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해지는 12연기의 출발은 무명이다.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처(六處)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이렇게 전개된다고 석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무명의 출발은 시작을 모른다.
영화 '도희야' 에서는 이것이 웬통 뒤섞여서 나온다.
무지,탐욕,폭력,두려움,혼란,외면,속임...
모든 캐릭터가 정신이 없다.
영화인의 시선에서 그렇게 설정한 것이겠으나,
실상에서도 자주 접하는 단상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친절한 자연환경은 없었을 것이다.
그 불인(不仁)한 천지가 예측할만한 규칙이 있어서
보는 이에게 지혜가 싹트고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적응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지한 채 폭력화 되어가는 인간들의 문제였다.
미세하게 보면 지식이란 것이 사회적으로 들어날 때
폭력인 경우가 많다.
마치 작용 반작용처럼,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이 다시 폭력이 될 수 있다.
무지가 폭력이라는 갈증을 낳을 때,
몸의 생존의 문제가 풀려야 벗어날 수 있다.
자각하고 다시 봐야한다.
인간이 폭력에 적응하면서 나타난 기술은
인간몸의 생존을 해결하는 수준까지 왔다.
문제는 계속되는 갈증.
지금도 성적인 갈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마치 그런 성적 욕망이란 것이 없으면
인간의 세대가 멈출 것이라는
근거도 없고 허황된 이야기를 씨부렁거리면서...
듫끓는 성적 욕망이나
공포를 조장하면서 들이치는 폭력이나
다가오는 모습이 비슷하지 않은가?
적당히 해서는 인간몸으로 온 보람이란 맛도 못볼 것이다.
평안함에 이르렀을 때... 길이 시작된다.
2014년 6월 20일 금요일
2014년 6월 17일 화요일
퀀텀닷 QD 디스플레이 - 또 백라이트 만?
디스플레이 업계는 또 사기칠건가...
LED 백라이트 LCD는 솔직히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 국가단위가 감사할 일.
사용자는 전기요금이 줄어 들었지만 눈에는 더 좋을까?
아무도 이런 부분은 검증하지 않는다.
플라즈마 실패
OLED 실패
결국 LCD만 주구장창 팔아먹고 있는 것이다.
픽셀 작게 만들 수 있는 것 빼면
주류 패널 회사들의 기술발전? 실상 미미한 것.
LCD의 고질적인 문제... 백라이트 방식, 응답속도...
퀀텀닷...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으나
이거도 결국 백라이트만 바꾸는 것으로 다가올 것 같다.
기대하지 말자.
그리고 디스플레이와 그래픽간 통신문제.
이거 tera-bps 광통신,무선으로 해결 안되나?
그러면 한동안 표준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LED 백라이트 LCD는 솔직히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 국가단위가 감사할 일.
사용자는 전기요금이 줄어 들었지만 눈에는 더 좋을까?
아무도 이런 부분은 검증하지 않는다.
플라즈마 실패
OLED 실패
결국 LCD만 주구장창 팔아먹고 있는 것이다.
픽셀 작게 만들 수 있는 것 빼면
주류 패널 회사들의 기술발전? 실상 미미한 것.
LCD의 고질적인 문제... 백라이트 방식, 응답속도...
퀀텀닷...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으나
이거도 결국 백라이트만 바꾸는 것으로 다가올 것 같다.
기대하지 말자.
그리고 디스플레이와 그래픽간 통신문제.
이거 tera-bps 광통신,무선으로 해결 안되나?
그러면 한동안 표준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2014년 6월 16일 월요일
LG전자 시네뷰 34UM95 - Flicker Safe? HDMI 발전이 안타깝다.
Flicker Safe?
Flicker Free 는 아니고
PWM (Pulse Width Modulation) 을 쓰는 것 같아 아쉽다.
LG는 웃기다. 하위 제품은 플리커프리이면서 상위제품은 아니라니...
상업적 논리라는 것 항상 웃기다.
http://www.tftcentral.co.uk/articles/flicker_free_database.htm
http://pcmonitors.info/forum/topic/flicker-free-monitors
http://pcmonitors.info/lg/lg-34um95-219-but-bigger
...
LG are strongly promoting viewing comfort, following in the wake of BenQ’s successful ‘Eye-care’ campaign. The backlight is ‘Flicker Safe’ (PWM free or very high PWM frequency to minimise or eliminate visible flicker) and there are a number of low blue light ‘Reading Modes’ designed to further reduce eye fatigue.
...
제공되는 입력
수평주파수(Digital) 30 ~ 90kHz
수직주파수(Digital) 56 ~ 61 (3440x1440시 HDMI 30/50Hz, Display Port 30/50/60Hz)Hz
대부분의 노트북류는 HDMI를 제공한다.
50Hz 써보면 눈피로 엄청났었다. 30Hz...
VESA 마운트 베어본 중 4k Displayport를 제공하는 것은
- Gigabyte Brix
- Zotac
- Shuttle
중 몇몇 모델이다.
