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7일 화요일

조선 왕들의 무덤:릉 - 몇이나 명당일까

 https://namu.wiki/w/%EC%A1%B0%EC%84%A0%EC%99%95%EB%A6%89

표 참조, 나름 판단했으니 묻거나 따지지 말 것.

태조 - 건원릉 非
정종 - 후릉 非(왼王),明(오른后)
태종 - 헌릉 非
세종 - 영릉 明
문종 - 현릉 非
단종 - 장릉 非
세조 - 광릉 非
예종 - 창릉 明
성종 - 선릉 明
중종 - 정릉 明
인종 - 효릉 明
명종 - 강릉 明
선조 - 목릉 非
인조 - 장릉 非
효종 - 영릉 明
현종 - 숭릉 非
숙종 - 명릉 非
경종 - 의릉 非
영조 - 원릉 非
정조 - 건릉 非
순조 - 인릉 非
헌종 - 경릉 非
철종 - 예릉 非
고종 - 홍릉 非 凶
순종 - 유릉 非

전반기는 피튀기는 쟁투 ... 세종하나
중기에는 5왕이 연달아 있다가 효종하나
후말기는 아예 없다.

조선의 왕들과 지관地官으로 나섰던 이들의 산물.

고려는 신臣 관官 족族 가家 다양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노예도 있었을 테지만 조선만큼은 아니었겠지.

조선은 그야말로 태생이 계급인 신분제 노예사회.
그것을 만든 신臣들의 세상.

이기理氣를 떠들었지만 관념이 아닌 실상에는 지기地氣빨 배팅했던 무덤만이 즐비하다.
윗것들이 그러하니 아랫사람들은 혹시나 해서였을까.

헤아리지 못할 무수한 이야기들
무엇이나 나타나면 사라짐 또한 올 터인데
실상을 안다는 건 씁쓸한 일이지

2024년 12월 26일 목요일

반야심경般若心經 관觀 일체개고一切皆苦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심경心經은 관觀 - 색 공 공 색 ... 무 무 무 ... 세밀한 설명.

불교는 출리出離 떠남의 해탈법이다.

관觀 일체개고一切皆苦(색,수,상,행.식)이어서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얻을 것이 없음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어 공포가 없다.

아 ...! 그런,그럴 것이 아니었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뒤집어진 꿈,생각을 멀리 떠나

구경열반究竟涅槃 경계가 다하는 열반이다. 또는 마침내 열반의 경계다.


말은 실상을 떠나면 그저 허상일 뿐이다.


2024년 11월 7일 목요일

잠잘 때 적정 온도

잠잘 때 적정온도

보일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이런 걸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싶다.

쾌적한 생활 기온은 18~24도라고 들어 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럼 잠잘 때 어떨까?
체온은 36도 시원하고 쾌적한데 숨이 느려지고 체온이 조금 떨어지겠지
피가 순환하면서 울냉열이 풀려가면서 잠에 들게 될 것이다.

잠자는 동안 체온 유지는 이불이 한다.

한번 수면은 보통 90분 주기라고 하고
3~4번의 주기가 있고 그 사이에 뒤척인다고 한다.

밤에 잠을 잔다. 
새벽에는 기온이 떨어진다.

이것과 물려서
사람 몸은 3번째 수면에 들어간다.
이 때 한 번 30분 정도 깊은 숙면에 들고
이 숙면이 몸의 재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숙면 이후 몸은 다시 순환과 고르기를 할 것이다.
꿈꾸는 시간이라고도...

꿈도 아마 체온과 관계있을 것이다.
선명한 꿈은 깊은 숙면이 잘 안됐다는 뜻일지도...
수행으로 길들여진 경우 꿈은 잘 꾸지 않는다고...

이때 기온이 높으면 꿈을 꾸기 쉽고
기온이 낮으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깨어난다.

여름에 시원하길 원하고
겨울이면 몸이 따듯해야 한다는 말은 
적정온도와 차이가 심해지면 기온으로 인해
숙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찬 날씨에 잠잘 때는
쾌적온도보다 약간 높은 온도에서 시작해
몸이 데워지면 쾌적 온도에
또 새벽에는 너무 떨어지지 않을 정도를 유지해 주어야 한다.

쉽게 말해 쾌적 기온 시
냉기 없이 잠잘 때를 기준으로 맞추는 게
가장 좋다는 말이다.

보일러에 그런 기능이 없다는 건
어쩌면 일정한 온도로 해도
빼앗기는 난방열로 적정히 맞춰진다...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러면 단열이다.
단열은 보온이 잘 되기 때문에
자기 전에 계절에 따라 쾌적온도에 맞춰지면
잠자는 동안 이후는 그 주기를 따라 갈테니...

최고의 단열의 기본은 
베란다 식 2중구조이지. 안그런가?

