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6일 수요일

anyframe 매뉴얼 위치

http://www.anyframejava.org/project/anyframe/reference

왜 쓸데없는 것을 만드는가........

MyBatis에서 ResultSet 처리부분 가로채기(플러그인) - 참조

출처:
http://beyondj2ee.pbworks.com/w/page/53607818/MyBatis%EC%97%90%EC%84%9C%20ResultSet%20%EC%B2%98%EB%A6%AC%EB%B6%80%EB%B6%84%20%EA%B0%80%EB%A1%9C%EC%B1%84%EA%B8%B0(%ED%94%8C%EB%9F%AC%EA%B7%B8%EC%9D%B8

package org.syzone.demo.plugins;

import org.apache.ibatis.executor.resultset.ResultSetHandler;
import org.apache.ibatis.plugin.*;

import java.sql.CallableStatement;
import java.sql.ResultSet;
import java.sql.ResultSetMetaData;
import java.sql.Statement;
import java.util.*;

/**
 *
 *
 * @author ZengJun
 * @version $$Revision$$
 */
@Intercepts({@Signature(type = ResultSetHandler.class, method = "handleResultSets", args = {Statement.class})})
public class DemoPlugin implements Interceptor {
    @Override
    public Object intercept(Invocation invocation) throws Throwable {
        List actual = new ArrayList();
        Object[] args = invocation.getArgs();
        Statement statement = (Statement) args[0];
        ResultSet rs = statement.getResultSet();
        while (rs == null) {
            if (statement.getMoreResults()) {
                rs = statement.getResultSet();
            } else {
                if (statement.getUpdateCount() == -1) {
                    break;
                }
            }
        }
        if (rs != null) {
            ResultSetMetaData rsmd = rs.getMetaData();
            int columnCount = rsmd.getColumnCount();
            Object[] metaData = new Object[columnCount];
            for (int i = 1; i <= columnCount; i++) {
                Map columnMeta = new LinkedHashMap();
                String columnName = rsmd.getColumnName(i);
                String columnLabel = rsmd.getColumnLabel(i);
                String columnType = rsmd.getColumnTypeName(i);
                columnMeta.put("columnName", columnName);
                columnMeta.put("columnLabel", columnLabel);
                columnMeta.put("columnType", columnType);
                metaData[i-1] = columnMeta;
            }
            actual.add(metaData);
        }
        Object results = invocation.proceed();
        actual.add(results);
        return actual;
    }

    @Override
    public Object plugin(Object target) {
        return Plugin.wrap(target, this);
    }

    @Override
    public void setProperties(Properties properties) {
        //To change body of implemented methods use File | Settings | File Templates.
    }
}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삼성 PCIe SSD 당연한 귀결.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3061802011132758002&naver=stand

OCZ가 먼저 내놓긴 했지만,
작은 사이즈의 pcie형 ssd는 꼭 필요했다.

이유는 한가지다. SATA-III 이후에 어떠한 이야기도 없기 때문이다.
이미 디스크 개념을 떠나 반도체형 저장장치로 이동한 상태라
다양한 인터페이스로 전개될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PCIe 외에 딱히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2013년 6월 3일 월요일

유식 30송 : 선정과 유식

출처:
http://www.daehansunbul.org/bbs/board.php?bo_table=sub520&wr_id=17
http://www.daehansunbul.org/bbs/board.php?bo_table=sub520&wr_id=18

唯 識 三 十 頌 

世親 菩薩造 
玄藏 三藏譯  

稽首唯識性 滿分淸淨者 我今釋彼說 利樂諸有情 

 1.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次能變唯三 
 2.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3.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4. 是无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5. 次第二能變 是識名末羅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6. 四煩惱常俱 爲我痴我見 幷我慢我愛 及餘觸等俱 
 7.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有無 
 8. 次第三能變 次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9.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定 皆三受相應 
10.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11. 善謂信慙愧 無貪第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12. 煩惱謂貪瞋 痴慢疑惡見 隨煩惱謂忿 恨覆惱嫉慳  
13. 誑諂與害憍 无慙及無愧 掉擧與惛沈 不信幷懈怠 
14. 訪日及失念 散亂不正知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15.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或俱或不俱 如濤波依水 
16.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17.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18.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19.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20.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无所有 
21.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22.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23.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无性 
24. 初卽相無性 次无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25. 次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26. 乃至未起識 久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27.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28. 弱視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29. 無得不思議 時出世間智 捨二芻重故 便證得轉依 
30.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已依聖敎及定理  分別唯識性相義 
  所獲功德施群生  願共速證無上覺 

唯識의 槪要 

일(事)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이치(理)에는 法則이 있어서 天下의 事가 循環되고 萬法이 同時에 存在한다. 

일(事)의 本末과 理致의 法則을 깨달아 아는 것을 부처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核心思想이 유식(唯識) 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은 일의 본말 곧 생멸의 이치를 밝힌 것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이치의 법칙 곧 만법의 주체를 밝힌 思想이라 하겠다. 따라서 唯識을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바로 아는 일이 되고 부처님의 思想을 이해하고 부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요문(要門)이라 하겠다. 

唯識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하신 부처님 思想을 토대로 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을 설명하고 정신과 물질의 불가 분리한 관계를 규명해 낸 학설이다.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우선 심(心) 의(意) 식(識)으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심(心)은 아뢰야식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이라 하며, 식(識)은 의식 또는 육식(六識)이라 한다. 

모든 법은 이 마음(唯識)에 의해 존재한다. 인간의 심성을 깨닫게 해준 唯識은 불교의 핵심思想으로서 반야思想과 함께 불교思想의 지주가 되어 왔다. 반야(般若)思想은 공(空)으로써 만법의 실상을 밝히고 유식(唯識)은 진공묘유(眞空妙有)로써 만법의 주제(主帝)를 밝힌다. 

얼핏 보면 이 두 思想이 상반된 듯 보이지만 깊이 살펴보면 서로 저촉되지 않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절대적인 진리임을 알게 된다. 이 唯識學은 부처님의 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인도에서 정리되고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1. 인도 唯識學의 성립 

唯識은 부처님의 思想을 발췌하여 정리한 思想으로서 이를 唯識學으로 성립시킨 학자는 무착 보살이다. 

무착 보살은 당시에 유통되었던 『해심밀경』, 『십지경』, 『아비달마경』, 『능가경』등의 대승경전을 접하고 이들 경전에서 일체는 유심조(一切唯心造)이며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는 이치를 깨닫고 『섭대승론』, 『헌양성교론』, 『아비달마경』 등을 저술하여 唯識學을 체계화하였다. 

무착 보살의 친동생 세친 보살 역시 대승불교에 귀의하여 『대승백법명문론』, 『십지경론』, 『唯識三十論』, 『섭대승론석』 등을 저술하여 형인 무착 보살과 함께 唯識學을 집대성하였다. 세친의 저술 가운데 가장 주목 받는 것은 『唯識三十論』이라 하겠다. 『唯識三十論』은 광범위한 唯識思想을 30게송으로 축소하여 정리한 것으로서 唯識學의 핵심이 된다 할 것이다. 

이 명제를 널리 보급하여 일반인들도 쉽게 唯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서를 저술한 주석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그 중 뛰어난 10명의 학자를 십대 논사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2. 中國의 唯識學 傳來 

중국에는 唯識學이 인도로부터 3차에 걸쳐 도입되었다. 그러나 전래된 唯識學이 종파간의 심체설(心體說)이 달라 후대의 학자들에게 많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제일 뒤에 전래된 법상종의 唯識思想이 널리 보급되어 중국불교사의 영향을 끼쳤다. 

법상종의 교학은 현장법사(600년~664년)가 인도로부터 귀국할 때 『유가사지론』, 『해심밀경』, 『섭대승론』, 『唯識三十論釋』을 들여옴으로써 전파되었다. 특히『唯識三十論』을 중국어로『成唯識論』이라는 책으로 번역함으로써 법상종의 唯識論이 신속하게 성장한 계기가 되었다. 

3. 韓國의 唯識學 傳來 

신라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중국에 가서 섭론종의 교학을 공부하고 온 것이 처음이다. 그 후 원측법사(圓測法師)가 중국에 유학하여 지론종과 섭론종과 법상종의 唯識思想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발전시켰다. 원측법사는 종파를 초월하여 대승교리와 소승교리를 함께 연구하였다. 중국의 법상종이 호법논사(護法論師)의 唯識學만을 최상의 진리라고 고집한 것과는 달리 원측법사는 안혜논사(安慧論師)의 唯識學을 비롯하여 모든 학설을 종합적으로 수용하였으며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신라의 唯識學은 원효대사(元曉大師)께서도 많이 연구한 흔적이 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현장법사의 학문을 흠모하였고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唯識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교리체계를 세움으로써 신라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효대사의 각종 저술에서도 『유가사지론』, 『成唯識論』, 『섭대승론』의 唯識思想에 의거하여 해설한 것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의상대사 역시 화엄학자로서 저술할 때마다 唯識思想을 인용하였다. 이 학풍은 고려시대까지 전해져 불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신라의 唯識學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唯識學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4. 唯識思想 

唯識이란 말은 마음이란 뜻으로 정신과 물질 등 안팎의 모든 것들이 마음(心識)에 의해서 창조되고 심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 思想이다. 唯識思想은 자칫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 소승불교의 부족한 교리를 보충하고 용수(龍樹)의 空思想을 보완하여 空思想이 후세에 공허한 思想으로 잘못 치우쳐 가는 것을 바로 잡아주는 佛敎의 核心思想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의 본성은 진실한 것(眞如性)이나 나에 대한 집착과 나 밖의 모든 것에 대해 집착함으로써 번뇌를 일으키게 된다. 인간은 항상 지혜 광명을 나타내고 있는 열반성(涅槃性)과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상(假相)의 환(幻)을 좇아 집착하고 탐함으로써 불성(佛性)을 상실하고 만다. 

唯識思想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게 하고 무한한 공능(功能)과 절대의 진여성(眞如性)으로서 태양과 같이 모든 것을 다 비추어 관찰할 수 있는 지혜가 본래부터 보존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또한 唯識은 중생계의 주체로서 유형무형의 모든 것과 상통하고 윤회와 변화를 주재하면서도 선악의 상태를 떠난 절대 불변의 성품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 思想이다. 

5. 현대 심리학의 의식구조 

현대 학문의 의식(마음) 구조는 프로이드(Freud)의 학설을 기본으로 한다. 

唯識思想의 발달 

굽타왕조시대에 형성된 유가행파(瑜伽行派)는 <해심밀경(解心密經)>이나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摩經)>의 思想을 이어받아 조직된 학파이다. 이들은 요가의 실천을 통해서 唯識의 체험을 심화하고, 용수에 의해 체계화된 空思想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을 전개했다. 유가행파는 중관파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이 유가행파의 시조는 미륵(彌勒, Maitreya)이며, 그 후 무착(無着, Asa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이 唯識說을 體系化시켰다. 唯識派의 개조인 미륵 논사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무착이 미륵보살을 만나 유가행(瑜伽行)의 깊은 뜻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전설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중국과 티벳에도 전해졌으며 무착이 미륵보살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논(論)이 중국과 티벳에 각각 5부가 있다. 이 양자의 전승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를 종합하면 일곱 가지가 된다. 

미륵의 저작으로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변중변론송(變中邊論頌)>, <금강반야경론송(金剛般若經論頌)>, <현관장엄론송(現觀莊嚴論頌)>, <법법성분별론송(法法性分別論頌)>, <구경일승보성론(究境一乘寶性論)>이 있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은 유가행파의 기본서로서 본지분(本地分), 섭결택분(攝決擇分), 섭석분(攝釋分), 섭이문분(攝異門分), 섭사분(攝事分)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본지분(本地分)에서는 요가 행자가 수행해야 할 17개의 명상단계를 성명하고 있고, 섭결택분(攝決擇分)에서는 아뢰야식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유가사지론>을 제외한 나머지 저서는 모두 간결한 시구로써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구경일승보성론(究境一乘寶性論)>은 티벳에서는 시구의 부분이 미륵의 교설이며, 산문 주석은 무착의 저작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전체가 견혜(堅慧)의 저작이라고 한다. <구경일승보성론>의 저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륵의 뒤를 이어 唯識思想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무착과 세친이다. 무착은 북인도 간다라 지방의 푸루샤푸라 출신으로 처음에는 소승불교로 출가했다가 나중에 대승불교로 전향하여 미륵의 가르침을 받고 이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무착의 저서로는 <섭대승론(攝大乘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현양성교론송(顯揚聖敎論)>, <순중론(順中論)>, <육문교수습정론송(六門敎授習定論)>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섭대승론(攝大乘論)>으로, 여기서는 대승불교의 특성을 10항목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 10항 
목의 배열은 현실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소지의분(所知依分)에서는 이전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켜 아뢰야식에 대해 논하고 있고, 소지상분(所知相分)에서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삼성설(三性說)을 논하고 있다. 

세친은 대략 4~5세기 인물로 추정되는데, 무착의 동생으로 처음에는 소승교단에 출가하여 <구사론>을 저술하였지만 형인 무착의 영향을 받아 대승으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세친은 미륵과 무착의 대부분 저서들에 주석을 썼으며, 여러 대승경전의 해설서도 썼다. 유식설에 관련된 저작으로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삼자성게(三自性偈)>,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등이 있다. 세친의 주요 저작은 <唯識三十頌>과 <唯識二十論>이다.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은 <유가사지론>, <해심밀경>, <대승장엄경론>, <변중변론> 등을 바탕으로 해서 唯識說의 요점을 30개의 시구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후 唯識 思想가들은 <唯識三十頌>에 대한 주석서를 써서 그들의 思想을 전개해 나갔다. 대표적인 주석으로는 안혜(安慧)의 주석과 호법(護法)의 주석인 <成唯識論>이 있다. <唯識三十頌>은 30개의 시구로 이루어진 것으로, 세친은 여기서 식(識)의 전변(轉變)이라는 관념을 도입하여 아뢰야식, 말나식(末那識), 전육식(前六識) 등 8식에 의해 현상 세계가 식의 현현(顯現)임을 설하고 있다.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은 약 20개의 시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서 세친은 소승불교를 비롯한 일반의 思想을 비판하여 ‘오직 식(識)뿐이며 외경(外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무착과 세친에 의해 대성된 유가행파는 하나의 학파로 계속 발전해갔다. 이후 연구는 주로 기본적인 경론에 대한 주석 작업으로 이어졌다. 현장은 세친의 <唯識三十頌>을 주석한 사람으로 십대(十大) 논사를 거론하고 있다. 이들은 호법(護法), 덕혜(德慧), 안혜(安慧), 친승, 난타(難陀), 정월(淨月), 화변(火變), 승우, 승자, 지월(智月)이다. 이 가운데 안혜와 호법의 주석만이 남아있다. 다른 주석들은 호법의 주석 가운데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세친 이후 유가행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진나(陳那)를 들 수 있다. 진나는 480 ~ 540년경의 인물로 주된 저작은 인명(因明 : 논리학)에 관한 것으로 <집량론(集量論)>이 있으며, 唯識에 관계된 것으로는 <관소연론(觀所緣論)>, <취인가설론(取因假說論)> 등이 있다. 논리학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에 공통된 학문으로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파를 니야야학파라고 한다. 니야야는 자기의 주장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승인하게 하기 위한 변론이다. 불교에서는 논리학을 인명(因明)이라고 하는데, 인(因)에 관한 명(明)이라는 뜻이다. 이전의 논리학에서는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인 인식근거(量)에 현량(現量 : 직접 지각), 비량(比量 : 추론), 비유량(比喩量 : 유추), 성언량(聖言量 : 성인의 말)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진나는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근거는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진나는 추론식을 종전의 오분작법(五分作法)에서 삼지작법(三支作法)으로 개량하였다. 오분작법(五分作法)은 종(宗 : 주장), 인(因 : 이유), 유(喩 : 실례), 합(合 : 적용), 결(結 : 귀결)로 구성되어 있다. 삼지작법(三支作法)은 종(宗), 인(因), 유(喩)로 구성된 것으로 유(喩)에는 동유(同喩)와 이유(異喩)가 있다. 

진나 이후 인도의 모든 학파에서는 논리학이 중시되었으며,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 이를 사용하였다. 진나의 논리학은 법칭(法稱)에게로 이어져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8세기 이후 중관파 논서에서는 진나와 법칭 계통의 유식설을 有相唯識이라고 하여, 이를 무착 이래의 전통적인 학설인 無相唯識과 구별하고 있다. 有相唯識은 마음 안의 대상의 형상과 이를 지향하는 인식작용의 대응성, 즉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대응성에서 인식이 성립한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지각의 내용으로 파악되는 사물의 형상에 사유가 이와 합치하는 판단을 내릴 때 정확한 인식이 성립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무상유식(無相唯識)은 대상의 형상을 표상함과 이를 지향함, 즉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작용 자체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분별은 미혹한 것이며 진리는 직관에 의해 획득된다고 보았다. 대체로 유상유식(有相唯識)은 식(識)의 실유(實有)를 강조함에 대해 무상유식(無相唯識)은 식(識)의 무(無)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唯識三十頌 

제1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아(我)와 법(法)이 가설인 이치로 말미암아 가지가지 현상계가 변하는 것이다. 그 가지가지 현상계는 식(識)에 의해서 변하고 이 변화의 주체〔能變〕는 오직 삼식〔唯三〕이 있을 뿐이다. 

唯識의 근본思想은 일체 만법이 오직 식(識)의 변화일 뿐이라는데 있다. 마음을 벗어나서는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체만법이란 일체 모든 법이니 자기와 자기를 둘러 싼 모든 존재, 물리적 현상이든 정식적 현상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의식주나 산천초목이나 삼천대천세계라 칭하는 우주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알지 못하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리 열반(涅槃)이라든가 하는 진리의 존재까지도 모두 만법에 포함되는데 이 모든 법이 전부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 

현상계가 수없이 가지가지 양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我)와 법이 갖가지로 변화하는 형상 때문이다. 그리고 아(我)와 법이 수없이 변화하는 것은 심(心), 의(意), 식(識) 삼식 때문이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상황들은 심, 의, 식 삼식으로 지은 결과로서 드러나는 현상들인 것이다. 

일체 상(相)을 변화하게 하는 고정된 아(我)와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我)와 법이 존재하고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의식 때문에 변화되는 것이다. 아(我)와 법이 가설로써 인식되어야 할 뿐인 것을 진실이라 믿고 의식한 것에 계탁(計度)하고 취사하고 분별하여 갖가지 현상계의 상(相)들을 만드는 것이다. 

아(我)와 법이 가설인 것을 이해하려면 부처님 법이 가설인 것을 알아야 된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팔만대장경을 가설이라고 한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진리를 말씀하신 것인데 원래 진리란 불언불설(不言不說)인 것을 말씀으로 하셨기 때문에 가설이라고 한 것이다. 

