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해 둔 것 같은데 영문서를 번역한 것 같다.
정확히 주제전개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인 불교의 수행개념 관점으로 참조용.
중략....
The Anapanasati Sutta
아나빠나사띠 경 (호흡에 대한 사띠수행을 말한 경전)
Introductory Section (서문)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유명한 장로 제자들인 사리뿟따 존자, 마하목갈라나 존자, 마하깟사빠 존자, 마하깟짜야나 존자, 마하꼿티따 존자, 마하깝삐나 존자, 마하쭌다 존자, 아누룻다 존자, 레와따 존자, 아난다 존자와 그 외 여러 잘 알려진 장로 제자들과 함께 사왓티에 있는 동승원의 녹자모 강당에 머무셨다.
[2] 바로 그 때에 장로 비구들은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어떤 장로 비구들은 열 명의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고, 어떤 장로 비구들은 20명의 …30명의…40명의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그래서 새로 입문한 비구들은 장로 비구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아서, 차차 고귀한 경지들에 도달하였다.
[3] 그 때에 세존께서는 우안거 해제일인 포살일 [9] 보름달 밤에 상가의 비구들에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고요함 속에 있는 비구 상가를 둘러보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4]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진전에 만족한다. 나의 마음은 이런 진전에 흡족한다. 이와 같이 더욱더 정진해서,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도록 하라. 나는 여기 사왓티에서 네 번째 달의 보름달 꼬무디를 맞기 위해 기다릴 것이다.”
비구들은 이 특별한 달에 명상을 계속 수행을 하거나, 새로운 옷을 만든다. 그리고, 다른 승려와 제가신도들에게 담마를 가르치거나 두타수행을 하기 위해 준비하기도 한다. 까티나 의식도 같은 달에 열린다. 까티나 의식 때, 제가신도는 상가 수행자에게 가사나 다른 필수품을 드려서 특별한 공덕을 쌓는 보시를 실천한다.
[5] 지방에 거주하는 비구들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네 번째 달의 꼬무디를 맞이할 것이라 들었다. 그래서 지방에 거주하는 비구들은 마땅히 세존을 뵈러 사왓티로 떠났다.
[6] 그러자 장로 비구들은 더욱더 열심히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어떤 장로 비구들은 열 명의 새로 입문한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고, 어떤 장로 비구들은 20명의 …30명의…4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그들 새로 입문한 비구들은 장로 비구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아서, 차차 고귀한 경지들에 도달하게 되었다.
[7] 그 때에 세존께서는 네 번째 달의 꼬무디 포살일, 보름달 밤에 상가의 비구들에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고요함 속에 있는 비구상가를 둘러보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8] “비구들이여, 여기 모인 이들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잡담을 하지 않는다.[10] 여기 모인 이들은 마치 순수한 나무 재질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상가가 이러하고, 여기 모인 이들이 이러하다. 비구들이여, 여기 모인 이들은 공양 받아 마땅하며, 환대 받아 마땅하며, 보시 받아 마땅하며, 합장 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비할 데 없는 복전(福田)이다. - 여기 모인 이들은 이러하다. 여기 모인 이들에게 적게 보시해도 많은 결실을 가져오고, 많이 보시하면 더 많은 결실을 가져온다. - 이 비구상가는 이러하고 여기 모인 이들은 이러하다. 여기 모인 이들은 세상에서 친견하기 어렵다.- 이 비구상가는 이러하고 여기 모인 이들은 이러하다. 여기 모인 이들을 친견하기 위해서 여행채비를 하고, 먼 길 떠날 가치가 있다. - 이 비구상가는 이러하고 여기 모인 이들은 이러하다.”
[9] 이 비구상가에 아라한이 된 비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번뇌가 다하였고 성스러운 삶을 살아 왔고,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진정한 목적지에 도달했고, 존재의 족쇄가 소멸되었으며 궁극적 지혜(final knowledge, 구경지)로 해탈했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것은 모든 족쇄들이 소멸되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지이다. 열 가지 족쇄들은 [1] 영원한 자아나 영혼이 있다는 믿음 [2] 올바른 길에 대한 의심 [3] 찬송, 의식, 제사가 열반으로 이끈다는 믿음 [4] 갈망 또는 탐욕 [5] 미움이나 혐오 [6] 순수한 물질적 존재나 비물질적 존재에 대한 욕심 [7] 자만이나 자부심 [8] 나태, 무감각, 졸음, 둔한 마음 [9] 들뜨고 동요된 마음 [10] 무지이다.
(빨리어로는 [1] Sakkayaditthi(유신견) [2] Vicikiccha(의심) [3] Silabbataparamasa(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4] Kanasmaraga(감각적 욕망) [5] Patigha(적의) [6] Ruparaga Aruparaga(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집착) [7] Mana(자만) [8] Middha(혼침) [9] Uddhacca(들뜸) [10] Avijja.(무명) 이다.)
마지막 경지인 아라한은 이렇게 말해진다. “그들은 성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이다. 짐을 내려놓았으며 진정한 목적지에 도달했고, 존재의 족쇄가 소멸되었으며 궁극적 지혜로 해탈했다. 그들은 방일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할 일을 다했다. 그들은 더 이상 부주의해질 수 없다.” (맛지마 니까야의 70번째 경 12절에서 인용하였다.)
[10] “이 비구상가에는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제거하여 청정한 거처(정거천)에 마땅히 태어날 비구들이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 경지에 있는 성인의 지위를 ‘아나가미(불환자)’라고 한다. 갈망과 미움이 더 이상 마음에 일어나지 않고, 다섯 가지 낮은 족쇄들([1] ~ [5])은 소멸되었다. 그러나 ,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다.
[11] “이 비구상가에는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하고 탐욕과 성냄과 미혹이 엷어진 일래자(한 번만 돌아 올)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은 한 번만 이 세상에 돌아와서 괴로움을 끝내 버릴 것이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 경지에 있는 성인의 지위를 ‘사까다가미’ 또는 ‘일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영원한 자아에 대한 믿음(유신견), 찬송이나 의식이나 제사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올바른 길에 대한 의심을 제거했다. 또한 이 경지에 도달한 이는 다른 나머지 족쇄들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약한 탐욕과 성냄을 갖는다.
[12] “이 비구상가에는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하여 흐름(길)에 든[예류] 비구들이 있으니, 그들은 [나쁜 곳에] 떨어지는 법이 없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 경지의 깨달음에 이른 이를 “소따빠나” 또는 흐름에 든 자(예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낮은 족쇄(유신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를 버렸다. 그들은 다시 낮은 존재로 결코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낮은 존재로 태어나지 않고, 일곱 번 태어남 안에서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
[13] “이 비구상가에는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 [11]를 닦기에 몰두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러한 비구들이 있다. 이 비구상가에는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을 … 네 가지 정신적 힘에 대한 기초(네 가지 성취수단, 四如意足)를 … 다섯 가지 기능들(오근)을 … 다섯 가지 힘(오력)을 …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 팔정도(고귀한 여덟 겹의 길)를 닦기에 몰두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런 비구들이 있다.”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 네 가지 정신적 힘에 대한 기초(네 가지 성취수단), 다섯 가지 기능(오근), 다섯 가지 힘(오력),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 그리고 팔정도(고귀한 여덟 겹의 길)는 Mahasakuludayi Sutta(마하사꾸루다위 경, 맛지마 니까야의 77번째 경, 16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유익한(wholesome) 상태들을 계발하는 길로서 말해진다. (이 경전은 제자들이 존경하고, 공경하며 의지하는 붓다의 자질을 기술하였다.) 우리는 지금 이 용어들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 팔정도(고귀한 여덟 겹의 길)은 경전을 설명하면서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The Four Right Kinds of Striving)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을 계발하는 길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불건전한 (의식) 상태들(unwholesome state)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열의를 가지고 깨어있다. 그리고 그는 정진하고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열의는 빨리어로 ‘칸다(chanda)’는 또한 ‘기쁨에 찬 흥미(joyful interest)’ 또는 ‘열심’을 의미한다. ‘기쁨’같은 유익한 대상을 향해 있는 마음은 이렇게 “기쁨에 찬 흥미”라는 성질을 가진다. 그래서 , 첫 번째 바른 노력은 마음이 맑아지고 불건전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도록,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를 갖는 마음을 계발시키는 것이다.
명상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이 미소 짓고 행복할 때, 기쁨이 자란다. 그 결과, 마음은 고양되고, 유익한 상태(wholesome)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 네 가지 바른 노력은 보통 네 가지 바른 정진으로 불린다.
어떤 명상 지도자들은 수행자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들 인지하는데(note) 엄청난 노력을 쏟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 이 경전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형태의 주시가 분명히 아니다.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를 가진 사띠 즉, ‘미소 짓는 마음을 갖는 것’은 밝고, 열려 있고, 받아들이고, 긴장함이 없는 마음으로 이끈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바른 노력(right effort)에 대한 적절한 정의이다. 이것은 결코 어떤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그 현상을 인지하는 것(noting)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이미 일어난 나쁜 불건전한 (의식)상태들(unwholesome states)을 버리기 위해서 열의를 가지고 깨어있다. 그리고 그는 정진하고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두 번째 바른 노력에 대한 가르침은 분노, 슬픔, 시기, 걱정, 정신적 긴장(스트레스), 침울, 공포 같은 어두운 감정 상태들을 버리고, 미소 짓는 마음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감정에서 생긴 매우 미묘한 긴장도 완화시킬 것이다. 미소 짓는 마음 상태는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가 있는 유익한 상태(wholesome state)이다. 미소 짓는 마음을 계발함으로써, 불건전한 감정 상태를 “내 것”으로 여기는 자아-동일시를 극복하게 된다. 정신적 수행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자신에 대해 미소 짓는 능력은 계발되어야 할 바른(skillful) 도구이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의식) 상태들(wholesome states)을 일으키기 위해서 열의를 가지고 깨어있다. 그리고 그는 정진하고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이것은 유익한 상태들(wholesome)이 마음에 있지 않을 때, 마음에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를 기르는 것이다. 즉, 사띠를 계발하는 것은 기쁨과 미소 짓는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다. 마음이 이것저것 단지 생각만 하는 중립적인 마음 상태일 때에도, 미소 지음을 연습하고 기쁨에 찬 흥미와 열의를 체험할 때이다.
“그는 이미 일어난 유익한 상태들(wholesome states)을 계발하여, 사라지지 않게 끊임없이 강화시키고, 증장시켜 유지하기 위하여 열의를 가지고 깨어있다. 그는 정진하고,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그것으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올바른 지혜의 완성과 성취에 도달하여 머문다.”
네 번째 바른 노력은 부단한 수행을 말한다. 이 끊임없는 수행은 공식적인 명상시간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포함한다. 언젠가 나에게서 배우는 이들이 이렇게 물었다. “미소 지음을 수행하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지는 것이 정말로 열반에 도달하게 합니까?”
그 사람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놓치지 않고 고찰하는 것이 열반에 도달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행을 그렇게 매우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다. 그들은 붓다가 가르친 밝고 행복한 방법으로 수행해 오지 않았었다. 나는 그들에게 반문하여 물었다. “어떻게 마음에 미소 지음과 기쁨에 찬 흥미 없이 열반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기쁨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희각지)가 아닌가요? 붓다는 ‘우리는 행복한 이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미소 짓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갖는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쁨에 찬 흥미와 미소를 가지면, 마음에 진정한 견해의 변화가 일어난다. 상황이 어려워져도 마음이 많이 무거워지거나 기분이 언짢아지지 않게 된다. 이것은 자아-동일시화가 그다지 크지 않고, 수행자가 상황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미소 지음과 기쁨에 찬 흥미가 없을 때, 모든 것이 힘겨워지고, 정신 상태와 생각이 의기소침해진다. 마음은 너무 심각하게 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예를 들면, 당신이 매우 행복할 때, 내가 와서 당신에게 장미 한 송이를 준다고 하자. 당신은 장미를 받고 나서 장미의 색, 모양, 향기에 감탄할 것이다. “아름다운 꽃이구나! 단지 보기만 해도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 당신이 의기소침해 있거나 화가 나 있다면, 내가 와서 당신에게 똑같은 꽃을 주어도 당신의 마음은 꽃 대신 가시를 볼 것이다. “우, 이 꽃은 매우 흉측하군. 이 꽃이 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때 보이는 것은 가시이다. 그러나 , 실제로 같은 꽃이지만, 당신의 기분이 이런 차이를 만든다. 기쁨에 찬 흥미와 미소 지음은 당신 주위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든다.
그러나 , 이 말은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 갈 것이다! 그러나, 기쁨이 있는 마음으로 바라볼 때 큰 문제를 작은 것으로 바꿀 것이다.
(The Four Bases for Spiritual Power)
네 가지 정신적 힘의 기초(네 가지 성취수단, 四如意足)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네 가지 정신적 힘에 대한 기초’를 계발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평온한 마음을 성취하게 하는 ‘기쁨’(chanda)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
첫 번째 정신적 힘은 ‘기쁨’(joy)을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정진’(viriya)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여기서의 집중은 평온을 의미한다.)