2024년 11월 6일 수요일

중국中國 지사地師(풍수風水?)를 가늠할 수 있는 - 정릉(定陵)

베이징시 창핑구 북경시 북쪽 50km에 있다고 한다.
정릉(定陵)은 만력제와 효단현황후, 효정태후 능이라고 한다.
명나라 시대 능이 많아 명13릉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대강 지도로 살피니 정릉(定陵)이 진혈眞穴에 있고 다른 능들은 대개 사혈似穴이다.
명나라 지사地師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사地師와 풍수風水는 확연히 구별된다.
땅에서 지기地氣 천기天氣가 조화되는 지점과 그 지점의 향向을 찾는 일을 한다.
이 두가지로 출입은 어느 지점으로 한다.까지 지정해 주는 것이 지사地師가 하는 일이다.
즉 혈穴 향向 문門을 지정한다. 이 말은 건물의 배치까지를 포함한다는 뜻이다.
지기地氣와 向향 를 알기 때문에 건물 배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 사師가 붙어 지사地師라 한다.

풍수風水는 물이 어떻고 바람이 어떻고 하는
주로 액운厄運을 피하고 부富,복福을 추구한다.

풍수風水가 땅이... 명당이... 혈이 어짜고 저짜고 하는 건 범주 밖이다.
그래서 주로 물,도로를 보고 집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 출입구를 어디로 내라 이런 일을 한다.
실내에 역음양오행방위를 연결하여 길흉에 대한 이론으로 무엇을 어디에 두어라/두지마라 한다.
그래서 실내 가구.물건 배치 등의 충고,권고를 위주로 한다.
다 복福이라는 부富, 권權, 귀貴 추앙,추구하며 오로지 이것이 기준이다.
장풍득수(藏風得水)란 말도 출처도 근거도 없었다.
그냥 어느 풍수가가 썼는지 출처도 근거도 어원도 모를 말이 그냥 명사가 되었다.
그저 예로부터 전해지는 지사들 중에 바람과 물로 이치를 설명하려 했던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바람과 물 중요하지, 특히 살아 있는 자에게는 더더욱...
그런데 바람과 물은 균형 조화 즉 없어서는 안되지만 넘쳐도 안되는 흐르는 것이다.
너무 빨라도 안되고 너무 느려도 안된다. 그런데 이게 보이는 것만 말하는 것일까?
기氣차원이라 생각해보지는 못했을까?
예를 들면, 가라앉음(물) 들뜸(바람) 파고 듬, 찌름, 퍼짐, 흩어짐 이런 식으로...

사유思惟해 보면 이건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직결되고 양택陽宅에 한정된다.
죽은 자의 무덤은 물이 차지 않는 땅에 봉분을 두껍게 하면 그만이다.
풍수는 잘 쳐줘도 양택陽宅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지사地師에게 음택陰宅이 아닌 넓은 터를 찾는 양택陽宅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또 일반인이라도 조금 감각이 예민하면 양택陽宅은 잘 찾아 집을 짓는다.

땅에 기氣가 뭉치면 혈穴이라고 일반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눈이 열린 지사地師가 말했던 혈穴은 진혈眞穴 명혈明穴이라 부르게 된다.

종합 정리된 책 지리오결은 용.혈.사.수.향 5분야인 듯 한데,
지사地師는 말로 밝혀줄 수 있지만, 패철 들고 다니는 자는 설명 못한다.
나침판, 나반, 패철  남북을 가리키는 데 썼던 이 물건은 지사地師와는 관계없는 물건이다.
대개 눈 먼 지사地師와 풍수사?들이 혈穴이라고 하는 걸 보면 사혈似穴이라 부르고 싶다.
혈穴과 같은데 혈이 아니란 뜻이다. 沙,似,寫,詐

이자들이 진혈眞穴 명혈明穴을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장님 문고리 잡기나 소 뒷걸음이다.
아니라면 계속 진혈眞穴 명혈明穴을 잡고 사혈似穴을 잡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 하던데 이게 사실이라면
사혈似穴의 기氣는 부富, 권權, 귀貴를 탐하고 추앙,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주위를 속이고 겁주고 짓누르고 짓밟고 갈구고 삥 뜯고 피를 빨고 기름 짜고 뼈를 곤다.
그렇게 부자, 권력자가 되어 그 짓을 끝없이 한다.
그 이유를 지사地師는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심오한 인과의 계界라서 
지사地師는 삼가고 삼가지만 풍수사는 되는 대로 짓는다.
결과 지금은 세상이 아주 어둡다.