세상에 말과 문자로 형상화된 모든 것은 진(眞)이 아니고 모두가 가(假)이다. 예를 들어 하늘이 나를 보고 하늘이라 명(名)해라 해서 하늘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 쓰는 것이고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쓰므로 나라마다 언어와 문자가 다르며 한 나라에서도 지방마다 계층마다 쓰는 언어도 다르고 언어도 세월가면 변한다. 이것이 가설이다. 

사람 사는데 필요하여 만들어진 크고 작은 갖가지 법이 아무리 잘 만들어 졌다고 해도 수시로 변하므로 임시로 만들어진 가설일 수밖에 없다. 모든 학문이 다 가설이고 가장 오차가 적다고 하는 수학도 가정설(假定說)이다. 실상(實相)에 꼭 맞게 정확한 표현이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세상에 설정된 모든 것이 가설인 것이다. 我와 法도 가설이므로 가아(假我)요 가법(假法)이다. 아(我)는 모든 존재를 인식하는 주체이고 法은 나로부터 인식되어지는 모든 존재이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아(我)이나 상대 입장에서는 내가 상대의 법(法)인 것이다. 

육조스님께서 여래가 말씀하신 아(我)는 자성이 청정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아(我)라고 하셨다. 범부의 탐·진·치 무명과 허망하고 실답지 않은 아(我)와는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범부의 아(我)는 의식으로 인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만드니 가아(假我)일 수밖에 없다. 

분별심이 있고 능소심(能所心: 상대적인 생각)이 있고 생멸(生滅)이 있으므로 범부의 아는 윤회 속에서 쉼 없이 가지가지 형태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법(法)이라는 것을 불교에서는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존재하는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敎說)을 말하고 
셋째로는 진리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내 가까이 있어도 법(法)을 보지 못하면 나를 못 본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때의 법(法)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진리인 것이다. 

금강경의 17분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는 구경에는 아(我)가 없어야 되는 도리를 밝히셨다. 범부의 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원래 무아법(無我法)이다. 아(我)와 법이 실로 없는데 내가 있고, 고정된 법이 있다고 의식으로 깊게 집착하므로 우리는 人生을 잘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에는 8가지가 있는데 이를 심, 의, 식으로 삼분(三分)하였다. 심은 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니 안식에서 말라식까지 7식을 생기게 하는 근본식이고 모든 존재를 생기게 하는 종자를 거두어들이는 마음이다. 

의는 7식이며 말라식이니 마음의 심층에서 활동하는 자아의식이다. 말라식은 8식에서 생겼는데 오히려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자아라고 집착한다. 식은 의식이니 안, 이, 비, 설, 신의 5관을 거느리고 5식과 더불어 작용하여 언어를 가지고 사고하고 분별한다. 

이 1송에서는 나를 주재하고 우주만법을 주재하는 것은 오직 3식(三識)뿐이라고 극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제2송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第一頌에서 唯三이라 말한 三識은 이숙, 사량 그리고 요별경식이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며 이숙이며 일체종식이다. 

이숙(異熟)은 제8식이고 사량(思量)은 7식이고 요별경식(了別境識)은 6식이다. 이숙(異熟)은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인데 선악의 인(因)에 의해 받는 과보가 다르게 나타나므로 이숙식(異熟識)이라 한다. 

사량은 제7식 말라식인데 항상 쉬지 않고 사량하고 계산하고 비교하며 아(我)에 대한 집착이 깊이 박혀있어 끊어짐이 없어 꿈에도 드러난다. 이 사량식은 8식에 의지하고 6식이 경계를 분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요별경식은 제6식을 말하는데 안, 이, 비, 설, 신의 5관이 작용할 때 각각의 경계를 분별하므로 분별의식이다.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경계에 대해 수시로 바뀌는 의식이다. 2송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아뢰야식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선 '아뢰야식이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사람에게는 설하지 않는다'하셨다. 

아뢰야식은 분별심이 없고 사량하지 않으며 我에 집착하지 않으나 그 작용은 항상 끊이지 않아 몸을 바꾸어 다른 生死를 받을 때까지 간단없이 이어간다. 

아뢰야식은 생명을 마칠 때까지 남아 있다가 生命이 끊어질 때 최후까지 남고 다시 몸을 바꾸어 환생할 때에 제일 먼저 와서 그 중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을 이숙식이라한 것은 인(因)이 과(果)로 변하여 나타나므로 이숙이라 하고 원인이 발생한 것은 과거인데 그 결과인 과보가 현재라는 시간에 성숙되어 나타나므로 이숙이라고 한다. 선이나 악을 지었는데 과보는 부귀나 빈천 등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원인과 성질을 달리하여 과보가 원인에 보답한다. 그러나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이숙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변이이숙(變異而熟)이니 지은 인(因)이 다른 果로 익어 나타난다. 남을 원망한 因으로 병약한 몸으로 과보를 받는 등 다른 모습으로 과보가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는 이류이숙(異類而熟)이니 다른 류로 바뀔 수 있는 과보이다. 축생이나 미물로도 과보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이시이숙(異時而熟)이니 금생의 인(因)이 일·이생(二生) 또는 백년生을 지나서도 과(果)로 이숙될 수 있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변이이숙이 되든 이류이숙이 되든 이시이숙이 되든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미래의 자기 존재방식에 대해서도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아뢰야식이 종자식인 것은 곡식의 종자처럼 선악의 인(因)이 종자로써 함장되어 있어 그로부터 모든 생사가 벌어지므로 일체의 종자식인 것이다. 

안식에서 말라식까지의 7가지 식은 구체적으로 활동하므로 현행식이라 하는데 이 현행식이 활동하면서 즉각 그 결과를 아뢰야식 속에 이식한다. 이 이식작용을 '熏習'이라고 부르고 심어진 결과를 식물의 종자에 비유하여 '종자'라 부른다. 

이때에 현행식이 因이 되고 종자가 과(果)이다. 그런데 이식된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서 성숙하여 다시 현행식을 생하게 하는 이식의 과정을 거친다. 이 경우 종자가 因이 되고 현행식이 果가 된다. 이와 같이 현행식과 아뢰야식이 상호 因이 되기도 하고 과(果)가 되기도 하면서 모든 존재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 종자식 때문에 모든 운명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은 識 진의 宗性이므로 성품을 지녔다고 진여식이라고도 하고 여래의 종자를 지녔다고 하여 여래장식이라고 하며 오관, 육식, 칠식, 선악 등 모든 심식(心識)의 주처라고 하여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일심으로 기도하거나 수행하면 8식에 들어갈 수 있다. 8식으로 사는 이가 보살이며 8식을 꺼내 쓰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불교이다 


제3송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아뢰야식은 불가지 집수요, 불가지 처요, 불가지 요이다. 5가지 변행심소인 촉·작의·수·상·사로 작용하며 5수인 고(苦)·락(樂)·우(憂)·희(喜)·사(捨) 중에서 오직 불고불락이고 불우불희인 사수(捨受)로만 상응한다. 

아뢰야식은 무궁무진한 작용을 한다. 그 행상이 미묘해서 범부가 능히 알 수가 없으므로 불가지(不可知)이다. 집수(執受)란 수용하여 지니는 것인데 그 수용능력이 도무지 짐작으로는 알 수가 없다. 

6식의 작용이 아무리 잘못되게 인식한 것이라도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한 7식의 그릇된 인식들도 모두 그대로 수용한다. 6식과 7식이 어떤 일을 하든 그 인(因)에 개입하거나 선택하거나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입력이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듯 단지 수용하여 집수할 뿐이다. 

6식과 7식은 자기와 동기가 상응하는 것만 수용하려하므로 능력에 한계가 있으나 아뢰야식은 수용능력에 한계가 없다. 거부 그 자체가 없는 것이다. 

세상(世上)에서 수용능력이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바다이다. 더러운 물 깨끗한 물 가리지 않고 큰 물 적은 물 가림 없이 모두 거두어 들여 종래에는 물고기가 살 수 있는 물인 바다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불법(佛法)을 바다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금강경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일체법이 다 불법(佛法)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세간이나 출세간 중 몇몇 법(法)만을 선택하여 불법(佛法)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 또한 무궁무진한 불법(佛法)의 수용능력이다. 

처(處)가 불가지한 것은 어느 때 어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 어떤 미물이든 개의치 않으며 지옥이든 천당이든 물속이든 불속이든 어디에나 처(處)할 수 있으므로 그 처하는 한계가 불가지인 것이다. 요(了)가 불가지인 것은 요별을 못하는 것이 없음이다. 

6식은 5관을 거느리고 요별하므로 눈을 가리면 못 보고 귀를 막으면 못 들으나 아뢰야식은 땅 끝까지의 것도 요별 못하는 것이 없고 형상이 없는 것도 분별없이 요별하니 요(了)가 불가지이다. 

마음의 작용을 심소라고 하는데 8식의 심소에는 촉·작의·수·상·사 5가지가 있어 이를 5변행심소라고 한다. 

8식이 이 5변행심소와 상응하는데 불고불락 불우불희인 사수(捨受)로만 상응한다. 상응이란 서로 응하는 것이니 여기에서는 중심마음인 8식과 갖가지 미세한 심소가 서로 작용하는 것이다. 

촉은 경계를 보면 바로 식(識)이 발생(發生)하는 것이다. 인식작용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근(根)〔감각기관〕과 경(境)〔인식대상〕과 식(識)〔인식하는 마음〕의 세 가지가 상호결합 되어야 하는데 이를 화합하게 하는 마음작용을 촉이라고 한다. 

6식이나 7식은 무엇을 보아도 자기 식(識) 대로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본 것을 분별하고 사량 하지만 8식은 선악과 구별 없이 그대로 본다. 

작의(作意)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점화장치가 엔진을 가동시키는 것처럼 마음을 처음 작동시키는 마음작용이다. 어떤 작의가 일어나느냐에 따라 인생(人生)이 크게 변하게 된다. 

8식은 언제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6식은 주의력이 없어 보고도 잊고 들어도 잊어 작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수(受)는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6식은 51개 심소가 작용하여 선악이나 고락을 왜곡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나 8식은 사수(捨受)와만 상응하므로 왜곡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상(想)은 면전(面前)경계가 무엇인가 아는 작용이다. 사물의 모습을 지각하고 분별하고 그 사물에 갖가지 이름을 붙여주어 개념을 존재하게 한다. 상(想)은 우리에게 집착이나 오류나 괴로움을 주는 원인이 되는데 8식은 밖의 경계를 그대로 추상한다. 

사(思)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할 때 그 일을 도모하는데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행위들을 하게끔 마음으로 야기하는 의지작용이다. 신(身)·구(口)·의(意) 3업이 사(思)에 의해 선악(善惡)으로 물드는 것이다.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할 때 그 대상인 좋은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구체적인 행위들을 마음 안에서 일으켜 궁리해 내는 것이다. 안의 경계를 관조하는 것도 사(思)이다. 

5수(受)는 마음의 심소와 작용할 때 동시에 고(苦)·락(樂)·우(憂)·희(喜)·사(捨)와 함께 상응하니 경계를 고(苦)로 수(受)하든가 락(樂)이나 우(憂)나 희(喜)로 수(受)하거나 불고불락인 사(捨)로 수(受)하는 것이다. 

6식과 7식은 고락으로 수(受)하며 상응하고 우희(憂喜)와 상응하여 취사선택하려고 늘 변계소집 하므로 번뇌가 떠나지 않으나 8식은 사수(捨受)로만 상응하므로 8식 자체에는 번뇌가 없다. 
  

제4송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아뢰야식은 무부무기이고 촉 등의 5변행심소 또한 무부무기다. 아뢰야식은 항상 전변함이 폭류와 같으니 아라한 위(位)에 이르러서야 버려진다. 

아뢰야식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무부무기이니 매우 독특한 작용이다. 무부(無覆)는 덮이지 않는다는 뜻이니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8식이 5변행심소와 상응하면서도 사수로만 상응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6식은 선심소가 있고 악심소도 있으며 고(苦)와 락(樂), 우(憂)와 희(喜)로 수(受)하므로 번뇌에 물들어 유부(有覆)이고, 7식도 아만·아치·아애·아견의 4번뇌가 있고 고(苦)·락(樂)·우(憂)·희(喜)로 수(受)하므로 유부(有覆)이다. 그러나 8식은 의(意)-7식-·식(識)-6식-이 지어 넣어준 선악을 집수(執受)만 할 뿐이지 물들지 않으므로 무부(無覆)라고 한다. 

무기(無記)는 비선비악(非善非惡)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닌 존재로 늘 존재하면서 선에도 물들지 않고 악에도 물들지 않는다. 

지금 생(生)이나 내생(來生)에 이익을 주는 마음이나 행위가 선(善)이고, 지금 생이나 내생의 손해를 주는 마음이나 행위가 악(惡)이라면, 지금 생이나 내생에 이익이나 손해에 관여하지 않는 마음이나 행동이 무기이다. 

그러니까 6식이나 7식이 지은 마음이나 행위가 지금 생이나 내생에 이익이나 손해를 주는 것이지 8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8식은 종자를 보장하는 외에는 능변하지 않는 것이다. 8식이 선악에 물들지 않으므로 의식(意識)이 지은 선악의 인(因)을 받아 선악을 성립시키는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선악의 종자가 그 자리에 훈습될 수 있는 것이다. 

8식이 선에 속하면 악을 거부할 것이고 악이라면 선을 거부할 것이며 집수에 선택이 있을 것이나 무기이므로 선택 없이 그대로 집수한다. 

의식(意識)이 어떤 선을 짓든 어떤 악을 짓든 전혀 관여하지 않고 지금 생이나 다음 생(生)에 어떤 이숙으로 어떤 존재양식이 되든 영향을 주지도 않고 관여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무기이다. 실상 8식 자리는 득(得)할 것이 없는 자리이므로 무부무기이고,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득(得)할 것이 없는 자리이다. 5변행심소와도 무부무기로 작용한다. 

촉과 상응하면서도 무부로 상응하고 무기로 상응한다. 작의·수·상·사와 상응할 때도 무부무기로 상응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태어날 때나 죽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잠들 때나 영원히 항상하는 단절 없는 마음이나 그 변화함의 빠르기가 폭포의 흐름과 같다. 

마음은 1 찰나에 900생멸 한다고 한다. 1초의 1600분의 1이 1찰라라고 한다. 지구가 도는 것을 느끼지 못하듯 마음이 생멸하는 그 빠르기는 감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의 움직임이 표면적으로는 움직이고 있지 않은 것 같으나 그 내용이 움직이는 속도가 마치 폭류와 같다는 말이다. 이렇듯 간단없이 이어지며 감지 못하게 빠른 마음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바로 참 나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량분별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을 쉬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아라한 위(位)에 올라야만 빠르게 움직이는 마음이 멈추니 이에 비로소 번뇌가 쉬어진다. 아라한은 성문4과의 최고경지이니 응공(應供), 살적(殺賊), 불생(不生),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응공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어 사람들한테 대접을 받을 자격을 갖춘 분이라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살적(殺賊)은 번뇌의 도적을 소멸시켰다는 뜻이다. 불생이나 무생은 영원히 생사윤회를 받지 않는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난 자리에 든 것이다. 

아라한 단계만 가도 8식의 폭류가 쉬는 것이다. 아라한 위(位)에 오르면 아뢰야식은 종자식, 함장식인 범부의 8식 자리가 아니라 불성자리에 드는 것이다. 아라한의 다음 단계가 보살위이고 그 다음 단계가 부처님 단계이다. 

수행위의 구경위에 가면 보리와 열반의 자리를 이루어 일체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경계가 된다. 그리하여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제5송 

次第二能辯 是識名末羅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다음 제2능변인 이 식은 말라식이라 하는데 저 8식을 의지하여 움직이고 8식을 반연하여 사량하는 것으로써 성품(性品)을 삼는다. 

능변(能辯)은 유식언어(唯識言語)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이 주체적으로 일으키는 작용이다. 누가 시켜서 일으키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으로 일으키는 마음이다. 즉 모든 분별을 하는 주체인 것이다. 

능변에 3가지가 있으니, 심(心)․의(意)․식(識)이다. 이 3가지가 각각 주체가 되어 1능변, 2능변, 3능변이 된다. 제 2능변은 7식이고, 말라식이다. 8식에서 생기고 8식을 의지한다. 6식을 부하처럼 거느리면서 6식을 조정한다. 

현대심리학에서도 불교의 唯識 구조처럼 의식을 의식․잠재의식․무의식 3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7식은 현대심리학의 중간의식인 잠재의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계적인 학문으로도 새삼 입증되고 있는 한 부분이라 하겠다. 

의피전연피(依彼轉緣彼), 즉 8식을 의지하여 움직이고 8식을 반연한다는 뜻으로 이는 7식의 의식체계를 나타낸 것이다. 8식에 의지하여[依彼] 움직이고, 밖의 경계를 받아들일 때도 8식을 반연하여[緣彼] 사량한다. 

8식을 의지하고 마음을 내는 데 사량으로써 마음을 내는 것이다. 사량하는 것으로써 7식의 성품을 삼고 성질을 삼고 특성을 삼으니, 7식의 마음작용은 사량인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사량을 일삼는 이 말라식 때문이다. 사량은 안의 경계와 밖의 경계를 살피고 계산하는 것이므로 사량을 잘하면 성공적이나 짐작으로 사량해 버리거나 잘못 사량하면 실수가 많다. 실로 사량만큼 불순한 것이 없다. 부딪치는 일마다 부정적으로 사량하는 것도 말라식의 사량 때문이고, 근심걱정이 지나친 것도 모두 사량 때문이다. 

가만히 있을 때도 이 생각 저 생각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가 있거나 책을 보고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 중에 사량이 튀어나오면 공상하기 시작하여 공부에 방해를 받게 되니 모두가 잘못된 사량 때문이다. 

사량이 많은 사람은 번뇌가 많다. 그러나 7식만 운영하고 살아도 군자가 되고 천재, 영재 소리를 들으며 성공적인 사람이 된다. 

7식은 예지능력이 있고 잠재능력이 있으며 사량하고 분별하여 계산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7식을 쓰지 못하고 사는 것은 7식이 심층 깊은 곳에 있고 6식의 51개나 되는 많은 심소(마음작용)에 가려서 드러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에게도 급하거나 간절하거나 일념이 되면 7식의 작용이 나온다. 참선, 염불 등의 수행으로 화두나 염불에 일념으로 집중하여 몰입하면 6식을 잠재울 수 있다.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물밑이 보이듯 6식이 가라앉아야 비로소 7식이 드러난다. 