이것은 두 번째 정신적 힘이다. 붓다의 길을 걷는다면, 게을러지거나 느슨해질 수 없다. 특히 붓다의 길이 일생에 걸친 수행임을 깨달을 때, 그 길에 머무르기 위해 많은 힘이 필요하다! 이것은 마음이 긴장되고 굳어 있을 때,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있는 힘을 말한다. 호흡으로 되돌아오기 전에 생각을 놓아버리고, 머리와 마음에서의 생긴 긴장을 이완하는 힘을 말한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마음의 정화’(purity of mind)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여기서의 집중은 평온을 의미한다.)
세 번째 정신적 힘은 마음의 정화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상의 대상에 가능한 오래 머무를 때 계발된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나 명상하기 힘들 때마다, 있는 그대로 그 장애를 놔두어서 장애에 대해 사고하여 개입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수행의 장애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이완하고 나서, 부드럽게 명상의 대상, 즉 호흡과 마음이 평온해지고 넓어짐으로 주의를 되돌리는 것이다.
마음이 미혹과 수행의 장애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이 아무리 여러 차례라도 괜찮다. 이완시키고, 그리고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기만 하라. 이것이 모든 번뇌와 장애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이다.
기억해라. 명상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순간 속에서 마음과 알아차림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자비로운 받아들임(loving acceptance)’으로 표현되는 상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미지와 언어를 갖는 생각들이 완전히 소멸하게 될 때, 명상은 고요함(silence)이다. 그러나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마음을 수축시켜 죄이고, 배척하는 형태이며 끊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수행의 장애를 억눌러 저항하며 투쟁하는 형태이다. 명상하는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평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배척, 억누름, 저항이 아니다. 집중된 마음으로는 붓다의 수행법에 따라 명상할 수 없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고찰’(investigation)의 정신적인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여기서 집중은 평온한 마음을 의미한다.)”
경험되는 현상을 탐구하는 습관은 정신적 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수행의 장애나 고통, 다른 미혹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 마음이 그 특별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명상할 때 졸음이 온다고 하자. 졸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수행자가 더 주의 깊게,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지고 그 명상의 대상에 머무르는 것이다. 마음이 졸음에 어떻게 슬며시 빠지게 되는지 직접 보도록 노력해라. 즉 더 많은 노력과 힘을 수행에 쏟아야만 한다.
수행자가 마음이 어떻게 수행의 장애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는지 안다면, 그는 더 빨리 놓아버리고, 오랫동안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 수행자가 졸음에 완전히 사로잡히면, 이 수행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잠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는 마음이 장애를 극복하고 싶어하지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탁구경기’처럼 명상의 대상과 졸음사이를 왔다갔다할 지 모른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더 밝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질수록, 더 빨리 수행의 장애를 놓아버리고 다시 명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이와 유사하게, 고통이 일어날 때 고통으로 마음이 향하지 않다가, 주의가 고통으로 이끌려지면, 그때서야 마음이 어떻게 고통이란 감각에 저항하는지 볼 수 있다. 만약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고통은 더 커지고 강렬해 질 것이다.
그래서 , 이러한 미혹들(고통, 수행의 장애, 무거운 감정 등)을 언어화하는 마음속의 생각을 먼저 놓아버린다. 그리고 , 마음을 완화시키고 그 감각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매듭을 푼다. 그리고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완화시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그리고서, 명상의 대상으로 주의를 되돌린다. 고통이 다시 마음을 끌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것을 행한다.
이것은 명상자가 주의를 고통의 한 가운데에 놓고 ‘고통...고통..고통.’ 하며 고통을 인식하라는 어떤 명상 지침과 아주 다르다. 그 명상 지침에 따르는 동안, 그들은 고통의 진정한 본성을 보고, 고통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 고통은 본래 불쾌한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계속 지켜보기 위해서 긴장하고 굳어 있는 마음을 갖는 경향이 있다. 명상자는 이러한 마음의 경직을 결코 알 수 없고, 그런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없다. 명상자는 결국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집중(고정된 주의)을 계발할 것이다. 그러나 , 이것은 마음을 억누르고 긴장함으로써 도달하는 것이다. 경험에 대한 ‘고찰’의 정신적인 힘의 기초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용함으로써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싸우거나, 조절하거나, 방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자애로운 받아들임(Loving-acceptance)과 인내(영어 사전에서는 ‘반목 없음’의 의미로 정의된다.)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집중, 긴장함, 억압함, 억누름으로 도달되지 않는다.
(The Five Faculties)
다섯 가지 기능들[오근, indriya]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오근)들을 계발하는 길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기능”(saddha)을 계발한다.
믿음의 기능은 또한 확신의 기능으로 불린다. 어떤 사람이 삶의 고통을 놓아버리려는 관심을 가진다. 그의 호기심이 더 커지고 명상 스승을 찾기 시작한다. 다행히 유능한 스승에게 배우게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올바른 수행을 통해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그의 확신은 커지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수행에 대한 열의가 커지고 좀더 수행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정진의 기능’(viriya)을 계발한다.”
확신이 커지면, 자연적으로 더 많은 힘을 수행에 쏟을 것이다. 좀더 오래 앉기 시작하고 마음은 더욱 맑아질 것이다.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한차례 앉기수행 시간은 45분보다 짧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앉기수행이 잘 되면, 계속할 수 있는 한 오래 앉아있기 바란다. 좋은 수행간격을 위해서는 한 시간, 한 시간 십분 또는 그 이상 계속되어야 할지 모른다. 점차 더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은 좋다. 앉기수행에 집착하게 된다고 걱정하지 마라. 집착하게 되는 유일한 방식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함에 의한 것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명상하지 않을 때 그렇다. 충분히 연습해왔다면, 신체적으로 상하지 않을 정도에서 앉기수행을 오래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긴 시간동안 편안하게 앉아 있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한두 시간 또는 세 시간동안 앉기 수행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만약 그 같이 오래 앉아있는 것이 매번 고통을 일어나게 한다면,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신체적 불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앉는 수행자세는 편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수행자가 무언인가에 기대지 않는다면, 걸상이나, 의자 같은 것을 사용해도 좋다. 기대는 것은 졸리고 멍하게 하기 쉽다. 그것은 명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확신을 가질수록 수행에 좀더 많은 힘을 쏟게 된다. 열의도 자연적으로 커진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띠의 기능’(sati)을 계발한다.”
수행자의 정진이 향상됨에 따라, 알아차림과 사띠는 자연적으로 강해진다. 이것은 강제적이 아닌 자연스런 과정이다.
여러분과 나 같은 보통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자. 메뚜기, 나비와 같은 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또한 미친 원숭이와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움직이고, 주변을 뛰어다닌다. 매 순간 공상과 충동이 변화하고 있다. 마음은 자극의 먹이이고, 마음 스스로 자극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한다. 이것은 어떤 자극들이 일어날 때, 늘 해오던 식으로 조건에 되받아 행하는 반응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기억에서 발산된 일련의 연상, 희망, 공포, 기억, 공상, 후회들이 마음에서 항상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마음은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맹목적이고 결코 멈추지 않으며 만족하지 않는다. 마음이 몹시 미쳐있고, 불만족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은 조건이 되는 사건들의 끝없는 정글 속에서, 충분한 과일을 찾아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다니는 들뜨고 미친 원숭이로 묘사된다. 그래서, 명상을 하기 시작할 때 마음은 자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명상의 대상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때때로, 수행자가 알아차릴 수 있기 전에 이삼 분이 걸리기도 한다. 그때는 부드럽게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이완한다. 그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다시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린다.
마음은 습관적으로 스스로 좋아하는 곳으로 돌아 다녀왔기 때문에, 명상의 처음에 이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 수행이 계발되어 잘 알 수 있고 더 빨리 놓아버리게 됨에 따라, 수행자의 사띠는 점차 더 뚜렷해지게 된다. 알아차리기 전에, 단지 일분 동안 마음이 호흡에서 떨어져 있게 될지 모른다. 그때, 놓아버리고, 마음을 이완하고, 호흡으로 돌아온다. 이때 마음이 다시 떠나기까지 호흡에 더 오랜 시간(아마도 삼십 초 정도)동안 머무르기 시작한다.
결국에 마음이 달아난 것을 더 잘 보게 되고, 사띠는 더욱 날카로워져 마음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의 믿음(saddha)이 더 강해질 때, 그들의 정진(viriya)도 커진다. 그리고 그 결과, 사띠(sati)도 자연스럽게 계발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마디(고요하고 평온함)의 기능’(samadhi)을 계발한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사띠가 향상될 때, 마음은 자연적으로 명상의 대상에 훨씬 더 오래 머무르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집중’이란 말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나타낸 말이 아니다. 명상의 대상에 몰입되거나 고정되지 않는 대신, 매우 고요하고 이완된 평온한 마음으로 호흡에 아주 잘 머물러 있다. 이때, 강한 기쁨이 일어나고 몸은 매우 가벼워지고 붕 뜬 것처럼 느껴진다. 그 기쁨이 사라질 때, 강한 평온, 평정, 편안의 느낌이 일어난다.
수행자는 날카로운 알아차림(awareness)으로 이런 느낌들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나 , 수행자가 이 상태를 근사하고 좋은 상태로 생각하여 내적 언어화를 시작한다면,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마음속에 졸음이 매우 자주 들어올 것이다. 이것은 호흡으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그런 느낌에 집착하고 슬그머니 사로잡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상태를 생각하고 내적으로 언어화하기 시작하고 그 상태를 조절하려는 생각에 휩쓸림에 따라, 사띠가 사라진다.
이것은 기쁨과 평온에 대한 갈망을 가질 때에도 일어난다. 이러한 욕망은 마음을 매우 경직되게 하고, 들뜸(restlessness)과 불만족(dissatisfaction)이 일어나게 한다. ‘어떤 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있었으면’하는 바람이 정신적 향상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이렇게 짝이 된 수행의 장애들은 정신적 수행이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 수행자는 이 즐거운 머무름에 대한 생각을 더욱 사띠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믿음이 커지고, 정진도 커진다. 이것이 우리의 사띠를 향상시키고, 사마디(평온하고 고요한 마음)를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되게 한다.
“비구가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혜(또는 이해)의 기능’(panna)을 계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올바른 지혜의 완성과 성취에 도달하여 머문다.”
마음이 더 평온하고 고요해짐에 따라, 담마(실체)에 대한 진정한 본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혜 또는 지성의 계발은 현상이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얻어진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선정(명상의 단계)상태에서 앉기 수행 하는 동안이라도, 어떻게 기쁨이 일어나는지 본다. 그런 상태가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겪는다. 그리고 어떻게 평온과 행복이 일어나는지 본다. 그는 그런 현상이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겪는다. 그는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수행의 처음단계에서도 무상의 진정한 본성을 볼 수 있다.
그는 느낌과 감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한다. 또한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에 불만족함이 있고, 이런 느낌과 감정은 괴로움의 한 형태임을 안다. 특히 원하는 방식으로 이런 느낌과 감정들이 행해지지 않을 때, 괴로움과 불만족함이 있음을 안다. 진실로 이 과정의 불만족함을 볼 때, 이 과정이 비자아적인 과정(impersonal process)임을 분명하게 본다. 이런 현상들의 나타남과 소멸함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정[명상의 단계]에 있는 동안일지라도, 기쁨의 일어남을 실제로 조절할 수 없다. 기쁨은 기쁨이 일어날 조건이 맞으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결코 기쁨을 강제로 머무르게 할 수 없다. 기쁨은 조건이 맞을 때 사라질 것이다. 그런 멋진 기쁨이 사라짐은 불만족을 더욱더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 그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즉 아니짜(무상), 둑카(괴로움), 그리고, 무아(아나따)를 보는 것이고, 이것은 지혜를 계발하는 길이다. 그래서 순관과 역관 모두로 연기를 보도록 점진적으로 이끈다. (연기를 보는 것은 곧 사성제를 보고 체험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수행자가 연기를 보지 못했더라도, 세 가지 존재의 특성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 연기를 볼 때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동시에 본다. 이것을 뒤에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할 것이다.
(The Five Powers)
다섯 가지 힘[오력]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 정신적인 힘들을 계발하는 길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faith)의 힘을 계발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정진(energy)의 힘을 계발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띠(mindfulness)의 힘을 계발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마디(Stillness)의 힘을 계발한다. 그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혜(wisdom)의 힘을 계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올바른 지혜의 완성과 성취에 도달하여 머문다.”
이것들은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기능들(오근, indriya)과 같다. 그것들은 마음을 정화하고 이롭게 만들어 맑게 하기 때문에 힘(power, bala)으로 부른다. 이제 아나빠나사띠 경전을 다시 계속 살펴볼 것이다.
