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름 기존 글을 날리고 다시 적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파라밀다심경
摩訶 般若波羅蜜多( Prajñā-pāramitā) 心(hrdaya) 經(sutra:모음,엮음)
으뜸 지혜로의 심장(핵심)의 경
(으뜸의,핵심,정수,완전한)
* 波羅蜜多 pāramitā paramita parameter
parameter 특정 기능이 실행되기 위해 필요한 인자.
매개 변수(媒介變數) f(x) = y 에서 x.
f라는 동작은 x가 들어왔을 때 y가 된다.
관자재보살(Avalokiteshvara-bodisattva)이
정수의 지혜를 깊이 할 때
5온(색,수,상,행,식)이 모두 비어있음을 비추어 보아
모든 괴로움과 멍에를 넘어섰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깨달은 관자재보살이 무루의 반야를 완성하려고...
관觀 Satipatthana Vipassana 오온을 대상으로 관찰
오온 = 사념처(몸, 느낌, 마음, 법:속성,특성)
색 - 육체,물질 - 느낌을 일으키는 모든 것.
수 - 느낌
상 - 지각,생각
행 - 작용,반응
식 - 인지,인식 - 수.상.행을 거친 종합한 인식
참고로 불교는
무상(無常, anicca)하고(제행무상)
고(苦, dukkha)이며(일체개고)
무아(無我, anatta)라는(제법무아)
기반으로 전개한다.
度一切苦厄 - 완전한 해탈에 이르렀다.
오온5溫 대상과 나의 일어나는 작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즉 물질현상이 나에게 느낌,지각,반응,인식의 인식을 일으키는 작용을 말한다.
12연기 참조. 이 오온이 각자가 세계라고 보는 곳이다.
이 오온5溫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한다.
사리자(Sariputra)여
색이 빔과 다르지 않고
빔이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빔이고 빔이 색이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色이 空과 다르지 않고 空이 色과 다르지 않고, 色이 空이고 空이 色이다.
色(~色聲香味觸法).受.想.行.識에 대해 모두 空과 不異하고 卽하다.
빔(空):자성(自性)이 없다. 독자성이 없다. (이렇게 표현들 하지만 더 어려워졌다, 병이다.)
거울에 모양이 비춰지지만 거울에 비친 모양이 실상은 아니다.
色(~色.受.想.行.識) 느끼고 짓지만 실은 空과 다르지 않다.
色이다 空이다 하지만 실은 작용일 뿐 色.空이 따로 일 수 없다.
* 이 부분이 입문인데 가장 어렵다.
감각 六根,六境,六識,六塵 *기관 통해 *대상을 *인식하여 *일렁이는 작용은 空하다.
뭐가 나타나고 인지 되면 바로 다양한 감정 변화로 치닫지만
하나 하나 비춰 보면서 살피면 더 정확한 인지 방식이고
실제 작용의 흐름일 뿐(보는 작용, 듣는 작용...),
다르게 작용하거나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물 - 갈증 나면 마시고, 더러우면 씻고, 익힐 때는 끓이고 찌고,
무거운 건 띄우고, 눈.얼음이면 놀이로 음식으로 식힘으로...
물 자체가 생각한 성질이 가지고 것이 아니고
조건에 따라 작용했을 때 드러남이 달라 진다.
色聲香味觸法인연(조건)에 따른 작용이 있을 뿐
相을 내지만 相의 실체라 할 것이 없다.
같은 행위도 조건에 따라 즐거움도 되었다가 괴로움도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것에 반했을 때, 수 십 번을 반복해서 같은 행위를 하지만 물리면 행위 자체가 고통이 된다.
몰입도 높은 드라마를 즐길 수도 있지만 그런 드라마를 보는 행위 자체가 고통일 수도 있다.
중독성 습관이라는 것들이 그렇다. 술, 담배, 식성, 성욕, 물욕, 추구, 경향성 있는 생각..뭐든...
처음에야 느낌이 놀랍고 새롭고 하지만, 익숙해지고, 습관으로 하다 보면
무뎌져서 그저 습관이 돼서 하고 있지, 끌려 다니고 그 반응을 받는 고통이다.
빠져있다 보면 고통인 줄 모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의 空이고 色.受.想.行.識 모두 空과 다르지 않으니까. 즉 空이니까.
(色.空을 같이 보고 있는 것에 주의하라)
이렇기 때문에 空하다 하지만 空性이라고도 한다.
(공空sunya 공성空性 sunyata 에 대한 의미부여는 생략...)
그래서 부처와 중생마저도 하나의 다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반야심경은 이 공空자 하나를 다시 의미부여하여 관통자로 쓰려 한다.
공통 공空 만능 공空이다. 단순히 없다 비었다 의 뜻이 이렇게 무겁게 되었다.
공은, 공관은 그저 도구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사리자여
모든 법이 이와 같이 비어있는 모양(작용)이어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러므로
비어있음에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고
색,소리,냄새,맛,느낌,성질도 없고
눈의 세계도 없고
내지 의식의 세계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고 밝지 않음이 다함도 없고
내지 늙어 죽음도 없고 늙어 죽음이 다함도 없다.
고.집.멸.도 도 없고 앎도 없고 얻음 역시 없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乃至 ~로부터 ~까지
色聲香味觸法 으로 근根 경境 식識으로 界라 하니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 18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 12연기
얻음이 없으므로
보리살타는 정수의 지혜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를 가짐도 없어서
뒤집힌 꿈의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는
지혜의 정수에 의지하므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
三世諸佛 依 般若波羅密多故 得阿褥多羅三藐三菩提
그러므로 알아라.