말라식은 어릴 때부터의 모든 의식이 잠재되어있는 잠재의식이며, 6식이 이미 인식하여 주입시켜준 관념으로 하여 매사에 6식에 간섭하며 영향을 주고 거기에다 사량까지 보태어준다. 6식은 벌써 잊어버린 것들을 7식은 잊지 않고 모든 것을 기억으로 지니고 있으므로 잠잘 때도 꿈으로 드러난다. 꿈은 잠재의식의 발로이니 7식을 극복하려면 꿈을 극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말라식은 ‘망령된 마음’을 나(我)라고 인식하고 집착하는 자아집착심으로 자의식이라고도 한다. 

실상은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무아(無我)를 이루어야만 진여, 열반을 이루는데 참선이나 염불을 할 때 몰입하여 삼매에 들려고 해도 ‘아(我)’가 불쑥 일어나 장애를 준다. 

7식을 극복해야 8식이 드러나는데 7식의 극복은 참으로 어렵다. 말라식은 항심사량(恒審思量)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6식은 항상 활동하지 않으나 말라식은 심층에서 끊임없이 또 쉬임없이 잠재적으로 활동하며 꿈속에서도 활동한다. 그래서 항상(恒常)하는 특징이 있고, 또한 자아에 끈질기게 집착하므로 심찰(審察)하는 특징이 있다. 

말라식은 항심사량(恒審思量)으로 항상 깊이 심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 항심사량은 7식에만 있는 특징으로 6식이나 8식에는 없다. 


제6송 

四煩惱常俱 謂我痴我見 
幷我慢我愛 及餘觸等俱 

말라식은 4번뇌를 항상 갖추고 있으니 아치, 아견, 아만, 아애이며 그리고 이밖에 촉 등 5변행심소(촉·작의·수·상·사)등과 함께한다. 말라식의 심소에 4번뇌가 있고, 5변행심소가 있고, 8대수번뇌가 있고, 5별경심소 중의 하나인 혜(慧)가 있으니 모두 18개가 있다. 

말라식은 자아집착으로 사량분별하고 지니고 있는 18개의 심소(마음작용)를 고락(苦樂)으로 
상응하므로 번뇌가 꽉 차 있다. 산다는 것이 고(苦)라고 한 표현은 4번뇌, 8대수번뇌가 7식 깊은 곳에 있으므로 번뇌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고 번뇌는 고(苦)를 낳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는 7식이 아(我)에 집착하고 아(我)를 내세우므로 생긴 번뇌이니, 이를 4번뇌라 한다. 말라식은 사량을 단순하게 한 것이 아니라 4번뇌로써 사량하는 것이다. 

아치는 무명(無明)의 뜻이다. 치(痴)란 모든 사물의 이치에 어두운 것으로 아치는 특히 자신에게 어두운 것을 말한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사량을 못하여 온갖 장애를 만든다. 그러므로 아치는 번뇌일 수밖에 없다. 

아견(我見)은 아집(我執)이다. 육체나 자기의 오염된 마음을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이 아견이 뿌리 깊게 자기를 고집하므로 자기와 타인과의 차별된 세계를 만들어 존재하게 한다. 아견은 주관인 자기 견처가 너무 강하여 상대에게 객관성이 없는 주관을 너무 내세워 스스로 장애를 만든다. 그러므로 아견도 번뇌이다. 

아만(我慢)은 아집이 강하므로 교만하고, 오만하여 타인을 경시하는 마음이다. 그로 인하여 온갖 장애를 만들기 때문이니 아만 또한 번뇌이다. 

아애(我愛)는 아탐(我貪)이다. 마음에 드는 경계를 탐내는 마음이다. 탐욕이 고(苦)를 만들고 업(業)을 이루므로 아애는 참으로 끊기 어려운 번뇌 중 하나이다. 

아애는 탐내는 마음, 아견과 아만은 성내는 마음, 아치는 어리석은 마음이니 탐·진·치 3독이 모두 7식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라식에도 촉·작의·수·상·사의 5변행 심소가 있는데 고락(苦樂)으로 상응하고 사량분별로써 상응한다. 이 외에 말라식의 심소에 8대수번뇌(隨煩惱)와 5별경(五別境) 심소 중의 하나인 혜(慧)의 9개 심소가 더 있다. 

8대수번뇌엔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혼침(昏沈), 도거(悼擧), 실념(失念), 부정지(不正知), 산란(散亂)이 있다. 

불신은 믿지 않는 마음으로 번뇌 중 제일 나쁜 번뇌이며, 선(善)심소인 신(信)의 반대 심소이다. 이 마음이 깊으면 다른 심소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신앙심이 생기지 않게 하는 근본이니 바르게 사는데 큰 장애가 된다. 

해태는 선을 닦고 악을 끊는데 게으르고 태만한 마음으로 정진(精進)에 진력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된다. 

방일은 죄를 막고 선을 닦으려는 마음이 없이 제멋대로 방종한 마음이다. 

혼침은 선정을 닦을 때 확인하기 쉬운 마음으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상태이다. 이 마음이 일어나면 경쾌하고 안정된 마음인 경안(輕安)을 방해한다. 또한 지관(止觀) 중에서 관(觀)을 방해하고 선정(禪定)에 방해가 된다. 

도거는 혼침과 반대로 선정 중 마음이 조용하지 않고 늘 산란한 상태로 지관(止觀) 중에서 지(止)를 방해한다. 

실념은 과거에 익힌 것들을 기억하는 작용을 할 수 없는 마음이다. 선정을 닦을 때 계속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어서 장애가 된다. 

부정지는 사물을 잘못 이해하는 마음이다. 착각하여 잘못 아는 마음으로 신업(身業)이나 구업(口業)을 일으키게 한다. 

산란은 마음이 한 대상에 멈추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으로 산란심이 많으면 정(定)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된다. 

별경(別境)은 인연하는 대상이 선일 때도 있고 악일 때도 있어서 그 경계가 다르므로 별경이라 하는데, 5별경 중의 하나인 혜(慧)는 무엇이 올바르고 이익이 되는 것인지, 무엇이 잘못되고 불이익이 되는 것인지 판단하는 마음 작용이다. 

정(定)을 닦음으로써 얻어지는 지혜가 혜(慧)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第7頌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말라식(末那識)은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하며 생하는 곳에 따라 얽매인다. 아라한(阿羅漢)과 멸진정(滅盡定)에 든 자와 출세도(出世道)를 성취한 자에게서는 유부(有覆)가 없어진다. 말라식은 4번뇌(四煩惱)와 8대수번뇌(八大隨煩惱) 그리고 혜(慧)가 5변행심소와 더불어 작용한다. 항심사량(恒審思量)을 쉼 없이 하며 유부무기(有覆無記)로 상응한다. 

 아뢰야식인 8식이 6식과 7식의 인식작용에 대하여 무부부기(無覆無記)로 작용하는데 비하여 말라식은 6식은 물론 7식 자체의 심소가 하는 인식작용에 대하여서도 유부무기로 작용을 한다. 무부(無覆)이면서 무기(無記)인 것은 당연하게 이해되는데 유부이면서 무기인 것은 이율배반 같은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어 이해가 쉽지 않다. 

무부가 경계에 물들지 않고 동(動)하지 않으며 장애도 받지 않는 것에 반하여 유부(有覆)는 

경계에 물들고 동(動)하고 장애도 받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5변행심소로 작용하나 오로지 사수(捨受)로만 상응하므로 무부인데 말라식은 아치·아견·아애·아만의 4번뇌(四煩惱)와 8대수번뇌(八大隨煩惱)를 지니고 있어서 늘 경계에 물들고 동(動)하고 장애 받는 등 경계에 지배를 당하므로 유부(有覆)이다. 

자아애착심으로 자나 깨나 항심사량(恒審思量)하므로 유부이다. 그러므로 말라식은 심층 깊은 곳에 있고 유부로 오염되어 있으므로 번뇌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수행도 어렵다. 

무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비선비악(非善非惡)이므로 말라식은 선(善)도 택하지 않고 악(惡)도 택하지 않으며 6식이나 7식의 심소가 지은 인식들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잠재시켜준다. 

선성(善性)이나 악성(惡性)이 아니므로 미래의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않는다. 6식이 악심을 가져 나쁜 과보를 받든 말든 관여하지 않고 그대로 잠재시켜주고 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의 심소가 선으로 쓰이든 악으로 쓰이든 관여하지 않고 행사하지 않는다. 

말라식은 자신에 대하여 자아애착심으로 끊임없이 집착하나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선악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는 무기로 상응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은 선만 잠재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지은 악은 자신이 나쁜 과보를 받을까봐 피하는 것도 아니다. 

참선을 할 때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을 무기라고 하는 것처럼 말라식의 작용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하므로 육식(六識)에게는 떠오르지도 않고 알아낼 수도 없으니 무기라고도 말한다. 

소생소계(所生所繫)는 낳는데 따라 얽매인다는 뜻이니 생(生)하는데 따라 그 자리를 집착해서 전생(前生)의 존재양식을 모두 잊고 지금의 자리에 애착하여 최상의 자리로 알고 매달리는 것이다. 

아뢰야식 중의 이숙과(異熟果)를 따라 생(生)하므로 소생(所生) 이라 한다. 

축생으로 나도 그 자리에 애착한다. 소로 태어나든 말로 태어나든 그 자리에 얽매어 집착하고 그 자리를 지키려 애쓰며 산다. 천·인간·축생·아귀·아수라·지옥의 유정(有情)들은 모두 말라식 때문에 어느 곳에 무엇으로 태어나든 사량하고 집아(執我)하면서 자신을 지키고 산다. 이것이 소계(所繫)이다. 

아라한위(阿羅漢位)에 오르면 항전(恒轉)하고 폭류(瀑流)하는 아뢰야식이 쉰다고 했는데 7식도 쉰다. 7식이 먼저 쉬어야 8식이 쉬므로 아라한에게는 7식의 번뇌도 쉰다.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이나 출세 도를 이룬 사람에게도 말라식의 번뇌가 쉰다. 멸진정의 자리가 아라한의 자리이다. 멸진정은 선정을 닦을 때 9차제정(九次第定)의 단계가 있는데 4선정(禪定)을 이루고 4무색정(無色定)을 이루고 난 후의 아홉 번째 단계의 정(定)을 말한다. 

4선정에 네 단계가 있으니 초선정에서는 탐심·진심(嗔心)·혼침(昏沈)·도거(掉擧)·의심이 끊어지고 2선정에서는 심사관찰(尋伺觀察)이 끊어지고 3선정에서는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기쁨의 희(喜)마장이 끊어지고 4선정에서는 밖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인 락(樂)이 끊어진다. 4선정을 이루면 희(喜)와 락(樂)이 끊어진 담담한 상태가 된다. 

다음단계가 4무색정(四無色定)이니 이 또한 4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공간에 자유자재가 되는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을 이루고 

두 번째는 아는 것이 끝이 없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을 이루고 

세 번째는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이루고 

네 번째는 생각이 끊어진 상황에서 만 가지를 보고들을 수 있는 비상비비상처정(非相非非相處定)을 이루고 다음 아홉 번째는 멸진정(滅盡定)이니 이 정(定)을 이루면 신심(身心)이 적정(寂靜)하게 되어 아집(我執)을 버릴 수 있다. 

출세도는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도(道)이니 정견(正見)의 자리이다. 아라한위(阿羅漢位)에 이르거나 멸진정에 들어가고 출세도의 자리에 이르러도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복(伏)하는 것이지 번뇌까지 끊어진 것이 아니다. 

종자를 심고 큰 돌을 누르면 싹이 나올 수 없으니 이를 복(伏)이라 하는 것이지 종자까지 끊어진 것이 아니다. 종자는 흙 안에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다. 종자를 파서 꺼내어 소멸시키는 것이 단멸(斷滅)이다.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出世道) 에서는 말라식의 번뇌를 누를 수 있는 것이다. 무유(無有)는 아라한 멸진정·출세도를 성취하면 모든 번뇌에 동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으로 유부(有覆)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第8頌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다음은 제삼능변(第三能變)이며 차별(差別)함에 6종(六種)이 있으니, 경계를 요별(了別)하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으며 선성(善性)과 불선성(不善性)과 비선비불선(非善非不善)인 무기성(無記性)이 갖추어져 있다. 

제1능변은 아뢰야식이며 

제2능변이 말라식이고 

제7능변이 제 6의식이다. 6의식은 6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다. 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으로 차별한다. 

제 3능변의 핵심은 육근(六根)이나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만을 가지고 차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육진(六塵)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경계가 있어야 된다. 

눈은 색을 차별하고 

귀는 소리를 차별하고 

코는 향을 차별하고 

혀는 맛을, 

몸은 감촉을, 

의(意)는 법(法)을 차별한다. 

그리하여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인 육식(六識)이 성립된다. 

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을 합한 것을 18계(十八界), 열여덟 개의 세계(世界)라 한다. 

육식은 육근의 감각기관에 의지하고 육진의 경계를 반연(攀緣)하여 생긴다. 그러므로 육식은 육근을 가지고 육진의 경계를 분별하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경계를 분별하는 것이 육식의 행상(行相), 즉 작용이다. 

범부는 눈이 없으면 못보고 귀가 없으면 못 들으나 성자(聖者)는 육근(六根)을 자유로이 쓸 수 있어 눈이 없어도 보고 귀가 없어도 듣는다. 

육근(六根) 중 하나만 있어도 육근 모두를 쓸 수 있다. 그런 능력을 지닌 것이 인간(人間)이다. 

육식은 선(善)·불선(不善)·구비(俱非)인 무기(無記)와 모두 상응한다. 육식은 의식 속에 선도 있고 불선(不善)인 악도 있고 불고불락(不苦不樂)인 무기(無記)도 있다. 

선에도 응하고 악에도 응하고 무기에도 응하니 선성(善性)·악성(惡性)·무기성(無記性)을 다 지니고 있어 육식은 시도 때도 없이 선했다, 악했다, 무기를 했다 하면서 변화가 종잡을 수 없게 심하다. 선한 사람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악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또 담담한 도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육식의 심성(心性)이 그렇게 생긴 탓이다. 

불고불락(不苦不樂)으로 고(苦)도 안 받아들이고 락(樂)도 안 받아들이므로 마치 담담한 도인같이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은 육식이 무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식이 지닌 무기는 변화하므로 도인처럼 보이다가도 순식간에 변할 수 있으므로 육식이 보여줄 수 있는 도인다운 모습은 진정한 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또한 무기성 때문에 육식으로 살면 잊기도 잘 잊는다. 

육식은 선성(善性)·악성(惡性)·무기성(無記性)을 지니고 51개의 많은 심소(心所)로 늘 분별하며 변계소집(遍計所執)하므로 선업(善業)이나 악업(惡業)을 수없이 짓는다. 
  

第9頌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定 皆三受相應 

이 육식(六識)의 심소(心所)에는 변행(遍行)·별경(別境)·선(善)·번뇌(煩惱)·수번뇌(隨煩惱)·  부정(不定)이 있다. 이런 심소(心所)는 모두 고(苦)·락(樂)·사(捨)의 3수(三受)와 상응한다. 

차(此)는 제3능변인 육종식(六種識) 즉 육식을 말한다. 육식(六識)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를 설명하는 송(頌)인데 심소(心所)라는 말은 유식(唯識)의 언어로 구체적이면서 미세한 심리작용이다.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인 육식(六識)과 제7식인 말라식(末那識), 제8식인 아뢰야식은 마음 중에서 근본이 되기 때문에 심왕(心王)이라고 한다. 심왕(心王)이 중심이 되고 이 중심마음과 동시에 작용하는 갖가지 미세한 마음들이 심소(心所)이다. 왕이 신하를 거느리듯 근본 마음을 심왕(心王)이라 하고 그에 속하는 권속들을 심소라고 칭한다. 심왕(心王)이 소유하고 있는 마음이라 하여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 하는데 이를 줄여서 심소(心所)라 하는 것이다. 심왕은 마음의 주작용(主作用)을 맡고 있으므로 능변식(能變識)이고 심소(心所)는 어떤 경계를 만났을 때 그 경계와 상응하면서 생기게 되는 갖가지 심리작용이다. 

제 8식에는 5변행(五遍行)심소의 다섯 가지 심소, 제 7식에는 5변행심소와 4번뇌, 8수번뇌 그리고 혜(慧)의 18개 심소, 6식에는 51개의 심소가 있다. 심소(心所)는 6가지 종류로 나뉜다. ①변행(遍行) ②별경(別境) ③선(善) ④번뇌(煩惱) ⑤ 수번뇌(隨煩惱) ⑥부정(不定)의 여섯 가지가 있다. 

변행(遍行)은 전체 51개 심소 중 가장 기본적인 심소이다. 6식·제7식·제8식 어느 식(識)에나 두루 존재한다. 어느 식(識)이 일어나도 상응하여 생기는 마음작용이다. 5개 심소가 있다. 

별경(別境)은 글자 그대로 별도의 대상경계를 아는 마음작용이다. 경계자체가 다르므로 별경(別境)이라 한다. 별도의 고유한 대상을 갖는 심소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고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심소이다. 5개 심소가 있다. 

선(善)은 누가 보아도 틀림없이 선이라는 가치판단을 받는 마음작용이다. 심왕과 함께 상응하므로 선(善)심소는 심왕을 선하게 만들므로 별경과 함께 자기를 완성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11개 심소가 있다. 

번뇌(煩惱)는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마음작용이다. 근본번뇌(根本煩惱)와 지말번뇌(支末煩惱)가 있는데 여기서는 근본번뇌를 말한다. 6개 심소가 있다. 

수번뇌(隨煩惱)는 지말번뇌로 번뇌에 속하며 번뇌에서 유출된 번뇌이다. 20개의 심소가 있어 어느 심소보다 많다. 일반적으로 번뇌와 수번뇌를 합하여 번뇌라고 하는데 이들은 악심소(惡心所)에 속하므로 인간은 악심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부정(不定)은 선·악·무기의 심소 중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아서 부정이라 하는 심소이다. 그러므로 선·악·무기에 속할 수도 있고 선악무기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심소가 사람이 지닌 모든 심소인데 우리가 어느 것 하나를 보아도 51개 심소가 상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51개 심소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참선이다. 6식의 51개 심소는 모두가 삼수(三受) 즉 고(苦)·락(樂)·사(捨)와 상응한다. 

마음에 맞는 순경계(順境界)와 만날 때는 락(樂)의 감각이 생기니 이는 낙수(樂受)로 상응하는 것이고 마음에 거슬리는 역경계(逆境界)와 만날 때는 고(苦)의 감각이 생기니 이는 고수(苦受)로 상응하는 것이고 비순비역(非順非逆)의 경계와 만날 때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감각이 생기니 이를 사수(捨受)로 상응한다고 한다. 