[14] “이 비구상가에는 자비(metta)를…연민(karuna)을 …더불어 기뻐함(mudita)을 …평정(upekkha)을 …부정관(meditation of foulness)을 …인식의 무상함(perception of impermanence)을 닦기에 몰두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 이 비구상가에는 이런 비구들이 있다. 이 비구상가에는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를 닦기에 몰두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정(upekkha)은 ‘네 가지 범천의 거처’ 즉 ‘경계와 제한이 없는 네 가지 마음 상태’로 알려져 있다. 이 명상 상태에 있을 때 마음에 경계와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부정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망(lust)에 강하게 끌리는 사람에게 적합하다. 사람 신체부위에 대한 혐오스런 성질과 그 요소들을 비추어 바라봄으로써 수행한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갈망하는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이 갖는 신체 부위의 안과 바깥이 바뀐다면 얼마나 갈망하게 될지 상상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창자와 간인가!” 또는 “와! 얼마나 아름다운 담즙, 고름, 담을 가지고 있다니” 그때 얼마나 많은 갈망이 마음에 있겠는가? 그래서, 이 명상은 갈망이 많은 성향의 사람이 평정에 있도록 돕는다.
인식의 무상함은 모든 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은 고요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보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은 마음이 갖는 무한 공간과 무한 의식의 명상상태를 말하고 있고, 그 때 마음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어떻게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이제 아나빠나사띠 숫따(호흡에 대한 사띠수행을 말한 경전)의 다음 구절로 넘어갈 것이다.
(Mindfulness of Breathing)
호흡(들숨날숨)에 대한 사띠
[15]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가면 , 큰 결실과 이익이 있다.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가면 , 사념처를 성취한다.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를 계발하고 닦아가면 ,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들을 성취한다. 칠각지를 계발하고 닦아가면 , 순수 지혜(true knowledge, vijja)와 해탈을 성취한다.”
우리는 경전 속에서 사념처 수행을 찾을 수 있고, 사념처는 평온하고 지혜로운 명상 상태인 선정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어떤 수행이론에서 ‘선정(명상 단계)을 경험하면서 사념처 수행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매우 다른 견해이다. 붓다는 한 가지 형태의 명상을 가르쳤다. 그것은 ‘사마타’ 또는 ‘평온함’ 또는 ‘사마디’라고 부를 수 있는 “평온-지혜 명상”(tranquil ‘wisdom meditation)이다.
[16] 그리고, 어떻게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야, 큰 결실과 이익이 있겠는가?
[17]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는 숲이나 나무 아래 또는 빈 오두막에 간다. 그리고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전면(in front of him)에 사띠를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확고한 사띠를 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숲이나 나무 아래 또는 빈 오두막에 간다.’는 문구는 수행의 장애가 거의 없는 조용한 장소에 간다는 것이다. 적당한 장소는 거리의 소음, 사람, 동물과 떨어져 있어 크고 끊임없는 음악이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다. 붓다가 살던 시절에, 대부분 사람들은 땅바닥 위에 앉아 명상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의자나 소파에 앉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곧바로 세워 앉는다.”의 구절처럼 바닥에 앉는다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일 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바닥에 앉아서 하고 싶을 때, 방석을 사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불편하고 고통스런 감각을 가지고 앉는 것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바닥에 앉는다고 마법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마법은 될 수 있는 한 편안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만약 바닥에 앉는 것이 매우 고통스런 경험이 된다면, 의자나 등받이 없는 앉음대 위에 앉아도 좋다. 그러나 , 명상자가 의자에 앉을 경우 매우 유의할 점이 있다. 의자에 기대지 말고 앉아야 하는 것이다. 기대는 것은 졸음이 오기 쉽고, 그것은 명상에 좋지 앉다!
‘상체를 곧바로 세운다.’ 는 경직되거나 불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등을 똑바로 잘 세워 앉는 것을 말한다. 똑바로 등을 잘 세우는 것은 척추 뼈가 위 아래로 쌓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야 등에서 에너지가 위 아래로 방해 없이 잘 흐를 수 있다. 기대는 것은 에너지가 흐르는 것을 막고, 졸음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제발 어떤 것에 등을 기대지 말기 바란다. 처음 수행을 할 때, 등을 세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근육들이 반항하고 불평하는 것 같다. 그러나 ,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지고 수행한다면, 사용하지 않아 온 근육들이 점차 적응되고 강해질 것이다.
또, 앉기수행을 할 때 어쨌든지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꿈틀거리지 말고, 손을 문지르거나 긁으려고 움직이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 앉기수행이 끝날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말기 바란다. 움직임은 수행의 연속성을 깨고, 수행을 완전히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어떤 명상 지도자들은 ‘사띠’를 하고있다면 , 움직여도 좋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 배우는 이들이 진정으로 사띠한다면, 마음과 싫어하는 감정을 지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감정을 둘러싸고 있는 마음을 이완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 몸을 움직여야 할 이유는 없다! 사띠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애롭게 받아들이는 것(lovingly-accept)을 말한다. 조절하거나, 저항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띠하는 것은 열려있고, 지금 이 순간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다.
면밀히 조사하는 중에 명상자가 움직인다는 것은 전혀 사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는 움직이려는 욕망에 굴복하여, 그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을 시작하고서 나서 수행의 미혹들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을 고요하게 머무르고 평온하게 유지해야한다. 붓다의 모습처럼 고요하게 앉아있는 것이 최선이다! 명상 중에 허용할만한 움직임은 오직 등이 굽거나 구부정하게 되기 시작할 때, 너무 자주가 아닌 조건에서 등을 똑바로 하는 것이다.
“전면에 사띠를 확립한다.”라는 말은 모든 세속적인 일과 감각적 쾌락에 휩쓸림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부드럽게 눈을 감고, 미혹시키는 소리, 냄새, 맛, 감각,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단순하게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명상의 대상으로 주의를 돌린다.
“확고한 사띠를 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는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수행 방법을 말하고 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말은 들숨을 쉬고 있을 때 알고 있고(being aware), 날숨을 쉬고 있을 때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알아차림(awareness)을 열어놓고, 가능한 호흡을 확고하게 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에서 긴장을 푸는 것이다. (이것은 잠시 후에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18] “길게 들이쉴 때, ‘길게 들이쉰다’고 이해하고 (understand, pajaanaati), 길게 내 쉴 때, ‘길게 내 쉰다’고 이해한다. 짧게 들이쉴 때 ‘짧게 들이 쉰다’고 이해하고, 짧게 내쉴 때 ‘짧게 내쉰다’고 이해한다.”
“이해한다”라는 굵게 강조한 이유는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호흡에만 강한 주시를 가지고 집중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지금 이 순간에 호흡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단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이다! 호흡이 길 때 오직 알고 있고, 호흡이 짧을 때 오직 알고 있다. 결코 호흡을 조절하지 말고, 대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을 오직 이해하고 있는 것(understanding)이다.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호흡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집중하면, ‘잘못된 집중’으로 머리에 두통을 키울 것이다. 명상의 대상을 꽉 붙잡고 마음을 강제로 ‘집중’하거나 수행의 미혹들을 쫓아내려고 할 때마다, 매우 경직되고 고통스런 긴장이 머리에서 자랄 것이다.
또, 미혹시키는 생각과 느낌을 거부하면서 앉기수행을 조절하려 하거나 명상의 대상으로 빨리 되돌아가려고 서두를 때, 머리에 긴장과 경직이 일어난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집중’수행방법 뿐만 아니라 ‘순간집중’ 수행에서도 일어난다.
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감각의 한 가운데에 주의를 두고,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다른 것을 일어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배우는 이들에게 강한 고통을 키우게 하고, 오히려 이것은 수행의 미혹이 되게 한다. 이러한 형태의 명상은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고통이 사라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한, 그런 긴장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경직되고 완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실, 이러한 경직되고 완강한 마음은 사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 경직된 마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많은 용기와 참을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경직된 마음을 키우고, 혐오가 저절로 생기게 된다. 그런 경직된 마음은 무상(아니짜), 고(둑카), 무아(아나따)를 알아차릴 수 없다.
결국, 명상하지 않을 때조차 이러한 억누름은 사람의 성격을 경직되게 하고, 그래서 정말 문제를 만든다. 그런 마음은 비평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성향이 있고, 경직된 인성을 계발하게 된다.
다른 형태의 명상을 해 왔던 많은 사람들이 자비관 안거수행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별로 좋은 행동과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이 명상법이 정말 나와 다른 사람을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인가요?”라고 묻는다. 만약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왜 나의 생각을 조화롭게 해 줄만한 또 다른 형태의 명상 수행법이 필요한지?’ 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쨌거나 이런 혐오는 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가르쳐 온 “집중”을 수행해서 억누를 수는 있다. 그러나 , 붓다가 가르친 방법은 결코 어떤 것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붓다의 방법은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 몸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마다, 먼저 고통의 감각에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감각에 대한 어떤 생각도 놓아버리고, 마음을 연다. 그 감각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놓아버린다. 그래서 어떤 정신적 저항이나 혐오 없이 그 감각을 그 자체로 놔둔다.
이것을 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마라. 이 고통이 있어도 괜찮다.” 그 다음에 머리에서 긴장을 푼다...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해짐을 느끼고...그리고서 명상의 대상, 즉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감각이나 고통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감각은 더 커지고 강렬해진다.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느낀다. ‘감각에 대한 이러한 생각’, ‘내적인 언어화’, ‘감각이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고통스런 감각에 대한 “자아-동일시”이다.
이것은 그 감각에 휩쓸리게 되어 조절하려는 것이다. 감각과 투쟁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인 담마(Dhamma)와 싸우는 것이다. 투쟁하고 조절하려고 하고 지금 이 순간의 담마에 마음이 경직될 때마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생기게 한다. 감각을 개인적으로 여기는 것도 담마와 투쟁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것은 고통을 악화시키고, 그 결과 더 심하게 다친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지금 이 순간을 자애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아-동일시’나 ‘생각 또는 내적인 언어화’가 없어야 하고, “나는 그렇다”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사마디), 평정(upekkha), 선명한 알아차림(삼빠잔냐, full awareness)과 사띠(mindfulness)를 얻는 방법이다.
붓다는 명상중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행할 세 가지 행위를 가르쳤다.
그것은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라. 지금 함께 있는 것을 사랑하라.”이다. 이 단순한 설명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받아들이도록 한다.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기”란 앉아서 명상할 때, 원하는 현상이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기”란 마음을 활짝 열고 현재 무엇이 일어나든지,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게 놔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좋은 줄임말은 “DROPS”(Don't Resist Or Push, Soften)로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말고, 부드러워져라.”를 나타낸다. 무엇이 일어나든지,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말고 부드럽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되어,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라. 이것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기” 이다.
“지금 함께 있는 것을 사랑하기”란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집착을 보고 놓아버릴 수 있도록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한 체험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고통과 슬픔을 보고, 자애롭게 그것을 놓아버릴 수 있다. 이것은 생각을 놓아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집착을 놓아버리고, 집착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온 몸(whole body)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경전에서 이 구절의 의미는 명상자가 들숨에서 호흡이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날숨에서 호흡이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이때 호흡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호흡을 과도한 집중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행해지고 있는 호흡을 단지 아는 것이다. 사띠가 충분히 예리해져서,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지 않으면서 호흡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지 항상 알고 있다. 오직 호흡과 알아차림이 자연스런 과정 속에 있게 한다.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tranquilizing)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이 간단한 구절은 명상 지침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의식이 일어날 때마다, 머리에서 긴장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그 긴장을 들숨과 날숨을 쉬는 동안 놓아버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서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되고 평온해짐을 느낀다. 마음이 호흡으로부터 달아난 것을 아는 매 순간마다, 미혹과 긴장을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긴장을 푼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되고, 고요해지고 맑아짐을 느낀다.
다음으로, 마음을 호흡으로 부드럽게 되돌린다. 호흡을 들이쉴 때, 머리와 마음에 있는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하게 한다. 호흡을 내쉴 때, 머리와 마음에 있는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하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오직 그 생각을 놓아버려라. 생각 속에서 중립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생각하지 말라. 그 생각을 오직 부드럽게 놓아버릴 뿐이다. 수행의 미혹이 어떤 감각이라면, 먼저 마음을 열고, 그 감각에 대한 혐오를 놓아버린다. 그리고 명상자의 주의를 호흡으로 돌리기 전에,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게 한다.
이렇게 마음을 열려 있고 넓어지게 하고, 머리에서 긴장을 놓아버리는 것은 미묘한 ‘자아-동일시’를 실제로 놓아버리는 것이다. 자아-동일시는 일어난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 이런 긴장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태어남(rebirth)을 일으키는 무지(ignorance)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명상지침을 열심히 따르는 도중에는 마음에 ‘표시’나 ‘니미따(nimitta)’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즉, ‘집중명상’을 수행할 때, 마음에 생기는 빛이나 마음이 만든 대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 강한 집중으로 억지로 명상의 대상에 마음을 머무르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집중은 머리에서 긴장과 고통을 생기게 한다. 지금 말하는 명상지침으로 모든 현상의 진실한 본성인 무상(아니짜) , 고(둑카, 불만족), 무아(아나따)를 체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머리와 마음의 긴장이 풀려 있음(relaxation)을 알아차린다. 또한 내쉬는 숨과 동시에 머리와 마음의 긴장이 풀려 있음을 알아차린다.
처음에는 들숨이나 날숨을 놓쳐도 괜찮다. 불필요한 압박을 스스로에게 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수행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쉬운 수행이다. 마음을 계발시키는 단순한 방법이다. 그래서 때때로 들숨이나 날숨을 놓친다면, 단지 놓아버리고 다음에 쉬는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린다.