지금으로서는 HDMI는 무용하고...
Apple 류 - ThunderBolt
VESA 마운트 베어본(PC 대체용) - DP
Displayport 4k 지원하는 모든 PC, 노트북
과 조합하는 것이 가장 좋아 보인다.
합리적인 가격에 DP로 4K 외부출력하는 노트북을 찾는 중.....
게이밍 노트북이 전시회에 보이고는 있는데
이 시점에는 판매되지 않고 있다.
---------------------------------------------
픽셀 크기 0.2325 x 0.2325mm 패널을
1440p 21:9 로 만든 것인데..(2.35:1 영화 화면비율과 비슷..)
1080p, 1440p, 2160p ?
프리미엄 라인 모니터라면
이 시점에 지금 5040x2160이 나와야 하겠으나
Thunderbolt 2
Displayport 1.3
HDMI 2.0
이 되어야 5040x2160 해상도를 쓸 수 있을까?
이 시점에 저 규약을 제공하는 기기가 거의 없다.
한세대 뒤쳐진 포트규약 때문이다.
안타깝다.
-------
Flicker Free 는 아니고
PWM (Pulse Width Modulation) 을 쓰는 것 같아 아쉽다.
LG는 웃기다. 하위 제품은 플리커프리이면서 상위제품은 아니라니...
상업적 논리라는 것 항상 웃기다.
http://www.tftcentral.co.uk/articles/flicker_free_database.htm
http://pcmonitors.info/forum/topic/flicker-free-monitors
http://pcmonitors.info/lg/lg-34um95-219-but-bigger
...
LG are strongly promoting viewing comfort, following in the wake of BenQ’s successful ‘Eye-care’ campaign. The backlight is ‘Flicker Safe’ (PWM free or very high PWM frequency to minimise or eliminate visible flicker) and there are a number of low blue light ‘Reading Modes’ designed to further reduce eye fatigue.
...
제공되는 입력
수평주파수(Digital) 30 ~ 90kHz
수직주파수(Digital) 56 ~ 61 (3440x1440시 HDMI 30/50Hz, Display Port 30/50/60Hz)Hz
대부분의 노트북류는 HDMI를 제공한다.
50Hz 써보면 눈피로 엄청났었다. 30Hz...
VESA 마운트 베어본 중 4k Displayport를 제공하는 것은
- Gigabyte Brix
- Zotac
- Shuttle
중 몇몇 모델이다.
지금으로서는 HDMI는 무용하고...
Apple 류 - ThunderBolt
VESA 마운트 베어본(PC 대체용) - DP
Displayport 4k 지원하는 모든 PC, 노트북
과 조합하는 것이 가장 좋아 보인다.
합리적인 가격에 DP로 4K 외부출력하는 노트북을 찾는 중.....
게이밍 노트북이 전시회에 보이고는 있는데
이 시점에는 판매되지 않고 있다.
---------------------------------------------
픽셀 크기 0.2325 x 0.2325mm 패널을
1440p 21:9 로 만든 것인데..(2.35:1 영화 화면비율과 비슷..)
1080p, 1440p, 2160p ?
프리미엄 라인 모니터라면
이 시점에 지금 5040x2160이 나와야 하겠으나
Thunderbolt 2
Displayport 1.3
HDMI 2.0
이 되어야 5040x2160 해상도를 쓸 수 있을까?
이 시점에 저 규약을 제공하는 기기가 거의 없다.
한세대 뒤쳐진 포트규약 때문이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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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3일 금요일
숫따 삐따까(Sutta pitaka, 經藏)
숫따 삐따까(Sutta pitaka, 經藏)의 구성 내용
숫따 삐따까(Sutta pitaka, 經藏)는 디가 니까야(Digha-nikaya, 長部),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 상윳따 니까야(Samyutta-nikaya, 相應部),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nikaya, 增支部),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aya, 小部) 등 五部로 되어 있다. 오부는 모두 經(sutta 혹은 suttanta)의 모음집이다. 모두 부처님의 말씀과 대화 또는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지만 때로는 거기에 부처님의 첫 제자들의 가르침도 실려 있다. 형태는 시가 들어 있는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각의 경은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서로 다르다. 팔리어 니까야(Nikaya)는 部集이란 말이다. 한역에서는 아가마(Agama, 阿含)로 번역하고 있다. 경장은 붓다의 가르침인 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주요한 원천이다. 이들 五部에 대한 내용은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장부(長部, Digha-nikaya) 경전은 내용이 긴 경을 모아 놓은 모음집이다. 이 장부는 三品, 34經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가지 품은 ①戒蘊品(Silakkhanda- vagga; 13經), ②大品(Maha-vagga; 10經), ③當學品(Patika-vagga; 11經)[Patika-vagga를 波梨品이라고도 한다.]이다. 이 장부는 매우 일찍 성립한 것이다. 장부에 포함되어 있는 梵網經(Brahmajala sutta)은 相應部(Samyutta-nikaya Ⅳ,p.286)에 인용되어 있다. 프랑케(R. O. Franke)는 이 장부를 "어떤 저술가의 통일적인 작품으로서 종합적으로 결집되어 저작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장부 내부에서도 팔리경전 전체에서처럼 상호 모순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케가 개개의 경전을 두고 증명한 외적인 관계성은 한 경이 모음집에서 하필 특정한 곳에 삽입되어야 하는가를 해명할 뿐이며, 그 이상의 결론을 추론해 낼 수 없다. 장부의 16번째 경전인 大般涅槃經(Mahaparinibbana-sutta)은 부처님의 마지막 생애의 사건들을 묘사한 것으로 특유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2) 중부(中部, Majjhima-nikaya) 경전은 중간 길이의 경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이다. 그 경들의 가치는 다양하다. 몇몇(예를 들어 No. 82, 83, 95)은 경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 중부에 포함된 경의 숫자는 152개이다. 크게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根本五十品(Mulapannasa, 1-50), 中分五十品(Majjhimapannasa, 51-100), 上分五十品(Uparipannasa, 101-152)이다. 프랑케(R. O. Franke)는 장부에서처럼 중부에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견지하면서 이 중부도 단순히 모음집이 아니라 Suttanipata(經集)과 동일한 관련 하에 "저술가에 의해서 저술된 작품"이라고 규정하였다.