이 삼수(三受)는 사람에 따라 상응하여 수(受)하는 바가 다르다. 어떤 경계 하나를 놓고도 누구는 고(苦)로 누구는 락(樂)으로 또 누구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인 사(捨)로 상응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어느 때는 고(苦)도 어느 때는 락(樂)으로도 어느 때는 불고불락(不苦不樂)으로도 상응한다. 6식의 51개 심소가 늘 변계소집하기 때문이다. 
  
  
第10頌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처음은 5변행(五遍行)이니 곧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이고 다음은 5별경(五別境)이니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이니, 반연하는 일[事]이 같지 않다. 

변행(遍行)에 다섯 가지가 있어 5변행(五遍行)이라 한다. 아뢰야식의 5변행은 사수(捨受)로만 상응하나 6식의 5변행(五遍行)은 경계와 상황에 따라 고(苦)·락(樂)·사(捨) 3수와 상응한다. 5변행에 대하여 간단히 거듭 설명해 보면 촉(觸)은 어떤 경계를 대할 때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이 상호 결합하여 식(識)이 발생하는 것이고 작의(作意)는 마음을 일으켜 작용시키는 마음작용이다. 

수(受)는 받아들이는 능력이고 상(想)은 면전 경계가 무엇인가 아는 작용으로 사물에 갖가지 이름으로 개념을 존재케 한다. 

사(思)는 어떤 구체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마음으로 궁리하여 야기시키는 의지작용이다. 

별경(別境)은 5종이 있어 5별경(五別境)이라 하는데 별도의 고유한 대상 경계를 갖는 심소이므로 인간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부분의 성취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심소이다. 자신을 향상시키거나 완성시키는데도 꼭 필요한 심소이다. 수행자에게는 남보다 더 확고하게 드러나야 되는 심소이다. 이 별경심소가 희박하면 수행의 길에 들어설 마음도 일어나지 못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뛰어난 사람들도 강한 별경심소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욕(欲)의 심소는 어느 것이나 일을 희망하고 구하려는 마음이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욕(欲)이고 자신은 즐거움을 얻으나 악(惡)인 일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욕(欲)이다. 수행하여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마음, 사회적인 어느 부분에 큰 성공을 하여 남에게 이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마음 등은 선욕(善欲)이다. 명리(名利)만을 쫓으려는 마음, 남의 것을 몰래 취(取)하려 하고 다치게 하려는 마음 등은 악욕(惡欲)이다. 

승해(勝解)는 어떤 내용을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딱 맞게 확실하게 결정적으로 이해하는 마음이다. 틀림없는 이해이며 정신작용으로 바른 인식과 바른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어느 일이나 그 내용에 가깝게 이해했다고 넘어가는 것은 승해가 된 것이 아니고 지적으로 이해된 것을 수행 같은 체험으로 확고부동하게 이해하는 마음이 승해(勝解)이다. 정지견(正知見)이나 정신(正信)의 의미로 쓰인다. 

념(念)은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여 잊지 않는 마음이다. 마음속에 분명하게 기억되게 하는 마음이다. 염력(念力)이라고 하듯이 강한 집중력의 마음이다. 염불(念佛)할 때의 염(念)이 이 심소이다. 염(念). 염(念)에 오직 이 심소만 있게 하고 다른 심소가 없게 오직 불(佛)만을 염(念)하는 것이 염불(念佛)이다. 염(念)의 지속이 몰입이고 몰입의 지속이 정(定)이 된다. 그러므로 이 념(念)이 정(定)을 이룰 수 있는 원인이 된다. 

정(定)은 일종의 지관(止觀)으로 하나의 일에 몰입함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일이든 알고자 하는 일이나 하고자 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모든 심소가 쉬어져 조용해진 마음이다. 염(念)에 의하여 몰입되어 다른 심소들이 가라앉고 마음의 하나의 경(境)에 모아진 상태이다. 정(定)은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선정삼매(禪定三昧)·염불삼매(念佛三昧) 등의 삼매(三昧)가 정(定)이다. 위기에 간절한 마음이 안 일어나면 정력(定力)이 약한 사람이다. 우리는 몰입삼매(沒入三昧)의 정(定)을 통해 큰 힘을 얻을 수 있고 또 지혜도 얻을 수 있다. 

혜(慧)는 사물을 가리는 능력의 마음이다. 간택능력의 마음이다. 정(正)·부정(不正)을 판단하는 마음작용으로 무슨 일을 추구하고 선택할 때 남이 하라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간택하는 마음작용이다. 이 혜(慧)를 말할 때 불교에서는 문(聞)·사(思)·수(修)의 세 가지 혜(慧)를 말한다. 들어서 얻는 혜(慧)가 문혜(聞慧)이고 바르게 생각해서 얻는 혜(慧)가 사혜(思慧)이며 수행을 통해서 얻는 혜(慧)가 수혜(修慧)이다. 수행을 통해 정(定)에서 얻은 혜(慧)가 가장 수승한 혜(慧)이다. 

이상(以上)이 5별경심소인데 이 심소가 6식에 있으므로 우리는 발심하고 자신을 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소연사부동(所緣事不同)이란 반연(攀緣)하는 일[事]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사물을 아는 것 즉 인식하는 것을 반연이라고 한다. 반연된 인식대상을 소연(所緣)이라 하고 반연하는 인식작용을 능연(能緣)이라고 한다. 반연하는 일이 같지 않다는 것은 5변행심소는 6식·제 7식·제 8식 모든 마음과 상응하나 5별경심소는 6식에만 있고 별도의 경계를 갖고 있으므로 작용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나를 바꾸어 보고자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51개 심소 중 욕(欲)·승해(勝解)·염(念)·정(定)·혜(慧)를 잊지 말아야 된다. 이 별경심소에 의지하여 일념으로 정진하여 정(定)에 들어가고 정(定)에 들어가 선악을 초월하는 지혜(智慧)를 얻고 선악을 초월하면 업(業)이 바뀌고 업(業)이 바꾸어지면 완전히 내가 바뀌는 새로운 사람이 된다. 몰입삼매에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5별경심소인 것이다. 


第11頌 : 

善謂信慙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6종심소(六種心所) 중에 선(善)의 심소는 신(信)·참(慙)·괴(愧)·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痴) 등 3선근(三善根)과 근(根)·안(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 그리고 불해(不害)이다. 3능변식(三能變識)인 제6식과 상응하는 11선심소(善心所)를 설명한 것이다. 선심소는 별경심소와 더불어 인간을 향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신(信)은 믿는 마음이니 선심소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다. 부처님께서는 “신심(信心)은 도(道)의 근본(根本)이요 공덕의 어머니며 만선(萬善)을 낳는다”라고 하셨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信)은 신앙심(信仰心)을 갖게 하는 근본마음으로 이 믿는 마음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실유(信實有)라 하여 진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제법(諸法)의 사(事)와 이(理)를 믿는 마음인 것이다. 

둘째는 신유덕(信有德)이라 하여 출세간이나 세간의 덕이 있는 성현(聖賢)을 믿고 존경하는 마음이다. 

셋째는 신유능(信有能)이라 하여 세간이나 출세간(出世間)의 재능(才能)이나 기능(技能)을 닦아 성취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믿어 그 힘을 얻고자 희망하는 마음이다. 신(信)의 심소는 정신(正信) 즉 바른 믿음의 의미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나 옳지 않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별경(別境)의 승해(勝解)처럼 확실하게 이해하면서 믿는 마음이다. 실유(實有)와 유덕(有德)과 유능(有能)을 믿는 마음이다. 

참(慙)은 착하고 어진 것을 숭상하고 착하고 어질지 않은 일에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죄를 짓지 않는 마음이다. 

괴(愧)는 다른 사람에게 지적당하는 것을 두렵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겨서 죄악에 대한 수치심이 많아 죄를 짓지 않는 마음이다. 부처님께선 [제자들이여, 이 세상을 지키는 두 가지 청정한 것이 있다. 즉 참(慙)과 괴(愧)이다]라고 하셨다. 참과 괴는 함께 붙여 참괴지심(慙愧之心)이라고 하여 유교에서도 쓰이는데 모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사람에겐 참과 괴가 있으므로 악을 범하는 일을 자제할 수 있는 것이다. 

무탐(無貪)은 만법을 수용함에 족(足)함을 알아서 탐하는 욕심이 없는 마음이다. 사람은 탐(貪)의 심소와 함께 무탐의 심소도 함께 갖고 있다. 무탐은 선을 증장시키고 탐은 악을 증장시킨다. 

무진(無嗔)은 어떤 역경계(逆境界)에서도 원망하지 않는 마음이나 화내지 않는 마음이다. 자신의 뜻에 어긋나도 화내지 않는 마음이다. 악의 심소인 진(瞋)의 심소와 대치되는 심소이다. 

무치(無痴)는 사리(事理)를 분명히 이해(理解)하여 모든 일에 어리석지 않은 마음이다. 이 또한 치(痴)의 심소와 함께 있으므로 인간이 언제나 치(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痴)는 삼선근(三善根)이라 한다. 선(善)을 일으키는 근(根)이 된다는 뜻이다. 신(信)은 선(善)을 믿는 것이고 3선근은 선(善)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근(勤)은 정진(精進)이라고도 하는데 선을 닦고 악을 끊으며 전념하며 물러섬이 없이 나아가는 마음이다. 선을 이루고자 정진하는 마음이다. 

안(安)은 경안심(輕安心)이다. 어떤 일에 몰두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몸과 마음이 평안하고 

경쾌하게 가벼운 상태가 되는데 이런 상태의 마음이다. 안(安)은 언제나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정수행 시 정(定)에 들 때 신심이 맑아질 때 일어나는 경쾌함이다. 어떤 일이든 전념하다 보면 하는 일에 익숙해져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이루어지는 마음 작용이다. 

불방일(不放逸)은 규범을 지키고 방일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악을 짓지 않고 선해지려는 마음이다. 행사(行捨)는 사(捨)로서 행하는 마음이다. 경계와 불고불락(不苦不樂)으로 상응하는 것이 사(捨)이므로 어느 것에 집착하며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다. 흥분하거나 침체되는 마음이 아니라 고요함에 머무르는 마음이다. 선정이 깊어지면 사(捨)의 상태가 된다. 

불해(不害)는 모든 생명체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모든 생명체의 고통과 피해를 덜어주려는 마음작용이다. 


第12頌 

煩惱謂貪瞋  痴慢疑惡見 
隨煩惱謂忿  恨覆惱嫉慳 

6종심소(六種心所) 중 번뇌에는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이 있으며, 수번뇌(隨煩惱)에는 분(忿)한(恨)부(覆)뇌(惱)질(嫉)간(慳)이 있으며, 번뇌(煩惱)는 심신(心身)을 괴롭히는 마음작용인데 모든 번뇌의 근본이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의 심소로부터 일어나므로 이들을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한다. 

탐(貪)은 자기 마음에 드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집착하고 탐내는 마음이다. 인간의 탐심은 끝이 없어서 가질수록 더욱 탐심이 커진다. 탐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숱한 번뇌와 업(業)을 만든다. 

진(瞋)은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것에 대하여 성내는 마음이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거나 손해를 보게 되거나 곤경에 처할 때 성을 내는 마음이니 상대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하여 엄청난 손실을 주게 되어 악을 야기하므로 악업을 짓게 한다. 

치(痴)는 무명(無明)을 일컫는다. 지혜(智慧)가 부족하여 사물의 이치에 어두운 어리석은 마음이다. 12연기의 첫 번째가 무명(無明)인 것은 자신을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근본심소가 무명임을 알게 해 준다. 

이상(以上)의 탐(貪)진(瞋)치(痴)는 온갖 번뇌와 악업의 근본이므로 삼독(三毒)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업을 짓는데 3가지 원인이 있으니 탐욕․진애․우치가 그것이다. 마치 씨앗을 땅에 뿌린 후 비가 적당한 때에 내려 뿌리면 싹이 터서 생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원인으로 업을 짓고 그 업이 익어서 갚음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만(慢)은 자신을 과신하고 다른 사람을 얕보는 마음이다. 자신의 재능이나 자신의 장점, 가정환경 등을 과시하는 마음으로 나와 남을 분명하게 차별화시킴으로써 번뇌를 낳게 하는 심소이다. 

의(疑)는 진리를 불신(不信)하고 남을 믿지 않는 마음이니 자신을 향상시킬 수 없는 심소이다. 

악견(惡見)은 틀린 일을 올바르다고 잘못 생각하는 마음이다. 진실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마음이다. 바르게 알지 못하니 바르게 살지 못하므로 세상 사는데 큰 장애 심소이다. 

악견(惡見)에 5종의 견(見)이 있다. 

① 신견(身見) -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가(假)인 줄 모르고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여 아(我)와 아소(我所)가 있다고 집착하는 견(見)이다. 

② 변견(邊見) - 인간은 죽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견(見)으로 이를 단견(斷見)이라 한다. 

③ 사견(邪見) - 인과를 믿지 않고 모두 운(運)에 맡기고 방종하게 생각하는 견(見)이다. 

④ 견취견(見取見) - 자신의 견해(見解)만을 고집하는 견(見)이다. 

⑤ 계금취견(戒禁取見) - 잘못된 계율에 집착하는 견해(見解) 만을 고집하는 견(見)이다. 예를 들면 신체적인 가해 등으로써 도(道)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계율로써 삼는 견(見)이 계금취견이다. 

수번뇌(隨煩惱)는 미세번뇌(微細煩惱)와 지말번뇌(支末煩惱)이다. 수번뇌(隨煩惱)는 모두 20종이 있는데 이 송(頌)에서는 6수번뇌(隨煩惱)를 먼저 말했다. 

분(忿)은 역경계(逆境界)에 대하여 화가 나는 마음이다. 특히 화가 나서 때리고 싶을 만큼 분노한 마음이다. 난폭한 행동을 일으킬 수 있게 하는 심소이다. 

한(恨)은 분노하는 마음이 계속되어 원망하는 마음이다. 한이 많은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부(覆)는 자기가 지은 죄를 감추는 마음이다. 자기에게 불이익이 올까 봐 감추는 마음이다. 

뇌(惱)는 화가 나서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 때문에 비위가 틀려 난폭한 언어를 써서 상대를 괴롭히는 마음이다. 포악스런 마음이다. 

질(嫉)은 다른 사람의 나은 점에 질투하는 마음이다. 이 심소는 중상모략의 행(行)을 일으키는 심소이다. 

간(慳)은 인색한 마음이니 남에게 베풀지 않고 자신의 부를 더욱 쌓고자 하는 마음이다. 재물에 인색하고 아는 것을 남에게 나눠주지 않는 것에 인색하여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니 번뇌 심소이다. 


第13頌 

誑諂與害憍 無慙及無愧 
掉擧與昏沈 不信幷懈怠 

광(誑)·첨(諂) 그리고 해(害)·교(憍)와 무참(無慙)·무괴(無愧)와 도거(掉擧) 그리고 혼침(昏沈)·신(不信)·해태(懈怠) 등이다. 

6식(六識)이 지니고 있는 수번뇌의 20개 심소(心所)중 앞 송(頌)에서 분(忿)·한(恨)·부(覆)·뇌(惱)·질(嫉)·간( )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이 송(頌)에서도 수번뇌(隨煩惱) 심소의 설명이 이어진다. 

광(誑)은 기혹(欺惑)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남을 속이는 심소이다. 자신의 명리(名利)를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신분 이상으로 위장과시하고 덕(德)이 높은 것처럼 양심적(良心的)으로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짓된 마음이다. 거짓으로 일을 꾸며 남을 속이기 잘하는 사람은 이 광(誑)의 심소가 두드러진 사람이다. 

첨(諂)은 사람들이 남의 환심을 사려하거나 비위를 맞추고자 할 때 아첨(阿諂)한다던가 아부(阿附)한다고 하는데 이때에 나타나는 마음작용이 첨(諂)이라는 심소이다. 자신의 과실을 감추려고 교묘하게 정직하지 못한 마음을 쓰므로 첨곡(諂曲)의 마음이라 한다. 

해(害)는 선심소(善心所)인 불해(不害)에 반대되는 심소이다. 불해(不害)가 모든 생명체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는 마음인데 비(比)하여 자비심이 전혀 없어 남에게 피해만 주는 마음이다. 살상(殺傷)을 일삼는 사람은 이 해(害)의 심소가 강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교(憍)는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이다. 자신이 자랑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랑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며 자랑 자체를 기쁨으로 삼는 마음이다. 그러다 보면 지나친 자랑으로 상대를 괴롭게 하거나 자랑거리가 아닌 것도 자랑하고 없는 것도 꾸며서 자랑하게 되기도 하므로 번뇌심소이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인 사람은 교(憍)의 심소가 강한 사람이다. 

무참(無慙)은 선심소(善心所)인 참(慙)의 반대심소이다. 참(慙)이 없는 마음이니 착하고 어질지 않는 일에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마음이다. 죄를 지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선을 짓는 일에도 태만하니 악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무괴(無愧)는 선심소(善心所)인 괴(愧)의 반대심소이다. 괴(愧)의 마음이 없으니 남을 의식하여 남을 두렵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죄악에 대한 수치심이 없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쉽게 악업을 지을 수 있는 마음작용이다. 

도거(掉擧)는 산란심(散亂心)으로 정신이 어수선한 마음이다. 참선 중 마음이 집중되어 고요해지는 상태에서 산란심이 일어 일념을 방해하는 마음이다. 참선 시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심소이다. 

혼침(昏沈)은 마음이 뚜렷하지 않고 어둡고 무거워 가라앉는 마음이다. 참선 시 혼침에 빠지면 관점(觀點)이 흐려진다. 선심소(善心所)인 안(安)을 방해하는 마음이다. 

도거(掉擧)와 더불어 참선 시 뚜렷이 느껴볼 수 있는 심소이다. 

불신(不信)은 선심소(善心所)인 신(信)의 반대로 믿지 않는 마음이다. 옳지 않은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유·유덕·유능을 믿지 않는 마음이다. 정법(正法)을 불신하고 남을 불신(不信)하고 자신마저도 불신하므로 자신을 향상시키는데 장애가 되는 마음으로 번뇌심소이다. 

해태(懈怠)는 게으르고 태만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지 못하게 하므로 큰 장애가 되는 번뇌심소이다. 해태심이 강하면 선(善)을 행하는 데에도 태만하니 업을 짓기 쉽게 하는 심소이다. 불신과 해태는 서로 깊은 관계가 있다 믿으면 정진(精進)하는 마음이 생기고 믿지 않으면 게으르고 태만해지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第14頌 :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방일(放逸) 그리고 실념(失念)과 산란(散亂)과 부정지(不正知)이다. 부정심소(不定心所)는 회(悔) 면(眠) 심(尋) 사(伺)이니 이 2류(二類)는 각자 선(善) 악(惡)의 2성(二性)이 있다. 방일(放逸)은 선심소(善心所)인 불방일의 반대되는 심소이다. 악을 짓지 않고 선을 지으려는 마음이 없어 멋대로 방종하여 악을 짓는 마음이다. 부처님께서는 「지혜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방일에 빠지지만 어진 사람은 방일하지 않음을 가장 뛰어난 보물로 지킨다」라고 하시고  「지자(智者)는 불방일(不放逸)로써 방일(放逸)을 제거하여 지혜의 누대(樓臺)에 오른다」라고 하셨다. 