단순하고 쉽지 않은가? 처음에는 호흡이 매우 빠르고 알아차리기 어렵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 계속 수행을 해나가면, 명상은 더 쉬워지고 들숨이나 날숨을 자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수행은 점진적인 훈련이다.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압박을 가할 필요는 없다. 명상 속에서 단지 이완되어 있어라.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호흡이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게 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명상자가 호흡에 너무 많이 ‘집중’할 때 일어나고, 머리에서 긴장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호흡이 다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면, ‘집중’에 초점을 맞추어서 마음이 충분히 평온하지 못한 것이다.
선정(명상의 단계)들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밀어붙여 강제로 하거나, 고정된 마음으로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붓다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런 형태의 명상을 가르쳤다.
[19] ‘기쁨(joy)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기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이것은 첫 번째 두 선정(명상 단계)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이 단계에 대한 설명은 경전에 여러 번 반복해서 정형화되어 나타난다.[12] 우리는 지금 이 초선과 2선정에 대한 설명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sensual pleasure)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명상을 시작할 때, 먼저 눈을 감는다. 이것은 보는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소리가 마음을 미혹할 때, 내가 그 소리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생각하지 말고 소리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라.
소리가 흘러가도록 놔두어라. 소리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라.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껴라. 다시 명상의 대상인 호흡으로 주의를 돌려라. 숨을 들이쉬면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마음이 열리고 넓어지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껴라. 숨을 내쉬면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어라. 마음이 열리고 평화로워지며 고요해지는 것을 느껴라. 미혹이 일어나기 전까지 호흡과 함께 머무르며 긴장을 풀고 마음을 이완시켜라.
마음을 호흡에서 달아나게 하는 냄새, 맛, 육체적 감각, 생각, 감각적 쾌락은 이렇게 대처해라. 감각 기관을 통해 생긴 미혹이 흘러가게 놓아버리고, 미혹에 대한 정신적 집착을 이완시킨다.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마음이 열려있고 넓어지게 한다. 그리고 다시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때때로 감각적 쾌락이 일어나더라도 상관하지 말아라. 감각적 쾌락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오직 놓아버려야 함을 기억하라.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고, 호흡으로 돌아오라.
‘...불건전(unwholesome)한 상태들에서 벗어났다...’
마음이 호흡에서 벗어나 일어나는 느낌들을 생각하게 되면, 마음은 그 느낌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렇게 느낌에 대해 생각하고, 느낌을 조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느낌을 더 크고 강하게 해서 더 큰 고통이 일어나게 한다.
이 정신-물질 과정은 집착에 기인한 오온(다섯 무더기)으로 구성된다. 색온(육체적인 몸, 물질), 수온(정신적/육체적인 느낌), 상온(인식, 인지, 산냐), 행온(의도, 생각, 자유의지, 상카라), 식온(의식)이다. 오온을 보게 된다면, 느낌과 생각이 다른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관찰하게 된다. 불행히도, 우리는 느낌이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하는 습관을 키워왔기 때문에, 느낌을 더 크고 강해지게 만든다. 그 결과, 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붓다의 명상법을 수행할 때, 이렇게 생각하는 오랜 습관을 이해하고, 단지 놓아버려야 한다. 그래서 , 신체적이거나 감정적인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놓아버려라...이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어라...마음이 넓어짐을 느껴라. 그리고서 고요해지고 평온해짐을 느껴라...그 다음에 호흡으로 주의를 돌려라...이럴 때, 느낌의 진정한 본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느낌은 그런 상태로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이렇게 저절로 일어나고 무상하며 변화하고 있다. 이런 엄청난 고통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분노와 슬픔, 공포, 좌절, 의심 등의 느낌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들은 일어났으면 하는 욕망과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 느낌들은 지속될 수 있는 만큼만 머무른다. 이런 느낌을 조절하고 밀어붙여 싸우려 할수록, 느낌은 훨씬 더 커지고 격렬해지며 오래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느낌을 조절하고 싶을 때마다, 그 감각이나 감정을 개인적인 것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얼마나 고통을 주고, 어디에서 왔고, 지금 왜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 생각한다. 그래서 ‘아! 나는 그 느낌이 싫고, 사라지기를 바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느낌에 대한 생각은 그 느낌에 대한 ‘자아-동일시’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거부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의 ‘담마’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고통이나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진리는 바로 그곳에 있다. 어떤 저항, 조절하려는 노력, 생각을 떨치려는 욕망, 느낌에 대한 투쟁은 단지 더 많은 괴로움을 일어나게 한다.
어떤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을 열고...조절하려는 욕망을 놓아버린다...느낌이 존재하는 사실을 자애롭게 받아들이고, 느낌이 거기에 존재하도록 관용하는 것이다.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마라. 부드러워져라...이것의 줄임말인 DROPS(Don't Resist Or Push. Soften)은 평정(upekkha)의 계발로 이끄는 받아들임(accepting mind)과 열린 마음(open mind)을 가지게 하는 열쇠이다. 아무리 작은 저항과 긴장일지라도, 거기에는 집착하려는 자아-동일시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른 아침 당신이 일하러 왔을 때, 한 친구가 당신에게 다가와 욕을 한다면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일어날까? 당신은 보통사람들처럼 화가 나고 싸우고 싶어, 그 사람에게 되받아 욕을 할 것이다. 친구가 가버렸을 때 당신은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했고 말했는가? 당신의 친구는 무엇을 말했으며 무엇을 말했어야 했는가? 당신은 ‘그렇게 느끼고 말하는 것이 옳고,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노의 느낌은 강하고, 그 분노에 집착하고 있는 생각들이 있다.
잠시 후, 다른 일상 활동 속에서 당신의 주의가 흩뜨려진다. 그러나 당신의 분노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말을 건다면, 욕을 한 그 친구에 대해 불평을 토로할 좋은 기회라 여길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불평과 분노를 토로하고, 그것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날 하루, 당신이 집착한 그 느낌과 생각들이 이따금씩 일어난다. 사실, 이런 생각은 녹음테이프에 녹음된 것과 같다. 정확하게 같은 언어와 같은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그 날 하루가 끝나가고 주의가 많이 흩트려져서 당신에게 그런 느낌이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당신은 앉아서 명상할 시간을 갖고 마음을 정화한다. 그러나 명상 중에 무엇이 일어나겠는가? 그것은 바로 분노와 연상되는 생각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느낌과 생각 속에 휩쓸리는 것을 놓아버리면서 무관심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생각들이 느낌을 커지게 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마음이 유연해지기 시작한다.
...‘상관하지 말아라.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유연해져라...‘그대로 놔두어라’...마음을 열고, 그런 생각을 둘러싼 정신적 긴장의 매듭을 놓아버려라...그 느낌에 대한 혐오를 놓아버려라...마음이 커지고 이완됨을 느껴라...이제 머리에 생긴 긴장을 풀어라...마음이 고요해짐을 느껴라... 매우 분명하지 않는가!...이제 호흡으로 부드럽게 돌아가라..들이쉬는 숨에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항상 마음이 열려있고, 커지고 평온해짐을 느껴라.
그런 후에 분노가 다시 일어난다면, 같은 일을 반복해라...그 생각에 휩쓸리지 말고, 생각 그 자체로 놔두어라. 마음을 열려 있게 하고, 정신적인 붙잡음을 이완시켜라...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어라...부드럽게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려라.
마음이 분노의 느낌에 아무리 여러 번 되돌아가도 상관하지 말라. 매번 같은 식으로 다루어라. 그 느낌 그 자체로 놔둘 때, 그 느낌을 자아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라. 그래야 느낌에 대한 자아-동일시가 없다.
이것이 느낌에 대한 진정한 본성을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느낌은 전에 그런 상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무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느낌이 일어날 때, 평온과 평화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분명히 고통스럽고, 사실적인 괴로움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느낌에 휩쓸리거나 생각하지 않고 느낌 그 자체로 있게 한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정신적 긴장을 풀어 사라지게 할 때, 무아의 본성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체험한다.
계속 마음을 이완시키고 모든 미혹을 놓아버림에 따라, 집착은 더 적어지고 약해진다. 마침내 집착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정도가 된다. 이렇게 되면, 해방과 기쁨이 마음속에 채워진다. 이러한 집착의 놓아버림은 불건전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명상자가 놓아버리게 될 때, 기쁨이 일어나고 상당한 시간동안 그 기쁨이 지속된다. 그 결과, 마음은 매우 평온해지고 평화롭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명상의 대상에 매우 쉽게 머무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반복해서 행한다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그때, 평정(upekkha)과 조화가 마음에 계발되기 시작한다.
‘...비구는 일으킨 생각(위따까,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vicara)을 갖추고, 초연함(seclusion)에서 생겨난 기쁨(삐띠, piti)과 행복(수카, sukha)을 가진 초선(명상단계)에 들어가서 머문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초선이라 말하는 명상 단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 초선 상태에서도 아주 약하지만 배회하는 생각(wandering thought)이 여전히 존재한다. 마음이 호흡에서 벗어났을 때에 명상자의 마음이 이완되어 있다면, 배회하는 생각을 매우 빨리 알 수 있다. 오직 놓아버린다...호흡에 돌아오기 전에 긴장을 푼다.
어떤 명상지도자는 이것을 근접삼매라고 부른다. 그러나 , 그들은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이 아닌 “집중명상”이라는 견지에서 보고 있다.
일으킨 생각(위따까,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vicara)은 사유(thinking mind)와 배회하는 생각(산만한 생각)에 대한 설명이다. 어떤 번역은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을 각각 사유(thinking)와 조사(Examining or Pondering)로 옮긴다. 다른 선정 단계에서도 머무는 사유(directed thoughts)가 있을 수 있다. 머무는 사유와 산만한 생각에는 차이점이 있다. 산만한 생각은 과거에 일어난 것, 미래 또는 보고 싶어하는 공상과 관련한 생각이다
머무는 사유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음이 바로 지금 매우 행복하다. 마음이 매우 고요하다. 몸은 바로 지금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다”처럼 관찰하는 사유들이다.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일으킨 생각(위따까)은 마음이 미혹될 때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리는 마음이다.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은 다시 주의가 벗어남 없이 호흡에 머무는 마음이다.
마음이 명상의 대상에 점점 더 오래 머무르게 될 때, 해방과 기쁨이 매우 강해질 것이다. 기쁨은 몸과 마음에 모두 행복한 느낌이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속에서 미소를 느낄 것이다. 그때 몸과 마음은 매우 가벼워져서 거의 붕 뜨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즐겁고 좋은 경험일 것이다. 어떤 명상지도자들은 기쁨이 일어날 때, “집착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 그들의 제자들은 어떻게든 집착하지 않도록, 기쁨에 대해 염려하고 밀쳐 내려고 한다. 그러나 , 이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중립적이거나, 어떤 느낌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마음이 호흡에 머무르며, 열려있고, 마음이 이완되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 어떤 느낌에 끌어당겨졌다면, 느낌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긴장을 풀어라. 그리고 마음이 열려있고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서 호흡으로 돌아가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해서 휩쓸리면 애착과 갈망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생각에서 집착이 일어난다.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존재하게 허용한다면, 집착하지 않고 명상의 대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기쁨이 사라진 후에,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고 편안하게 된다.
편안하고 평온한 이런 느낌을 초연함에서 생겨난 행복(happiness)이라 부른다. 명상자가 이런 명상 단계에서 처음에는 십분 또는 십오 분 앉을 수 있고, 수행함에 따라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초선(명상 단계)이다. 이것은 마음이 미혹되지 않고 감각적 쾌락, 불건전한 습관, 마음 상태를 얼마동안 계속해서 놓아버릴 때 일어난다. 수행자가 이와 같은 고요한 상태를 경험할 때, 명상하는 이유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때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미혹이 거의 없는 행복한 상태이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그런 경험 후에, 수행자는 열의를 갖게 되고, 앉아서 수행할 때마다 그런 상태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 그런 고요한 마음 상태를 가지려는 욕망은 그 상태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더 많은 노력을 쏟는다. 불행히도, 마음은 더욱더 불안하고 동요된다. 이것은 어떤 것이 특별한 방식으로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욕망 때문이다. 그것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몰아붙이고 강제로 고요하고 평온해지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났으면 하는 집착 때문에, 고요한 명상 단계를 경험할 수 없다. 이런 욕망 때문에 현재 그 순간에 치우치게 한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순간을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현재 순간이 원하는 것과 맞지 않으면,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고요한 마음은 그것이 일어날 만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오직 강한 욕망을 이완하고 놓아버려라.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 따라 그것들이 되어갔으면 하는 바램을 버리고, 고요하게 있어라. 초선(명상의 단계)을 경험한 후, 다음 앉기수행에서 상당히 활동적인 마음을 갖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사띠는 예리하고 마음이 벗어났을 때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열려있게 하고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고요해짐과 들숨에 대해 열려있음, 고요해짐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이완됨...
오래지 않아, 마음은 다시 안정되고, 기쁨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기쁨이 사라질 때, 다시 편안한 행복과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을 경험할 것이다.