(3) 상응부(相應部, Samyutta-nikaya) 경전은 장부나 중부 보다 늦게 편집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더욱 부처님의 직설에 가까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상응부의 팔리어 원어인 상윳따 니까야(Samyutta-nikaya)란 말은 '주제에 따라 잘 편집된 모음집'이란 뜻인데, 한역에서 雜阿含으로 번역된 것은 이에 해당되는 범어 경전이 중국으로 옮겨질 때 착간(錯簡)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帝釋相應(Sakka samyutta)은 제석천이 등장하는 짤막한 경들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覺支相應(Bojjhanga samyutta)는 七覺支分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경을 모은 것이다. 상응부에서 유명한 경은 轉法輪經(Dhammacakkapavattana sutta)이다. 여기에는 전법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는 부처님의 첫 설법이 들어 있다. 상응부는 5品 56相應으로 분류되며 총 경전의 숫자는 2889개이다.
(4) 증지부(增支部, Anguttara-nikaya) 경전은 상응부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짧은 경전들로 이루어져 있다. 11개의 章(Nipata)으로 분류되며, 각 장은 해당되는 숫자와 어떤 관련이 있는 대상에 대한 경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1장(Eka-nipata)의 첫 경은 둘도 없는 인간 마음을 속이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5장(Panca-nipata)은 다섯 가지의 有學力(sekhabalani)에 관한 경으로 시작한다. 자료가 모자라는 큰 숫자로 시작하는 장, 예를 들어 제9장의 경우에는 5+4, 제11장의 경우에는 3+3+3+2의 상징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공리 공론적인 자료의 배치는 번쇄한 아비달마 철학과 가깝다. 경전의 숫자는 적어도 2308개이며, 각 장의 각 품(vagga)은 일반적으로 열 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5) 소부(小部, Khuddaka-nikaya) 경전은 짧은 텍스트의 모음집이란 뜻을 갖고 있다. 소부는 여러 가지 성격의 경전을 포함하고 있다. 그 내용에 있어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경전들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성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 전승의 소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다.
(1) Khuddaka-patha 小誦經
(2) Dhammapada 法句經
(3) Udana 自說經
(4) Itivuttaka 如是語經
(5) Sutta-nipata 經集
(6) Vimanavatthu 天宮事經
(7) Petavatthu 餓鬼事經
(8) Theragatha 長老偈經
(9) Therigatha 長老尼偈經
(10) Jataka 本生經
(11) Niddesa 義釋
① Maha-Niddesa 大義釋
② Cula-Niddesa 小義釋
(12) Patisambhida-magga 無楝解道
(13) Apadana 譬喩經
(14) Buddhavamsa 佛種姓經
(15) Cariya-pitaka 所行藏經
(1) 장부(長部, Digha-nikaya) 경전은 내용이 긴 경을 모아 놓은 모음집이다. 이 장부는 三品, 34經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가지 품은 ①戒蘊品(Silakkhanda- vagga; 13經), ②大品(Maha-vagga; 10經), ③當學品(Patika-vagga; 11經)[Patika-vagga를 波梨品이라고도 한다.]이다. 이 장부는 매우 일찍 성립한 것이다. 장부에 포함되어 있는 梵網經(Brahmajala sutta)은 相應部(Samyutta-nikaya Ⅳ,p.286)에 인용되어 있다. 프랑케(R. O. Franke)는 이 장부를 "어떤 저술가의 통일적인 작품으로서 종합적으로 결집되어 저작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장부 내부에서도 팔리경전 전체에서처럼 상호 모순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케가 개개의 경전을 두고 증명한 외적인 관계성은 한 경이 모음집에서 하필 특정한 곳에 삽입되어야 하는가를 해명할 뿐이며, 그 이상의 결론을 추론해 낼 수 없다. 장부의 16번째 경전인 大般涅槃經(Mahaparinibbana-sutta)은 부처님의 마지막 생애의 사건들을 묘사한 것으로 특유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2) 중부(中部, Majjhima-nikaya) 경전은 중간 길이의 경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이다. 그 경들의 가치는 다양하다. 몇몇(예를 들어 No. 82, 83, 95)은 경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 중부에 포함된 경의 숫자는 152개이다. 크게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根本五十品(Mulapannasa, 1-50), 中分五十品(Majjhimapannasa, 51-100), 上分五十品(Uparipannasa, 101-152)이다. 프랑케(R. O. Franke)는 장부에서처럼 중부에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견지하면서 이 중부도 단순히 모음집이 아니라 Suttanipata(經集)과 동일한 관련 하에 "저술가에 의해서 저술된 작품"이라고 규정하였다.