실념(失念)은 과거에 익힌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별경심소인 염(念)의 반대되는 심소로 참선 시 실념이 일어난다면 일념(一念)을 이루는데 장애를 받는다. 지난 일이나 사물을 잊어버리므로 실념(失念)은 산란심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산란(散亂)은 경계에 대하여 흔들리는 마음이니 마음이 한 대상에 멈추지 않고 이리저리 흐트러지는 마음으로 일상적인 일에서도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산만해지게 하는 심소이다. 

부정지(不正知)는 경계에 대하여 잘못 아는 마음이다. 착각 때문에 사물을 잘못 아는 마음이다. 사물이나 상황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신업(身業)이나 구업(口業)을 짓게 한다. 부정심소(不定心所)는 어느 한 심소에 고정되지 않고 선심소나 악심소 어느 것에나 해당될 수도 있으므로 부정(不定)심소라고 한다. 선심소가 될 수도 있고 악심소가 될 때도 있는 심소이다. 

회(悔)는 뉘우치는 마음이며 후회하는 마음이다. 자신이 행한 것을 후회하거나 뉘우치거나 자신이 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마음이다. 선한 것을 행하지 못한 것은 뉘우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뉘우친다면 선(善)으로 갈 수 있는 뉘우침이고, 악(惡)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은 후회하고 앞으로 꼭 이루겠다고 다짐한다면 선으로 갈 수 있는 뉘우침으로 어떤 것을 뉘우치느냐에 따라 선성(善性) 악성(惡性)으로 나누어진다. 

면(眠)은 잠들고 싶은 마음, 잠자고 있는 마음이다. 사람이 잘 때는 이 심소가 일어난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자고 있을 때 6식의 모든 심소가 끊어졌다고 보는데 수면이 6식의 심소 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생시에도 이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심소가 혼미해지고 몸도 무겁고 자유롭지 못하게 되므로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없어진다. 적당한 잠은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덜어주므로 이익을 주어 선성(善性)이 되나 지나치게 잠을 자거나 때가 아닌 때에 자면 수행이나 일에 지장을 주므로 악성(惡性)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심(尋)은 심구(尋求)의 뜻으로 사물을 미루어 짐작하거나 추측하는 마음이다. 어떤 경계(境界)를 만날 때 이것이 무엇일까? 왜 그럴까? 분별을 일으켜 추측하고 짐작함이니 심(尋)은 바르게 유추할 수도 있고 바르지 않게 유추할 수도 있다. 

사(伺)는 심(尋)과 더불어 사물을 짐작하고 추측하는 마음인데 심(尋)보다 깊게 사고하는 마음작용이다. 깊고 세밀하게 경계를 분별해내는 마음이다. 심(尋)과 사(伺)는 언어를 가지고 사물에 대하여 얕게 또는 깊게 분별하여 언어를 존속케 하는 원인이 되는 심소이다. 심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타(自他)에게 이익을 주기도 하고 불이익을 주기도 하므로 부정심소(不正心所)이다. 

이각이(二各二)는 각(各)을 중심으로 앞의 '이(二)'는 회(悔)와 면(眠), 그리고 심(尋)과 사(伺)의 2류(二類)이고, 뒤의 '이(二)'는 선악 2성(二性)을 가리킨다. 부정심소인 회(悔)와 면(眠)은 선성(善性)도 될 수 있고 악성(惡性)이 될 때도 있다. 또한 심(尋)과 사(伺)도 선성(善性)이 될 수도 있고 악성(惡性)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상 3능변식인 6식의 51개 심소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심(心)의(意)식(識) 3식(三識), 즉 8식(八識) 7식 6식의 모든 심소가 설명되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8식인 아뢰야식은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의 5변행심소가 있고 7식인 말라식은 5변행과 4번뇌인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와 8대수번뇌인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혼침(昏沈) 도거(掉擧) 실념(失念) 부정지(不正知) 산란(散亂) 그리고 혜(慧)의 18개 심소가 있고 6식에는 5변행심소 5별경심소 11선(十一善) 6번뇌 20수번뇌 4부정의 51개 심소가 있다. 

第15頌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惑俱惑不俱 如禱波依水 

아뢰야식인 근본식을 의지하여 전오식(前五識)이 연(緣)을 따라 드러나니 혹 전 5식 중 다른 여러 식(識)과 함께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식과 함께 드러나지 않고 일식(一識)씩 단독으로 드러나기[現起]도 하는데 이 정형(情形)은 마치 파도가 물에 의지하듯 전오식은 아뢰야식인 근본식에 의지한다. 

전오식은 인체(人體)의 제일 일선(一線)인 밖에 나와 있는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의 오관(五官)으로 밖의 경계를 인식하는 의식으로 면전(面前)에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경계가 있어야 작용하므로 면전의식(面前意識)이라고도 한다.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총칭이다. 전오식은 모든 식(識)의 근본식인 8식 즉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작용한다. 의지한다는 것은 면전 경계를 받아 드려 인식할 때도 아뢰야식을 반연하여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의 5송에 의피전연피(依彼轉緣彼)가 있었듯 7식도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현기(現起) 된다. 6식도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현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는 데도 눈[耳]과 외부경계인 색경(色境)만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여러 가지 인연이 구비되어야 인식되므로 수연현(隨緣現)이라고 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인 모든 대상의 분별과 여러 물질 위에 나타나 있는 푸르고[靑], 누르고[黃], 붉고[黃], 흰[白]색을 구분하여 인식하며 밝고[明], 어둡고[闇], 빛나는[光] 등의 자연의 색깔들을 판단하고 모든 물질의 높고[高], 낮고[低], 길고[長], 짧고[短], 바르고[正], 바르지 못한[不正] 등의 형색(形色)들을 인식하는 데 눈 하나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구비조건이 있어야 되므로 연을 따라[隨緣]현기 한다고 하는 것이다. 

안식(眼識)이 현기 되는 데는 9가지 조건 즉 9연(九緣)이 완전히 구비되어야 한다. 안식을 일으키게 하는 인연은 다음과 같다. 

① 공연(空緣): 공간 또는 거리가 필요하다. 볼 수 있는 경계인 대상을 눈에 딱 붙이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② 명연(明緣): 빛[光線]이 필요하다.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는 한 발짝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한 걸음 나아가기도 어렵다. 

③ 근연(根緣): 안근(眼根)이니 안식을 발생케 하는 가장 근본이다. 근연 없이 나머지 8연이 구비되어도 안식이 발생될 수 없으니 根緣이다. 

④ 경연(境緣): 면전의 경계이다. 곧 색(色)의 경계이니 눈앞에 보이는 물질이다. 

⑤ 작의연(作依緣): 5변행심소(遍行心所) 중의 작의(作意)이니 마음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다. 

⑥ 분별의연(分別依緣): 제 6식의 분별능력과 상응해야 된다. 

⑦ 염정의연(染淨依緣): 제 7식이다. 아집이 강하게 일어날 때를 염(染)이라고 하고 가볍게 일어날 때를 정(淨)이라 한다. 전오식 밑바닥 에서 항상 활동하고 아집으로 전오식을 오염시키니 말라식을 염정의연이라 한다. 

⑧ 근본의연(根本依緣): 제 팔식을 가리킨다. 모든 식(識)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일어난다. 

⑨ 종자의연(種子依緣): 각 식(識)이 스스로 의지하는 종자를 의미하는 데 팔식 중의 종자식, 팔식 안에 이미 함장 시켜 놓는 종자식을 의지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먼저 보고 안 각각의 모든 대상에 대한 분별의식을 이미 입력해 놓았기 때문에 함장된 그 기존 인식들을 종자로 하여 어느 것을 볼 때 아 저것은 붉은 것이다. 

저것은 책상이다 하는 분별을 연(緣)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각각의 법은 반드시 자류(自類)의 종자에 의해 생기(生起)할 수 있다고 했다. 

이식(耳識)은 어둠 속에서도 들을 수 있으므로 명연(明緣)을 제의하고 8연으로 듣는다. 

근연(根緣)은 이근(耳根)이며 경연(境緣)은 사람을 비롯한 동물의 소리와 자연을 비롯한 물질의 소리가 있다. 나머지 연은 안식과 같다. 

비식(鼻識)과 설식(舌識)과 신식(身識)은 빛인 명연(明緣)뿐만 아니라 공간과 거리가 필요한 공연(空緣)이 없어도 되므로 근연, 경연, 작의연, 분별의연, 염정의연, 근본의연, 종자의연의 칠연(七緣)으로 식(識)을 발할 수 있다. 

비식은 근연이 비근(鼻根)이고 경연은 온갖 냄새인 향(香)이 경계의 대상이다. 설식은 근연이 설근(舌根)이고 경연은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 싱거운 맛인 미(味)가 경계의 대상이다. 

신식은 근연이 신근(身根)이고 경연은 차고, 덥고, 배고프고, 갈증나고, 매끄러운 등 각종 촉감인 촉(觸)이 경계의 대상이다. 이렇듯 전오식은 반드시 여러 연(緣)이 집합하여야 일어날 수 있다. 전오식은 2개나 3, 4개의 식(識)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으므로 구(俱)라고 하고 단독으로만 작용할 수도 있으므로 불구(不俱)라고 하니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동시에 하면 2구(二俱)가 되고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면 3구(三俱)이고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면 삼구(三俱)이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면 사구(四俱)이고 전오식이 동시에 식(識)을 발하면 5구(五俱)가 된다. 

불교수행에서는 볼 때는 보기만, 먹을 때는 먹기만, 들을 때는 듣기만 하게 공부시킨다. 오식(五識)이 각기 분별을 일으켜 번잡하게 굴면 공부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전오식이 수연현(隨緣現)하고 구(俱)하기도 하고 불구(不俱)하기는 그 정형(情形)은, 즉 심정이 밖에 들어난 상황들은 마치 파도가 물을 의지하는 것 같다고 하여 여도파의수(如濤波依水)라고 했다. 

물은 아뢰야식이요, 파도는 전오식이라는 비유이다. 물에서 파도가 일어나려면 바람이 있어야 하듯 팔식에 의지하고 있는 전오식이 여러 연(緣)에 수연(隨緣)하여 식(識)을 이룬다는 뜻이다. 


第16頌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제 육의식은 항상 현기하지만 무상천(無 想 天)에 태어날 때와 무상정(無 想 定)과 무심정(無心定)의 2정(二定)에 들 때와 잠잘 때와 민절(悶 絶)했을 때는 현기하지 않는다. 사람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의식을 쓰면서 산다. 사람의 심리작용 중 가장 많이 작용하는 것이 6식이니 평생을 6식을 가지고 변계(遍 計)하고 소집(所 執)하면서 산다. 

6식이 51개의 심소로 전오식을 지휘하며 분별에 분별을 더하면서 업을 지으며 산다. 그런데 5가지의 경우에는 육식이 작용하지 않는다.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때와 무상정(無想 定)에 들었을 때와 무심정(無心定)에 들었을 때와 잠들었을 때와 기절했을 때이다. 

무상천(無想天)은 색계(色界)에 18天이 있는데 제4선천(第 四 禪 天)의 9천(九天)중의 제4천(第四天)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생사윤회가 쉴새 없는 미계(迷界)를 셋으로 나누어 3계(三 界)라고 하는데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가 있다. 

욕계(欲界)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6욕천(六欲天)의 6도(六道)를 총칭하며 탐욕의 세계로 특히 식욕, 음욕, 수면욕이 치성한 세계이다. 

색계(色 界)는 욕계와 같은 탐욕은 없으나 무색계처럼 완전히 물질을 여의어서 순 정신적으로 되지 못한 중간의 물적(物 的)인 世 界라고 한다. 

선정(禪 定)이 얕고, 깊고, 거칠고, 묘함에 의해 크게 4선(四 禪)으로 하고 다시 18천(天)으로 나눈다. 

18천은 색계의 모든 하늘인데 초선천(初禪天)의 3천(天), 이선천(二禪天)의 3천(天), 3선천(三禪天)의 3천(天), 사선천(四禪天)의 9천(天)이 있다. 

무색계(無色界)는 색계 위에 있으며 물질을 여읜 순 정신적인 존재인 세계로 온갖 형색(形色)은 없고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마음작용만 있다고 한다. 

4천(四天)이 있다고 한다. 1천(天)은 공무변처(空無邊處)이니 공간에 자유자재가 되는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을 이룬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2천(天) 은 식무변처(識無邊處)이니 아는 것이 끝이 없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을 이룬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3천(天)은 무소유처(無所有處)이니 무소유의 해(解)를 얻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이룬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4천(천)은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이니 비상비비상처정(非相非非相處定)을 이룬 사람이 가는 하늘이다. 

불교에서는 여기도 생사(生死)가 있는 곳이라 한다. 이 정(定)을 이루면 거친 생각이 없으므로 비상(非想)이라 한다. 그러나 세밀한 생각이 없지도 아니하므로 비비상(非非想)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상천(無想天)은 무상정(無想定)의 삼매를 이룬 이가 사후(死後)에 태어나는 곳이나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다시 심상(心想)이 일어나면 다시 윤회(輪廻)의 굴레에 들므로 6식이 다시 일어난다. 

무상정(無想定)은 무상천에 낳는 인(因)이 되는 선정이다. 일체의 생각이 끊어진 경지의 삼매이다. 

외도(外道)는 이 무상정을 성취하면 이것이 열반을 얻은 것이라고 믿는다. 무상정을 이루어도 다시 6식은 일어난다. 

무심정(無心定)은 멸진정(滅 盡 定)이니 번뇌 망상이 쉬고 심신이 적정(寂靜)하게 되어 아집(我執)을 버릴 수 있는 경지이므로 무심정을 성취하면 6식에 부동하므로 무심(無心)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멸진정은 비상비비상처정 다음의 선정(禪定)이다. 또 6식은 깊은 잠이 들면 모든 심소가 다 쉰다. 전오식이 먼저 수면 중에 없어지고 이어서 6식은 숙면 중에 없어진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드러난다. 그리고 민절은 혼미한 상태로 인사불성이니 기절했을 때를 말하는 데 이때도 6식은 정지되나 혼절에서 깨어나면 육식이 다시 작용한다. 


제17송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이 모든 식(識)이 전변(轉變)하여 분별(分別)과 소분별(所分別)이 있다. 차(此)인 분별 즉 능분별(能分別)과 피(彼)인 소분별은 모두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체(一切)가 오직 식(識) 뿐이다. 

제식(諸識)은 전오식(前五識)과 6식(六識)과 7식(七識)과 8식(八識)을 말하는 데 이 모든 식(識)이 활동하고 변하여 능분별과 소분별이 있게 된다. 분별은 분별의 주체이므로 능분별이라고 하고 분별의 대상은 소분별이다. 활동하고 변하는 전변(轉變)의 양상(楊相)으로 아(我)와 법(法)의 종종상(種種相)이 생긴다. 가지가지 양상은 일체만법(一切萬法)을 말하는데 일체만법이 실(實)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唯識(唯識)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식(識)이 인연에 의해서 전변하나 그 인연의 주체는 唯識이라는 것으로 「일체는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唯識의 근본思想을 다시 한 번 확고하게 일깨워 주는 송(訟)이다. 

전변(轉變)은 唯識 언어로써 익혀 놓아야할 만큼 중요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식(認識)의 현상(現像)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식(識)이 활동하고 변하여 쓰임이 있게 해주는 근간이 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전변(轉變)은 선전후변(先轉後變)의 뜻으로 먼저 식(識)이 전(轉)한 후에 변(變)한다는 뜻이다. 전이나 변이나 모두 변화의 뜻을 지니나 전(轉)은 변화의 동기이고, 변(變)은 변화의 결과이다. 모든 식(識)이 분별과 소분별로 전변을 한다는 것이다. 

식(識)이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전(轉)이고 그 인식작용이 마음 밖의 대상인 경계를 받아들여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다시 마음속에 심어 준 결과들이 변(變)이다. 

변(變)으로 인(因)하여 식체(識體)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변출(變出)되는 것이다. 견분(見分)이나 상분(相分)이 모두 마음작용인데, 견분(見分)은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아보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껴보고 뜻으로 법(法)을 알아보는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사물을 마음 안에서 인식하는 내용이다. 

상분(相分)은 마음이 마음속에 객체인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내용이다. 즉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마음이 그 사물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영상을 오관(五觀)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끌어들여 마음 안에 그 대상을 인식하여 만들어 놓은 것으로 만들어 놓은 마음 자체가 인식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산하대지 등 밖의 모든 경계를 받아들여 내 안의 산하대지에 대한 대상을 심어주어 늘 인식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식(識)을 통하여 마음작용을 의식한다.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사물을 자유롭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화된 마음은 본래의 마음 자체가 아니라 변화된 마음인 것이다. 식(識)이 전(轉)이 되고 변(變)이 되어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견분(見分)은 주관적인 인식이고, 상분(相分)은 객관적인 인식이니 한 식(識) 안에 주관과 객관의 인식이 나뉘어져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을 분별심(分別心)이라고 한다. 분별소분별(分別所分別)은 식이 전변되는 양상으로 분별은 식(識)이고 능변(能辯)이며 주관계(主觀界)에 속하고, 소분별은 경계이고 소변(所變)이며 경계를 인식한 것이므로 객관계(客觀界)에 속한다. 식(識)이 인식작용을 하는 공능(功能)이 있다고 해도 인식 대상이 없으면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분별이고 인식되어지는 대상에 대한 분별이 소분별이다. 앞에서처럼 소분별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그 내용을 삼는다. 

차피개무(此彼皆無)의 차(此)는 아(我)로서 전변하는 주체인 능변(能辯)으로 모든 식을 말하고, 피(彼)는 아소(我所)로서 분별의 대상인 소변(所變)으로 아(我)와 법(法)으로 이루어진 일체만법을 말한다. 차피(此彼)가 없다는 것은 능분별(能分別)과 소분별(所分別)이 없다는 것인데 이 처럼 없음에도 있는 듯 느껴지는 것은 인연 때문이다. 

제 1송(訟)에서「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이라 하여 일체만법이 갖가지 상(相)으로 전변하는 것이 아(我)와 법(法)이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我)와 법(法)이 없으니 따라서 차피(此彼)가 모두 없으므로 차피개무(此彼皆無)라 한 것이다. 