지기地氣는 지질과 관계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현대에 지사地師 노릇하는 자 중에 형기(,형세,형물),이기류는
혈을 특정할 때 오류가 빈번하거나 잡지 못하고
엘로드류의 도구를 쓰는 기감을 이용하는 자들은 일관성은 있는데 큰 함정이 있다.
이런 기감 도구들은 잡는 사람 신체에너지에 반응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지사地師가 감지하는 곳과 지사地師아닌 자가 감지하는 곳은 다르다.
기맥을 추적할 때도 혈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 에너지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대별적으로 간단하게 양陽은 양에 음陰은 음에 반응한다.
크게보면 이렇지만 사람의 에너지가 다 달라서 반응이 제각각이고 
아주 미묘하게 갈리는 경우도 많아서 뭐가 맞는 건지 알 수도 없고
또 대부분 사람들이 음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지사地師 공부는 수도修道와 같다.
먼저 스스로 공부가 되어야 한다.
공부 된 이에게 지사地師급의 일은 반응에 대해 정립될 때까지 수련만 하면 된다.
공부 안된 이들은 그 길이 맞는 줄 알고 참 부지런히 가더라. 말도 많고.....
도법자연道法自然 했으니 자연自然의 이치와 땅의 이치를 깨달아야 지사地師 일을 할 수 있다.
깨달았어도 삼가고 삼갈 뿐이다.

분에 넘는 쓸데없는 말이 많아진다.............




2024년 9월 28일 토요일

명곡 - 연안부두 1979

아주 가끔, 불현듯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작사가 작곡가야 그런 느낌의 정서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에게도 그런 뉴앙스가 전달되어 불렀겠지만

풍경

지금은 사라져 기억조차 못하는 
좋은 날 그냥 찍힌 사진 속 눈물겨운 풍경.
이유 모르게 왈칵

가사는 시 같고 곡조는 설렘 아련함으로
편곡,연주,노래는 그 결 따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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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부두 

조운파 작사
안치행 작곡
김트리오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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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

바람이 불면 파도가 울고
배 떠나면 나도 운단다

안개 속에 가물가물
정든 사람 손을 흔드네

저무는 연안부두 외로운 불빛
홀로선 이 마음을 달래주는데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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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6일 화요일

공空을 깨치다. 空이란 글자를 깨치다.

불교 용어로서 공空 그 말로 밝힌 것이 더 어렵다.
난 직관을 좋아하고 말은 그림자이자 상징매체라 생각한다.

말로 뭘 해보려는 건 사족이고 사기다.

공空이란 한자의 뜻을 몰라서 그렇게 헤맸던 것.

그런데 누구도 지금부터 밝히는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간단하였다. 

공空은 비었다는 뜻인데 먼저 오는 글자가 구멍 혈穴이다.
구멍 혈穴은 어떤 면이나 입체에 뚫려 빈 곳이 나 있는 것에 초점이 있다.
그런데 공空은 그것의 빔에 촛점이 있다.
여기서 모양은 제외하고 빈 것이면 허虛가 되었을 것.
공空은 모양이 있는데 속이 비어 있다.
그래서 허虛가 아닌 공空이란 글자를 대치해 쓴 것이다.

껍데기 모양은 다 갖추고 있어 그런데 속이 비었어.
그래서 빌 공이 된 거.

심경의 없다는 무無는 허虛로 써도 되고 허무虛無로 써도 되지만
허무虛無란 파생의 뜻이 있고
또 불교가 허망虛亡이란 말을 애용하고 
그쪽으로 흐르지 않게 하려고 무無만 썼다.

그러니 무無무無하는 건 공空의 빔, 허虛를 말하고 있다.

색.수.상.행.식 하지만
인지,인식이 그러할 뿐 그 속 실상은 비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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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심경의 무無를 오역이라 보고 아니다非,不,否로 풀이하면 
일반인의 개념을 부정하거나 충돌하지도 않고
동시의 다른 관점으로 원만하게 해석된다.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10년이 아니고 12년이었나?

10년이 아니고 12년이었나?

내 소리를 들어줘...가 아닌 것이 음악이란 걸 오래 전에 알았지만서도,
왜 그렇게 알았는지를 몰랐다.

무위자연 구족원만

근래에 새로운 관점이 열리면서 인식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있다.
다를 것 하나 없는데 또 다른 세계라...

왜 타를 또는 스스로를 괴롭히나? 화두가 풀린 것이기도 하고.
집착이란 것의 구체적인 행태가 새로이 보이기는 것 즉 뒤집힌 것이다.

바라는 것이 없어야 집착이 없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집착이 있는 것이다.

무원의 원, 그저 가는 것 뿐.

스스로도 말하고 있었다.

깨달으면 좋은 줄 알고...
눈이 열려 보이면 그게 뭐 좋은 건 줄 알고...
알면 좋을 줄 알고...
좋은 게 좋은 줄 알고
(이건 늘 뒤집혀 착각하는 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거지.)

스스로도 주문처럼 외쳤던

무위자연이란 거. 무위를 모르니 자연을 모르지

구족이 안되어 있으니
자꾸 갈애를 일으키고
갈애를 일으키니 쏠리고
쏠리니 기울고
기우니 흐트러지는 것

그러니 원만할 리가 있나.

2012년 이었으니 지금은 2024년 10년이 아니고 12년이었나?

뜸들이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