(3) 상응부(相應部, Samyutta-nikaya) 경전은 장부나 중부 보다 늦게 편집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더욱 부처님의 직설에 가까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상응부의 팔리어 원어인 상윳따 니까야(Samyutta-nikaya)란 말은 '주제에 따라 잘 편집된 모음집'이란 뜻인데, 한역에서 雜阿含으로 번역된 것은 이에 해당되는 범어 경전이 중국으로 옮겨질 때 착간(錯簡)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帝釋相應(Sakka samyutta)은 제석천이 등장하는 짤막한 경들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覺支相應(Bojjhanga samyutta)는 七覺支分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경을 모은 것이다. 상응부에서 유명한 경은 轉法輪經(Dhammacakkapavattana sutta)이다. 여기에는 전법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는 부처님의 첫 설법이 들어 있다. 상응부는 5品 56相應으로 분류되며 총 경전의 숫자는 2889개이다.
(4) 증지부(增支部, Anguttara-nikaya) 경전은 상응부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짧은 경전들로 이루어져 있다. 11개의 章(Nipata)으로 분류되며, 각 장은 해당되는 숫자와 어떤 관련이 있는 대상에 대한 경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1장(Eka-nipata)의 첫 경은 둘도 없는 인간 마음을 속이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5장(Panca-nipata)은 다섯 가지의 有學力(sekhabalani)에 관한 경으로 시작한다. 자료가 모자라는 큰 숫자로 시작하는 장, 예를 들어 제9장의 경우에는 5+4, 제11장의 경우에는 3+3+3+2의 상징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공리 공론적인 자료의 배치는 번쇄한 아비달마 철학과 가깝다. 경전의 숫자는 적어도 2308개이며, 각 장의 각 품(vagga)은 일반적으로 열 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5) 소부(小部, Khuddaka-nikaya) 경전은 짧은 텍스트의 모음집이란 뜻을 갖고 있다. 소부는 여러 가지 성격의 경전을 포함하고 있다. 그 내용에 있어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경전들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성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 전승의 소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다.
(1) Khuddaka-patha 小誦經
(2) Dhammapada 法句經
(3) Udana 自說經
(4) Itivuttaka 如是語經
(5) Sutta-nipata 經集
(6) Vimanavatthu 天宮事經
(7) Petavatthu 餓鬼事經
(8) Theragatha 長老偈經
(9) Therigatha 長老尼偈經
(10) Jataka 本生經
(11) Niddesa 義釋
① Maha-Niddesa 大義釋
② Cula-Niddesa 小義釋
(12) Patisambhida-magga 無楝解道
(13) Apadana 譬喩經
(14) Buddhavamsa 佛種姓經
(15) Cariya-pitaka 所行藏經
2014년 6월 8일 일요일
영화 Autumn Blood
대사가 거의 없다.
탐욕.무지.폭력
높고 깊은 산 속 외딴 집,
사랑? 질투 살인 그 후에 남겨진 어미,큰 딸, 사내아이....
어미가 죽던 날 사냥꾼의 어두운 성욕의 폭주로 큰 딸은 강간당하고
폭력에 맛들인 사냥꾼들 오두막까지와서 다시 강간한다.
누나와 동생은 나약하게 도망친다.
결과는 사냥꾼 무리 셋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현실과는 다르다.
현실이었으면 잔인한 허무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현실이란 도망칠 곳도 별로 없다.
인간종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한다.
인간이란 짐승으로 태어나
탐욕을 벗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
모든 탐욕은 성욕으로 연결될 수 있고 그 발현은 살기,폭력이다.
그렇게 태어나게 되었더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탐욕.무지.폭력
높고 깊은 산 속 외딴 집,
사랑? 질투 살인 그 후에 남겨진 어미,큰 딸, 사내아이....
