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6일 일요일

모든 말은 형용사다

그것이 바램을 표현하던, 상황.현상을 설명하던 형용사다.

왜냐하면,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구지 실체라고 한다면 - 생각하는 작용이다.
그것의 소리와 문자의 시각적 표현이다.
말을 소리로 들으면 그 소리의 결을 느낄 수 있다.

실시간 동기화가 아니다.
실시간의 작용은 계속되는데, 말은 형용을 한다.
동기화될 수 없다.

그렇지 않은 말이 있다.
상황.현상에 동기화되는 말이다.

배고파, 밥먹자...,
좋아. 싫어.
여러가지 아~

형용이 늘어나는 생활이 되다보니... 힘들어져서
직통하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비동기속에서 동기화 해보려는 ...
생각은 생각으로, 살이는 살이로.

그것이 네트워크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뭐든 저장하고 기록하는 것으로 축약해볼 수 있는데,

그것의 유통이 너무나 실시간(필요)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정보의 영역을 네트워크화 한다.

이시대에는 그것이 통신의 발전으로 네트워크간 네트워크인 인터네트워크로
현대문명이 있는 전세계로 접속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시간이 조금 흐르자 문명생활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시대가 도래하였다.

맘껏 찾고 즐길수 있다.

정보는 어느 단말에서도 접속이 가능한 시대...
간격의 벽이 사라지고 잇는 것이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에 충실하자.

2012년 8월 22일 수요일

반야심경 쉬운 해설

2020년 여름 기존 글을  날리고 다시 적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파라밀다심경

摩訶 般若波羅蜜多( Prajñā-pāramitā) 心(hrdaya) 經(sutra:모음,엮음)

으뜸 지혜로의 심장(핵심)의 경 

(으뜸의,핵심,정수,완전한)

* 波羅蜜多 pāramitā paramita parameter
parameter 특정 기능이 실행되기 위해 필요한 인자. 
매개 변수(媒介變數) f(x) = y 에서 x.
f라는 동작은 x가 들어왔을 때 y가 된다.

관자재보살(Avalokiteshvara-bodisattva)이
정수의 지혜를 깊이 할 때
5온(색,수,상,행,식)이 모두 비어있음을 비추어 보아
모든 괴로움과 멍에를 넘어섰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깨달은 관자재보살이 무루의 반야를 완성하려고...

관觀 Satipatthana Vipassana 오온을 대상으로 관찰

오온 = 사념처(몸, 느낌, 마음, 법:속성,특성)

색 - 육체,물질 - 느낌을 일으키는 모든 것.
수 - 느낌
상 - 지각,생각
행 - 작용,반응
식 - 인지,인식 - 수.상.행을 거친 종합한 인식

참고로 불교는
무상(無常, anicca)하고(제행무상)
고(苦, dukkha)이며(일체개고)
무아(無我, anatta)라는(제법무아) 
기반으로 전개한다.

度一切苦厄 - 완전한 해탈에 이르렀다.

오온5溫 대상과 나의 일어나는 작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즉 물질현상이 나에게 느낌,지각,반응,인식의 인식을 일으키는 작용을 말한다.
12연기 참조. 이 오온이 각자가 세계라고 보는 곳이다. 
이 오온5溫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한다.

사리자(Sariputra)여
색이 빔과 다르지 않고
빔이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빔이고 빔이 색이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色이 空과 다르지 않고 空이 色과 다르지 않고, 色이 空이고 空이 色이다.
色(~色聲香味觸法).受.想.行.識에 대해 모두 空과 不異하고 卽하다.

빔(空):자성(自性)이 없다. 독자성이 없다. (이렇게 표현들 하지만 더 어려워졌다, 병이다.)

거울에 모양이 비춰지지만 거울에 비친 모양이 실상은 아니다.
色(~色.受.想.行.識) 느끼고 짓지만 실은 空과 다르지 않다.
色이다 空이다 하지만 실은 작용일 뿐 色.空이 따로 일 수 없다.

