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용어에 작용 반작용, 상대성이론 이란 말이 있다.
물리는 유교의 格物과 유사한 개념이다.
物理는 자연계를 인과작용의 규칙에 중점을 둔 말이고,
格物은 그 자연계 규칙에 대한 인간의 입장 중점을 둔 말이다.
그래서 格物-사물이 존재방식에 대한 인간의 이해입장과
그에 따른 행동방식까지 영역하는 경우도 흔하다.
격이란 인간의 말로는 형국position,입장stands으로 기술할 수 있다.
형국은 객관적시각을 입장은 형국에서 어떤 구분객체의 시각을 의미한다.
유교가 정치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 오랜동안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격물은 감각인지(사고의 영역 포함)작용에 한정이 있다.
물리는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는데
추론 가설 증명 등 - 다양한 사고수단과 관측장비를 만들고 활용한다.
영역이 훨씬 넓고 인간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는다.
이런 인간행위의 소산 중에
작용과 반작용, 상대성 이론 이란 용어는 세대를 대표한다.
이것은 불교용어와 매우 유사하다.
인과因果cause-and-effect .... 작용반작용.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 - selflessness) - 상대성이론 theory of relativity
종교의 근본은 현대물리와 매우 닮아 있다.
기복행위 등 인간의 입장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좀 지나치게 자아ego에 집착하여
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엉뚱한 욕구행위로 전개되고
그것이 정상적인 작용을 방해하니
정상적인 성인(聖人)들의 말의 빌미가 된다.
종교는 인간태도를 규제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물의 이치와 관계없이 인간의 욕구로 연역되어 버리는 습성인
후차적 마음작용에 집중한다.
이것은 삶의작용에서 대한 체험에 대한 기억의 반사작용
즉 마음의 회로같은 것이다.
그 지나친 작용(때론 왜곡된 작용)을 흐르는 증폭회로를 제거하는데
집중한다는 말이다.
선가귀감에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마음의 일이란 마음으로 해결한다는 의미다.
모든 선문답은 과장된 회로를 제거하거나 제거되었는지에 점검행위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것을 보다,비추어 보다 라고 한다.
이런 작용들을 깨우침 깨침 깨달음이라 하여
깨어남... 즉 착각,오해,꿈같은 작용에서 깸이다.
내용이 없으면 안되니...관점을 변화시키는 한가지를 소개하자면.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사실 선문답이란게 의문이 쓸데없음을 깨우친다고도 볼 수 있으나
그 과정을 통해서 관점이 변한다는게 효과라 할 수 있다.
자기라는 존재로 인식되는 모든 자원을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말로 설명하면 아주 간단하다.
부모전에는 나我가 없었다.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부차적 회로들을 제거하는 아주 간명한 말이다.
그래서 선禪을 '간단히 보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머리로만 깨치든 마음으로 깨치든 어떤 작용이 있게 되는데
입장,태도가 변화하는 것이 결과다.
그에 따라 돈오돈수,돈오점수,점오돈수,점오점수 등의 분류가 있게 된다.
기실 그결과는 어떤 고정적 태도나 입장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를 고집苦集을 멸滅하는 길道라고도 말한다.
허무주의(관념적 공空주의)나
무간지옥(세상 모든 것이 잘못이다는 혼돈 괴로움이 끊없는 상태)의 부작용이나
놀라운 생각의 변화나 어떤 특이작용이 있을 수도 있거나
놀라운 생명현상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것은 부차적이라 그에 대한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이 중요하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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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하게 설명하였다.
행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위의 변화의 과정이 지나면, 왜곡된 불필요한 시비분별이 없어진다.
불필요한 논쟁보다는 필요한 행위을 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바르다 바르지 않다는 기준은 그래서
어떤 상相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모든 관념,교육되어진 것,체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일차적으로 사라지고 다시 보이게 된다.
어떤 행위의 인과-작용반작용을 잘보게 되는 효과도 있다.
인간사회에서의 논쟁의 원인도 잘 보게 되고 자기역할을 거저하게 된다.
소위 잘되고 좋은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원망이나 욕망에 대한 시비가 사라지고 충실하게 된다는 말이다.
뭐 애초에 일이라는 것이 있었나? 그것들 다 추상개념 아닌가?
모든 개념은 도구 아닌가?
그래서 다시 行이란
이 생생한 생명현상을 그대로 보고 그대로 작용한다.
인간의 노이즈가 많은 부차적회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보고(直視,直觀) 바로 작용한다.
긴 흐름과 순간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生生之 謂 易이라 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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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적인 이야기는 이만하면 되었고,
작용반작용이라는 말을 걸었으니,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작용이 있으면 동시에 그에 대응하는 작용이 있다.는
간단한 내용이고
하나의 인생살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인간이라는 생명작용 위에
마음이라는 회로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뱃속부터 시작될 것이다.
생명체는 먹고,활동하고,쉬는 과장이 반복된다.
어머니 뱃속에 있으니 그 뱃속환경에 그대로 영향을 받음은 당연할 것이다.