일체唯識(一切唯識)은 일체만법이 식(識)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없으므로 일체 唯識이라 했다. 

1송(訟)에서의 「此能變唯三」을 다시 강조하여 나를 주제하고 우주만법을 주제하는 것이 오직 마음뿐인 것을 재삼(再三) 일깨워 주셨다. 식(識)은 인연에 따라 전변하는 데 이러한 인연이 쌓여 업장(業障)을 이룬다. 따라서 업장을 소멸키 위해선 인연을 고쳐야 되는데 인연을 고치기 위해선 한 생각만 바꾸면 된다. 인연의 주인이 식(識)이니 마음을 바꾸어 큰 원력(願力)을 가지면 작은 업장은 저절로 소멸된다. 어리석은 중생이라도 절실한 마음만 가지고 수행하면 부처가 되는 것은 모두가 唯識(唯識)에 의하기 때문이다. 

일체唯識은 중생들에게 고통의 원인을 알고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탈하는 길을 알려주는 가장 바른 진리이다. 


第18頌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이 일체 종식이 가지가지 형태로 변하여 변화를 전개하려는 힘을 가지므로 가지가지 분별이 생긴다. 

일체종식(一切種識)은 8식인 아뢰야식을 말하는 데 그 안에 일체의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인 유루업(有漏業)과 수행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청정한 업력인 무루업(無漏業)이 모두 종자로서 함장되어 있으므로 일체종식이라 한다. 

6식(六識)이 활동에 의해 지은 갖가지 선·악의 업(業)이 습기(習氣)로서 8식에 훈습되어 선악의 종자(種子)가 된다. 

아뢰야식 속에 함장된 종자는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음의 결과를 맺을 때까지 쉬임없이 생동하고 있는 것이다. 

선행(善行)을 했으면 그 업력이 아뢰야식에 들어가 먼저 잘못하여 조성된 악의 종자에 증가하여 악업을 약화시켜서 악의 종자로 하여금 악과(惡果)가 아닌 선의 결과가 되게 하기도 한다. 먼저 있었던 업력을 나중에 넣어 준 업력이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그 내용을 변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미 나쁜 짓을 하여 생긴 악업을 함장하게 하여 보존하고 있다고 해도 선행을 많이 하면 그 선업이 기존의 악업에 영향을 주어 악업과는 다른 선과(善果)를 갖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함장된 종자의 업력(業力)은 연(緣)을 만나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정신계와 물질계 모두를 변화시키고 향상 발전시킬 수도 있다. 

아뢰야식은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하는데 업(業)인 인(因)이 다른 과(果)로 드러나므로 이숙(異熟)이라 한다. 

2송(訟)에서 설명되었듯이 인(因)이 다른 과(果)로 나타나는 변이이숙(變異而熟) 다른 류(類)로 태어나는 이류이숙(異類而熟) 금생의 인(因)이 일, 이생 또는 수 십 년 후에 과(果)로 이숙되는 이시이숙(異時而熟)이 있다. 

아뢰야식에 함장된 종자는 일단 아뢰야식에 심어져 훈습기간을 경과한 후 성숙되어 외연(外緣)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려 비로소 변기(變起)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은 아뢰야식에 함장된 가지가지 종자로 인하여 가지가지의 무량무수한 과(果)로써 변화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선악의 종자뿐만 아니라 5관 6식으로 익혀 둔 온갖 인식들이 종자로 아뢰야식에 보존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현기(現起)하기도 하고 인(因)이 무르익으면 언제든지 과(果)로서 변출(變出)될 수 있으므로 여시 여시변이라 한다. 여시(如是)를 반복한 것은 종자가 무량무수하고 그 변화가 복잡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함을 뜻한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겪는 온갖 상황들은 모두 내가 수없이 심어놓은 종자들이 과(果)가 되어 수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전전력(展轉力)은 변화를 전개하는 능력이니 전오식과 6식과 7식은 구체적으로 활동하므로 현행식(現行識)이라 하는데 이 현행식들이 활동하며 얻은 그 결과들을 아뢰야식 속에 훈습시켜 종자를 만들어 준다. 

그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서 성숙되어 인(因)이 되어서 전전력의 힘을 빌려 과(果)로써 다시 현행식에 생기(生起)된다. 

그러면 현행식이 과(果)가 되는 것이다. 과(果)인 현행식이 일으키는 분별과 행(行)이 다시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새로운 종자를 이루어주니 현행식과 아뢰야식은 상호 인(因)이 되기도 하고 과(果)가 되기도 하면서 전전부단(展轉不斷)하니 분별 또한 끝없이 이어지며 모든 존재가 이어지고 모든 운명이 전개되는 것이다. 

피피분별생(彼彼分別生)은 피피(彼彼)는 종종(種種)의 뜻으로 가지가지 분별이 생긴다는 뜻이다. 아뢰야식은 수없이 많은 능변(能辯)의 힘이 있고 무한한 전전력(展轉力)의 힘이 있으므로 변화가 전개될 때마다 그로인해 수없는 분별들이 생기는 것으로 만사가 의식소변(依識所變) 즉 의식의 변화에 의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신 송(訟)이다.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 능소분별이 없고 주관과 객관의 입장을 넘어선 선분별(善分別)로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부하고 선업을 지으며 살면서 종내에는 唯識性(唯識性)을 이루어야 되겠다. 


第19頌 

由諸業濕氣 二取濕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모든 제업의 습기(濕氣)와 능(能) 소(所) 이취(二取)의 습기가 함께 갖추어져 있으므로 말미암아 생사윤회가 존재하고 앞의 이숙(異熟)이 이미 다하면 다른 이숙이 다시 생긴다. 

 전반적인 식(識)의 작용 즉, 아뢰야식, 말라식, 제6의식인 3능변식(能變識) 전체의 작용이 생사윤회를 있게 하고 만법이 있게 하는 근원임을 밝힌 송(頌)이다. 

생사윤회를 있게 하고 만법을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제업습기와 이취습기 때문이고, 또한 이숙(異熟) 때문인데 제업을 만들고 습기를 만들고 이숙을 있게 하는 모든 일들이 전반적인 식의 작용인 것이다. 

제업(諸業)에는 선업(善業) 악업(惡業) 선도 악도 아닌 업인 무기업(無記業)이 있고,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 유루업(有漏業) 무루업(無漏業) 등이 있다. 이 모든 업이 모두 6식과 말라식으로 짓게 된다. 6식과 말라식이 지은 모든 업은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아뢰야식에 훈습되어서 종자로 만들어져 아뢰야식 속에 보존된다. 

마치 옷에 향이 배듯 아뢰야식에 훈습(薰習)되어 종자로 만들어져서 머물게 된다. 그러나 아뢰야식은 무부무기(無부無旣)여서 담아둘 뿐 전혀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이 담겨 있는 병의 물이 담겨 있을 뿐이지 병을 이룬 물질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제업습기에는 유루업과 무루업으로 크게 나뉘는데 유루업은 선.악.무기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두 생사의 인(因)이 되나 무루업은 생사를 받지 않는다. 

습기(濕氣)는 업의 습기 즉, 업에 의해 습관된 기운이다. 아뢰야식에 보존되어 있는 업의 종자는 거듭거듭 같은 업을 반복하여 지음으로써 그 힘이 익어 성숙하여져서 습관과도 같은 기운이 된다. 그리하여 습기는 종자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습관처럼 박혀버린 업의 습기는 좀처럼 고치기가 어렵다. 시시때때로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되어 훈습되어서 무르익은 습기이므로 내외(內外) 어느 경계에 부딪칠 때라도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 통제가 불가능해져서 다시 같은 업을 짓게 되고 마는 원인이 되어 준다. 「습관이 제 2의 천성(天性)이다」라는 말은 천성 고치기가 힘들 듯 습관 고치기가 어렵다는 말이니 한 번 짙게 훈습된 습기는 고치기가 어렵다. 

선업의 습기가 강한 사람은 애쓰지 않아도 선업을 잘 짓고, 악업의 습기가 강한 사람은 참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악업을 또 짓게 된다. 긍정적인 사람은 긍정적인 습기가, 부지런한 사람은 부지런한 습기가. 매사에 노력하는 사람은 노력하는 습기가, 모든 면에 수승한 사람은 수승한 습기들이 강한 사람들이다. 선업습기이든 악업습기이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선하고 악하고 잘 살고 못사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의식 탓이다. 

수 없는 습기들이 행(行)을 낳고, 수 없는 종자가 되어 그 종자들이 성숙하여 이숙과(異熟果)를 초래하니 인과응보가 끊임이 없고 생사윤회가 끊임이 없는 것이다. 

2취(二取)에는 능히 취하는 바의 능취(能取)와 취함을 당하는 바의 소취(所取)가 있다. 취에는 취착(取着)의 뜻으로 취하여 집착함이니 거듭거듭 취착하므로 습기로 익은 것이다. 능취는 인식의 주체인 일체의 심(心)과 심소(心所)이며 소취는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다. 2취는 의식이 의식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다. 능변식이나 심소 자체에 집착하고, 견분이나 상분에 집착한다. 많은 심소 중에 어느 심소가 특히 강한 사람은 그 심소의 습기가 강한 것이다. 

인식하는 주체의 마음 작용인 견분을 집착하여 실아(實我)라고 여기고 인식하는 대상 의식인 상분을 집착하여 실법(實法)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취착이 흩어지지 않고 오래 계속되면 습관과 도 같은 기운으로 모여 습기가 된다. 

모든 습기에는 명언습기(名言濕氣)와 아집습기(我執濕氣)와 유지습기(有支濕氣)의 3가지가 있다. 

①명언습기 : 사람들은 세상을 살기 위하여 언어를 만들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명칭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명언습기이다. 어떤 의미를 표시하는 언(言), 어(語), 장구(章句), 부호(符號)등은 모두 뜻을 나타내는 명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런 명언들을 배워 훈습시켜 종자로서 아뢰야식에 보존시켜 놓고 쉽게 말하고 들으며 쓰면서 사는 것이다. 

②아집습기 : 아(我)란 본래 존재함이 없으나 아가 있다고 집착함으로 아집(我執)이라 한다. 아집에는 전생부터 넣어둔 본능적이고 선천적인 구생아집(俱生我執)과 분별에 의해 일어나거나 학습되어 이루어진 분별아집(分別我執)이 있다. 아집은 6식, 7식인 말라식 모두에 존재하나 근원은 말라식의 4번뇌(我癡, 我見, 我慢, 我愛)로부터 오는 것이다. 말라식 즉, 7식이 아집의 근본이고, 아집은 생사의 근본이다. 아집이 강하므로 아집습기가 강한 것이다. 아뢰야식을 써야 비로소 아집이 없으므로 아집을 없애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다. 

③유지습기 : 유지(有支)는 12유지, 12인연, 12연기(緣起)라고도 한다. 지(支)는 인(因)의 뜻으로 三界를 3유라고 한다. 因이 있고 果가 있고, 生死가 있기 때문이다. 12연기도 因, 果. 生死가 있으므로 12유라 한다. 12유의 因의 습기로 하여 삼계( 욕계, 색계, 무색계)의 과를 만들고 생사가 있게 한다. 

전이숙 기진 부생여이숙(前異熟 旣盡 復生餘異熟)은 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니 前 이숙인 종자가 멸해도 없어지기 바쁘게 새로운 이숙이 다시 생기는 것이다. 

마음의 움직임이 「恒轉 如瀑流」라 4송에서 말하듯 빠르고 끊임없으니 이숙 또한 쉴 틈이 
없다.  


第20頌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 無所有 

가지가지 변계(遍計)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종종(種種)의 사물을 보면 변계하나니 이렇게 변계하는 마음과 변계되는 사물의 자성(自性)은 본래 있는 바가 아니다. 

唯識思想에 3성(三性), 3무성(三無性)의 도리가 있다. 3종(三種)의 자성(自性)을 간략하게 3성(三性)이라 하고 3성에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있다. 일체법이 3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이 3성은 모두 무성(無性)이므로 3무성(三無性)이라고도 한다. 

변계소집성은 변계하여 그 변계한 것을 집착하는 것이다. 변계(遍計)는 이리저리 억측하는 것으로 주관적인 자신의 감정과 욕망으로 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악시비(善惡是非)와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져 마음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을 그냥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계산하면서 보고 듣고 함으로 잘못 보고 잘못 듣게 되므로 변계라고 한다. 

소집(所執)은 변계에 의해 잘못 보거나 계산된 대상에 대하여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있다거나 없다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변계소집성은 능변계하는 마음이 대상이 되는 소변계의 잘못 계산된 명(名)과 상(相)들을 망령되이 집착하는 것이다. 아(我)가 아닌 것을 아(我)라고 집착하고, 법(法)이 아닌 것을 법이라 집착할 때 집착하여 나타나는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이 변계소집성이다. 이때의 실아와 실법은 변계소집된 미혹한 마음이다. 

예를 들어 길게 놓여 진 노끈을 뱀인 줄 잘못 알고 고집할 때 노끈은 소변계이고 뱀이라고 분별하는 마음은 능변계이며 그때 눈앞에 떠 오른 뱀의 영상은 변계소집성이다. 사물을 잘못 보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착각은 다 변계소집이다. 

변계는 6식 7식으로 한다. 언어를 사용하여 변계한다. 6식이 51개 심소로 작용할 때, 7식이 18개 심소로 작용할 때 의식은 얼마나 변계하며 소집하는지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면서 의식을 쓰므로 계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살게 된다. 칭찬 받고자 함도 계산이고, 남을 속이는 것도 계산이고, 아첨도 계산이고 10악 모두가 계산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계산이 따르니 부모가 바라는 마음으로 자식을 키우면 변계하는 것이다. 사람은 경계를 보면 계산부터 하게 된다. 종교조차도 변계로써 찾고 믿는 경우가 많다. 

피피(彼彼)는 변계하는 마음이 매우 많아서 나타내는 표현이다. 종종물(種種物)은 변계되어지는 온갖 대상들이다. 차변계소집 자성 무소유(此遍計所執 自性 無所有)는 본래 변계하는 마음과 변계되어 집착되는 사물은 스스로 자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노끈을 뱀이라고 하지만 변계된 뱀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와 법이 있다고 변계하나 아와 법의 자성은 본래 없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자리인 변계소집성은 일념으로 몰입하여 삼매(三昧)에 들면 없어진다. 수행이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중심이 바로 서는 것이다.  


第21頌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의타기자성은 분별의 연(緣)에 의해 생긴 것이고 원성실성은 저 의타기성에서 전성(前性)인 변계소집성을 여의면 자연히 드러나는 성(性)이다. 

앞 송(頌)에 설명된 변계소집성과 더불어 의타기성, 원성실성은 마음의 존재 양식을 세 가지로 나눈 삼종(三種)의 자성(自性)이다. 이 삼종자성을 간략하게 삼성(三性)이라 하는데 세상의 모든 일체만법이 이 삼성을 떠나지 않았으며 이 삼성은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 이 삼성은 인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 스스로 自性을 지닌 것이 아니어서 모두 무성(無性)이라고 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모든 법이 인연에 의해 생기는 마음이고, 이것을 사량, 계교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변계소집성이다. 타(他)에 의존하지 않으면 결코 기(起)가 되지 않는 것이니 세상만물은 타와의 인연에 의해 생길 뿐 결코 홀로 자생(自生)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타기성은 만물을 生하게 하는 이치이다. 

아무리 사람으로 윤회할 할 수밖에 없는 이숙된 종자를 스스로 지니고 있어도 내 부모와의 인연이 없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의타로 기(起)하는 것이다. 산천초목의 현상이 그렇고 모든 물질이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현상도 모두 그렇다. 인연소생(因緣所生)이므로 모두 의타기인 것이다. 

마음 또한 의타기로 생긴다. 마음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대인 경계와의 인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에 의지하여 마음이 생긴다. 상대에 의해서만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5관 6식을 지니고 있어도 경계인 상대가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5관 6식이 다 잠들고 꿈도 꾸지 않는다면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 깨어나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으로부터 부딪치게 되는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하여 수도 없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잠재되어 있던 의식들이 튀어나와 그 의식자체가 상대(他)가 되어 다른 의식들이 일어난다. 

의타기의 자성이 분별연(分別緣)으로 소생(所生)한다고 할 때의 분별은 차별하는 분별이 아니고 구별(區別) 또는 선별 (選別)의 뜻이다. 분별연의 연(緣)은 만법을 생하게 하는 기성(起性)의 연이므로 타에 해당 된다. 정신계와 물질계 모두 인연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데 이 연생법(緣生法)에는 색법(色法)과 심법(心法) 두 가지가 있다. 

색법은 상분 (相分)이며 소분별(所分別)인 사물이다. 분별에 의하여 어떤 일인지. 어떤 사물인지, 구분하여 알 수 있으므로 분별지연(分別之緣)에 의탁했으므로 연생(緣生)이다. 

심법은 견분(見分)으로 능분별(能分別)인 인식(認識)이다. 견분은 안으로 견분종자(見分種子)를 의탁하고 밖으로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의 5근(五根)과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5경(五境)등의 연(緣)이 있어야 분별하므로 견분 또한 분별지연이고 연생이며 무자성(無自性)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에서 원성실은 의타기에서 변계소집을 여의면 원성실이 되는데 원(圓)은 원만의 뜻이고, 성(成)은 성취(成就)의 뜻이고, 실(實)은 진실(眞實)의 뜻으로 원만성취진실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원성실이라 한다.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 법신(法身) 등이 모두 구족한 성(性)이다. 다시 말하면 불성, 법성, 진여, 법신 등이 모두 원성실성이다. 

법상(法相)은 가유(假有)이므로 유한(有限)하고 진실 되지 못하나 법성(法性)은 무한하고 진실하다. 따라서 제법의 법성은 부동불변(不動不變)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시방세계에 원만하게 상주하므로 원성실성이라 한다. 

원성실성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과 같이 자성이 없으므로 무성(無性)이다.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의 실성(實性)이라 할 수 있는데 의타기도 무성이고 원성실성도 무성(無性)이다. 어피(於彼)에서의 피는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이다. 

상원리전생(常遠離前性)에서 전성은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을 여의어야 된다는 뜻이다. 즉, 마음이 의타기한 그대로에 계산된 분별을 보태어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원성실성이다.  


第22頌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與無常等性 非不見此彼 

그러므로 이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등의 성(性)에서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을 깨달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 頌에서는 원성실성이 의타기성과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도 않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고(故)라고 하여 앞 송의 내용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은 앞 송의 의타기에서 계탁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의타기성 자체가 원성실성으로 드러난다고 했으므로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의 관계를 말해줄 이 頌으로 이어 온 것이다. 