* 이 부분이 입문인데 가장 어렵다. 
감각 六根,六境,六識,六塵  *기관 통해 *대상을 *인식하여 *일렁이는 작용은 空하다.
뭐가 나타나고 인지 되면 바로 다양한 감정 변화로 치닫지만
하나 하나 비춰 보면서 살피면 더 정확한 인지 방식이고
실제 
작용의 흐름일 뿐(보는 작용, 듣는 작용...),
다르게 작용하거나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물 - 갈증 나면 마시고, 더러우면 씻고, 익힐 때는 끓이고 찌고,
무거운 건 띄우고, 눈.얼음이면 놀이로 음식으로 식힘으로...

물 자체가 생각한 성질이 가지고 것이 아니고
조건에 따라 작용했을 때 드러남이 달라 진다.

조건에 따라 입장에 따라 깨끗하다 더럽다 그 판단이 갈린다.

물은 물이라는 생각도 없다.
色聲香味觸法인연(조건)에 따른 작용이 있을 뿐
相을 내지만 相의 실체라 할 것이 없다.

같은 행위도 조건에 따라 즐거움도 되었다가 괴로움도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것에 반했을 때, 수 십 번을 반복해서 같은 행위를 하지만 물리면 행위 자체가 고통이 된다.
몰입도 높은 드라마를 즐길 수도 있지만 그런 드라마를 보는 행위 자체가 고통일 수도 있다.
중독성 습관이라는 것들이 그렇다. 술, 담배, 
식성, 성욕, 물욕, 추구, 경향성 있는 생각..뭐든...
처음에야 느낌이 놀랍고 새롭고 하지만, 익숙해지고, 습관으로 하다 보면
무뎌져서 그저 습관이 돼서 하고 있지, 끌려 다니고 그 반응을 받는 고통이다.
빠져있다 보면 고통인 줄 모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의 空이고 色.受.想.行.識 모두 空과 다르지 않으니까. 즉 空이니까.
(色.空을 같이 보고 있는 것에 주의하라)
이렇기 때문에 空하다 하지만 空性이라고도 한다.
(공空sunya  공성空性 sunyata 에 대한 의미부여는 생략...)

그래서 부처와 중생마저도 하나의 다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반야심경은 이 공空자 하나를 다시 의미부여하여 관통자로 쓰려 한다.
공통 공空 만능 공空이다. 단순히 없다 비었다 의 뜻이 이렇게 무겁게 되었다.
공은, 공관은 그저 도구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사리자여

모든 법이 이와 같이 비어있는 모양(작용)이어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러므로
비어있음에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고
색,소리,냄새,맛,느낌,성질도 없고
눈의 세계도 없고
내지 의식의 세계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고 밝지 않음이 다함도 없고
내지 늙어 죽음도 없고 늙어 죽음이 다함도 없다.
고.집.멸.도 도 없고 앎도 없고 얻음 역시 없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乃至 ~로부터 ~까지
色聲香味觸法 으로 근根 경境 식識으로 界라 하니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 18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 12연기

얻음이 없으므로
보리살타는 정수의 지혜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를 가짐도 없어서
뒤집힌 꿈의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는
지혜의 정수에 의지하므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

三世諸佛 依 般若波羅密多故 得阿褥多羅三藐三菩提


그러므로 알아라.
정수의 지혜는
이처럼 커다란 신의 주문이며
이처럼 밝은 주문이며
이처럼 가장 높은 주문이며
이처럼 견줄 수 없는 주문이라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그래서 정수의 지혜의 주문을 말한다.
주문을 설하니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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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는 접고
나의 경우는 이러하다.

처음에 몇십번을 읽어도
마하반야파라밀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제아제 바라아제
이상한 한자들이 있어서 답답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상태를 모른다' - 였다.

여차 저차 살아오다가 어느 때에


노자 1,2장 

道可道,非常道 - 도를 도라 할 수 있지만 늘 이르는 도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 - 이름을 이름할 수 있지만 늘 이르는 이름이 아니다.
常 - 늘, 항상, 일상, cf.常識

노자는 첫 구절부터 직입한다. 된통 맞아서 어리둥절하다. 당연하다.
우리가 감각에서 사유로 흐르는 작용은 본능이라 착각할 만큼 빠르게 전개된다.
실상(實相)을 빠르게 상징화해서 전달한다고 언어라는 매개를 쓰지만
실상은 배제되거나 건성이거나 혼란으로 덮어두고 꽥꽥거리면서 소란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생각이 시끄러운 것이다.