어머니는 뱃속 아기의 환경이지만, 어머니도 외부환경과 내부조건이 있다.
어머니가 살아가는 사회
사회가 있는 자연계...
아기가 나오고 아기는 생명체로 돌봄을 받게 된다.
뱃속환경이 사라지고 직접작용으로 된다.
먹고 싸기만 하다가, 뒤집고, 기고, 걷고,
이런 와중에 말을 배우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작용반작용이다.
보고 비교하고 차이와 같음을 분류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행동에도 반영한다.
이 과정은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이런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정서(지능)이 발전한다.
이때 충격이 주어지고 그것에 적응한다.
생명활동에 필요한 기초작용 기반한
의식작용이 대응,기억,연역,추론,재정립 등의 사고활동으로 축적된다.
그래서 다음 작용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준다.
공감이란 것은 공진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슷한 회로가 있다는 것으로 비교될 수 있다.
그래서 그 조건들이 계속 변화하면서
생명작용 위에 마음.의식이라는 것도 작용과 반작용이 이어진다.
나와 남, 이것 저것, 슬프고, 기쁘고, 좋고 안좋고, 화나고
등등의 회로들이 생겨난다.
그것을 마음 마음작용이고 이야기들 한다.
생명작용위에 있으므로 그에 따라 다시 생명작용에 영향을 준다.
생명작용은 숨쉬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쉬고, 배설하고
감각기능이 작용하고 등등이다.
그 위에 마음작용이 있다. 필터역할을 한다.
층이 하나 더 있다라고 보면 된다.
이 마음층에서 다양한 왜곡과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왜곡된 마음의 작용은 생명의 에너지 소모가 크고, 생명작용에도 장애가 된다.
심지어 해치게 된다.
이론적으로 이런 마음층은 애초에 없다는 것이 불교 이론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공통 정서에 기반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활동한다.
마음과 그 작용이 있는 것 같은게 아니라 있다고 확신한다.
왜? 이 기분째지고 내가 최고고 잘풀리고 답답하고 화나고 억울하고 두렵고
이렇게 이름되어지는 작용이 있으니까.
이것은 자기라는 자체내에서 또 그 행동에 영향을 받는 다른 이에게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작용들이 행위로 나타날 때, 행인데
이것 또한 자연계의 법칙에 따라 작용 반작용이 있다.
이것을 인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인지되고 작용을 멈추고 싶을 때 - 다른 표현으로 마음을 쉬고 싶을 때
작용하지 않을 조건은 마음이라는 회로가 없거나 작용이 통제될 때이다.
처음은 어렵다. 당연하다.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방향을 돌리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냥 멈춰버리는 사람은 대단히 신기한 능력을 지녔거나,
그런 작용들에 별 충격,상처,기대 등이 없이 살아왔거나이다.
가난한 자의 질곡한 삶......대단히 문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얼마나 위험하고 피폐하고 고단한지 살이를 통해서 잘 알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부자가 되려하고 또 된다. 그것만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결과를 보자, 그런 사람이 정말로 되고 싶은가? 되니까 정말 그렇게 좋은가?
그것만으로 되었는가? 그것을 유지하기에 고단하지 않은가?
해서 괴물같은 체계를 만들어 세상을 공략하고 인프라를 깔아 점유한다.
그래도 그 체제는 그냥은 유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누구나가 그런 것을 꿈꾸고 지맘대로 세상을 해보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지맘대로 했을 때의 결과가 2012년 한국사회에서 보여주는 단상이다.
지맘대로에서 지맘이 그런 것이다. 지맘의 결과가 그런 것이다.
한국의 국민들은 그것을 선택했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떠나서
그냥 선택했다. 이런 결과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좋단다.
작용과 반작용을 제대로 보고, 긍정,부정,부대적인 작용도 다 봐야하는데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일어났을 때, 그 작용 전체를 보지 않는다.
드러났어도 그런 선택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많이 취해 버렸거나 돌이킬 방법이 없다고 보고, 이 상황에서 더 나아지길 바란다.
또 해결할 뭔가가 나올거야...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
없는 것을 바라는 것 같다.
뭐 그렇다. 그래서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작용하고 세상이란 것들이 이어져 있고 이어져 간다.
'난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어..'라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지혜가 필요하다.
죽~ 이야기 해왔던 마음이라는 회로를 걷어 내는 일.
불교의 수행법은 이것을 위한 것들이 많다.
가장 효과적인 것이 관법(위빠사나)이다.
작용이 나타남을 알아차리고 사라질 때까지 본다.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곧 사라지는데,
계속해서 나타나 벗어나고 싶을 때,
왜 그런 생각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을까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본다.
곧 피곤해지므로 힘이 필요한데...
알아차림을 좀 오래 해야한다.
처음은 힘들지만 곧 묘한 힘을 느끼게 된다.
선정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런 수양행위들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것이므로 불필요한 생각이나 결론을 갖지 마시길...
우선은 수양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그것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씩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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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불민소견이다.
불필요한 습관을 바루기 버겁다.
뭐 하는 만큼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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