어미가 죽던 날 사냥꾼의 어두운 성욕의 폭주로 큰 딸은 강간당하고
폭력에 맛들인 사냥꾼들 오두막까지와서 다시 강간한다.
누나와 동생은 나약하게 도망친다.
결과는 사냥꾼 무리 셋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현실과는 다르다.
현실이었으면 잔인한 허무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현실이란 도망칠 곳도 별로 없다.
인간종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한다.
인간이란 짐승으로 태어나
탐욕을 벗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
모든 탐욕은 성욕으로 연결될 수 있고 그 발현은 살기,폭력이다.
그렇게 태어나게 되었더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2014년 5월 19일 월요일
영화 '레이버 데이' Labor Day
미국 영화본 것 중에 흔하지 않은 것이다.
이야기 소재는 매우 비현실적이다.
탈옥수와 아들과 사는 무기력한 아낙네 3인이 어느 철에 며칠간의 이야기다.
이야기답지 않게 진행도 잔잔하며 음악도 잔잔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목한 점은
'조우'와 '충동' 문제다.
영화내용은 충동으로 인한 많은 우연이 일어난다.
인간이 모여살고 움직이기에 원하던 아니던 만나게 된다.
부디치다보면 여러가지 충동이 일어난다.
영화의 줄거리는 하두 엉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지만,
늘 이런 것이 인간살이인데, 인간살이 어찌할 것이냐
화두같은 것이 다가왔다.
이야기 소재는 매우 비현실적이다.
탈옥수와 아들과 사는 무기력한 아낙네 3인이 어느 철에 며칠간의 이야기다.
이야기답지 않게 진행도 잔잔하며 음악도 잔잔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목한 점은
'조우'와 '충동' 문제다.
영화내용은 충동으로 인한 많은 우연이 일어난다.
인간이 모여살고 움직이기에 원하던 아니던 만나게 된다.
부디치다보면 여러가지 충동이 일어난다.
영화의 줄거리는 하두 엉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지만,
늘 이런 것이 인간살이인데, 인간살이 어찌할 것이냐
화두같은 것이 다가왔다.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무위(無爲)란
제가 알게된 無爲는 이렇습니다.
무위(無爲)란
爲:=意爲=僞 - 의도적 행위 또는 작위적 행위가 아닌
의도나 꾸밈이 없는 함
그럼 그냥무냥이란 말인가? 아니다.
- 天眞爛漫,純眞無垢 - 있는 그대로요 걸림이 없다.
老子 - 道德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늘 도(고정적 실체가 있는)가 아니며,
이름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은 늘 이름(고정적 실체가 있는)이 아니다.
이것이 첫걸음입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까지 언어의 수사와 형상을 날려 버립니다.
의식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그때, 이름은 이름일 뿐.
하나니 만상이니 하는 것들이 다 생각일 뿐이네.
실상은 있는 그대로네.
無極=太極
아무것도 없는 또 만상이 펼쳐진... 그냥 있는 이것.
사람들은 이런 것을 견성, 깨달음 뭐 그렇게들 이야기합니다.
하나,근원,생명 -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됩니다.
내면으로(단지 상대적 비유일뿐) 이 절대(무주상:머물 상이 없는)의 시각에서
만상의 상대계를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그때 그때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 상태를 온전히 해가며 살 뿐입니다.
그래서 노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矣.
천하가 대개 아름답다 알고 아름답게 여기고, 미움을 가른다.
皆知善之爲善,斯不善矣.
대개 좋다 알고 좋게 여기고, 좋지 않음을 가른다.
故 그러므로(이런 것을 비추어 보아)
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形,高下相傾,音聲相和,前後相隨。
있고 없음이 서로 내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은 서로 모양짓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고,
울림과 소리는 서로 이끌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니.
(서로 하나의 개념이니)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이래서 성인은
하지(덧대지,꾸미지,속지) 않음을 일로 삼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에 머문다.
참 많은 말로 또는 형언할 수 없는 이 무언가, 느낌이 옵니까?
노자는 聖人의 길을 제시하고 노래하지만
眞人이란 개념도 있습니다.
저의 표현으로는 '생명과 하나되어 버린 자' 입니다.
생명을 인지하는 자와 생명과 하나되어 버린 자는 ... 뭐 좀 다르겠죠.
진.선.미 라는 것도
생명을 眞이라고 봤을 때
眞 <- 善 <- 美 이렇게 상속계보입니다.
참이라야 좋고 좋아야 아름답다.
착하다로 해석해도 참에 착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풀려갔습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시각이 이렇게 변하면 사람이 좀 이상해 집니다.
이 때까지 배워져왔던 도덕관념이 깨지고 그냥 보여지게 됩니다.
소위
인본이니
가치니
진보니
이런 용어들을 남발하는 사람들 보면
'이렇게 하면 소탈?한 내 욕망이 채워질까?' 해서 그냥 주절거기는 것 뿐입니다.