실상이 언어를 매개로 표출되어 실상을 전달에 실패하면 이미 언어가 아니고 대부분 이렇다.
이것을 노자는 첫부분부터 훅~!! 이것을 헤집은 것이다.

無名天地之始 - 없음은 천지의 시작을 이름함이고
有名萬物之母 - 있음은 만물의 어미를 이름함이다.

형이상,형이하 유,무를 언어로 이렇게 정의-전제하는 것은 탁월하다.
無는 道에 有는 名에 실상-언어로 대응시켜 보아도 간명함이 쩐다.

故 - 그러므로, 그러하니

常無欲以觀其妙 - 늘 무욕으로 그 묘함을 관하고
常有欲以觀其徼 - 늘 유욕으로 그 돌아감을 관한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 이 둘은 같이 나와 다른 이름이며 같이 이르기를 심오하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 심오하고 또 심오하니 온갖 묘함의 문이다.

玄-가물다,아득하다,심오하다.

실상, 인간생활의 가르는 것 欲
인간이란 동물의 몸이 생존해가는 체계가 보내는 신호가 욕(欲)이다.
생존의 체계가 정연하고 충족되면 욕(欲)은 잠잠하다.
대부분은 소란스러움은 습성,트라우마적 반응이 판을 치는 것이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아름다움이 이미 추함을 가르고
모두 좋다고 여기는 좋다는 것이 이미 좋지 않음을 가른다.

이런 이유로
있고 없음은 서로 내고, 어렵고 쉬움은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내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대며
소리냄와 들림은 서로 화하고, 앞뒤는 서로 따른다.

*일체가 相으로 구분되어짐을 정말 명쾌하게 드러냈다.

相-서로 상


이와 같이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물고
말 아닌 것으로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을 짓지만 이렇다 저렇다 않고
내지만 갖지(有) 않고
이루지만 머물지 않는다.
무릇 오로지 머물지 않음으로서 떠나지 않는다.

道,名,有,無로 먼저 직입하고 相으로 識을 드러내고
실상이 이러므로 聖人(노자의 이상적인 인간형)은 이러하다고 말한다.


노자의 도에 대한 말도 이 1,2장이 명쾌해지지 않으면
뒤로는 관념으로 흐르거나 혼란만 더하기 십상이다.

...

천부경의 일시무시일 ... 일종무종일


선禪 - 부모로부터 나기 전 본래면목, 한물건도 없다.


등으로 연결되면서 풀렸다.

---



말이라는 도구는 실상을 전달하기에 역부적이다.
실상이 있을 때, 말도 도구노릇을 한다.
실상은 그냥 있다.

이 상태는 생각이라는 작용이 일어나기 전을 말하고 있다.
한가지를 짚으면 이미 만가지로 저절로 구별되어 버린다.

일상생활이란 것이 만가지의 끝자락에 있다.

돌이켜서 아무것도 없는 텅빔과 모든 작용들 그리고 보는 이것.
이건 뭔가? 아직 경계...
보는 이것은 보이는 것은.... 다시 일상... 작용들...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심경의 비추어보는 상태가 이 상태인 것.

(중간에 .... 많은 것들은 생략....)

'내려놓음'이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었나 싶다.


빔과 빔을 보는 것이 동시이고 직접적이다.
겹쳐지는 세상 일상...

차츰 (구별이) 있고 없음에 상관이 없이 그 상태가 되었다.
물론 망각할 때도 있다.


특히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표현이 절정이다.
석가모니가 무서워서 집을 나가고....무서운 꿈을 벗어나 열반


이후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
그대로지만 그대로가 아닌...본래로 돌아가는지도...


계속해서 관점이 사라지거나 정리되어 간다.
몸에 대한... 마음에 대한... 초보적이라도 다행이다.


몽상을 지나치게 하시는 분들이 매우 거칠게 나올 때는 난감할 뿐.
그래도 그 순간에 나에게 일어나는 작용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편한 상태에서 사유?같은 걸 해보고 원인도 찾고 풀어내야
벗어나게 되고  그 거친 것에 대한 작용이 순탄해져 간다.

'나는 머무르지도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이 거센 흐름을 건넜다'하고 한
석가모니의 담담한 일러줌이 따뜻하게 위로한다.

