택한 것이며, 
바로 그것이 진실함이다. 

종교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당신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존재의 공허함을 
종교적인 잡동사니로 
보상 받고자 함도 아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은 
실재와 접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숭배하든 
자신을 숭배하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인격적으로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전념치 않는다면 
유신론, 무신론 둘 다 문제 투성이다.

보통 유신론적 전통에서는 
외부의 대상을 숭배하고, 
무신론적 전통에서는 
외부의 대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양쪽 다 
단지 보모를 어디서 
구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보모를 안이나 밖에서 
구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그 어느 쪽에서든 
당신의 존재는 적절하게 
완전히 발현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대치물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돈을 아무리 세어 보라.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 것은 아니지 않는가) 


*로제 도제: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에고'의 문제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나'라는 실체라고 느끼는 것이 '에고'이다.

우리는 경험에는 항상 
중심 되는 인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누군가를 
연속되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에고는 
영역을 창조해 내는 존재로서 
개인의 왕국을 만들고자 한다. 

이것을 "개성의 에고"라고 한다. 

깨달은 이들은 
'개성이란 실재로 지어내는 과정'이라 고 했다.

자기 정체성이라는 좁은 집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양된 자아, 
정신적이고 순화된 자아 
또한 존재치 않는다. 

석가모니불은 참된 모습인 
브라만 자체도 헛된 것이라 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의 주체로서의 자아와 
이 자아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는 
서로 의존적이며 서로 끊임없이 
확인 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바즈라야나 불교에서는 에고는 
원초적인 지성의 왜곡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에고는 
단순히 순진무구가 아닌 
완고한 고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길"이란 
어떻게 이 에고를 통찰하여 순화하고, 
또 어떻게 이것을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이 에고가 없는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데는 
외부의 구세주가 있지 않다.

(개인이라는 관점을 넘어선 경험에 대해) 

*팀코 신부:

'내'가 있다고 하면 
초월적 경험은 불가능하다. 

각설탕은 하나하나 구분된 개체로 되어있지만 
커피 잔에 넣어 녹음과 동시에 
그 커피와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설탕의 성질이 
사라져 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설탕의 성질에는 변함이 없다. 

이때 더 이상 개별화된 중심이나 
자아로서의 '나'가 아니다. 

이제 '나'란 없다. 

'나'는 죽은 것이고 
그 다른 것 속에 녹아 
다른 실체에 동화되었다



*조지프 골드스타인:

(정신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경지에 이르는 두 가지 방식) 

첫째, 자아를 점점 키워서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과정-->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 

둘째, 제로상태의 경험에서 오는 일체감--> 
모든 것을 내버리는 마음 


*로제 도제의 이에 대한 답변: 

대승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를 이렇게 본다. 

하나는, 
우주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자신의 마음씀을 넓힘.) 

다른 하나는, 
자아를 녹이는 것이다. 

이 두 양자는 
마치 막대기의 양끝과 같다. 

(상대적 에고와 절대적 에고의 관계)

상대적인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개별적으로 고립된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버림으로써 
타인에 대한 자비심도 일어날 수 있다.

절대적인 면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자아도 없고
타인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근본적인 무아이다. 


(어떻게 상대적인 세계가 초월되는가) 

*로제 도제:

첫째로 개인의 자존심이 허물어지면서 
개인의 에고가 의지처를 잃게 되는 과정이다.

둘째로 어떤 조건적인 경험을 
놓아 보겠다는 관념만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상대적인 세계를 
재음미하게 된다. 

다시 말해, 
상대적 세계가 환원된다. 

이때는 
상대적 경험들도 변현된다.

이것을 넘어서면 
상대계와 절대적인 실재가 
처음부터 이미 함께 있었다는 
인식이 있게 된다. 



(에고의 정의) 

*트룽빠 린뽀체:

에고는 근본적으로 공격심과 격정, 
그리고 무지를 유발시키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에고를 
악의 작품이라 여기진 않는다. 

에고는 
각성으로 전환 될 수 있으므로 즉, 
자비와 온화함으로 변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에고는 무엇일까. 

곧 무아이다. 
혹은 공이라 해도 좋다.

무아는 에고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과 합일되는 존재는 
여전히 자기의식적 이거나 
인격적 자아이다.

즉, 변형된 에고인 
선한 에고조차도 사라진 무엇이 
곧 '무아'이며 '공'이다. 

신과의 진정한 합일은 
티끌만한 에고가 존재해도 일어나지 않는다. 


*키팅 신부: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느님의 아들로써의 관계를 초월한 즉, 
그리스도는 인격적 자아를 초월한 단계를 통과했다. 

무에서 새로운 삶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삶은 자신의 것만이 아닌, 
자아가 사라져 버린 전체와 결합된 삶이다. 

그러한 경험은 영광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분은 궁극적인 실재와 하나라서 
그 실재 속에 완전히 녹아있다. 


*트룽빠 린뽀체:

궁극적인 실체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非이어야 한다. 

즉 비존재.............. 

불교에서는 이것을 
'평상심'이라고 한다.

너무나 평범한 마음 그것이다. 
또한 一味라고도 한다. 

자아가 없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체험되는 신도 없고 
타인과의 어떠한 관계도 없다. 

http://suntaokorea.com/naum5/gheart.htm (현일자)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