저에게 읽혀지는 속마음은 다 그런 거였습니다.
그냥 욕지기일뿐 그것이 무엇이든 별 상관은 없어 보였습니다.
누구나 인정할만큼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그저 '내 가치가 더 옳아' 하면서
상대방에게 개거품 물며 비아냥, 비난, 욕짓거리하려는 장식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다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왜 그러냐면,
어짜피 욕계 중간쯤에 있는 인간계에서 더 부지런히 탐욕하는 자가
더 큰 권세를 얻는 구조라면
대체로 '내가 바르다'는 선량한 사람이란 사람들은
그들을 힘들게 하는 반대편의 탐욕에 대한 부지런함, 무경계함을 관리하지 못합니다.
그 낚시바늘에 꿰어 버렸거든요.
조금 편해지면 홀랑홀랑 나른나른 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쌓여진 인연에 따라 표출되기 시작하면
온갖 것을 원망하며 통곡합니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바램을 갖습니다.
판때기 만들고 토끼몰이 한 자들은 별도로하고
그 판때기 알아보고 수백만이 아파트투기하는 걸 보면 ...
(적어도 그렇게 악바리로 부지런한 자가 더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럼 굶어 죽으란 말이냐' 할 사람 많겠지만
차라리 굶어 죽겠다.. 라는 사람 ... 글쎄요.
바라는 걸 가만가만 들어보면
모두가 풀 수 있는 것이고
그 단초는
있는 그대로 보고 문제 풀어갈 자에게
가볍게 표하나 던져주고,
그 표관리,표권관리 잘 하는 겁니다.
그 다음
주거도 공동구매
보험도 공동구매
변호사도 공동구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동구매하면 됩니다.
그렇게 스스로 인프라를 만들어가면 기본적인 것 다 됩니다.
욕망의 충돌은 기본(의식주거)을 건드리지 않는 영역에서만 하도록 하는 거죠.
탐욕은 항상 타인의 생명과 안전, 의식주거, 인프라를 파고 듭니다.
그곳에라야 제대로 된 빨대거든요.
제대로 낚시바늘을 꿰놔야 원하는대로 부릴 수 있거든요.
그거 발견한 것을 뭐 대단한 양 할 필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거잖아요.
민주주의? 이 용어자체가 .. 만인이 주인이라는 생각인데요.
내가 주인된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뭐 해보는데까지 해보지만 헛지랄일 수도...
있는 그대로 그냥 살지머. 이 정도죠....
----------
天地不仁爲仁
天心無心爲心
뒷구절은 제가 붙인 겁니다만,
천지자연은 사랑이 아님을 사랑으로 삼습니다.
천심은 마음없음을 마음으로 삼습니다.
둘다 인간에게는 무서운 말입니다. 안봐줍니다.
民心而天心
민심이 천심처럼 무심(편견없이 정확)하고 인정사정이 없어야 뭐가 좀 될텐데...
욕망따라 할랑할랑 이랬다가 저랬다가
뭐 어쩌라구요.
------------
소위 모두가 주인인 민주주의라면.. 주인이라면
주인이 욕망따라 행동할까요?
주인이라면 다먹여야 하는데 살림을 도적에게 맡길까요?
대체로 주인들 아닙디다.
두리번 거리는 객이지요.
주인이라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무심히 할 일 합니다.
-------------
다시 無爲로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에 따라 행할 뿐.
眞-善-美 로 펼쳐지는 무심한 상태로 살뿐..
인간들이 무위자연,소요유.. 이런 이야기 들으면
할랑할랑 또는 소박한 소시민 이런 거 생각하는 데...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무주상으로 끊임없이 찰나찰나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인데
어떤 인간도 헤아릴 수 없이 쉼없이 자연이 움직이는데
어찌 할랑거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힘을 주면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심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 뿐
자기편견을 다 내려 놓아야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있는데
어찌 한순간이라도 헤이해지겠습니까?
숨은 노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생명과 하나되는 길을 가기게
욕망은 물론이고 어떤 견해나 경계도 다 내려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과 하나된 자가 생명이 가는대로 그냥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無爲입니다.
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할 일을 그냥 한다... 입니다.
욕망,견해,논리 이런 거 전개 안합니다. 無心합니다.
無心 - 온갖 견해,번뇌가 없어지지 않으면
생명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방향을 모릅니다.
養神,養身,養生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생명이 그냥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욕망,견해,번뇌 그런 것에 걸리거나 거쳐지지 않고
그냥 나오게 생명에너지가 직사되도록 한다고나 할까요.
逍遙遊소요유,彷徨방황 - 노닌다
---------
老子,莊子,孔子 - 이거 철학?같은 용어를 써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들 다 생명에 이르고 생명으로 사는 일에 대한 길을 노래한 것입니다.
수천만 말이 있으나 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모든 것이 풀릴 것입니다.