이때에도 집착에 기인한 오온(다섯 무더기)을 여전히 경험한다. 여전히 들을 수 있고,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모기가 몸에 앉았을 경우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모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미혹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놓아버린다...머리와 마음에서의 생긴 긴장을 풀고 나서 부드럽게 호흡으로 되돌아온다.
수행자가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열고 고요하게 함에 따라, 마침내 더 이상 방황하는 사유(wandering thoughts)가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기쁨이 좀더 강해지고 오래 지속된다. 기쁨이 사라지면, 편안함과 행복이 더 강해지고 고요한 마음이 호흡 속에서 더 깊어진다. 이 상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다시, 일으킨 생각(위따까,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vicara)을 가라앉힘으로, 비구는 위따까와 위짜라가 없고, 확신(self-confidence)이 있으며 고요한 마음 상태에(singleness of mind)있고, 마음의 고요(stillness of mind)에서 생겨난 기쁨(삐띠, piti)과 행복(수카, sukha)을 가진 2선에 들어가서 머문다.”
위따까와 위짜라의 가라앉힘은 마음이 매우 고요하고 명상의 대상에 아주 잘 머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과거나 미래에 대한 산만한 생각이 없다. 그러나 , 여전히 관찰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진정한 명상은 고요하고, 열린 관찰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모든 감각의 문이 활동하기 때문에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 예를 들어, 소리가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어디에 처해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
경전에서 말하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은 스스로 명상이 잘 행해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때 얻는 확신에서 유래한다. 자기-확신은 앉기명상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고요한 마음은(singleness of mind) 마음이 매우 고요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는 상태이다. 호흡에 기꺼이 머무르고, 들숨과 날숨 속에서 열려있고 이완된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초선과 2선에 대한 설명이다. 이제 아나빠나사띠 경전으로 돌아가자.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이 계속 향상되고 고요함과 열린 마음을 유지함에 따라, 마침내 기쁨이 너무 거친 느낌이 된다. 그래서 기쁨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럴 때 한 명상자가 스승에게 다음처럼 희극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제자: 제 명상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스승: 왜 그렇게 말하지?
제자: 더 이상 ‘기쁨(삐띠, joy)’을 느끼지 않습니다.
스승: 그것이 나쁘다는 것인가?
제자: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 ‘기쁨(삐띠)’을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스승: 이전보다 편안하고, 더 고요한가? 마음에 강한 균형감을 느끼는가? 큰 안락함을 느끼는가?
제자: 예, 그 모두를 느낍니다. 그러나 ,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다.
스승: 좋다. 계속 그렇게 해라.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 기쁨(삐띠, joy)이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이완되어 있어라.
기쁨(삐띠, joy)이 저절로 사라지고, 강한 조화와 고요함이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이따금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앉기명상 중에 어떤 사람이 그의 몸을 만진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 마음은 그런 것에 미혹되지 않는다.
경전에서 ‘명상자가 선명한 알아차림 (full awareness)을 가진다’고 할 때 이것을 말한다. 다음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또한 기쁨(삐띠, joy)이 사라짐으로, 비구는 평정(upekkha)에 머문다. 사띠(mindful)와 선명한 알아차림(fully aware)이 있고, 아직 몸으로 행복을 느낀다. ‘그는 평온과 사띠를 가지고 행복에 머문다.’라고 성자들이 설한 것처럼 그는 3선에 들어가서 머문다.”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3선에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음은 매우 맑게 깨어있고 조화 속에 있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명상의 대상에 편안하고 쉽게 머무르고 있다. (사띠하며) 깨어있고, 마음속에 평정(upekkha)을 가지는 것은 평소와는 다른 경험이다. 그리고 이 명상 상태는 전 생애를 통해 가장 높고 최고의 느낌이다. 더욱이 강한 평정(upekkha)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몸과 마음이 매우 이완되고 편안하다. 얼마나 멋진 상태인가! 이것이 성자들이 이 상태를 찬양하는 이유이다. 머리에서 경직이 이완되어 있는 것 외에, 몸의 긴장이 풀려있고 감각적 느낌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정신적 경직은 몸에 긴장을 일으킨다. 하지만 지금 마음이 매우 편안하기 때문에, 몸에서 감각되는 긴장도 사라진다. 이 상태일 때, 몸은 매우 부드럽고 편안해서 느낌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를 만진다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사띠와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음은 주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고, 일어나는 것에 동요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들숨과 날숨에서 행복을 경험한다’ 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정된 집중 명상’을 가르치는 어느 명상지도자는 이 선정상태일 때, 몸이나 모든 감각기관에서 더 이상 어떤 현상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명상자가 어떤 사람이 그들을 막대기로 때리거나, 그들의 손과 발의 위치를 바꾼다해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음이 매우 깊이 명상의 대상에 몰입되어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전을 읽어보거나,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분명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음의 작용(심행, mental formation)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tranquilizing)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마음이 계속 고요해지고 넓어지고 이완됨에 따라, 저절로 더 깊은 상태로 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몸과 마음에서 행복은 너무 거친 느낌이 되어, 마음에서 이례적인 평정(upekkha)과 조화를 경험한다. 이것은 경전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짐과 함께 행복과 괴로움을 버림으로, 비구는 괴롭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평정(upekkha)으로 인해 사띠가 청정한 4선에 들어가 머문다.’
마음이 매우 조용하고 고요할 때, 수행자는 깊은 평온(tranquility)과 평정(upekkha)을 경험한다. 그러나 여전히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몸에서의 감각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런 현상들에 결코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이 명상 단계(선정)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평온한 마음은 청정하고 빛나고 나무랄 데 없으며, 불완전함을 제거했고 유연하고 알맞으며, 안정되어 있고 동요하지 않음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진지한 명상자가 이 단계에 이를 때 기대할 수 있는 상태이다. 마음은 대단히 맑고, 빛나고 깨어있다. 마음은 수행의 미혹이 막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도 알 수 있다. 그때 그것을 놓아버리고 열려 있다.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해지고 호흡에 되돌아온다.
‘행복과 괴로움의 버림’이란 말은 행복과 괴로움이 때때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종종 일어나지만, 마음은 조화 속에 있어서 미혹에 흔들리거나 동요되지 않는다. 마음은 행복과 괴로움이 일어날 때 잘 알아차리고, 평정(upekkha)과 사띠가 매우 강해서 그것에 관심 갖지 않게 된다.
‘그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짐과 함께’의 의미는 마음이 낮은 감정 상태인 좋아함과 싫어함을 놓아버린 것을 말한다. 이 보다 낮은 모든 선정 단계에서부터 감정적인 마음 상태를 놓아버리게 된다. 먼저 명상을 배우기 시작할 때, 마음을 종종 움직여온 매우 낮은 거친 상태들을 놓아버린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알고 난 후, 수행의 미혹이 일어남 없이 오랫동안 앉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과 다른 선정요소들을 경험한다. 마음이 더 깊은 상태가 될 때,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이 사라진다. 기쁨은 잠시동안 더 강해진다. 그리고 점차 기쁨은 너무 거친 요소가 되어, 마음은 기쁨에 너무 많이 동요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적으로 명상의 대상에 더 깊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쁨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이때 마음에 평정(upekkha), 행복(happiness), 사띠(mindfulness),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이 있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매우 행복한 상태이다. 그러나, 결국, 행복은 너무 거친 느낌이어서 마음은 호흡에 더 깊이 나아가고, 동시에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하는 것을 계속한다. 이 때, 호흡과 마음의 이완(relaxing of mind)은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행복은 사라지고 마음에 남아있는 것은 강한 평정(upekkha), 강한 사띠(exceptional mindfulness), 마음의 고요(composure of mind)이다.
이것이 수행자가 마음의 작용(심행)을 경험하고 평온하게 하는 방식이다. 크리슈나무르띠는 진정한 명상상태를 이렇게 말했다. “명상하는 마음은 고요하다. 그것은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침묵이 아니다. 고요한 저녁의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이 가지는 이미지나 언어와 지각이 완전히 멈출 때의 침묵이다. 이렇게 명상하는 마음은 종교적인 마음이다. 이 종교는 교회, 사원, 염송으로 접촉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 “그는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때,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가장 작은 미혹들도 모두 알 수 있고 곧바로 쉽게 놓아버릴 수 있다. 먼저, 마음의 긴장을 놓아버린다...이제 호흡으로 되돌아간다...들숨에서 열려 있고, 넓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날숨에서 느슨하고, 쭉 펴져 있고 이완되어 있다.
“그는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gladdening)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자가 이 명상상태에 이를 때, 더 미묘하고 고양된 기쁨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깨달음의 한가지 요소인 기쁨(Pharana Piti)으로 기술된다. 마음은 매우 평화로운 행복에 있고, 전과 완전히 다른 편안함에 있다. 이것은 마음이 행복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마음의 기쁨(gladdening)이라 부른다. 그때, 마음은 대단히 고양되어 있고, 매우 맑으며 사띠가 전보다 더 예리해져 있다. 평정(upekkha)은 더욱더 조화되고 고요한 상태이다.
“그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stilling)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때 미혹이 거의 없고, 마음은 더욱 미묘하고 고요해진다. 미혹들이 일어날 때, 재빨리 알고 놓아버린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호흡으로 되돌아간다. 호흡과 평온한 마음은 더 자연스럽고 쉽게 고요해진다. 이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일어난다.
“그는 ‘마음을 해탈(liberating)케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의 해탈은 수행자가 호흡에 ‘기쁨으로 가득찬 흥미’를 가지고 호흡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동요하거나 호흡에서 벗어날 때 알아차리고 미혹에 대한 동일시 없이 놓아버린다. 그리고 호흡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음을 이완한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날 때, 재빨리 이것을 알고 주저하지 않고 놓아버린다. 이 상태에서 ‘나태와 무감각’, ‘들뜸과 불안’은 수행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일어난 장애는 선정에서 나오게 하고, 다른 미혹들을 일으킬 것이다. ‘마음의 해탈’이란 말은 어떤 방식이든지 집착하지 않고, 낮은 선정들의 단계와 모든 선정 요소들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동일시하지 않는다.
[21] “그는 ‘무상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무상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호흡과 마음의 고요와 확장에 대한 명상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마침내 마음은 매우 깊어진다. 그리고 마음이 더 넓어지고 커지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마음의 고요와 광대함이 함께 나아간다. 헤아릴 수 없는 고요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마음이다. 이 상태를 실제로 말하자면, 중심이 없고 바깥 모서리가 없다. 계속 커지고 확장된다. 경계가 없고 공간과 마음이 무한한 것을 보기 시작한다. 맛지마 니까야 111 경전, 아누빠다 숫따 경에 이렇게 써있다.
‘다시, 물질(색온)에 대한 인식을 초월하고, 모든 적의(patigha, resistance)의 사라짐과 인식의 변화에 이끌리지 않음으로, 공간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비구는 공무변처(base of infinite space)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 공무변처의 상태-공무변처라는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 됨(unification of mind)-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 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물질(색온)에 대한 인식을 초월한다’의 의미는 수행자가 그때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이 알아차림에서 마음이 몸으로 쉽게 이끌리지 않는다. 이 선정 상태에서는 마음 그 자체와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아차린다.
‘모든 감각적 적의의 사라짐과 인식의 변화에 이끌리지 않음’은 비록 몸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에도 고통을 알아차리지만 그 감각에 개입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몸이 커지고, 변화하고 확장되는 것을 느끼지만, 호흡과 이완된 마음(relaxing of the mind)에서 벗어나 미혹되지 않는다. 명상자의 마음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확장된다. 그러나 명상자의 마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받아들인다. 무상을 보고 어떻게 마음이 변화하고 확장되는지 본다. 수행자는 이러한 현상이 조절하지 않은 무아적인 과정의 일부분임을 깨닫는다.
수행자가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열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마침내 의식(consciousness)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계속해서 다가오고 멀어지고, 중단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의식(consciousness)이 모든 감각기관에서 존재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계속한다. 이것이 아누빠다 숫따 경전에서 이렇게 기술된다.
‘다시, 공무변처(the base of infinite space)를 완전히 초월함으로써, 의식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아차림으로 비구는 식무변처(the realm of infinite consciousness)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식무변처의 상태-식무변처라는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됨-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 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무한 의식 상태에 있을 때, 여전히 무감각이나 둔감한 마음, 들뜸 같은 어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수행의 장애는 수행에 쏟는 에너지가 완전히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에너지가 너무 없다면, 둔감함(dullness)을 경험한다.(이때 명상자에게 졸음이 있는 것은 드물다.)
한편, 수행자가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과도한 에너지를 수행에 쏟는다면, 들뜸(restlessness)이 일어날 것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의 장애가 마음에 존재할 때, 선정에서 나오게 할 것이다. 이 상태에 있을 때, 변화가 매우 빠르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매우 성가신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불만족이 의식상태와 함께 일어나는지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 수행자는 무상, 고를 직접 본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을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사건들은 스스로 일어난다. 그 결과, 수행자는 이러한 정신-물질 현상 속에서 무아의 본성을 본다. 이것이 무상을 주시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얻어질 수 없고, 개인적인 깨달음의 경험을 통해 얻는다.
다시 아나빠나사띠 경전으로 돌아가자.