자비라는 것도 길가는 자의 스스로를 위한 덕이라는 생각도 든다.


2012년 8월 18일 토요일

마침내 이유가 없다.

그냥 그렇다.

끄달린다는 표현이 있다.
피곤하고 힘드니까 이유를 알고싶고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래 이렇게 저렇게 이유와 근거를 인과로 파고 들다가
아... 이유가 없다.

여기서 더 힘들다. 이유가 없는데 왜 이런 행위들이 일어날까?
모든 존재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아직까지 설명한 이가 극히 적다.
설명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맞는 설명인지 알 길도 없다.

석가모니부처도
무시이래로 무명 겹치고 쌓여서 노이즈가 많아졌고
이러저런 인과의 작용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설명할 정도다.

그래서 다만 노이즈와 노이즈의 근거를 제거해가려고 한 것 같다.

거기에 이르르면 더이상의 말이 없다.

그것을 좋다 나쁘다 그런 말이 없다.
다만 지금의 나약하고 혼란스런운 건 없어지고
아니 모든 것은 없어지고 ... 열반한다.

음..... 그리고 지금은 선승으로 살다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증인으로 있다.

음..... 그리고 그 법으로 평온에 이르렀다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겠지.

부처,성인,군자 이런 것은 살아있는 말이 아니다.
부처,성인,군자가 된 이들만이 할 수 있다.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行-작용과 반작용

물리용어에 작용 반작용, 상대성이론 이란 말이 있다.
물리는 유교의 格物과 유사한 개념이다.
物理는 자연계를 인과작용의 규칙에 중점을 둔 말이고,
格物은 그 자연계 규칙에 대한 인간의 입장 중점을 둔 말이다.

그래서 格物-사물이 존재방식에 대한 인간의 이해입장과
그에 따른 행동방식까지 영역하는 경우도 흔하다.

격이란 인간의 말로는 형국position,입장stands으로 기술할 수 있다.
형국은 객관적시각을 입장은 형국에서 어떤 구분객체의 시각을 의미한다.

유교가 정치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 오랜동안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격물은 감각인지(사고의 영역 포함)작용에 한정이 있다.

물리는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는데
추론 가설 증명 등 - 다양한 사고수단과 관측장비를 만들고 활용한다.
영역이 훨씬 넓고 인간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는다.

이런 인간행위의 소산 중에

작용과 반작용, 상대성 이론 이란 용어는 세대를 대표한다.

이것은 불교용어와 매우 유사하다.
인과因果cause-and-effect .... 작용반작용.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 - selflessness) - 상대성이론 theory of relativity

종교의 근본은 현대물리와 매우 닮아 있다.
기복행위 등 인간의 입장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좀 지나치게 자아ego에 집착하여
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엉뚱한 욕구행위로 전개되고
그것이 정상적인 작용을 방해하니
정상적인 성인(聖人)들의 말의 빌미가 된다.

종교는 인간태도를 규제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물의 이치와 관계없이 인간의 욕구로 연역되어 버리는 습성인
후차적 마음작용에 집중한다.

이것은 삶의작용에서 대한 체험에 대한 기억의 반사작용
즉 마음의 회로같은 것이다.
그 지나친 작용(때론 왜곡된 작용)을 흐르는 증폭회로를 제거하는데
집중한다는 말이다.

선가귀감에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마음의 일이란 마음으로 해결한다는 의미다.

모든 선문답은 과장된 회로를 제거하거나 제거되었는지에 점검행위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것을 보다,비추어 보다 라고 한다.
이런 작용들을 깨우침 깨침 깨달음이라 하여
깨어남... 즉 착각,오해,꿈같은 작용에서 깸이다.

내용이 없으면 안되니...관점을 변화시키는 한가지를 소개하자면.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사실 선문답이란게 의문이 쓸데없음을 깨우친다고도 볼 수 있으나
그 과정을 통해서 관점이 변한다는게 효과라 할 수 있다.
자기라는 존재로 인식되는 모든 자원을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말로 설명하면 아주 간단하다.

