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억압적 상태가 아닌 것을 말한다.
어떤 형태든 전개되려고 할 때 장애 현상이 없는 것.
그런데 그것은 고사하고 자유라는 단어를 들먹이는 이유는
억압이라는 기제의 체험이 쌓여서 반발기제가 발현 되었다는 표현이고
그것은 물리적으로 흐름의 장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12연기를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감흥을 이야기하는 소요유나
바른 이해를 유도하는 제물론은 부차적인 것이다.
개개의 생명현상에 대한 입지는
그 작용에 있거나 그 체험이 있지 않은 한 논할 개제는 아니다.
다만 개체의 체험적 입장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覺)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후는 복잡함(중복과 부차적 현상)의 원인이다는 것을 명쾌하게 아는 것이다.
아쉬움의 모든 느낌은 놓쳤기 때문이다.
모양 짓는 것은 겸하지(내려 놓지) 못하다.
道 = 中.正.空.虛.無
中.正.空.虛.無도 부차적인 것이다.
심지어 道라 이름하는 것 조차도 부차적인 것이다.
그래서 道可道 非常道라고 말로 드러낸 것이다.
깨달음은
12연기로 쌓인 회로(관성)가 道를 인지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 현상이 그 쌓인 회로에 엄청난 변화를 준다.
(그래서 그 많은 설레발의 표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 온 삶 만큼이나 다양하다(깨짐이든 깨침이든 깨달음이든...)
하여, 다른 이의 체험을 언어를 매체로 들을 때 담담하라는 이유다.
보름 전과 보름 후가 어떻게 다른가? "나날이 좋은 날이지..."한다.
일체를 벗어난다 나의 마음이...
이것은 어느 스승의 시적인 표현이다.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는가?
석가모니 부처는(상윳따니까야 1장)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흐름을 건넜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다.
깨달음(깨짐이든 깨침이든)이 중요하거나 말거나
뭐 어쩌자는 것이 아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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