‘사라짐(탐욕의 여읨)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사라짐(탐욕의 여읨)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자가 들숨에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날숨에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계속 수행함에 따라, 이제 마음은 전에는 서슴없이 보아왔던 모든 의식을 놓아버린다. 그때 마음은 무소유처(the realm of ‘nothingness)에 들어간다. 이것은 마음이 볼 외부 현상계의 것들이 없는 상태이다. ‘마음 외부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고 있는 마음이다. 아누빠다숫따 경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식무변처(infinite consciousness)를 완전히 초월하며,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이와 같이 비구는 무소유처(the base of nothingness)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무소유처의 상태 - 무소유처의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됨-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 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 상태는 매우 흥미로운 상태이다. 비록 보아야 할 외부의 마음과 정신적 요소들(metal factors)이 없더라도, 여전히 지켜보고 관찰할 것들이 많이 있다. 수행자는 여전히 집착에 기인한 오온을 가진다. 그리고 너무 느슨해있거나 힘이 넘치게 될 때마다, 여전히 수행의 장애들이 불쑥 나타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 칠각지가 차례차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기력(torpor)이 일어날 때, 수행자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 현상(법)에 대한 고찰, 정진, 기쁨’의 요소들을 각성시킴으로써 마음을 균형 잡아야 한다.
들뜸이 일어난다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 편안(경안), 사마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각성시켜야 한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이때, 마음은 매우 미묘하고 교묘해진다. 명상상태를 미혹하는 미묘한 과정들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사띠가 매우 강하고 이러한 속임수들을 매우 쉽게 볼 수 있다.
그는 ‘소멸(cessation)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소멸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이 들숨과 날숨에서 계속 더욱 고요해진다. 이때 마음은 작아지기 시작하고, 수축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마음은 매우 미묘하고 고요하게 된다. 아누빠다 숫따 경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다시, 무소유처(the base of nothingness)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구는 비상비비상처(base of neither-perception nor non-perception)에 구족하여 머문다.’
마음은 매우 미세해지고, 거의 움직임이 없다. 때때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렵다. 또한 마음의 인식(perception, 산냐)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렵다. 이렇게 매우 미세한 마음 상태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 마음이 현존하고 있는 것을 아직 인식하고 있을 때, 수행자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넓히는 수행을 계속한다면 여기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수행자는 호흡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러나 , 여전히 어떤 느낌들이 일어난다. 이때 수행자는 오랫동안 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완전히 적정상태(total tranquilizing)에 있고 모든 에너지가 이완되어 있다. 또한 청정무구한 상태에 있고, 더 오래 앉을수록 더 좋은 상태다. 수행자는 서너 시간, 또는 다섯 시간동안 앉기 시작한다. 안거수행 기간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수행하는 집에서도 수행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때, 몸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느낌을 여전히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을 열려 있고 넓어지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매우 미세하고 세밀하게 되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된다. 결국에는 ‘니로다사마빳띠(Nirodha Samapatti)’ 라고 불리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 상태’(상수멸)를 경험한다.
“그는 ‘놓아버림(relinquishment)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놓아버림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 명상상태는 출세간적 열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순간과 매우 가까운 것이다. 출세간적 열반은 순관과 역관의 십이연기(빠띠짜사무빠다)를 모두 보게 될 때 경험한다.
이것은 인식(산냐)과 느낌이 다시 돌아오고, 다시 알아차리게 된 후 일어난다. 궁극적인 무지(final ignorance)를 봄에 따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 탐욕을 여의게 되고,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이것이 모든 연기 고리를 직접 봄으로써 출세간적인 열반상태를 경험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깨어남의 가르침’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누빠다 숫따 경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시,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구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 상태’(상수멸, cessation of perception and feeling)에 구족하여 머문다. 그래서 지혜를 가지고 봄으로써 그의 번뇌는 멸진되었다.”
상수멸의 상태에 있을 때,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어떤 인식(산냐)과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아주 어두운 밤에, 모든 빛이 꺼진 것과 같다.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그 순간에 손을 얼굴 앞에 놓더라도 알 수 없다. 이 상태는 인식(산냐)과 느낌이 전혀 없는 것과 유사한 상태다. 이 상태로 오랜 시간 앉아 있을지 모른다. 인식(산냐)과 느낌이 되돌아오고, 그의 사띠가 충분히 예리해졌다면, 그들은 사성제의 두 번째, 괴로움의 원인(즉, 연기의 원인과 결과 관계)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 모두를 보고 난 후, 수행자는 사성제의 세 번째, 괴로움의 소멸(즉 어떻게 이러한 연기 고리들이 그치게 되고, 하나의 놓아버림이 다른 것의 놓아버림으로 직접 이르게 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수행자에게 저절로 보여지게 된다. 수행자가 연기를 배웠던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기억되거나 학습한 앎이 아닌 지혜이다.
‘그래서 지혜를 가지고 봄으로써 그의 번뇌는 멸진되었다.’는 사성제를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연기를 본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성제를 본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원인을 보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사성제의 세 번째)을 본다면, 수행자는 자연히 사성제의 네 번째를 보게된다.
다른 세 가지 사성제를 보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수행해야만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네 번째 사성제이다. 그래서, 연기를 직접 본다는 말은 수행자가 모든 사성제(고귀한 진리)를 보고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놓아버림을 주시하는 방법이다.
[22]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이렇게 계발하고 닦아가면, 큰 결실과 이익이 있다.”
(Fulfillment of the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의 성취
[2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어떻게 계발하고 닦아가면, 사념처를 성취하는가?”
[24] “비구들이여, 어떤 경우든지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이해하고(pajaanaa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이해한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이해하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이해한다.
‘어떤 경우든지(on whatever occasion)’라는 말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뜻을 암시한다. ‘어떤 경우든지’라는 것은 단지 앉기수행만이 아닌, 모든 순간을 말한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음이 무겁고 많은 생각들이 일어날 때, 이것을 알아차리고 생각들을 단지 놓아버린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신적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마음이 평온하게 될 때 한두 번 숨쉬는 동안 호흡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사띠를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고, 의식상태에 대한 알아차림을 향상시키는 분명한 실천 방법이다. 매순간 이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때, 삶을 올바르게 보고 인식하게 한다. 일하거나 쉬는 동안에서도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보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어떤 경우든지’ 라는 말은 걷기명상에도 또한 적용된다. 어떤 명상 지도자는 주의를 발에 기울일 것을 추천하지만, 그 대신 걷기 명상하는 동안 들숨과 날숨에서 이완되어 있으면서 마음에 주의를 계속 기울일 수 있다. 이것이 몸에 대한 사띠이고 다른 행동에도 확대하여 적용시킬 수 있다. 마음을 사띠하는 것은 알아차려야 할 매우 중요한 대상이고, 육체적인 몸보다 훨씬 더 쉽게 지켜볼 수 있다. 마음이 긴장하고 경직된 상태를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럴 때 이완되고, 머리에서 긴장이 풀어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완전히 이완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더라도, 한두 번 숨 쉬는 동안 호흡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담마빠다(법구경)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을 기억해라. “모든 선하고 악한 심리 상태는 마음을 뒤따른다. 마음은 그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마음을 뒤따르고, 마음은 어떤 것을 행복이나 고통으로 만든다. 몸의 모든 움직임을 따라가려 한다면 분명하게 그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움직임과 의식으로 일어난 긴장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라고 말할 때 붓다가 의도한 것은 마음과 모든 마음의 움직임과 긴장하게 되는 경향을 직접 알아차리는 것이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몸의 작용(신행, bodily formation)을 평온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 비구들이여, 이렇게 수행할 때 그 비구는 몸을 단지 몸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비구들이여, 이 들숨날숨이란 것은 몸들 가운데서 한가지 [형태의] 몸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 때에 몸을 단지 몸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 선명한 알아차림과 사띠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내는 것이다.”
‘온 몸을 경험한다’와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tranquilizing, passambhayam)하게 한다.’는 말은 앞에서 말했다. 그래서 , 그 부분들을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겠다. “몸을 단지 몸으로써 주시한다.”는 말은 호흡에 대해 자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열심(atapi)이라는 말은 부지런히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음을 말한다.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는 선정상태 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마음 깨어있음과 연관되어 있다. “평온한 선정” 상태에 있을 때,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주 잘 알아차리고, 사띠는 예리하고 분명하다. 그리고 ,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음 상태, 느낌, 감각, 미혹과 선정의 요소(기쁨, 행복, 평온, 고요함, 평정의 요소)를 관찰할 수 있다.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라는 말은 미혹, 감정, 고통스런 느낌, 즐거운 느낌, 행복한 느낌에 대해 마음이 좋아함과 싫어함을 초월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고통을 일어나게 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머지는 호흡명상이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수행의 한 부분이고, 사념처의 첫 번째인 신념처(몸에 대한 사띠수행)와 일치하는 것을 말하는 반복적인 구절이다.
[25] “비구들이여, 비구는 ‘기쁨(joy)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기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행복(happiness)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의 작용(심행, mental formation)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것은 이전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경전의 다음 구절로 넘어가겠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수행할 때 그 비구는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비구들이여, 이 들숨날숨이란 것은 느낌들 가운데서 한가지 [형태의] 느낌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 때에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 선명한 알아차림과 사띠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내는 것이다.”
이 구절은 첫 번째 네 가지 선정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느낌들 중 가장 중요한 느낌은 들숨과 날숨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명상의 다른 단계들을 경험해 나가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호흡의 느낌을 주시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명상의 진전 또한 멈춘다. 호흡의 느낌에 머무르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하다. 이것은 사념처의 두 번째인 수념처(느낌에 대한 사띠수행)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26]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stilling mind)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다시 반복되는 구절이다. 앞의 설명을 참조하기 바란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수행할 때 그 비구는 마음을 단지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비구들이여, 사띠를 놓아버리고 선명한 알아차림을 지니지 않은 자가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닦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 때에 마음을 단지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 선명한 알아차림과 사띠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내는 것이다.”
“사띠를 놓아버리고 선명한 알아차림을 지니지 않은 자가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닦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 경전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문구 중 하나이다. 사띠의 기능은 기억하는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는 것인가? 명상의 대상에 대해 기꺼운 흥미로움(joyful interest)과 분명한 이해(clear comprehension)로써 머무르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평온한 선정’ 상태에 있을 때, 마음은 매우 맑고 밝고, 깨어있게 된다.
수행의 길이 점점 더 깊어짐에 따라, 더 심오한 마음 상태가 드러난다. 사띠와 선명한 알아차림은 매우 순수해지고, 가장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도 주시하고 놓아버릴 수 있다. 마음은 더 이완되고, 더 확대되고 광대해진다. 긴장에서 자유로워지고 호흡을 지켜보기 더 쉽고 분명하게 된다. 수행자의 주의 깊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면, 마음은 이전보다 더 고요하게 된다. 이것이 사념처의 세 번째인 심념처(마음에 대한 사띠수행)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27]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impermanence)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무상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탐욕이 여읨(fading away)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탐욕이 여읨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소멸(cessation)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소멸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놓아버림(relinquishment)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놓아버림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여기서 다시 무색계 선정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출세간적 열반을 성취하고 경험하는 길을 말하고 있다. 이 경전은 어떻게 명상 단계에 도달하고 사성제와 사념처, 그리고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통해 최고의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수행할 때 그 비구는 담마(마음의 대상)를 단지 담마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그는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이 제거됨을 지혜로서 보고서, 평정(upekkha)을 가지고 분명하게 주시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 때에 담마를 단지 담마로 주시하면서, 열심히, 선명한 알아차림과 사띠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내는 것이다.”
더 높은 선정들을 경험하게 될 때, 마음의 조화(balance)가 점점 더 계발된다. 그래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이 제거됨을 지혜로서 보고서, 평정(upekkha)을 가지고 분명하게 주시한다’는 상태를 경험한다. 그때,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속이는지를 분명하게 보게 되고, 불쾌한 것들이 일어날지라도 그 속에서 평정(upekkha)을 유지한다.
명상으로 인한 진정한 조화는 마음이 무색계 영역에 들어갈 때 배우게 된다. 이것은 정신적인 개념과 집착을 진정으로 놓아버리게 되는 때이다. 가장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은 그것에 동요됨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귀한 평정(upekkha)을 계발하게 된다. 이것이 사념처의 네 번째인 담마(마음의 대상)에 대한 사띠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28]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이와 같이 계발하고 닦을 때 사념처를 성취한다”
(Fulfillment of the Seven Enlightenment Factors)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
[29] “비구들이여, 사념처를 어떻게 계발하고 닦을 때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성취하는가?”
[30] “비구들이여 비구가 몸을 단지 몸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 그때에 사띠를 확립하고 놓아버리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사띠를 확립하고 놓아버리지 않으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칠각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 대념처경(사띠빳타나 숫따)을 인용할 것이다. 대념처경에 이르기를,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가 있다’고 이해하며(understand),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이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마음이 고요하고 예리하고 맑으며, 호흡과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기꺼운 흥미로움이 마음에 있는 것을 단지 알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사띠가 둔하고, 예리하지 못하고, 마음이 약간 지루해지고 흥미를 잃었을 때, 그 상태를 단지 아는 것이다. 그런 경우, 수행자는 흥미를 살려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정말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서 모든 호흡이 어떻게 다르고, 호흡들이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것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를 계발하여 성취하는 방법이다.