정수의 지혜는
이처럼 커다란 신의 주문이며
이처럼 밝은 주문이며
이처럼 가장 높은 주문이며
이처럼 견줄 수 없는 주문이라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그래서 정수의 지혜의 주문을 말한다.
주문을 설하니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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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는 접고
나의 경우는 이러하다.
처음에 몇십번을 읽어도
마하반야파라밀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제아제 바라아제
이상한 한자들이 있어서 답답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상태를 모른다' - 였다.
여차 저차 살아오다가 어느 때에
노자 1,2장
道可道,非常道 - 도를 도라 할 수 있지만 늘 이르는 도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 - 이름을 이름할 수 있지만 늘 이르는 이름이 아니다.
常 - 늘, 항상, 일상, cf.常識
노자는 첫 구절부터 직입한다. 된통 맞아서 어리둥절하다. 당연하다.
우리가 감각에서 사유로 흐르는 작용은 본능이라 착각할 만큼 빠르게 전개된다.
실상(實相)을 빠르게 상징화해서 전달한다고 언어라는 매개를 쓰지만
실상은 배제되거나 건성이거나 혼란으로 덮어두고 꽥꽥거리면서 소란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생각이 시끄러운 것이다.
실상이 언어를 매개로 표출되어 실상을 전달에 실패하면 이미 언어가 아니고 대부분 이렇다.
이것을 노자는 첫부분부터 훅~!! 이것을 헤집은 것이다.
無名天地之始 - 없음은 천지의 시작을 이름함이고
有名萬物之母 - 있음은 만물의 어미를 이름함이다.
형이상,형이하 유,무를 언어로 이렇게 정의-전제하는 것은 탁월하다.
無는 道에 有는 名에 실상-언어로 대응시켜 보아도 간명함이 쩐다.
故 - 그러므로, 그러하니
常無欲以觀其妙 - 늘 무욕으로 그 묘함을 관하고
常有欲以觀其徼 - 늘 유욕으로 그 돌아감을 관한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 이 둘은 같이 나와 다른 이름이며 같이 이르기를 심오하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 심오하고 또 심오하니 온갖 묘함의 문이다.
玄-가물다,아득하다,심오하다.
실상, 인간생활의 가르는 것 欲
인간이란 동물의 몸이 생존해가는 체계가 보내는 신호가 욕(欲)이다.
생존의 체계가 정연하고 충족되면 욕(欲)은 잠잠하다.
대부분은 소란스러움은 습성,트라우마적 반응이 판을 치는 것이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아름다움이 이미 추함을 가르고
모두 좋다고 여기는 좋다는 것이 이미 좋지 않음을 가른다.
이런 이유로
있고 없음은 서로 내고, 어렵고 쉬움은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내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대며
소리냄와 들림은 서로 화하고, 앞뒤는 서로 따른다.
*일체가 相으로 구분되어짐을 정말 명쾌하게 드러냈다.
相-서로 상
이와 같이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물고
말 아닌 것으로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을 짓지만 이렇다 저렇다 않고
내지만 갖지(有) 않고
이루지만 머물지 않는다.
무릇 오로지 머물지 않음으로서 떠나지 않는다.
道,名,有,無로 먼저 직입하고 相으로 識을 드러내고
실상이 이러므로 聖人(노자의 이상적인 인간형)은 이러하다고 말한다.
노자의 도에 대한 말도 이 1,2장이 명쾌해지지 않으면
뒤로는 관념으로 흐르거나 혼란만 더하기 십상이다.
...
천부경의 일시무시일 ... 일종무종일
선禪 - 부모로부터 나기 전 본래면목, 한물건도 없다.
등으로 연결되면서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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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라는 도구는 실상을 전달하기에 역부적이다.
실상이 있을 때, 말도 도구노릇을 한다.
실상은 그냥 있다.
이 상태는 생각이라는 작용이 일어나기 전을 말하고 있다.
한가지를 짚으면 이미 만가지로 저절로 구별되어 버린다.
일상생활이란 것이 만가지의 끝자락에 있다.
돌이켜서 아무것도 없는 텅빔과 모든 작용들 그리고 보는 이것.
이건 뭔가? 아직 경계...
보는 이것은 보이는 것은.... 다시 일상... 작용들...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심경의 비추어보는 상태가 이 상태인 것.
(중간에 .... 많은 것들은 생략....)
'내려놓음'이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었나 싶다.
빔과 빔을 보는 것이 동시이고 직접적이다.
겹쳐지는 세상 일상...
차츰 (구별이) 있고 없음에 상관이 없이 그 상태가 되었다.
물론 망각할 때도 있다.
특히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표현이 절정이다.
석가모니가 무서워서 집을 나가고....무서운 꿈을 벗어나 열반
이후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
그대로지만 그대로가 아닌...본래로 돌아가는지도...
계속해서 관점이 사라지거나 정리되어 간다.
몸에 대한... 마음에 대한... 초보적이라도 다행이다.
몽상을 지나치게 하시는 분들이 매우 거칠게 나올 때는 난감할 뿐.
그래도 그 순간에 나에게 일어나는 작용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편한 상태에서 사유?같은 걸 해보고 원인도 찾고 풀어내야
벗어나게 되고 그 거친 것에 대한 작용이 순탄해져 간다.
'나는 머무르지도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이 거센 흐름을 건넜다'하고 한
석가모니의 담담한 일러줌이 따뜻하게 위로한다.
자비라는 것도 길가는 자의 스스로를 위한 덕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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