분석을 잘한다고 그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잘하면 좋은데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
사람들이 자기 수양을 위해 이런 책들을 많이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진탕 현실정치에 연결하려는 것은 거리가 있고
다만 여러 수양이 좀 된 사람들이
생명이 펼쳐지는 원리를 따라 정치에 적용해보려 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것이 모두가 주인인데
모두가 주인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上德不德은
天地不仁爲仁
天心無心爲心
이것으로 대신하고
욕망에 퐁당한 인간들은 이해에 맞지 않으므로 不德하다 할 것입니다.
---
욕망의 끝은 폭력이고 파괴입니다.
전쟁이 그 극치일 것입니다.
생명은 무심합니다. 바탕은 늘 온화할 뿐.
생명이 늘 온화한 빛이기 때문에
그냥 행복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늘 항상
---
희.노.애.락.애.오.욕 은 어찌할 것이냐.
전개되는 작용일 뿐입니다.
조건에 따라 오는 것은 조건에 따라 사라질 뿐.
끄트머리 포말을 가지고 물을 논할 것은 아니지요.
----
얘기 들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나서 적었습니다만,
다시 無爲로 돌와오면
無爲는 생명으로 그냥 사는 겁니다.
무위(無爲)란
爲:=意爲=僞 - 의도적 행위 또는 작위적 행위가 아닌
의도나 꾸밈이 없는 함
그럼 그냥무냥이란 말인가? 아니다.
- 天眞爛漫,純眞無垢 - 있는 그대로요 걸림이 없다.
老子 - 道德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늘 도(고정적 실체가 있는)가 아니며,
이름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은 늘 이름(고정적 실체가 있는)이 아니다.
이것이 첫걸음입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까지 언어의 수사와 형상을 날려 버립니다.
의식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그때, 이름은 이름일 뿐.
하나니 만상이니 하는 것들이 다 생각일 뿐이네.
실상은 있는 그대로네.
無極=太極
아무것도 없는 또 만상이 펼쳐진... 그냥 있는 이것.
사람들은 이런 것을 견성, 깨달음 뭐 그렇게들 이야기합니다.
하나,근원,생명 -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됩니다.
내면으로(단지 상대적 비유일뿐) 이 절대(무주상:머물 상이 없는)의 시각에서
만상의 상대계를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그때 그때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 상태를 온전히 해가며 살 뿐입니다.
그래서 노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矣.
천하가 대개 아름답다 알고 아름답게 여기고, 미움을 가른다.
皆知善之爲善,斯不善矣.
대개 좋다 알고 좋게 여기고, 좋지 않음을 가른다.
故 그러므로(이런 것을 비추어 보아)
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形,高下相傾,音聲相和,前後相隨。
있고 없음이 서로 내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은 서로 모양짓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고,
울림과 소리는 서로 이끌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니.
(서로 하나의 개념이니)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이래서 성인은
하지(덧대지,꾸미지,속지) 않음을 일로 삼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에 머문다.
참 많은 말로 또는 형언할 수 없는 이 무언가, 느낌이 옵니까?
노자는 聖人의 길을 제시하고 노래하지만
眞人이란 개념도 있습니다.
저의 표현으로는 '생명과 하나되어 버린 자' 입니다.
생명을 인지하는 자와 생명과 하나되어 버린 자는 ... 뭐 좀 다르겠죠.
진.선.미 라는 것도
생명을 眞이라고 봤을 때
眞 <- 善 <- 美 이렇게 상속계보입니다.
참이라야 좋고 좋아야 아름답다.
착하다로 해석해도 참에 착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풀려갔습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시각이 이렇게 변하면 사람이 좀 이상해 집니다.
이 때까지 배워져왔던 도덕관념이 깨지고 그냥 보여지게 됩니다.
소위
인본이니
가치니
진보니
이런 용어들을 남발하는 사람들 보면
'이렇게 하면 소탈?한 내 욕망이 채워질까?' 해서 그냥 주절거기는 것 뿐입니다.
저에게 읽혀지는 속마음은 다 그런 거였습니다.
그냥 욕지기일뿐 그것이 무엇이든 별 상관은 없어 보였습니다.
누구나 인정할만큼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그저 '내 가치가 더 옳아' 하면서
상대방에게 개거품 물며 비아냥, 비난, 욕짓거리하려는 장식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다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왜 그러냐면,
어짜피 욕계 중간쯤에 있는 인간계에서 더 부지런히 탐욕하는 자가
더 큰 권세를 얻는 구조라면
대체로 '내가 바르다'는 선량한 사람이란 사람들은
그들을 힘들게 하는 반대편의 탐욕에 대한 부지런함, 무경계함을 관리하지 못합니다.
그 낚시바늘에 꿰어 버렸거든요.
조금 편해지면 홀랑홀랑 나른나른 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쌓여진 인연에 따라 표출되기 시작하면
온갖 것을 원망하며 통곡합니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바램을 갖습니다.