[31] “그는 그렇게 사띠하며 머물면서 그런 현상(담마)을 지혜로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같이 사띠하며 머물면서 그런 현상을 지혜로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하면,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와 친숙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행의 다섯 가지 장애(오개)나 감정 상태, 신체적 고통 등의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무아적으로 탐구한다. 이것은 그 현상에 대한 생각으로 개입되지 않고 해야 한다. 단지 그 현상을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그 현상을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현상을 놓아버린다. 그것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긴장한 정신적 움켜쥠을 열려있게 해서, 이완하고 확대하고 그 미혹에 대해 생각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허용한다 ... 마음과 정신적 긴장을 푼다...그리고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린다... 마음이 긴장하는 매순간, 그 미혹에 대해 다른 면을 보려고 노력해라...그리고 그것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이완하고 호흡으로 되돌아오라. 이런 방법으로, 미혹과 더 친숙해질 수 있고, 그것을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법을 고찰하는 것(택법)은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있다’고 이해하고,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일으키기 위해서, 모든 현상이 작용하는 방식에 강한 흥미를 가져야만 한다. 그 현상을 좀더 탐구할수록, 고통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수행의 장애와 미혹이 갖는, 특별하고 다른 모습을 더욱 쉽게 알게 된다. 이러한 현상들을 분명하게 볼 때, 그것들을 놓아버리는 것이 훨씬 쉽게 된다. 또 이것이 무아의 과정이고, 불만족스럽고 항상 변화한다는 견해를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견해는 수행을 계속해서 향상시키게 한다.
[32] “그가 그런 현상(법)을 지혜로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할 때 불굴의 정진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그런 현상(법)을 지혜로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하여 불굴의 정진이 일어나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 진지한 관심과 주의깊음으로 고찰할 때, 많은 정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정진하고 강한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짐에 따라서, 좀 더 많은 정진이 생기게 된다.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있다’고 이해하고,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33] “정진이 일어난 이에게 출세간적인 기쁨이 일어난다. (출세간적인 기쁨(Ubbega Piti)은 첫 번째 두 가지 선정에서 경험되는 기쁨을 말한다. 더 높은 선정에서 느낄 수 있는 미세하고, 더 높은 형태의 기쁨인 ‘전-충만한 기쁨(Pharana Piti)’이 있다. 이것들은 감각적인 기쁨(즉, 눈, 귀, 코, 혀, 몸)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출세간적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정진이 자리잡기 시작한 비구에게 출세간적인 기쁨이 일어나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호흡에 머무르는 정진력이 더욱 커짐에 따라, 사띠는 더 예리해지고 정진은 조금씩 더 커진다. 이렇게 될 때 호흡에 머무르고 마음을 확대함 속에서, 마음은 매우 행복하고 기쁘다. 이 행복한 느낌에는 일종의 흥분이 있고, 그것을 ‘고양된 기쁨’(Ubbega Piti)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 더 높은 명상 의식 상태에 있을 때 ‘전-충만한 기쁨’ (Pharana Piti)라고 불리는 기쁨이 있다. 이때는 그다지 흥분이 없는, 매우 훌륭하고, 좋은 상태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 상태는 두려워하거나 없애야 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명상 수행이 계발되고 향상됨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호흡에 머무르고, 흥미를 가지고 마음을 열려 있게 하면서, 기쁨을 즐기려고 휩쓸리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런 기쁨에 휩쓸린다면, 기쁨은 곧바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 결과, 대개 졸음, 나태, 무감각을 경험할 것이다.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있다’고 이해하며(understand),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나태와 무감각이 일어날 경우, 첫 번째 네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은 매우 중요하다. 나태는 졸음을 말하고, 무감각은 둔한 마음을 뜻한다. 수행자가 사선정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선정상태에 있을 때, 수행 중 일어나는 두 가지 주요 장애는 들뜸과 무감각이다. 그러나 ,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키워 이 무감각을 고찰하게 될 때, 더 많은 정진도 필요하다. 이것이 둔감함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 더 높은 선정에 들 때, 점차 수행을 미세하게 조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과 친숙해짐으로써, 모든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알게 된다. 이것이 출세간적인 열반상태에 직접 이르게 할 것이다.
명상이 잘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인 사띠(염각지)이다. 사띠가 없다면, 아마 명상의 어떤 경지에도 이를 수 없다. 사띠는 나태와 무감각, 들뜸 모두를 극복하게 하는 주된 열쇠이다.
이러한 수행의 장애는 언제든지 올 수 있으며, 비상비비상처(neither-perception nor non-perception) 같은 명상상태에서도 바로 나오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라. 그래서 , 이런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을 매우 주의해서 알아차리고 있어야 하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세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는 들뜸을 극복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34] “기쁨이 있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몸과 마음이 편안(경안)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기쁨이 있는 마음을 가져 몸과 마음이 편안(경안)하게 되면, 그 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마음에 기쁨이 일어날 때, 몸과 마음에서 매우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 이것은 무색계 선정 처럼 매우 높은 명상상태에서도 그렇다. 잠시 후에, 기쁨이 약간 사라져가고,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게 된다. 이 상태를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라고 부른다. 그때, 몸과 마음은 엄청난 평화로움과 고요함에 있게 된다.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있다’고 이해하며(understand),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안다.”
실제로,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가 현저히 나타나는 부분은 신체적인 느낌이다. 몹시 평화로운 느낌과 함께 기분이 매우 좋고 고요하다. 이것은 첫 번째 세 가지 무색계 선정인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를 경험할 때, 특히 잘 알 수 있다.
[35] “몸이 편안하고(경안) 행복을 느끼는 자의 마음은 사마디에 든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몸이 편안하고(경안)하고 행복을 느껴서 마음이 사마디에 들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종종 깨달음을 도와주는 집중(concentration, 삼매)의 요소라고 부른다. 그러나 , 이러한 용어는 또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stillness)의 요소라는 용어를 택했다.]
몸과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평온해짐에 따라, 마음은 호흡에 머물러 미혹됨이 없이 자연스럽게 더 확대된다.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열고, 이완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진다. 마음은 마침내 어떤 외적 혹은 내적인 미혹에 동요되지 않고 고요해져 있다. 집중하려고 노력하거나 과도한 힘을 들이지 않고 명상의 대상에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호흡에 아주 오랫동안 머무른다. 물론, 매우 예리한 사띠(sharp mindfulness)와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이 있다. 무소유처(realm of nothingness)에 머무를 때에도 여전히 선명한 알아차림이 있다.
모기가 날아다니는 소리를 듣거나 모기가 앉으려고 할 때도, 마음은 동요하지 않고 호흡에서 떠나지 않는다. 호흡에 대한 사띠와 사마디는 관찰하기에 매우 분명하고 예리하다.
무소유처에 있을 때, 다양한 마음의 모습을 경험하고 지켜본다. 비록 낮은 명상단계에 있을 지라도 마음은 매우 맑다. 또한,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현상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을 ‘고요함의 작용(action of silence)’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매우 고요한 그 순간은 모든 사람이 찾고 있는 축복이다. 지금 이 순간은 그런 고요함 속에서 완전해진다. 사띠빳타나 숫따 경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있다’고 이해하며,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의 요소(정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36] “그는 그처럼 사마디에 든 마음으로 안으로 평정(upekkha)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그처럼 사마디에 든 마음으로 안으로 평정(upekkha)하게 되면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도 계발해야할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마음이 동요될 때, 마음을 조화 속에 있게 한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는 무엇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든지, 마음이 그것을 자애롭게 받아들이게 하는 최상의 요소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고통이(정신적이든 감정적이든) 일어나더라도 미혹되지 않는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는 현상들을 무아(아나따)로 보고, 미혹들에 휩쓸려서 자아와동일시 하지 않게 한다.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고, 그리고서 조화 속에서 그것을 초월한다.
아나따(무아)를 보는 것은 붓다의 길을 따라 빠르게 나아가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 평정(upekkha)은 다소 조심해야할 것이다. 종종 무관심해지는 것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무관심은 일종의 미혹이고, 무관심 속에는 혐오가 있고, 그것은 평정(upekkha)이 아니다.
평온(upekkha)은 오직 열려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관심은 닫혀있고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무시하려는 것이다. 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에서 이것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있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있다’고 이해하며(understand),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없을 때 ‘내게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없다’고 이해한다. 비구는 전에 없던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일어난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의 요소(사각지)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이해한다.”
편안함(tranquility), 사마디(stillness), 평정(upekkha), 이 세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는 마음에 들뜸이 일어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들뜸은 마음속에 많은 생각을 만들고, 몸에 불쾌한 느낌들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 결과, 명상이 중단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미혹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것은 고통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매우 격한 마음이다. 들뜸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마음에 사마디(stillness)와 몸에 편안함(tranquility)을 계발하는 것이다. 마음이 들뜸에 있을 때, 조화가 전혀 없고, 그 대신 그 끔찍한 느낌으로 많은 자아-동일시가 있다. 그래서 이 수행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행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한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tranquility), 사마디(stillness), 평정(upekkha)의 요소를 생기게 하고, 이런 요소들에 마음이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들뜸을 극복할 것이다.
명상자를 항상 괴롭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두 가지 주된 수행의 장애는 무감각(또는 둔한 마음)과 들뜸(또는 과도하게 활동적인 마음)이다. 이런 수행의 장애들과 친해지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아라한이 될 때까지, 그것들은 주위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 수행의 장애가 일어났을 때, 그 상황에 저항하는 것을 신속하게 내던지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탐험하기 시작해라. 그러면 더 빨리 수행의 장애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수행의 장애를 더 빨리 놓아버리고, 선정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37] “비구들이여 비구가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이 전체 형태는 30-36절의 반복이다.) …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수행의 장애나 미혹이 일어날 때마다,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을 이용해야 함을 깨달아라. 앉기수행과 더불어 일상생활에서도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은 수행의 장애나 미혹에 부닥쳤을 때 마음을 조화 속에 있게 한다. 이것은 모든 사념처 수행 내내 적용된다. 그리고 ,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하는 동안, 항상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은 차례로 일어나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선정은 마음의 계발하는데 중요하고, 이 단순한 지침을 따를 때 누리게 될 큰 결실과 이익을 보여주고 있다.
[38] “비구들이여 비구가 마음을 단지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이 전체 형태는 30-36절의 반복이다.) …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39] “비구들이여 비구가 담마(mind-object, 법)를 단지 담마로 주시하면서 열심히(atapi), 선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사띠(sati)를 지니고, 세계(오온)에 대한 탐욕과 정신적 괴로움에서 초연하며 지낸다…(이 전체 형태는 30-36절의 반복이다.) … 그때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가 비구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비구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계발하고 닦아서 성취함에 이르게 된다.”
[40] “비구들이여, 사념처를 이렇게 계발하고 닦으면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성취한다.”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가 완전한 균형 속에 있을 때, 출세간적인 열반에 이를 가망성이 보이게 된다. 더 높은 선정으로 나아감에 따라,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의 균형은 더 미세해지고 미묘해진다. 이 미세한 마음의 조율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자연히 오랜 시간 앉아 수행하고 싶어진다. 이러한 명상상태는 이제껏 경험해온 가장 멋진 것이다!
어떤 명상자는 매우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기 전에 충분한 시간동안 마음을 지켜보고 마음의 조화를 수행한다. 이 명상은 모든 활동 중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즐거운 경험이다.
(Fulfillment of True Knowledge and Deliverance)
순수 지혜와 해탈의 성취
[41] “비구들이여,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어떻게 계발하고 닦으면 순수 지혜와 해탈을 성취하는가?”
[42]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초연함(seclusion)과 탐욕의 여읨(dispassion)과 소멸(cessation)에 의지하고, 놓아버림(relinquishment)으로 성숙한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를 닦는다. ”
‘초연함에 의지한다’는 적어도 가장 낮은 선정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앞에 말한 것처럼, 초선에 대한 진술은 ‘감각적 즐거움에서 초연해지는 것, 그리고서 “불건전한 상태들에서 초연해지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 마음은 깨어 있고 명상의 대상에 분명하게 머문다. 즉, 마음에 미혹이 없다.
미혹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사띠하며 알고 놓아버린다. 경전에는 ‘그런 초연함으로 행복을 경험한다.’고 나타나 있다. 이것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초연함’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탐욕의 여읨’은 애착과 집착에서 마음이 자유로운 것, 즉 사유하거나 분석하지 않는 것이다. 사선정은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탐욕을 여읜 강한 평정(upekkha)을 갖는 마음이다. 이것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탐욕의 여읨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소멸’은 번뇌와 일어난 현상에 대한 자아-동일시가 그치는 것을 말한다.
‘사띠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파악하기 힘든 의미를 갖고 있다. 단순하고 정확한 사띠의 의미는 ‘관찰하는 마음(observing mind)’이나 ‘주의(attention)’, ‘주의에 대한 깨어있음(alertness of attention)’이다.
