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게된 無爲는 이렇습니다.
무위(無爲)란
爲:=意爲=僞 - 의도적 행위 또는 작위적 행위가 아닌
의도나 꾸밈이 없는 함
그럼 그냥무냥이란 말인가? 아니다.
- 天眞爛漫,純眞無垢 - 있는 그대로요 걸림이 없다.
老子 - 道德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늘 도(고정적 실체가 있는)가 아니며,
이름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은 늘 이름(고정적 실체가 있는)이 아니다.
이것이 첫걸음입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까지 언어의 수사와 형상을 날려 버립니다.
의식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그때, 이름은 이름일 뿐.
하나니 만상이니 하는 것들이 다 생각일 뿐이네.
실상은 있는 그대로네.
無極=太極
아무것도 없는 또 만상이 펼쳐진... 그냥 있는 이것.
사람들은 이런 것을 견성, 깨달음 뭐 그렇게들 이야기합니다.
하나,근원,생명 -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됩니다.
내면으로(단지 상대적 비유일뿐) 이 절대(무주상:머물 상이 없는)의 시각에서
만상의 상대계를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그때 그때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 상태를 온전히 해가며 살 뿐입니다.
그래서 노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矣.
천하가 대개 아름답다 알고 아름답게 여기고, 미움을 가른다.
皆知善之爲善,斯不善矣.
대개 좋다 알고 좋게 여기고, 좋지 않음을 가른다.
故 그러므로(이런 것을 비추어 보아)
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形,高下相傾,音聲相和,前後相隨。
있고 없음이 서로 내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은 서로 모양짓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고,
울림과 소리는 서로 이끌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니.
(서로 하나의 개념이니)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이래서 성인은
하지(덧대지,꾸미지,속지) 않음을 일로 삼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에 머문다.
참 많은 말로 또는 형언할 수 없는 이 무언가, 느낌이 옵니까?
노자는 聖人의 길을 제시하고 노래하지만
眞人이란 개념도 있습니다.
저의 표현으로는 '생명과 하나되어 버린 자' 입니다.
생명을 인지하는 자와 생명과 하나되어 버린 자는 ... 뭐 좀 다르겠죠.
진.선.미 라는 것도
생명을 眞이라고 봤을 때
眞 <- 善 <- 美 이렇게 상속계보입니다.
참이라야 좋고 좋아야 아름답다.
착하다로 해석해도 참에 착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풀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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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시각이 이렇게 변하면 사람이 좀 이상해 집니다.
이 때까지 배워져왔던 도덕관념이 깨지고 그냥 보여지게 됩니다.
소위
인본이니
가치니
진보니
이런 용어들을 남발하는 사람들 보면
'이렇게 하면 소탈?한 내 욕망이 채워질까?' 해서 그냥 주절거기는 것 뿐입니다.
저에게 읽혀지는 속마음은 다 그런 거였습니다.
그냥 욕지기일뿐 그것이 무엇이든 별 상관은 없어 보였습니다.
누구나 인정할만큼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그저 '내 가치가 더 옳아' 하면서
상대방에게 개거품 물며 비아냥, 비난, 욕짓거리하려는 장식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다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왜 그러냐면,
어짜피 욕계 중간쯤에 있는 인간계에서 더 부지런히 탐욕하는 자가
더 큰 권세를 얻는 구조라면
대체로 '내가 바르다'는 선량한 사람이란 사람들은
그들을 힘들게 하는 반대편의 탐욕에 대한 부지런함, 무경계함을 관리하지 못합니다.
그 낚시바늘에 꿰어 버렸거든요.
조금 편해지면 홀랑홀랑 나른나른 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쌓여진 인연에 따라 표출되기 시작하면
온갖 것을 원망하며 통곡합니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바램을 갖습니다.
판때기 만들고 토끼몰이 한 자들은 별도로하고
그 판때기 알아보고 수백만이 아파트투기하는 걸 보면 ...
(적어도 그렇게 악바리로 부지런한 자가 더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럼 굶어 죽으란 말이냐' 할 사람 많겠지만
차라리 굶어 죽겠다.. 라는 사람 ... 글쎄요.
바라는 걸 가만가만 들어보면
모두가 풀 수 있는 것이고
그 단초는
있는 그대로 보고 문제 풀어갈 자에게
가볍게 표하나 던져주고,
그 표관리,표권관리 잘 하는 겁니다.