차(此)는 원성실성을 가리키고 차여의타(此는與依他)는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을 말한다. 비이비불이(非異非不異)에서 비이(非異)는 동(同)의 뜻이고 비불이(非不異)는 부동(不同)의 뜻이다. 모든 만법의 의타기법은 모두 원성실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비이라고 하고, 만법이 원성실을 떠나면 의타기성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이라고 한 것이다. 원성실의 진공묘유(眞空妙有) 성품 때문에 만법이 생하는 것이므로 비이라고 한 것이다. 비불이(非不異)인 것은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이 아니고 의타기성은 엄연히 원성실성이 아니게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비불이라고 한 것이다. 

여무상등성(如無常等性)은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등 소승사법인(小乘四法印)을 말한다. 이는 성문, 연각 이승(二乘)이 수행하는 것이다. 

세상의 만법은 변화한다는 제행무상성(諸行無常性), 나라고 고집할 수 있는 나는 없다는 제법무이성(諸法無我性),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일체개고성(一切皆苦性), 만법은 실체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다는 일체개공성(一切皆空性)이다. 

비불견차피(非不見此彼)는 견(見)으로 깨달아 안다는 뜻이다. 차(此)는 원성실성이고, 피(彼)는 의타기성이다. 비불견(非不見)은 깨달아 알지 못함이 없다는 것은 깨달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제행무상을 깨달으면 원성실성을 볼 수 있고, 의타기성도 볼 수 있다. 제행이 모두 의타기이므로 제행이무상임을 알면 변계소집을 여의게 되므로 원성실성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제법무아나, 일체개고, 일체개공을 깨달으면 역시 변계소집을 여의어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의 이치를 알 수 있게 된다. 

원성실성을 본다는 것은 변계소집성을 버린다는 뜻이며 변계소집을 버린 원성실성은 의타기가 아님이 없으므로 비불견차피가 된다. 


第23頌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즉 이 삼성(三性)에 의해 저 삼무성(三無性)이 건립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일체법이 무성(無性)이라 설(說)하신 것이다.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으로 마음의 존재양식을 나타낸 삼성은 唯識思想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삼성을 깨달으면 동시에 삼무성을 깨닫게 되고 唯識의 性을 깨닫게 된다. 또한 삼성의 근본이 삼무성이므로 삼무성을 깨달아야 삼성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 모두 인연소생이로 이루어진 것이지 스스로 자성(自性)을 지니지 않은 것이므로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 모두 무성이다. 

무성에 상무성(相無性), 생무성(生無性), 승의무성(勝義無性)의 3종류가 있으니 이는 세상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진리를 밝혀 주신 것이다. 

依此三性 立彼無三性은 이 삼성에 의해 저 삼무성이 건립된다는 뜻이니 삼성이 설립되므로 인하여 아울러 3무성도 성립된다는 것이다. 3성의 실성(實性)이 3무성이기 때문이다. 

먼저 의타기에 의해 마음이 일어나고, 의타기된 마음을 계탁분별하여 쓰면 변계소집이 되고 계탁분별하지 않으면 원성실이 되는 바를 말씀해 주시고 나서 3성의 실성은 무성으로 본래 없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3무성의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3무성의 상무성(相無性)은 일체만법의 상(相)은 무성이고, 생무성(生無性)은 만법이 인연따라 생하는 것이지 자성으로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승의무성(勝義無性)은 원성실성의 무성성(無性性)을 말한 것이다. 본무자성(本無自性)의 뜻을 확고하게 가르쳐주신 송(頌)이다.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은 부처님께서 “일체법이 무성”임을 밀의로 설하셨다는 뜻이다. 밀의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의미가 숨겨져 있어 진실된 마음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밀의라 하고, 두 번째는 뜻이 깊고 은밀하여 인지(因地)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는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밀의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일체법이 무성임을 밀의로 설하신 뜻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살성을 밝히시니 이들 3성의 자성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할까 염려하셨고, 또 본래무성임을 잘못 이해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공능(功能)을 모르고 일체가 없다는 공(空)에 떨어져 허무에 빠질까 저어되어 밀의로 설하신 까닭이 아닌가 이해된다. 

3성의 자리는 본래 무성이다. 무성의 자리는 집착할래야 집착할 수 없고 집착을 파(破)할래야 파할 것이 없는 자리이며 영원불멸의 자리이다. 


第24頌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처음에는 상무성(相無性)이요, 다음에는 무자연성(無自然性)이요, 마지막에는 전의 我와 法에 집착한 바를 멀리 여윈 성(性, 즉 승의무성(勝義無性))이다. 

初卽相無性 삼성을 의지하여 삼무성이 건립됨을 설명한 송인데 처음에는 변계소집성을 의지하여 상무성이 건립되므로 상무성이 쓰여졌다. 변계소집성이 상무성이라는 뜻이다. 상무성은 일체 모든 상이 무성이라는 것이다. 만법이 본래 자성상(自性相)이 없는데 변계하여 허상을 만들어 실유(實有)라 소집한다. 我와 法이 없는데 아와 법이 있다고 변계하므로 만상이 변계되며 변계된 모든 상은 자성이 없으므로 무성이니 상무성이 건립된다. 

次無自然性 다음에는 의타기성을 의지하여 무자연성이 건립된다. 의타기성이 곧 무자연성이다. 무자연성을 생무성(生無性)이라 하는데 자성으로 스스로 生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으로 자생할 수 없는 것이 무자연성이다. 모든 법은 자연생이 아니라 인연생이므로 의타기가 되고 의타기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무성이니 무자연성 또는 생무성이 건립된다. 우리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모든 현상에서 어느 것 하나도 종종(種種)의 인연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므로 의타기는 무자연성이다.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마지막으로 원성실성에 의지하여 승의무성이 건립된다. 의타기된 마음에다 아와 법에 집착하여 계탁분별하며 변계소집하여 쓰는 마음을 멀리 여의면, 즉 의타기된 마음에 변계소집을 일으키지 않으면 원성실성이 드러난다. 의타기된 것을 변계소집하지 않는 마음이 원성실성이므로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의 실성(實性)이라 할 수 있다. 원성실성도 무성이고, 원성실성을 승의라 하므로 승의무성이라고 한다. 

後는 원성실성을 가리키며 前의 의미는 다음 구절인 소집아법성에 이어져 ‘이전에 변계소집하여 집착한 아와 법’으로 설명되어진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원성실성의 진성(眞性)을 구명(究明)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1송에서 24송까지는 唯識(唯識)의 상(相)을 밝힌 것이고, 25송에서는 唯識의 성(性)을 밝힌 거이고, 26송에서 30송까지는 유식실성(唯識實性)을 깨달아 들어가는 유식위(唯識位)릉 밝히고 수증경계(修證境界)를 설명했다. 

唯識의 相이라고 할 때 相을 살펴보고자 한다, 相이란 현상적 존재 전체를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현상적 존재를 사(事)라고 하는데 사물이든 마음이든 현상적 존재는 모두 어떤 상을 갖게 된다. 상은 사물의 형태나 모습을 의미하지만 시각적인 형태나 모습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 전체를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나름대로의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손을 예로 들면, 손은 손이라는 모습을 지니고 있고, 손으로 온갖 일을 하는 작용이 있고, 손이라는 의미와 특질을 지니고 있다. 만상이 다 그렇다. 이렇듯 어떤 존재의 모습, 작용, 의미, 특질들을 모두 합하여 相이라고 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외형적인 형태나 모습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의 의미나 특질 모두가 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유위법 모두를 相이라고 한다. 따라서 唯識의 의미라든가, 識의 종류라든가, 식의 특질등 유위적인 唯識思想 모두가 唯識의 相인 것이다. 


第25頌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이것이 제법의 승의(勝義)이며 또한 이것을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항상 제법의 실성(實性)과 같으므로 唯識의 실성이라고 한다. 이 송(頌)은 唯識의 실성을 밝힌 송이다. 성(性)은 상(相)의 본체(本體)로서 유위적(有爲的)인 모든 법의 근본이치, 곧 만물이 그것에 의해 성립되는 근본진리를 말한다. 모든 법의 본성, 실성이 곧 성(性)이다. 변계소집성이 唯識의 존재양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相)이라고 할 때 상무성(相無性)은 변계소집성의 성(性)이다. 

앞 송(頌)에서 변계소집한 아상과 법상을 멀리 여의므로써 드러나는 진실된 경계가 원성실성이고 원성실성은 무성(無性)이므로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 했는데 이 송에서는 그 승의무성인 원성실성이 제법의 승의이고 그 승의는 진실하고 항상 존재하는 불변한 것이어서 진여(眞如)라고 했다. 

승의는 세간의 이치보다 수승하고 심묘(深妙)한 의리(義理)를 말하는데 제법의 승의가 곧 진여인 것은 승의가 진여와 같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삼무성을 성취하면 그대로가 제법의 실성인 진여의 자리이고 제법승의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승의무성이 제법승의이고 진여이므로 唯識의 실성이 제법승의요 진여인 것이다. 즉 제법의 실성과 唯識의 실성은 모두 진여이고 승의이다. 

차(此)는 앞 송에서 밝힌 원성실성의 진성(眞性)인 승의무성을 말한다. 제법승의(諸法勝義)는 제법이 지닌 승의로서 승의에 세간승의(世間勝義), 도리승의(道理勝義), 증득승의(證得勝義), 승의승의(勝義勝義)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제법승의는 승의승의를 말한다. 진여의 자리는 승의승의를 말하는 것이다. 

승의에 4종류의 4단계가 있다. 

①세간승의 : 5온(오온 ;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12처(十二處 ; 6근(六根), 

            6경(六境)), 18계(十八界 ; 육근(六根), 6경(六境), 6식(六識))등의 법을 말하며 그 의(義)가 아무리 수승해도 세간법에 속하므로 세간승의라 한다. 

②도리승의 : 고(苦), 집(執), 멸(滅), 도(道)의 4성제(四聖諦)를 가리키며 진리를 닦는 승의이므로 도리승의라고 한다.

③증득승의 : 2공진여(二空眞如)를 가리키는데, 아와 법이 모두 공임을 증득하게 되는 것으로 그 의(義)가 수승함으로 증득승의라 한다. 이 단계는 진여경(眞如境)을 증득할 수는 있으나 아직 닦고 증득할 바가 남아 있는 단계이다. 

④승의승의 : 일진법계(一眞法界)를 가리킨다. 唯識에서 일진법계는 일심(一心)을 말한다. 『화엄경』에 「삼계는 오직 한마음뿐이니 마음 밖에 별다른 법이 없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되어 있다. 일심은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마음으로 원성실성이라는 진여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므로 승의 중에 승의라하여 승의승의라고 한다. 앞의 3종의 승의보다 가장 수승하므로 승의승의라고 한다. 

진여(眞如)는 제법 중에 함유하고 있는 성(性), 곧 승의승의이다. 진(眞)은 진실이며 허망이 아니라는 뜻이며, 여(如)는 여상(如常)의 뜻으로 영원불변의 뜻이다. 제법의 실성은 진여이고, 법성(法性)이다. 

상여기성(常如其性)은 항상 그 성품과 같은 것으로, 기성(其性)은 제법의 본성, 또는 법성으로 제법의 승의 자리는 항상 제법의 본성, 법성, 진여의 자리라는 것이다. 

유식실성(唯識實性)은 변계(遍計)와 의타(依他)는 모두 실성이 아니고 오직 원성(圓性)만이 唯識의 실성이라는 것이다. 승의, 진여, 唯識실성이 모두 같은 의미이다. 

앞의 차(此)인 승의무성이 제법승의이며, 진여이며, 唯識實成이라는 뜻이다.  


第26頌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이에 분별식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써 唯識性에 주(住)하기를 구하려 하나, 능(能), 소(所) 2취(取)와 수면종자는 아직 복멸되지 않는다. 

이 송부터 유식실성(唯識實性)을 깨달아 가는 방법으로써의 수행위(修行位)에 들어간다. 唯識의 상(相)과 성(性)을 의심없이 신해(信解)하여서 수행에 들 수 있는 자량(資糧)을 갖추었다고 하여 자량위(資糧位)라 한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자재와 식량을 자기 속에 갖추어 수행에 들 자격을 갖추었다는 수행의 첫 단계로서 唯識의 상과 성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해도 만법이 唯識임을 의심없이 믿고 이해하여 唯識性에 이르고자 하는 원력이 자량이 되고 분별심과 번뇌를 끊는 것이 자량임을 일러주는 송이다. 

미기식(未起識)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미 唯識의 실성을 알아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는 단계는 이룬 것으로 이 정도는 되어야 유식위(唯識位)에 들 자량은 갖춘 것이라는 의미이다. 마음은 경계에 의해 일어나는데 어떤 경계에 부딪쳐도 부동할 수 있는 경지는 이룬 과정이다. 

구주유식성(求住唯識性)은 唯識의 실성에 안주하기를 구하는 것으로 마음이 안 일어나는 미기식으로 唯識性에 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2취수면(二取隨眠)의 2취는 아(我)와 법(法)인 능, 소의 2취이고, 수면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중생에겐 늘 근본번뇌와 수번뇌가 따르므로 수(隨)라 하고, 그 작용이 아득하여 마치 잠자는 상태와 같아 면(眠)이라 한 것이다. 또한 잠자면 꿈으로 나타나는 수면종자의 뜻이다. 

미능복멸(未能伏滅)은 아직 복멸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복(伏)은 복단(伏斷)의 뜻이고, 멸(滅)은 단멸(斷滅)의 뜻이다. 수행자가 분별은 복단하였으나 2취수면은 아직 단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식이 있을 때는 아와 법에 걸리지 않아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데 본능에는 아와 법이 있어서 무의식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아가 튀어나와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종자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단계이다. 또한 꿈을 꾸게 되는 것은 7식이 꾸게 되므로 그것은 마음이 일어난다는 증거인 것이다. 깨어 있을 때 의 의식은 조절이 되어도 꿈 조절이 어려운 것은 7식이 꿈을 꾸기 때문이다. 

7송에서 아라한위에 이르거나 출세도에 이르러도 번뇌를 복(伏)하는 것이지 멸(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설명되어졌었다. 종자를 심고 돌을 누르면 싹이 나지 않는 것은 복으로, 이때 종자는 돌 속에 살아 있는 것이며, 종자를 꺼내 소멸시키는 것이 멸로서 멸해야 번뇌종자가 단멸된다. 유식실성을 이루고자하는 자량이 분별심과 번뇌를 끊음에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송이다. 

자량위에도 10주(十住), 10행(十行), 10회향(十廻向)의 단계가 있는데 수행과정에 따라 지혜도 점차 높아지고 자비의 덕도 점점 늘어나게 된다. 


第27頌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수행자가 현전(現前)에 어떤 것(少物)을 세워 이것을 유식성(唯識性)이라 여기면, 이미 소득(所得)의 마음이 있는 것이므로 이는 실제로 唯識性에 주(住)함이 아니다. 

 이 송(頌)은 唯識의 수행위(修行位)중 가행위(加行位)이다. 앞 송(頌)의 자량위(資糧位)에서는 唯識性을 성취하고자 발심하여 수행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자량이 분별심과 번뇌를 끊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자량위(資糧位)의 수행으로는 능, 소 2취의 번뇌 종자까지는 복멸(伏滅)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행에 박차를 가하고 더욱 정진하는 가행(加行)의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량위(資糧位)에서 수행에 필요한 복덕(福德)과 지혜(智慧)를 갖추게 되었으므로 가행위(加行位)에서는 더 한층 노력 정진하여 수행하여야 唯識性에 진일보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전(現前)은 수행자가 가행위(加行位)의 관법을 닦을 때 수행자의 마음속에 드러나는 의식이다. 수행자의 앞에 드러나는 목전경계이기도 하다. 가행위(加行位)에서는 4심사관(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는데 4선근(善根)이란 수행단계로 닦음을 밝히고 있다. 

심사(尋思)는 어떤 대상을 놓고 "이것은 무엇일까?"하고 그 본질을 추구하고 관찰하는 마음이다. 제법의 명(名)· 사(事)· 자성(自性)· 차별(差別)에 대한 심사를 하므로 4심사관(四尋思觀)이라 한다. 여실지(如實智)의 여실(如實)은 제법의 실성(實性)과 같다는 뜻이며 제법의 실성은 곧 진여(眞如)이다.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을 때에는 4여실지(四如實智)의 지혜가 생길 때까지 심사하고 또 심사하며 가행(加行)하는 것이다. 4여실지(四如實智)에서는 제법의 명· 사· 자성· 차별의 실성(實性)은 실로 진여실성(眞如實性)과 같아 능·소가 공(空)이고 무소유임을 인식으로가 아니라 증득(證得)으로 아는 것이다. 

4심사관(四尋思觀)에서 4여실지(四如實智)로 가기 위해서는 난위(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위(世第一位)의 단계인 4선근의 위차를 거쳐야 한다. 4선근의 수행단계을 거쳐야 4심사관(四尋思觀)을 이루고 4여실지(四如實智)가 성취된다. 4심사관(四尋思觀)에는 제법의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에 대하여 심사관찰 한다. 

1. 명심사관(名尋思觀) :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모두 명칭이 있는데 이렇듯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이 명(名)이다. 비유하자면 손을 손이라 하는데 애초에 이름 붙여질 때 발이라 했다면 지금 우리는 손을 발이라 부르고 쓸 것이다. 따라서 당초에 그 이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두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므로 가립(假立)된 것이다. 명(名)이란 사물의 본체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그 명(名)에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킨다. 모든 명(名)이 가명(假名)임을 깨달으면 마음이 부동(不動)을 이루어 명심사관이 이루어진다. 

2. 사심사관(事尋思觀) : 사(事)는 작(作)의 의미로 사물을 가리킨다. 5온(색·수·상·행·식), 산·바다·사람·집·농업·대학 등 일상생활, 유정물·무정물 등 이름을 지닌 모든 것이 모두 사(事)에 해당된다. 모든 사물은 모두 인연소생(因緣所生)이고 유식소현(唯識所現)이어서 인연과 식(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사물을 정확히 심사 관찰하여 모든 일 자체가 인위이며 가상(假相)임을 철저히 깨닫는 것이다. 

3.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 : 명(名)과 사(事)의 본질에 체성(體性)이 있는가 철저히 심사관찰하고 자신의 실상인 자신의 마음자리를 살펴 자성은 본래 공(空)이며 무소유이고 청정함을 의식으로가 아니라 보는 것으로 알아야 된다. 제법의 자성이 허공과 같음을 심사 관찰하여 허환(虛幻)의 집착을 여의는 것이다. 