진정한 ‘사띠’의 의미는 마음이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보고 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긴장의 원인들을 놓아버리고,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 평온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 전체 과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하고, 연극 같은 현상 속에 휩쓸리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그것을 허용하면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연극 같은 현상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말은 이 무아의 과정을 자아적인 것으로 동일시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띠는 자애롭게 마음을 열고, 미혹에 대해 동일시를 놓아버리고 나서, 머리와 마음에서의 긴장을 풀고, 그래서 실체를 분명하고 고요하게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조절하거나 저항하려고 할 때마다, ‘담마’ 즉 ‘지금 이 순간의 진실(Truth of the Present Moment)’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의 실체와 싸우는 것은 많은 불만족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한다. 그러나 , 이것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임을 사띠를 가지고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을 경직시키거나 어떤 식으로 저항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기쁨에 찬 흥미는 매우 중요하다. 마음이 기쁨 속에 있을 때, 분노, 시기, 혐오, 공포, 불안이 없기 때문이다. 기쁨에 찬 흥미는 명상자가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무아의 시각으로 보는 올바른 견해를 갖게 한다. 기쁨은 마음을 고양시킨다. 마음이 고양될 때, 일어나는 현상은 연속적인 과정의 단지 일부분이고, 그 과정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기쁨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 중의 하나이고 수행에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또한, 기쁨이 마음에 일어날 때, 일어나는 것들이 즐겁게 느껴진다. 매우 유용한 머릿글자인 DROPS을 기억해두어라. 그것은 저항하지 말고, 재촉하지 말고, 미소짓는 것이다.(Don't Resist Or Push, SMILE) 그리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담마의 순간(Dhamma of the Moment)’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마침내 마음이 더 높고 미묘한 명상 상태에 이르게 된다.(무색계 선정) 이때, 마음은 ‘무소유처(아무것도 없음의 영역)’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소멸(cessation)이다. 이것은 마음 외부에 더 이상 지켜 볼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무소유처’를 경험할 때, 마음은 아무것도 지켜보지 않는다. 그러나 , 마음은 여전히 존재하고, 집착에 의해 영향 받은 오온(다섯 가지 무더기)과 함께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들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몇몇 수행의 장애들이 일어나서 명상의 높은 경지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그래서 마음이 마음 바깥을 관찰할 것이 없지만, 여전히 보아야할 것이 많다. 이것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의 요소(염각지)가 소멸에 의지하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를 경험하고, 계속 마음을 열고 이완할 때, 마침내 ‘상수멸(인식과 느낌의 소멸 상태, Nirodha-Samapatti)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태가 일어나는 동안, 이 의식의 꺼짐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이나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유일한 명상의 단계이다.
그러나 , 이 명상 상태는 여전히 세간적이다. 이것은 아직 출세간적인 열반이 아니다. 인식이나 느낌이 없다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식과 느낌이 되돌아왔을 때뿐이다. 사띠가 충분히 예리하다면, 수행자는 각각 그리고 모든 연기의 고리가 순차적으로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볼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이것은 출세간적인 열반 상태가 아니다. 이 연기의 고리는 다음과 같다.
무지(無知, ignorance)를 조건으로 하여 형성(行, formation)이 일어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意識, consciousness)이 일어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과 물질(名色)이 일어나고,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여섯 감각장소(六處, six-fold sense base)가 일어나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 만남(觸, contact)이 일어나고, 만남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受, feeling)이 일어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망(愛, craving)이 일어나고, 갈망을 조건으로 하여 움켜쥠(取, clinging)이 일어나고, 움켜쥠을 조건으로 하여 되어짐(有, being)이 일어나고, 되어짐을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生, birth)이 일어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老死, old age, death)이 일어난다.
이 일어나는 현상이 사라진 후에, 연기의 소멸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진행된다. 늙음과 죽음(old age and death)의 소멸로 태어남(birth)의 소멸이 오고, 태어남의 소멸로 되어짐의 소멸이 오고, 되어짐(being)의 소멸로 움켜줌(being)의 소멸이 오고, 움켜쥠의 소멸로 갈망(craving)의 소멸이 오고, 갈망의 소멸로 느낌(feeling)의 소멸이 오고, 느낌의 소멸로 만남(contact)의 소멸이 오고, 만남의 소멸로 여섯 감각장소(six-fold sense base)의 소멸이 오고, 여섯 감각장소의 소멸로 정신과 물질(mentality-materiality)의 소멸이 오고, 정신과 물질의 소멸로 의식(consciousness)의 소멸이 오고, 의식의 소멸로 형성(formations)의 소멸이 오고, 형성의 소멸로 무지(ignorance)의 소멸이 온다.
순관과 역관으로 연기를 보는 것이 마음을 ‘출세간적인 열반’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때 견해의 큰 변화가 있다. 그때 마음은 영원히 지속하는 에고나 자아가 있다는 믿음에 대한 여읨이 있다.
이것은 단지 무아적인 과정이고, 현상이 일어나는 방식을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앎으로 보는 것이다. 현상은 그 조건이 일어나기 적당한 때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불교적인 용어로 이것은 ‘아나따(anatta)’ 즉 ‘자아라는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단지 말, 구절, 경전을 암송하거나, 다른 사람이나 자신들이 행하는 의식과 의례로는 성인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올바른 길(아라한이 될 때까지 더 높은 단계의 마음 정화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의심이 더 이상 없다. 이것이 소따빠나(수다원과)가 되고 진정한 정화의 길에 이르는 것이다.
이 높은 경지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 단지 연기를 봄으로써 사성제를 체험하는 것이다. 오직 세 가지 존재의 특성(무상, 고, 무아)을 보는 것이 ‘출세간적인 열반’에 이르게 하는 희유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붓다가 이 세계에 나타나, 사성제를 깨달음의 길로 보여준 이유이다.
“여기 비구는 초연함과 탐욕의 여읨과 소멸에 의지하고, 놓아버림으로 성숙한, 깨달음을 도와주는 현상(법)에 대한 고찰의 요소(택법각지)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노력의 요소(정진각지)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기쁨의 요소(희각지)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편안함의 요소(경안각지)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마디(정각지)의 요소를 … 깨달음을 도와주는 평정(upekkha)의 요소(사각지)를 닦는다.”
[43] “비구들이여,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이렇게 계발하고 닦으면, 순수 지혜와 해탈을 성취한다.”
이 경전은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와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사띠빳타나 숫따(대념처경)의 마지막 부분으로 이 책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그 부분은 맛지마 니까야 10번째 경의 46절과 47절에서 인용하였다.
(46)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을 이와 같이 칠 년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궁극적 (해탈의) 지혜를,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 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아나가미’ 또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의 성취를 말한다.
“비구들이여, 칠 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와 같이 육 년을 … 오 년을 … 사 년을 … 삼 년을 … 이 년을 …일 년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궁극적 (해탈의) 지혜를,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 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일 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와 같이 일곱 달을 …여섯 달을 … 다섯 달을 … 네 달을 … 세 달을 … 두 달을 … 한 달을 … 반달을 …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궁극적 (해탈의) 지혜를,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 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반달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와 같이 칠 일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궁극적 (해탈의) 지혜를,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 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47) “그래서, ‘비구들이여, 이것은 존재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초월하고,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진리의 길을 성취하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바른 길(direct path)’이다. 이 길이 바로, 사념처이다.’라고 설한 것은 이와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어떤 번역에서는 ‘이 길은 유일한 길’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방법에서의 바른 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하고 혼란스럽지 않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설법에 기뻐하였다.”
이것은 내가 지어낼 수 없는 매우 위대한 법문이다. 나는 단지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전할뿐이다. 당신이 ‘아나빠나사띠’로 얻어진 평온(사마디)을 통해 마음을 계발하는 수행을 진지하게 실천한다면, 최종적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첫 번째 즐거운 머무름(초선)에 도달하고, 계속 수행해 나간다면,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에 이르게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붓다가 말한 것이다. 수행을 바꾸거나, 멈추지 않고 계속 열심히 노력한다면, 분명히 붓다가 설한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출세간적인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순관과 역관으로 연기를 깨닫는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기 바란다. 다른 길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핵심인 사성제(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직접 보고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에 의해 시설된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결실과 유익이 있을 것이다.
SADHU...SADHU...SADHU...
사두... 사두... 사두...
이 책에 어떤 잘못된 점이 있다면, 모두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에 대한 충고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명상 수행하는 모든 이들이 계속 노력을 기울여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 바로 궁극의 해탈인 출세간적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진지한 모든 이들이 지혜를 통해 사성제를 알고 이해하기를...
그래서 최고의 목적지에 이르기를...
붓다의 길을 걷는 모든 수행자들이 연기의 고리를 쉽고 빠르게 깨달아 그들의 괴로움이 쉬이 극복되기를...
이 책에 써진 유익함을 부모님, 친척, 도움 준 이들, 모든 존재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침내 최고의 행복에 이르고,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말라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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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는 이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엄습한 두려움이 사라지기를...
모든 비탄을 벗어버리고, 모든 존재들이 안식을 찾기를...
모든 존재들이 우리가 이렇게 얻은 공덕을 나누어 행복을 성취하기를...
우주와 지구에 사는 존재들과 힘센 천신/용신(naga)들이 우리가 얻은 이 공덕을 함께 나누기를...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보호하기를...
Footnotes(각주)
[1] 칠각지와 사념처를 포함하는 아나빠나사띠 경전을 언급하고 있다.
[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모리스 왈쉬(Maurice Walshe)가 번역한 ‘The Long Discourses of the Buddha’(장부경전, 디가니까야, Wisdom Publications (1987)의 p.556를 보라.
[3] 맛지마 니까야 경전의 36번째 경인 마하사짜까 경(Mahasaccaka Sutta)을 보라.
[4] 이것은 모두 아홉 가지이다! 그것은 네 가지 색계 선정들, 네 가지 무색계 선정들, 그리고 상수멸을 말한다.
[5] 여기서, ‘선정’이라는 말은 몰입집중삼매(아빠나 사마디), 또는 근접집중삼매(우빠짜라 사마디)의 의미이다. 근접집중삼매는 마음이 명상의 대상 속에 몰입되기 바로 전 단계이다. 이 말은 현재 명상 지도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정의들이다.
[6] 이에 관련해서, 그것은 단지 몰입집중삼매(아빠나 사마디)를 의미하고, 근접집중삼매(우빠짜라 사마디)를 의미하지 않는다.
[7] 어떤 명상 지도자들은 이것을 순간집중삼매 또는 순간-순간 집중삼매(카니까 사마디)라고 부른다.
[8] ‘경전들’이라는 복수형의 의미는 여러 차례 일치하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
[9] 이것은 하안거의 마지막에 비구들이 함께 모여서 그들이 행한 어떤 작은 잘못도 고백하는 포살 의식을 말한다.
[10] 이것은 무의미한 수다와 잡담을 말한다. 비구는 붓다가 말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동안, 고요한 마음을 확대하고 분명한 사띠를 가지고 명상수행을 하고 있다.
[11] 이것은 몸에 대한 사띠, 느낌에 대한 사띠, 마음에 대한 사띠, 담마에 대한 사띠를 말한다.
[12] 예를 들어, 77번째 경인 마하싸꾸루다이 숫따 (Mahasakuludayi Sutta)와 111번째 경전인 아누빠다 숫따(Anupada Sutta)를 보라. 이 두 경전은 맛지마 니까야에 있다.
- 옮기면서 모은 글 (collected short terms)
사띠 : sati(빨리어), mindfulness, 사띠는 ‘알아차림’, ‘마음챙김’, 염(念), ‘주의깊음’, ‘마음 깨어있음’ 등으로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사띠는 마음이 갖는 관찰력으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점진적인 수행으로 이완되어 있음이 더 깊어짐에 따라, 좀더 미묘한 것들을 일어나는 그 순간에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는 한글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사띠의 진정한 의미는 사띠수행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담마 : 법(法), 진리, 본성, 성질, 이론, 마음의 대상(Mind-Objects)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불교 단어 중 가장 중요하고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Dhamma(빨), 이 책에서 종종 ‘지금 이 순간의 진실’(Truth of the Present Moment)로 사용되었다.
아나빠나사띠: 호흡(들숨날숨)에 대한 사띠수행,
mindfulness of Breathing, anapanasati(빨)
사띠빳타나(사념처) : 네 가지 대상(몸, 느낌, 마음, 담마)에 대해 확고부동한 사띠를 확립하는 수행, 네 가지 사띠의 확립,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 satipatthana(빨)
선명한 알아차림: 삼빠잔냐, full awareness(영),
sampajanna(빨)
사마디 : 평온-지혜, 한 가지 대상에 집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tranquil wisdom, samadhi(빨)
평정 : 우뻬카, equanimity, upekkha(빨)
수행의 장애(오개) : [욕망/탐욕], [미움/혐오], [나태/졸음/둔함], [들뜸/후회/걱정/산만해짐], [회의적 의심], the five hindrances, nivarana(빨)
사성제 : 네 가지 고귀한 진리, Four Noble Truths
칠각지 : 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
Seven Enlightenment Factors, bojjhanga(빨)
A practical, Bare-Bones guide
to Loving-Kindness Meditation
자비관 명상에 대한 중요한 실천 지침
By Ven. Bhante Vimalaramsi
위말라람시 스님 저 (담마 수카 명상센터)
옮김 : 거울