판때기 만들고 토끼몰이 한 자들은 별도로하고
그 판때기 알아보고 수백만이 아파트투기하는 걸 보면 ...
(적어도 그렇게 악바리로 부지런한 자가 더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럼 굶어 죽으란 말이냐' 할 사람 많겠지만
차라리 굶어 죽겠다.. 라는 사람 ... 글쎄요.
바라는 걸 가만가만 들어보면
모두가 풀 수 있는 것이고
그 단초는
있는 그대로 보고 문제 풀어갈 자에게
가볍게 표하나 던져주고,
그 표관리,표권관리 잘 하는 겁니다.
그 다음
주거도 공동구매
보험도 공동구매
변호사도 공동구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동구매하면 됩니다.
그렇게 스스로 인프라를 만들어가면 기본적인 것 다 됩니다.
욕망의 충돌은 기본(의식주거)을 건드리지 않는 영역에서만 하도록 하는 거죠.
탐욕은 항상 타인의 생명과 안전, 의식주거, 인프라를 파고 듭니다.
그곳에라야 제대로 된 빨대거든요.
제대로 낚시바늘을 꿰놔야 원하는대로 부릴 수 있거든요.
그거 발견한 것을 뭐 대단한 양 할 필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거잖아요.
민주주의? 이 용어자체가 .. 만인이 주인이라는 생각인데요.
내가 주인된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뭐 해보는데까지 해보지만 헛지랄일 수도...
있는 그대로 그냥 살지머. 이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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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不仁爲仁
天心無心爲心
뒷구절은 제가 붙인 겁니다만,
천지자연은 사랑이 아님을 사랑으로 삼습니다.
천심은 마음없음을 마음으로 삼습니다.
둘다 인간에게는 무서운 말입니다. 안봐줍니다.
民心而天心
민심이 천심처럼 무심(편견없이 정확)하고 인정사정이 없어야 뭐가 좀 될텐데...
욕망따라 할랑할랑 이랬다가 저랬다가
뭐 어쩌라구요.
------------
소위 모두가 주인인 민주주의라면.. 주인이라면
주인이 욕망따라 행동할까요?
주인이라면 다먹여야 하는데 살림을 도적에게 맡길까요?
대체로 주인들 아닙디다.
두리번 거리는 객이지요.
주인이라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무심히 할 일 합니다.
-------------
다시 無爲로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에 따라 행할 뿐.
眞-善-美 로 펼쳐지는 무심한 상태로 살뿐..
인간들이 무위자연,소요유.. 이런 이야기 들으면
할랑할랑 또는 소박한 소시민 이런 거 생각하는 데...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무주상으로 끊임없이 찰나찰나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인데
어떤 인간도 헤아릴 수 없이 쉼없이 자연이 움직이는데
어찌 할랑거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힘을 주면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심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 뿐
자기편견을 다 내려 놓아야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있는데
어찌 한순간이라도 헤이해지겠습니까?
숨은 노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생명과 하나되는 길을 가기게
욕망은 물론이고 어떤 견해나 경계도 다 내려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과 하나된 자가 생명이 가는대로 그냥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無爲입니다.
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할 일을 그냥 한다... 입니다.
욕망,견해,논리 이런 거 전개 안합니다. 無心합니다.
無心 - 온갖 견해,번뇌가 없어지지 않으면
생명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방향을 모릅니다.
養神,養身,養生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생명이 그냥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욕망,견해,번뇌 그런 것에 걸리거나 거쳐지지 않고
그냥 나오게 생명에너지가 직사되도록 한다고나 할까요.
逍遙遊소요유,彷徨방황 - 노닌다
---------
老子,莊子,孔子 - 이거 철학?같은 용어를 써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들 다 생명에 이르고 생명으로 사는 일에 대한 길을 노래한 것입니다.
수천만 말이 있으나 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모든 것이 풀릴 것입니다.
분석을 잘한다고 그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잘하면 좋은데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
사람들이 자기 수양을 위해 이런 책들을 많이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진탕 현실정치에 연결하려는 것은 거리가 있고
다만 여러 수양이 좀 된 사람들이
생명이 펼쳐지는 원리를 따라 정치에 적용해보려 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것이 모두가 주인인데
모두가 주인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上德不德은
天地不仁爲仁
天心無心爲心
이것으로 대신하고
욕망에 퐁당한 인간들은 이해에 맞지 않으므로 不德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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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끝은 폭력이고 파괴입니다.
전쟁이 그 극치일 것입니다.
생명은 무심합니다. 바탕은 늘 온화할 뿐.
생명이 늘 온화한 빛이기 때문에
그냥 행복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늘 항상
---
희.노.애.락.애.오.욕 은 어찌할 것이냐.
전개되는 작용일 뿐입니다.
조건에 따라 오는 것은 조건에 따라 사라질 뿐.
끄트머리 포말을 가지고 물을 논할 것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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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들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나서 적었습니다만,
다시 無爲로 돌와오면
無爲는 생명으로 그냥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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