부모전에는 나我가 없었다.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부차적 회로들을 제거하는 아주 간명한 말이다.
그래서 선禪을 '간단히 보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머리로만 깨치든 마음으로 깨치든 어떤 작용이 있게 되는데
입장,태도가 변화하는 것이 결과다.
그에 따라 돈오돈수,돈오점수,점오돈수,점오점수 등의 분류가 있게 된다.

기실 그결과는 어떤 고정적 태도나 입장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를 고집苦集을 멸滅하는 길道라고도 말한다.


허무주의(관념적 공空주의)나
무간지옥(세상 모든 것이 잘못이다는 혼돈 괴로움이 끊없는 상태)의 부작용이나
놀라운 생각의 변화나 어떤 특이작용이 있을 수도 있거나
놀라운 생명현상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것은 부차적이라 그에 대한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이 중요하다한다.


---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행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위의 변화의 과정이 지나면, 왜곡된 불필요한 시비분별이 없어진다.
불필요한 논쟁보다는 필요한 행위을 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바르다 바르지 않다는 기준은 그래서
어떤 상相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모든 관념,교육되어진 것,체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일차적으로 사라지고 다시 보이게 된다.

어떤 행위의 인과-작용반작용을 잘보게 되는 효과도 있다.
인간사회에서의 논쟁의 원인도 잘 보게 되고 자기역할을 거저하게 된다.
소위 잘되고 좋은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원망이나 욕망에 대한 시비가 사라지고 충실하게 된다는 말이다.
뭐 애초에 일이라는 것이 있었나? 그것들 다 추상개념 아닌가?
모든 개념은 도구 아닌가?

그래서 다시 行이란
이 생생한 생명현상을 그대로 보고 그대로 작용한다.
인간의 노이즈가 많은 부차적회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보고(直視,直觀) 바로 작용한다.
긴 흐름과 순간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生生之 謂 易이라 했을지도.
---
원리적인 이야기는 이만하면 되었고,

작용반작용이라는 말을 걸었으니,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작용이 있으면 동시에 그에 대응하는 작용이 있다.는
간단한 내용이고
하나의 인생살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인간이라는 생명작용 위에
마음이라는 회로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뱃속부터 시작될 것이다.

생명체는 먹고,활동하고,쉬는 과장이 반복된다.
어머니 뱃속에 있으니 그 뱃속환경에 그대로 영향을 받음은 당연할 것이다.
어머니는 뱃속 아기의 환경이지만, 어머니도 외부환경과 내부조건이 있다.
어머니가 살아가는 사회
사회가 있는 자연계...

아기가 나오고 아기는 생명체로 돌봄을 받게 된다.
뱃속환경이 사라지고 직접작용으로 된다.

먹고 싸기만 하다가, 뒤집고, 기고, 걷고,
이런 와중에 말을 배우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작용반작용이다.

보고 비교하고 차이와 같음을 분류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행동에도 반영한다.

이 과정은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이런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정서(지능)이 발전한다.
이때 충격이 주어지고 그것에 적응한다.

생명활동에 필요한 기초작용 기반한
의식작용이 대응,기억,연역,추론,재정립 등의 사고활동으로 축적된다.
그래서 다음 작용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준다.

공감이란 것은 공진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슷한 회로가 있다는 것으로 비교될 수 있다.

그래서 그 조건들이 계속 변화하면서
생명작용 위에 마음.의식이라는 것도 작용과 반작용이 이어진다.

나와 남, 이것 저것, 슬프고, 기쁘고, 좋고 안좋고, 화나고
등등의 회로들이 생겨난다.

그것을 마음 마음작용이고 이야기들 한다.

생명작용위에 있으므로 그에 따라 다시 생명작용에 영향을 준다.
생명작용은 숨쉬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쉬고, 배설하고
감각기능이 작용하고 등등이다.

그 위에 마음작용이 있다. 필터역할을 한다.
층이 하나 더 있다라고 보면 된다.

이 마음층에서 다양한 왜곡과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왜곡된 마음의 작용은 생명의 에너지 소모가 크고, 생명작용에도 장애가 된다.
심지어 해치게 된다.

이론적으로 이런 마음층은 애초에 없다는 것이 불교 이론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공통 정서에 기반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활동한다.
마음과 그 작용이 있는 것 같은게 아니라 있다고 확신한다.

