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해지는 12연기의 출발은 무명이다.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처(六處)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이렇게 전개된다고 석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무명의 출발은 시작을 모른다.
영화 '도희야' 에서는 이것이 웬통 뒤섞여서 나온다.
무지,탐욕,폭력,두려움,혼란,외면,속임...
모든 캐릭터가 정신이 없다.
영화인의 시선에서 그렇게 설정한 것이겠으나,
실상에서도 자주 접하는 단상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친절한 자연환경은 없었을 것이다.
그 불인(不仁)한 천지가 예측할만한 규칙이 있어서
보는 이에게 지혜가 싹트고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적응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지한 채 폭력화 되어가는 인간들의 문제였다.
미세하게 보면 지식이란 것이 사회적으로 들어날 때
폭력인 경우가 많다.
마치 작용 반작용처럼,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이 다시 폭력이 될 수 있다.
무지가 폭력이라는 갈증을 낳을 때,
몸의 생존의 문제가 풀려야 벗어날 수 있다.
자각하고 다시 봐야한다.
인간이 폭력에 적응하면서 나타난 기술은
인간몸의 생존을 해결하는 수준까지 왔다.
문제는 계속되는 갈증.
지금도 성적인 갈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마치 그런 성적 욕망이란 것이 없으면
인간의 세대가 멈출 것이라는
근거도 없고 허황된 이야기를 씨부렁거리면서...
듫끓는 성적 욕망이나
공포를 조장하면서 들이치는 폭력이나
다가오는 모습이 비슷하지 않은가?
적당히 해서는 인간몸으로 온 보람이란 맛도 못볼 것이다.
평안함에 이르렀을 때... 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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