4.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 : 차별(差別)은 명(名)과 사(事)의 여러 가지 세세한 존재방식을 말한다. 사물마다 이름이 다르고 선악(善惡), 유루(有漏)· 무루(無漏)등과 생주이멸(生住離滅)등의 여러 상황에 따라 차별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제법의 차별상(差別相)에 대하여 심사 관찰하여 차별의 실상이 허상(虛相)임을 알고 차별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수행자가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얻는 지혜가 4여실지(四如實智)인데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음으로써 유식실성(唯識實性)을 깨달을 수 있다. 여실지를 얻으면 제법의 명· 사· 자성· 차별이 모두 唯識에 의해 생긴 것이며 식을 떠나서는 일체법이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4심사관(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수행함에 반드시 필요한 위차인 4선근(善根)에는 난위(暖位)·정위(頂位)·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가 있다. 

난위(暖位)·정위(頂位)에서는 4심사관 (四尋思觀)을 닦아 소취가 공(空)함을 관하고 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에서는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 능취(能取)·소취(所取)가 모두 공(空)임을 관한다. 

① 난위(暖位) : 인식되는 것 즉 소취(所取)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심사에 의해 관찰하는 단계이다. 명득정(明得定)이라는 삼매를 이루는데 이 삼매의 정력(定力)에 의지하여 심사관을 닦아 소취인 명·사·자성·차별이 모두 분별식에 의해 가유(假有)로 있다는 것을 관하게 된다.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광명의 따사로움을 느끼는 단계라고도 말하고 광명난법(光名暖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한다. 몸이 더워지는 난위(暖位)를 거쳐야 4심사관(四尋思觀)이 바르게 된다. 

② 정위(頂位) : 소취가 공(空)임을 보다 깊게 관찰되어지는 단계이다. 명증정(明增定)이라는 삼매의 정력(定力)에 의지하며 심사력(尋思力)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살필 데가 없는 데까지 극점에 도달하였다하여 정위(頂位)라 한다. 

③ 인위(忍位) : 난위(暖位)· 정위(頂位)에서 4심사관(四尋思觀)으로 소취가 공함을 알았으나 아직 능취(能取)의 견이 남아있어 인력(忍力)이 더 필요한 단계라 하여 인위(忍位)라 한다. 인위(忍位)에서는 인순정(印順定)이란 삼매에 의지하여 여실지관을 닦는다. 아직은 결정적인 여실지가 못되므로 하품 여실지를 닦는 단계라 한다. 

④ 세제일위(世第一位) : 무간정(無間定)이란 삼매의 정력(定力)으로 소취·능취가 모두 공(空)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印〕단계이다. 무간정이라 한 것은 소취·능취가 무(無)임을 안〔印〕순간 찰나에 무간(無間) 곧 사이가 뜰 간격 없이 바로 견도에 든다는 것이다. 이 단계는 아직 세간(世間)을 벗어난 것은 아닌데 세간 법 중 제일이라 하여 세제일위(世第一位)라 한다. 

입소물(立少物) : 소물(少物)을 세운다는 뜻인데 마음속에 지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4심사관 (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가 소물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을 할 때는 "관세음보살"이란 소물을 세우고 계속 염불을 하는 것이고 화두참선을 할 때는 화두를 소물로 지니고 염염(念念)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 이어주는 것이다. 소물은 저절로 놓아질 때까지 소물을 세울 수 없는 자리에 갈 때까지 끌고 가는 것이다. 이 송(頌)에서는 唯識性이 아닌데 唯識性이라고 여기어 집착하는 것이 소물이라고 했다. 

4심사관 (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을 때 현전(現前)되는 것들을 위시유식성(謂是唯識性) 즉 唯識性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唯識性은 진여성이어서 티끝 하나도 가립(假立)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유소득고(以有所得故), 소물이라도 있다면 득(得)한 바가 있는 것이므로 비실주유식(非實住唯識), 唯識性에 주하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第28頌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만약에 소연경(所緣境)에 대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로 인식하여 얻고자 하는바가 없으면 그때 비로소 唯識性에 주하는 것인데 능취상(能取相)과 소취상(所取相)을 여의였기 때문이다. 이 송은 통달위(通達位)에 관한 설명이다. 

가행위(加行位)에서는 능취(能取)·소취(所取)가 공(空)한 여실지를 얻었지만 능취(能取)·소취(所取)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相)을 관념 속에 가지고 있으므로 소물(小物)을 지난 것이어서 진실로 唯識性에 주한 것이 아니었다. 가행위(加行位)의 세제일위(世第一位) 단계의 다음 찰나 범부로서의 깨달음의 극치에 이르러서 마침내 무루(無漏)의 종자가 생기고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생긴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능취와 소위의 2취(二取)상이 끊어지고 진여의 이치를 깨달아 진여에 도달하므로 통달위(通達位)라고 한다. 진여의 이치를 본다고 하여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지도무소득(智都無所得) : 이 구(句)에서의 지(智)는 무분별지(無分別智)이고 근본지(根本智)이다. 능과 소가 모두 공(空)함을 관하고 능소(能所)를 여의면 일법(一法)도 얻을 바가 없으므로 이것이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그러므로 소연경(所緣境)을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보면 모두 무소득인 것이다. 능소(能所)를 여윈 무분별지(無分別智)는 오직 직관적 작용일 뿐이다. 

이시주唯識(爾時住唯識) 이이취상고(離二取相故) : 唯識性에 주(住)한다는 것은 능취(能取)·소취(所取)의 2취(二取)상을 모두 여의었다는 것이다. 능취(能取)·소취(所取)의 2취(二取)상을 여윈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만상(萬相))의 차별(差別)을 여의고, 만류(萬類)에 처하지 않는 것이 없어 평등하고 진여 그대로여서 이 경지에서 唯識性에 주하게 되는 것이다. 능소(能所) 2취(二取)의 분별심을 여윈 그 자리가 唯識性의 자리인 것이다. 

수행자가 도를 닦는 과정에서 3현(三賢)의 현위(賢位)와 10성(十聖)의 성위(聖位)가 있는데 자량위(資糧位)·가행위(加行位)·통달위(通達位)가 3현(三賢)으로 성위(聖位)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위(方便位)에 속한다. 

  
第29頌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무득(無得)이며 부사의(不思議)며 출세간지(出世間智)다.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라는 2가지 조중粗(重)한 종자를 버릴 수 있는 까닭에 보리(菩提), 열반(涅槃)이라는 2가지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할 수 있다. 

이 송(頌)은 이미 唯識性을 통달하고 난 뒤 닦아 익히는 진정한 수도의 단계이므로 수습위(修習位)라 한다. 견도(見道)하여 진여의 이치를 깨달았으므로 전도지견(顚倒知見)에 속한 번뇌는 소제할 수 있어 항상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번뇌의 10사(十使)번뇌 가운데 5리사(五利使)는 여의었으나 5둔사(五鈍使)는 여의지 못하였으므로 이 수습위에서 크게 닦아야 5둔사(五鈍使)마저 멸진 시키는 것이다. 5리사(五利使)는 그 성품이 날카로워 중생의 마음을 마구 부리는데 5견이라고도 한다. 5견(五見)은 12송의 악견(惡見)에 하나하나 설명되어졌고, 그 성품이 우둔하여 끊기가 더 어려운 5둔사(五鈍使)에는 탐(貪), 진(嗔), 치(癡), 만(慢), 의(疑)의 다섯 가지 견(見)이 있다. 

수습위를 통하여 단계적으로 번뇌의 장애를 끊고 단계적인 진여를 증득하여 비로소 성불할 수 있으므로 수습의 단계로 보살10지(菩薩十地)의 수행과정이 설명되어진다. 

무득부사의(無得不思議) :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어 보리와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무분별지를 얻어야 되는데 무분별지는 무득이며 부사의라는 것이다. 무분별지는 실상의 자리 근본자리이므로 무득(無得)의 자리이다. 어느 것도 붙지 않는 자리이다.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모두 여의었으므로 체(體)인 것이다. 

본래부터 진여의 체(體)는 적정(寂靜)하여 무득인 것이다. 무분별지를 이루면 그 마음 씀씀이의 용(用)은 묘용(妙用)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不思議)라 한다. 무득(無得)은 근본지인 무분별지의 체(體)이고, 부사의(不思議)는 무분별지의 용(用)이다. 

시출세간지(是出世間智) : 무분별지는 18계(6根·6境·6識)에 주(住)하지 않고 견문각지(見聞覺知)에 주(住)하지 않고 떠났으므로 세간지가 아니다. 능취, 소취, 수면(隨眠)이 세간의 근본인데 무분별지가 그것을 끊을 수 있으므로 그 성품을 출세간지(出世間智)라 한다. 

조중(粗重) :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로써 바로 2취 습기를 말하는 것으로 윤회를 주도한다. 이 윤회종자는 조중하여 수도에 의해서만 끊어지는데 무분별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없어진다. 

변증득전의(便證得轉依) : 전(轉)에는 수행하여 버리는 전사(轉捨)와 수행하여 얻은 전득(轉得)의 뜻이 있다. 의(依)는 8식을 소의처(所依處)로 삼는 것이다. 8식안에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2조중의 종자를 저장하고 있으며 동시에 보리, 열반의 종자도 저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8식을 의지하여 수행하여 번뇌와 소지의 장애를 버리고 보리, 열반의 종자를 얻으므로 2조중(二粗重)을 버리고 2전의과(二轉依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2전의를 증득하여야 불과(佛果)를 이루는 것이다. 

전사(轉捨) 전득(轉得)의 수행단계에 보살10지(十地)의 수습단계가 있다. 보살10지에서는 10바라밀(十波羅密)을 닦는데 1지(一地)마다 한 종류의 바라밀을 닦아 각각의 번뇌와 소지의 장(障)을 끊고 단계 단계의 진여(眞如)를 증득한다. 

①환희지(歡喜地) : 이 위(位)의 보살은 보시(布施) 바라밀을 닦는다.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 3종(三種)의 보시를 닦아 자타(自他)를 이익되게 하니 대환희심을 내므로 환희지라 한다. 범부장(凡夫障)을 끊고 변행진여(邊行眞如)를 증득한다. 

②이구지(이(離垢地) : 이 위(位)의 보살은 지계(持戒)바라밀을 닦는다. 섭율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界),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의 3종의 지계를 닦아 수혹(脩惑)을 파(破)하고 일체의 구염(垢染)을 멀리 여의므로 이구지라 한다. 사행장을 끊고 최승진여(最勝眞如)를 얻는다. 

③발광지(發光智) : 이 위(位)보살은 인욕(忍辱)바라밀을 닦는다. 대원해인(對怨海印), 안수고인(安受苦忍), 제찰법인(諸察法忍)의 인욕을 닦아 대총지법문(大總持法門)을 얻어 지혜가 충만하여 발광지라 한다. 암둔장(暗鈍障)를 피하고 승류진여(勝流眞如)를 증득한다. 

④염혜지(焰慧智) : 이 위(位)의 보살은 정진(精進)바라밀을 닦는다. 안갑정진(按甲精進), 섭선정진(攝善精進), 이락정진(利樂精進)의 정진을 닦아 지혜가 증장되어 일체번뇌를 태울 수 있을 것 같으므로 염혜지라 한다. 미세번뇌장(微細煩惱障)을 끊고 무섭수진여(無攝受眞如)를 증득한다. 

⑤난승지(難勝地) : 이 위(位)의 보살은 선나(禪那)또는 정려(靜慮)바라밀을 닦는다. 안주정려(安住靜慮), 인발정려(引發靜慮), 변사정려(辨事靜慮)의 정례를 닦아 진(眞), 속(俗)의 2제(二諦)를 동시에 현전(現前)케 하고 서로 융섭하게 하는 어려운 일을 해내므로 극(極)난승지라 한다. 하승열반현행장(下乘涅槃現行障)을 끊고 유무별진여(類無別眞如)를 증득한다. 

⑥현전지(現前地) : 이 위(位)의 보살은 반야(般若)바라밀을 닦는다. 생공반야(生空般若), 법공반야(法空般若), 이공반야(二空般若)의 반야를 닦아 최상의 지혜를 발하여 현전(現前)의 제법으로 하여금 염정(染淨)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게 하므로 현전지라 한다. 조상현행장(粗相現行障)을 끊어서 무염정진여(無染淨眞如)를 증득한다. 

⑦원행지(遠行地) : 이 위(位)의 보살은 방편(方便)바라밀을 닦는다. 회향방편(回向方便), 제도방편(濟度方便)의 방편을 닦아 세간과 2승의 유상행(有相行)을 떠났으므로 원행지라 한다. 세상현행장(世相現行障)을 끊고 법무분별진여(法無分別眞如)를 증득한다. 

⑧부동지(不動地) : 이 위(位)의 보살은 원(願)바라밀을 닦는다. 구보리원(求菩提願)과 도중생원(度衆生願)의 원을 닦아 일체의 번뇌와 경계에 동(動)하지 않아 부동지라 한다. 무상중작가행장(無相中作加行障)을 끊고 부증감진여(不增減眞如)를 증득한다. 

⑨선혜지(善彗智) : 이 위(位)의 보살은 역(力)바라밀을 닦는다. 사택력(思擇力), 수습력(修習力)의 역을 닦아 4무애지를 얻어 지혜를 잘 운용하고 설법이 무애하므로 선혜지라 한다. 이타불욕행장(利他不欲行障)을 끊어서 지자재소의진여(智自在所依眞如)를 증득한다. 

⑩법운지(法雲地) : 이 위(位)의 보살은 지(智)바라밀을 닦는다. 수용법락지(受用法樂地), 성숙유정지(成熟有情智)의 지를 닦아 광대교법(廣大敎法)을 구족하여 중생을 제도함이 큰비를 내리어 초목을 윤택하게 하는 것과 같아 법운지라 한다. 제법미자재장(諸法未自在障)을 끊고 업자재소의진여(업(業自在所依眞如)를 증득한다. 


第30頌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이는 곧 번뇌가 없는 無漏의 경계이며 부사의(不思議)며 선(善)이며 항상(恒常)하므로 상(常)이며 안락(安樂)이며 해탈신(解脫身)이며 대모니(大牟尼)이며 법신(法身)이라 이름한다. 이 송(頌)은 唯識 30송의 마지막 송이며, 수행위의 마지막 단계인 구경위(究竟位)이다. 

구경이란 지극(至極)이라는 의미로서 수도가 지극에 이르면 성불(成佛)이므로 구경위는 불위(佛位)라고 한다.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의 3현위(三賢位)와 수습위의 보살 10지(地)인 10성위(十聖位)를 거쳐 구경위에서 비로소 성불하므로 불위(佛位)이다. 유식성(唯識性)의 성취가 완성되는 단계이다. 차(此) : 전 송(頌)에서 말한 2전의과(二轉依果)다.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보리(菩提)열반(涅槃)의 2과(果)로 전득(轉得)됨을 말했는데 이차(此)는 보리와 열반을 성취한 자리 즉 보리 열반의 자리이다. 

무루계(無漏界) : 루(漏)는 객관 대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6근(六根)에서 허물을 누출(漏出)한다는 뜻으로 끊임없이 번뇌를 일으키므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루는 무번뇌이다. 번뇌가 없고 누수가 없고 헛됨이 없는 것이다. 

계(界)는 장(藏)의 뜻이 있으니 광대무변하고 희유한 대공덕이 있음을 말하고 인(因)의 뜻이 있으니 오승출세간(五乘出世間), 인(人)· 천(天)· 성문(聲聞)· 연각(緣覺)· 세간보살(世間菩薩)· 출세간 보살(出世間 菩薩)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이락사(利樂事)를 생(生)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루계는 번뇌가 없고 삼계육진(三界六塵)에 떨어지지 않는 경계이다. 

불사의(不思議) : 의식(意識)의 심연상(心緣相)을 떠나고 분별의 말을 지닌 언설상(言說相)을 떠났으므로 즉 불가사(不可思)하고 불가의(不可議)한 경지이다. 보리· 열반의 자리는 부사의 자리고 부처의 자리는 부사의 라는 뜻이다. 

선(善) : 모든 과오와 허물을 떠났으므로, 즉 과악(過惡)이 전혀 없으므로 선(善)에 속한다는 뜻이다. 법성(法性)을 깨친 이의 행(行)은 선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은 법성이 선에 속한 때문이다. 

상(常) : 변하거나 소멸하는 법이 없이 항상(恒常)하므로 불변감(不變減)하여 상(常)에 속한다. 생멸(生滅)을 떠난 상(常)이고 본성자체로서 늘 상(常)이다.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 : 청정법계인 보리· 열반의 자리에는 고통스런 번뇌가 없으므로 안락이라 하고 해탈은 온갖 장애와 결박에서 벗어났으므로 해탈이라 한 것인데 불(佛)은 안락과 해탈을 몸(身)으로 삼는다 하여 해탈안락신이라 했다. 

대모니(大牟尼) : 모니(牟尼)는 적묵(寂默) 적정(寂靜)의 뜻으로 언설(言說)이나 심연(心緣)을 떠난 경지이다. 생사의 집착에서 벗어나 큰 생(生)을 살도록 가르치는 큰 스승을 말하기도 한다. 

명법(名法) : 법신(法身), 법성신(法性身)을 말한다는 뜻이다. 무루계·부사의·선·상·안락해탈신·대모니를 이름하여 법신·법성신이라 한다는 뜻이다. 보리·열반을 법신·법성신이라 한다는 뜻이다. 

법신(法身)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를 말하는데 본체에 인격적인 의의(意義)를 붙여 말한다. 법신(法身)은 무상(無常)이며 또한 무불상(無不相)이어서 그 쓰임이 묘용(妙用)이고 무궁하여 체용불이(體用不二)이다. 

법신에는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用身) 응화신(應化身)으로 나눈다. 이는 법상종에서 세우는 3신설(三身說)이다. 

①자성신(自性身) : 일체제법의 본체이며 제불(諸佛)의 진정법계(眞淨法界)이다. 불생불멸이고 본래상주(本來常住)인 진여로서 제법이 평등하므로 범부· 동물· 산천초목 등 모든 존재에 존재한다. 범부는 자성신을 지니고 있지만 번뇌 · 망상 속에서 살므로 번뇌에 덮혀 실상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니 자성이 청청해지면 법신이 되는 것이고 자성신을 이룬 것이다. 

②수용신(受用身) : 오랜 수행 과정에서 지은 한량없는 원과 행의 과보로 나타난 만덕(萬德)이 원만한 불신(佛身)으로 2종류로 나뉜다. 증득한 법락(法樂)을 자기만이 느끼고 다른 이와 함께 하지 않는 자수용신(自受用身)과 다른 이도 같이 그 법락을 느낄 수 있도록 그 법락을 받을 수 있는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하는 타수용신(他受用身)이 있다. 

③응화신(應化身) : 불신(佛身)이 본래의 형태를 변화하여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천(天)·인(人)·귀(鬼)·축(畜) 등 어느 모습으로든 화신(化身)하지 않는 곳이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바로 응화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