왜? 이 기분째지고 내가 최고고 잘풀리고 답답하고 화나고 억울하고 두렵고
이렇게 이름되어지는 작용이 있으니까.

이것은 자기라는 자체내에서 또 그 행동에 영향을 받는 다른 이에게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작용들이 행위로 나타날 때, 행인데
이것 또한 자연계의 법칙에 따라 작용 반작용이 있다.
이것을 인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인지되고 작용을 멈추고 싶을 때 - 다른 표현으로 마음을 쉬고 싶을 때
작용하지 않을 조건은 마음이라는 회로가 없거나 작용이 통제될 때이다.

처음은 어렵다. 당연하다.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방향을 돌리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냥 멈춰버리는 사람은 대단히 신기한 능력을 지녔거나,
그런 작용들에 별 충격,상처,기대 등이 없이 살아왔거나이다.

가난한 자의 질곡한 삶......대단히 문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얼마나 위험하고 피폐하고 고단한지 살이를 통해서 잘 알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부자가 되려하고 또 된다. 그것만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결과를 보자, 그런 사람이 정말로 되고 싶은가? 되니까 정말 그렇게 좋은가?
그것만으로 되었는가? 그것을 유지하기에 고단하지 않은가?

해서 괴물같은 체계를 만들어 세상을 공략하고 인프라를 깔아 점유한다.
그래도 그 체제는 그냥은 유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누구나가 그런 것을 꿈꾸고 지맘대로 세상을 해보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지맘대로 했을 때의 결과가 2012년 한국사회에서 보여주는 단상이다.

지맘대로에서 지맘이 그런 것이다. 지맘의 결과가 그런 것이다.

한국의 국민들은 그것을 선택했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떠나서
그냥 선택했다. 이런 결과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좋단다.

작용과 반작용을 제대로 보고, 긍정,부정,부대적인 작용도 다 봐야하는데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일어났을 때, 그 작용 전체를 보지 않는다.
드러났어도 그런 선택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많이 취해 버렸거나 돌이킬 방법이 없다고 보고, 이 상황에서 더 나아지길 바란다.
또 해결할 뭔가가 나올거야...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
없는 것을 바라는 것 같다.

뭐 그렇다. 그래서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작용하고 세상이란 것들이 이어져 있고 이어져 간다.



'난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어..'라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지혜가 필요하다.


죽~ 이야기 해왔던 마음이라는 회로를 걷어 내는 일.
불교의 수행법은 이것을 위한 것들이 많다.

가장 효과적인 것이 관법(위빠사나)이다.
작용이 나타남을 알아차리고 사라질 때까지 본다.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곧 사라지는데,
계속해서 나타나 벗어나고 싶을 때,
왜 그런 생각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을까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본다.
곧 피곤해지므로 힘이 필요한데...
알아차림을 좀 오래 해야한다.
처음은 힘들지만 곧 묘한 힘을 느끼게 된다.

선정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런 수양행위들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것이므로 불필요한 생각이나 결론을 갖지 마시길...
우선은 수양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그것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씩 달라진다.

--
이상 불민소견이다.
불필요한 습관을 바루기 버겁다.
뭐 하는 만큼 되는 거니까.












2012년 8월 2일 목요일

자연은 sync 인간은 async

tathata, tathagata, 如如, 있는 그대로의 것 - 자연의 세계다.
인간은 여기에 기억,추론,연역,잠재의식까지 많은 세계를 만들었다.

소위 성현들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의 것에 돌아가자는 이야기다.
불교에서는 중생衆生이라는 용어로
모든 사물(=실은 하나의 생명체가 바라보는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본재 자연은 주체 객체가 없으며, 모든 것은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서술로 또다른 관념세계를 만드는 것은
달을 보라하니 손가락끝을 보는 것과 같이
언어(=생각)의 자락에서 헤메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성현들은 말한다-있는 그대로의 너로 작용하라고.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어떤 똘똘하다는 사람도 이것을 직설하지 못한다.
수많은 관념계,무의식계를 벗어나는 일들이 그렇게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런 사람이라도
말듣는 상대가 가진 관념계,무의식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결과적으로 말을 하지 않게 된다.

tathata, tathagata, 如如, 있는 그대로
이것이 시작점이다.

이것이 실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