그 다음
주거도 공동구매
보험도 공동구매
변호사도 공동구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동구매하면 됩니다.
그렇게 스스로 인프라를 만들어가면 기본적인 것 다 됩니다.
욕망의 충돌은 기본(의식주거)을 건드리지 않는 영역에서만 하도록 하는 거죠.
탐욕은 항상 타인의 생명과 안전, 의식주거, 인프라를 파고 듭니다.
그곳에라야 제대로 된 빨대거든요.
제대로 낚시바늘을 꿰놔야 원하는대로 부릴 수 있거든요.
그거 발견한 것을 뭐 대단한 양 할 필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거잖아요.
민주주의? 이 용어자체가 .. 만인이 주인이라는 생각인데요.
내가 주인된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뭐 해보는데까지 해보지만 헛지랄일 수도...
있는 그대로 그냥 살지머. 이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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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不仁爲仁
天心無心爲心
뒷구절은 제가 붙인 겁니다만,
천지자연은 사랑이 아님을 사랑으로 삼습니다.
천심은 마음없음을 마음으로 삼습니다.
둘다 인간에게는 무서운 말입니다. 안봐줍니다.
民心而天心
민심이 천심처럼 무심(편견없이 정확)하고 인정사정이 없어야 뭐가 좀 될텐데...
욕망따라 할랑할랑 이랬다가 저랬다가
뭐 어쩌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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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모두가 주인인 민주주의라면.. 주인이라면
주인이 욕망따라 행동할까요?
주인이라면 다먹여야 하는데 살림을 도적에게 맡길까요?
대체로 주인들 아닙디다.
두리번 거리는 객이지요.
주인이라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무심히 할 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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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無爲로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에 따라 행할 뿐.
眞-善-美 로 펼쳐지는 무심한 상태로 살뿐..
인간들이 무위자연,소요유.. 이런 이야기 들으면
할랑할랑 또는 소박한 소시민 이런 거 생각하는 데...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무주상으로 끊임없이 찰나찰나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인데
어떤 인간도 헤아릴 수 없이 쉼없이 자연이 움직이는데
어찌 할랑거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힘을 주면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심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 뿐
자기편견을 다 내려 놓아야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있는데
어찌 한순간이라도 헤이해지겠습니까?
숨은 노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생명과 하나되는 길을 가기게
욕망은 물론이고 어떤 견해나 경계도 다 내려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과 하나된 자가 생명이 가는대로 그냥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無爲입니다.
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할 일을 그냥 한다... 입니다.
욕망,견해,논리 이런 거 전개 안합니다. 無心합니다.
無心 - 온갖 견해,번뇌가 없어지지 않으면
생명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방향을 모릅니다.
養神,養身,養生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생명이 그냥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욕망,견해,번뇌 그런 것에 걸리거나 거쳐지지 않고
그냥 나오게 생명에너지가 직사되도록 한다고나 할까요.
逍遙遊소요유,彷徨방황 - 노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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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莊子,孔子 - 이거 철학?같은 용어를 써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들 다 생명에 이르고 생명으로 사는 일에 대한 길을 노래한 것입니다.
수천만 말이 있으나 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모든 것이 풀릴 것입니다.
분석을 잘한다고 그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잘하면 좋은데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
사람들이 자기 수양을 위해 이런 책들을 많이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진탕 현실정치에 연결하려는 것은 거리가 있고
다만 여러 수양이 좀 된 사람들이
생명이 펼쳐지는 원리를 따라 정치에 적용해보려 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것이 모두가 주인인데
모두가 주인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上德不德은
天地不仁爲仁
天心無心爲心
이것으로 대신하고
욕망에 퐁당한 인간들은 이해에 맞지 않으므로 不德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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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끝은 폭력이고 파괴입니다.
전쟁이 그 극치일 것입니다.
생명은 무심합니다. 바탕은 늘 온화할 뿐.
생명이 늘 온화한 빛이기 때문에
그냥 행복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늘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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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노.애.락.애.오.욕 은 어찌할 것이냐.
전개되는 작용일 뿐입니다.
조건에 따라 오는 것은 조건에 따라 사라질 뿐.
끄트머리 포말을 가지고 물을 논할 것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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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들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나서 적었습니다만,
다시 無爲로 돌와오면
無爲는 생명으로 그냥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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